우리나라에는 모두 7개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있다.
창덕궁, 수원 화성, 석굴암 불국사, 해인사장경판전, 종묘,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이밖에, 몇 년전 설악산을 자연유산으로 지정할려고 했으나,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이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현재 제주도의 주상절리를 자연유산으로 지정하려는 작업이 활발하다.
1. 창덕궁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전경
대조전은 왕비가 생활하던 중궁전의 건물이다.태종 5년(1405년)에 처음 지었으나 그후 여러차례 불에 탔다.
현재 건물은 1917년 불타서.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다 다시 지은 것이다. 이 건물은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내부 침실 주위에는 왕과 왕비의 잠자리를 지키는 상궁들이 쓰는 작은 방들이 있다.
대조전이라고 지은 이유는 임금(大)을 만드는 처소라고하여 그렇게 지은 것이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하여 대조전엔
용마루가 없는 것이다.
대조전과 왕의 숙소인 희정당으로 연결된 복도이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로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곳을 이용하였다. 또한 왕세자나 세자빈을 결정하였을 때나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태종 5년(1405)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는데, 그 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4년(1804)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2층의 높은 기단
위에 세웠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밖으로
뻗친 부재 끝이 날카롭게 표현되어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오얏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이것은 한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던 무늬이다. 건물 좌우에는 복도(행각)가 있고, 마당에는 신하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놓여 있다.
내부 천장 가운데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 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 넣었다. 뒷면의 높은 기둥 사이에 임금이 앉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는 해와 달, 5개의 봉우리를 그린 일월오악도 병풍이 있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정전다운 격식과 장식을 잘 갖추고 있는
건물이다.
2. 수원 화성
| 조선 태종때 도호부로 승격된 수원은 한성 4진의 하나였다. 한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방향 인 광주, 강화, 수원, 개성에 진을 설치하여 수도 한양을 보위케 한것이다. 그 수원땅을 지 키고 있는 화성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역사적가치를 높이고 있다.
팔달산(143m)을 중심으로 쌓은 화성(사적 제3호)은 총길이가 5,700m에 달한다. 화성은 단순 한 하나의 '성'이 아니다. 역사적 의미와 함께 건축학적으로도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화성의 축성은 정조의 한과 효심에서 비롯됐다. 1762년 영조 38년 윤 5월21일 사도세자 (장 조:고종때 추존)는 당쟁으로 인하여 한여름 뒤주 속에 갇혀 8일만에 죽었다. 사도세자의 아 들 정조는 당시 11세였다.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즉위 13년만에 부친의 고혼을 위로키 위해 묘를 양주 땅 배봉산(지금의 서울시 전농동)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수원을 자신이 이상으로 꿈꾸는 신도시로 건설하고자 정조 18년 정월부터 20년9월까지에 걸쳐 성곽 을 축성하였다. 화성은 조선 성곽제도의 최고 완성형이다. 한국성곽 발달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 한다. 이 성은 석성과 토성의 장점만을 살려 축성됐다. 화성축성에 매달린 선조들은 한국성 곽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과 서양의 축성술을 본뜨기도 했다. 이 성에 관련된 사항은 "화성 성역의궤"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화성의 건축과 관련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당시 30세였던 다산은 왕실서고 규장각에 비치된 첨 단서적들을 섭렵하고 중국에서 들여온『고금도서 집성』5,000권을 참조해 새로운 성곽을 설 계했다. 정약용은 거중기를 고안하기도 했다.
3. 석굴암 불국사 (Seokguram Grotto and Bulguksa Temple (1995년지정)
석굴암 전경
토함산 아래 자리한 석굴암은 불교 예술의 극치로 전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는 우리 불교 문화의 진수입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1년(752)에 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화강암을 다듬어 돔을 쌓은 위에 흙을 덮어 마치 천연 암석동굴을 연상케하는 깊이 14.8m, 높이 9.3m의 석굴 안에 순백의 아미타불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본존인 이 석불은 1.58m의 좌대 위에 3.26m의 거대한 불상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석굴암은 당시 고도로 발달한 기하학을 응용하여 황금비율의 가장 쾌적한 비례를 각 부분에 적용하여 아름답고 성스러운 공간을 창조하였습니다.
석굴암 주실에는 동해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본존 석불인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앞방에는 팔부중상과 금강역사사천왕상이 배열되어 있고, 굴실 안에 제석천, 대범천, 문수보살, 보현보살, 십대제자, 관음보살, 보살나한상 등이 구성되어 있는데 그 변화무쌍한 자세의 불상들을 그 처럼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었던 당시의 예술적 감각이 그저 감탄스럽기만 합니다. 특히 본존불의 위엄있는 모습은 종교 미술의 이상주의적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표현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본존 석불상의 반쯤 뜬 눈은 온화하고, 열릴 듯이 보이는 입술은 자애롭게 보입니다. 석불의 정면에는 동해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이 곧바로 보입니다. 아침해가 솟아오르면 석불상의 얼굴에 붉은 미소가 떠올라 신비감을 주고 새하얀 불신에 햇살이 반사되면 석굴 속은 마치 반사광을 받은 듯 신비에 젖게 하는 설계가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몇 해 전에 본존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호창을 만들었기 때문에 석굴암 해돋이는 옛말이 되었습니다. 다만 굴 앞에서 맞는 해돋이는 동해가 끓어오르는 듯한 오묘함을 맛보게도 합니다. 석굴암에는 석굴 밖에 수광전, 직묵당과 보월재 등의 건물이 있습니다. 석굴암 앞마당가에는 돌로 수조를 만들어 감로수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
신라 때 오악의 하나인 토함산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입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하며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위치해 있습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며,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하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경덕왕때에 대상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는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석굴암은 신앙적인 측면에서부터 조형적인 면까지
신라미술의 최고 절정을 이룬 민족 최대의 석조미술품으로 꼽아 결코 손색이 없는 위치를 굳히고 있습니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석굴암은 통일신라 미술의 특징인 조화미와 정제미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극소의 오차도 허용치 않은 완벽한 건축기술은
현대의 건축기술로도 설명 못하고 있으며
1000년을 아무 이상없이 버텨온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석굴암의 구조와 형식, 규모를 결정한 기준은 "인간중심"사상입니다.
이것은 석굴암은 부처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으로 부처님에게 참배할수 있는 구조로 설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석굴암은 대좌 및 석굴크기와 각 부분간의 크기 비례를 자연미의 원리로 조영함으로서
인간과 자연, 과학과의 조화를 이루었으며
불교의 화엄의 세계로 승화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유리방 안에 들어가기전 석굴암 전실상]
불국사 ( Bulguksa Temple)
불국사 전경
불국사의 유래
불국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서기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부처님(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부처님(阿彌陀佛)을 주조해 봉안했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으며,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다른 기록인, 《불국사 사적(事蹟)》에는 이보다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祠)되었다 했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의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청운교와 백운교의 뜻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즉, 다리를 통해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의 다리’, ‘기쁨과 축복의 다리’로의 표현의지인 것이다.
즉, 이들 계단은 부처님이 계신 도리천을 의미하며, 33이라는 숫자는 욕계 제2천인 33천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아래로는 17단의 청운교가 있고 위로는 16단의 백운교가 있는데,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신라시대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다보탑
석가탑
석가탑과 다보탑의 정식명칭
다보탑의 정식명칭은 불국사다보탑(국보 20호)입니다.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석가탑의 정식명칭은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21호)입니다.
불국사삼층석탑과 불국사다보탑(국보 제20호)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파손되어 1973년 남원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 그 후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4. 해인사 장경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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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있는 팔만대장경이 있기에 해인사는 법보사찰이다. 일주문을 지나 곧장 몇몇 문을 더 지나야 주법당인 대광보전 앞마당에 들어서게 된다.
해인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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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은 사찰로, 왕후의 병을 부처의 힘으로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8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도 부른다.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과 인조 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 15칸·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5. 종 묘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정전은 종묘의 중심 건물로 영녕전과 구분하여 태묘(太廟)라 부르기도 한다.
정전은 조선시대 초 태조 이성계의 4대조(목조, 익조, 탁조, 환조) 신위를 모셨으나, 그 후 당시 재위하던 왕의 4대조(고조, 증조, 조부, 부)와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 되었다. 종묘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사직단과 함께 국가에서 가장 중요시한 제례 공간으로, 그 건축 양식은 최고의 격식을 갖춘다.
현재 정전에는 서쪽 제1실에서부터 19분 왕과 왕비의 신주를 각 칸을 1실로 하여 모두 19개의 방에 모시고 있다. 이 건물은 칸마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매우 단순한 구조이지만, 19칸이 옆으로 길게 이어져 우리나라 단일건물로는 가장 긴 건물이다. 홑처마에 지붕은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 형태의 둥근 기둥이고, 정남쪽에 3칸의 정문이 있다.
종묘 정전은 선왕에게 제사지내는 최고의 격식과 검소함을 건축공간으로 구현한, 조선시대 건축가들의 뛰어난 공간창조 예술성을 찾아볼 수 있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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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종묘 제례악>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56,503평의 경내에는 종묘정전을 비롯하여 별묘인 영녕전과 전사청, 재실, 향대청 및 공신당, 칠사당 등의 건물이 있다. 정전은 처음에 태실 7칸, 좌우에 딸린 방이 2칸이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1608)에 다시 고쳐 짓고, 그 후 영조 헌종때 증축하여 현재 태실 19칸으로 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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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전은 세종 3년(1421)에 창건하여 처음에는 태실 4칸, 동서에 곁방 각 1칸씩으로 6칸의 규모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에 10칸의 규모로 지었으며 그 후 계속 증축하여 현재 16칸으로 되어 있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전에서 매년 춘하추동과 섣달에 대향을 지냈고, 영녕전에는 매년 춘추와 섣달에 제향일을 따로 정하여 제례를 지냈으나 현재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정하여 종묘제례라는 제향의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제사드릴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무용을 포함하는 종묘제례악이 거행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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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의 주전인 정전은 건평이 1,270㎡로서 동 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로 추정되며, 종묘의 건축 양식은 궁전이나 불사의 건축이 화려하고 장식적인데 반하여 유교의 검소한 기품에 따라 건립된 특수목적용 건축물이다.
종묘는 한국의 일반 건축물과 같이 개별적으로 비대칭구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의례공간의 위계질서를 반영하여 정전과 영녕전의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 기둥의 굵기를 그 위계에 따라 달리 하였다.
중국 주나라에서 시작된 종묘제도는 7대까지 모시는 제도로 시작되어 명나라 때에 와서 9묘 제도로 확대 되었는데 중국의 태묘에서는 태실이 9실에 불과하나 한국의 종묘만은 태실이 19칸인 매우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모습은 종묘제도의 발생지인 중국과도 다른 건축양식이며 서양건축에서는 전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유형이다.
종묘제례는 종묘인 의례공간과 함께 의례절차, 의례음식과 제기, 악기와 의장물, 의례음악과 의례무용 등이 조화되어 있으며, 1462년에 정형화된 형태를 500년이상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적 의례문화라고 할 수 있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에 나타난 의례 절차, 음악, 무용 등은 중국의 고대문명을 바탕으로 형성된 하, 은, 주 시대의 의례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고대문화의 특징과 의의를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동양 고대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문화유산 중의 하나이다.
종묘제례악은 기악, 노래, 춤으로 구성되는데 세종때 처음짓고 세조때 다듬은 보태평과 정대업 22곡을 연주하고 그 동작이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것이 특징인 육일무 등의 춤을 춘다. 신라향가나 고려가요가 오늘날 가사만 전하여 지는데 비하여 종묘제례악은 500년 전의 선율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하고 있어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종묘는 조선시대의 전통건물로서 일반건축이 아닌 신전건축임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많은 현대 건축가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으며 종묘의 뛰어난 건축적 가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종묘는 사적 제12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제227호), 영녕전(보물 제821호),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제 제56호)가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6. 경주 역사 사적지구
서출지
첨성대
포석정
냉골 아미타 여래 좌상
1)보리사마애석불
2) 경주남산용장사곡석불좌상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주임해전지(사적 제18호)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국유 연못)를 대표하는 유적.
경주 첨성대(국보 제31호)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높이는 9.17m.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경주포석정지(사적 제1호)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
신라태종무열왕릉비(국보25호)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
김유신묘(사적21호)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
문무대왕릉(사적158호)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
7.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부른다. 북유럽·서유럽·지중해 연안·북아프리카·서남아시아 일대의 신석기시대 묘제로 분포하나, 한국의 고인돌과 직접적인 문화적 관계는 없는 듯하다. 중국 랴오닝성과 산둥반도 및 일본 규슈[九州]에도 분포하나, 한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미미하다.
고인돌은 크게 나눠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그 위에 상석을 올린 형식과, 지하에 묘실을 만들어 그 위에 상석을 놓고 돌을 괴는 형식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대체로 한반도 중부 이북 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후자는 중부 이남 지방에서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들을 각각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이밖에도 지하에 묘실을 만들었으나 남방식 고인돌과는 달리 돌을 괴지 않고 묘실 위에 상석을 바로 올린 고인돌도 있는데, 이를 개석식 혹은 변형 고인돌이라고 한다.
고인돌의 연구에서는 지하의 묘실 구조와 축조방법을 중시하는데, 연구자에 따라 약간의 견해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이렇게 북방식·남방식·개석식 등의 3종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북한 학계는 고인돌에는 한 구역 안에 2~3기의 고인돌을 나란히 세우고 상석 높이까지 돌을 덮어 묘역을 구성한 형식의 고인돌과,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의 두 유형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을 각각 침촌리형과 오덕형 고인돌로 부르며 전자가 시기적으로 더 이르다고 본다.
고인돌 각 형식 간의 시간적 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북방식이 앞선다는 설과 남방식이 앞선다는 설이 있으나, 시간적 관계 판단에 필요한 유물이 워낙 미미하기 때문에 확실하게 단언하기 힘들다.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점에 대해서도 아직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혹자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치를 근거로 신석기시대에 이미 고인돌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기원전 8~7세기 이전에 시작되었다거나, 아무리 이르게 보아도 기원전 5세기를 넘을 수 없다는 주장 등을 하여 이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고인돌이 마지막으로 사용된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움무덤[土壙墓]이 등장하기 이전인 기원전 2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고인돌이 만들어진 문화적 연원에 대해서도 역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지하에 설치된 돌널무덤[石棺墓]이 지상화되어 고인돌로 발전하였다는 자생설, 만주지방에 분포한 대석붕(大石棚)의 영향을 받아 발생하였다는 설, 남아시아의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유입으로 발생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고인돌은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국에 분포하나, 황해도·전라도에 가장 밀집되어 있으며 한 곳에 수백 기의 고인돌이 군을 이루어 분포한 경우도 있다. 북방식 고인돌은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 전라북도 고창에서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이 최남단의 것이다. 남방식 고인돌은 전라도 지방에 밀집 분포하며, 경상도와 충청도 등 한강 이남 지역에서도 많이 보인다. 한편,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일본 규슈[九州]지방에 분포하는 고인돌은 죠몽[繩文]시대 말기에서 야요이[邇生]시대 초기에 걸쳐 등장하는데, 그것들이 한국계 유물과 함께 발견되고 있어, 일본 야요이문화가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암시한다. 고인돌에서는 간돌검과 돌화살촉이 주요 부장품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민무늬토기와 붉은간그릇 등 토기류와 청동기가 부장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많은 고인돌에서는 유물이 전혀 없거나 있어도 매우 미미해, 고인돌이 세골장(洗骨葬) 혹은 이차장(二次葬)용의 무덤일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다. 또한 고인돌 축조에 필요한 거대한 돌의 운반에는 대규모의 인력이 필요로 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이것이 족장(族長) 등 지배계급들의 묘(墓)라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종합)
경주 - Seokguram Grotto and Bulguksa Temple (1995년 지정), Gyeongju Historic Areas (2000년 지정)
불국사의 정원
불국사 전경
하나의 도시에 2개가 지정된 경우는 비엔나, 로마, 티볼리 등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고, 매우 특이한 경우로 프랑스의 랭스나 모젤,
라인계곡 등이 있다. 이렇듯, 경주는 세계문명과 문화의 흐름에서 손가락에 드는 매우 중요한 도시인 것이다.
경주에 진입하면 도시가 매우 편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제주도를 방문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니 경주와 제주도는 모두 특별법에 의해서 쉽게 개발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경주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서 건축시에 문화재청에 신고를 해야하고, 제주도는 지하수관리와 고도제한으로 인하여 경주와 제주도를 방문할 때 시야를 헤치지 않기에 아늑하다는 느낌이 드는 까닭이다. 두 도시 모두 보문단지와 중문단지로 숙박과 위락시설을 집중한 것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나온 완숙함일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으나 경주와 제주는 자전거로 어느 정도 여행이 가능하다는 점 또한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석굴암 전경 (내부는 사진촬영 금지)
간혹, 서울을 떠나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풍경이나 도시들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긴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면 결국에는 경주와 제주도로 압축되는 것도 두 도시가 지닌 독특한 매력, 즉 체계적인 개발을 따른 아늑함과 완숙함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주말이나 휴가철이면 너무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불국사는 약간 위락지 분위기로 변한다. 석굴암 역시 밀리는
사람들 틈에서 스쳐가며 보아야 하기 때문에 짧은 시간의 여행이라면 경주의 남산 산행을 권하고 싶다.
천마총 (멀리 보이는 산이 남산)
삼릉에서 시작하여 석불좌상 - 삼층석탑 - 마애여래좌상 - 용장마을로 내려오는 코스는 운이 좋다면, 중간 중간에서 자원 봉사자나 관광안내원으로 부터 남산의 석불과 마애불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무료로 들을 수 있다. 아무리 사전에 정보를 많이 취하고 자료를 수집하더라도 막상 문화재를 접하면 어디에서 부터 이해를 하고 무엇을 자세히 봐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패키지 여행을 대단히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 혼자 여행을 많이 다니다 보면, 패키지 여행 뒤를 따라 다니며 귀동냥에 의존하는 경우도 무시하지 못한다. 혼자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숲을 보는 여행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 문화재에 숨어있는 (사실이던, 사실이 아닌 전설이던) 작은 나무들을 놓치는 것을 보면 결코 자유여행이 최선은 아니다.
첨성대 야경
여행에 대한 몇가지 오해가 있는데, 여행서적의 바이블로 통하는 론리플래닛의 서두에 나오는 말이다. '혼자서 여행을 하면 100을, 둘이서 여행을 하면 50을, 셋이서 여행을 하면 33을 배운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동의 하지 않고 '혼자서 여행을 하면 고독을, 둘이서 여행을 하면 배려를, 셋이서 여행을 하면 인내를 배운다'고 정의하고 싶다. 또 다른 것으로 개인 자유여행이 패키지 여행보다 수준이 높다는 착각이다. 여행을 어느 관점에서 볼 것이가에 따라 다르지만, 반드시 자유여행이 패키지 여행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는 할 수 없다. 유럽에서 내가 만났던 거의 모든 한국인 대학생들은 오히려 패키지 여행을 따라 왔어야 했다. 그들은 한달 동안 계속해서 유럽의 비슷 비슷한 교회와 미술관을 보면서, 그게 그거이고 따라서 자신에게는 스위스의 어느 작은 마을이 가장 좋았다는 점으로 여행의 목적을 합리화 한다. 세계사, 건축, 미술학도가 아니라면 로마나 루브르박물관를 이해하기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국어로 편집된 '3일 만에 끝내는 프랑어'의 1장 10 여 페이지를 읽고 책을 덮은 것과 다를 바 없다. 가이드 (현지인이던, 한국인이던, 무선안내방송기기이던)를 통하는 것을 적극 권하고 싶다. 그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일부분은 아직도 채색이 남아 있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경주 남산은 해발 468m의 금오산과 494m의 고위산인 까닭에 쉽게 산책하듯 볼 수 있다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신라인들의 신앙지이고 영험한 산으로 절터가 146곳, 석불과 마애불이 118체, 석탑과 폐탑이 96기 이를만큼 볼거리가 곳곳에 펼쳐있고 40여개의 골짜기와 등성이가 있기 때문에 등산화는 필수이다. 남산 전체를 돌아보는데는 크게 3개의 코스가 있기 때문에 하루에 하나씩 약 2박 3일 정도를 예상하는 것이 좋다고 할 수 있다.
남산에 하루나 이틀을 투자하고, 남는 시간에는 안압지, 반월성, 계림, 첨성대, 대릉원(천마총), 그리고 경주 국립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자동차의 경우는 반드시 한곳에 주차하고 도보를 이용하여 둘러보는 것이 좋다. 이 지역은 일몰후에도 너무 화려하지 않은 야경이 매우 운치가 있기 때문에 남산을 둘러본 후에 저녁 시간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안압지 야경
한가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왜 경주 패스 (Pass)와 같은 1일 티켓이 없는가 하는 점이다. 매번 유적지를 입장할때 마다 일일이 계산을 해야 하는 점이 무척 번거롭다. 1일 - 1만원, 3일 - 2만원 정도로 경주패스가 나온다면 전체적으로는 좀 더 많은 입장 수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실제로 포석정이나 첨성대 같은 경우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황당한 느낌을 받는다.
서출지
석굴암, 불국사 각각 성인 입장료 4000원과 주차료 2000원으로 최소 1만원의 비용이 든다. 4인 가족으로 경주 전체를 관람하면 약 10만원 가량을 예상해야 한다. 혼자서 이번 여행 7일 동안 모두 70만원을 지출하였다. 휘발유와 고속도로 이용료, 숙박, 식사, 관람료. 모든 것이 서유럽의 평균보다 같거나 더 비쌌다. 화폐 가치가 많이 하락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해인사 - Haeinsa Temple Janggyeong Panjeon, the Depositories for the Tripitaka Koreana Woodblocks
(1995년 지정)
대장경의 원래 뜻은 범어인 트리피타카(TRIPITAKA)가 말해주듯 ‘세 개의 광주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經),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담은 율(律),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해놓은 론(論), 이 세 가지 큰 광주리를 합쳐 대장경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불교경전 일체를 총괄하는 것이기에 일체경(一切經)이라고도 한다. (자료 출처 : 해인사 (http://www.haeinsa.or.kr/tripitaka/tripitaka_2.html))
해인사 전경
최근에 읽은 책, [잭 웨더포드의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는 고려대장경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데 몇가지 인용할 만한 내용이 있다. 유목민, 즉 몽고족은 수천년에 걸쳐 고삐, 재갈, 안장 깔개 등을 이용하여 말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처럼 엄청난 에너지원을 자신의 것으로 다룰 줄 알았기 때문에 언제나 농경문화를 습격하고 약탈하는 유혹을 느끼는 것이다. 특히, 등자(말을 탔을때 두발을 디디는 도구)는 매우 혁신적인 발명으로 등자를 디딛기 때문에 창으로 찌를 때 마치 땅 바닥에서와 같이 안정된 힘으로 버틸 수 있고, 더욱이 말의 속도를 감안하면 대단히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 또한, 안장의 경우는 자유롭게 몸을 비틀고 돌리면서 어느 방향으로나 안정적으로 활을 쏠 수 도 있게 되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이들은 서유럽과 일본을 제외한 터키, 페르시아, 중국, 인도 어느 나라든지 정복하였는데, 일본의 경우는 섬이기 때문에, 서유럽의 경우는 울창한 숲 때문에 기병들이 활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유목민은 매우 놀랄만한 통신술을 갖추고 있었다. 매 50 킬로미터 마다 역참을 두어 파발을 이용하여 하루에 500 킬로미터라는 놀라운 속도가 가능했고(시베리아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이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고 함), 팍스몽골리안 동안에는 핀란드에서 베트남까지 사상최대의 제국을 다스렸고, 이 기간에 여자아이가 머리에 금을 이고 영토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도 괴롭히지 않을 정도로 잘 재편된 행정조직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당시에는 몽골족, 즉 기마민족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어쩌면 종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을 만큼 강력했던 것이고, 그들이 정벌하는 지역에서는 매우 강력한 제도가 효율적으로 이용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도읍을 강화로 옮겨 피난 와중에 오직 불심의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무력함을 이해할 수 있다.
내려오는 길에는 성철스님의 부도탑이 있는데, 청빈한 삶과는 아이러니 하게 너무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마도, 후세 사람들이 큰 뜻을 기리기 위함이겠으나... 해인사 성보박물관의 10세기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선명한 목조회랑조사상은 꼭 한번 관람하기 바란다.
고창/화순 - Gochang, Hwasun, and Ganghwa Dolmen Sites (2000년 지정)
고창은 복분자, 풍천장어, 그리고 선운사로 우리에게 유명하다. 고창과 화순이 외국인들에게 어필할 수는 없을까 ? 외국인 뿐만 아니라, 고창과 화순의 고인돌은 우리들에게도 당분간 매우 힘들 것 같다. 첫째,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보존해야 할 문화적 의의는 있으나 피라미드, 오벨리스크, 스톤헤지와 비교할 때 그 규모가 너무 작다. 둘째, 둘째, 사유지와 뒤섞여 일반 무덤과 함께 뒤범벅이 되어 있고 관리가 미흡하여 일반인이 얼핏보면 산에서 흘러내린 돌 무더기 더미에 지나지 않는 점이 아쉽다. 세째, 인프라가 부족하여 찾아가는 길이 너무 어렵고 주변도시들이 특징이 없어 라스코, 알타미라, 베젤레의 벽화처럼 미술사적인 의의가 없어 고고학자를 제외하면 찾아가지 않을 듯 하다.
화순 고인돌 군락
현재, 고창은 고인돌 보다는 선운사/복분자에 무게를 두고 있고, 화순은 다른 특별한 것이 없어 고인돌 지역을 관광지로 개발하는 중이다. 그러나, 사후체험이라고 목관을 만들어 들어가서 누워보게 한 것, 청동기 시대를 마치 원시시대로 표현한 것 등 고인돌공원 안내도와는 너무도 다른 부실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조금 만 더 신경쓴다면 보성 녹차밭 못지 않게 개발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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