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2학년 때 어버지의 근무지를 따라서 김천으로 이사와 김천국민학교에 잠시 다닌 적이 있다.
이 시절의 친구로 지금까지 세교를 트고 지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같은 반에 있었던 이성우라는 친구가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개업하였던 국민학교 앞 <남산 병원>을 물려받아 일하고 있다는 전화를 십년 여 전에 단국대학으로 한 적이 있었다.
김천을 지나는 길에 성우를 찾아보았으나, 그는 무슨 병에 걸려 오래 전에 타계하고 없었다.
그래서 나와 김천의 인연은 끊어지고 말았다.
김천과의 다른 인연이 있다면, 나의 졸작 중편소설 <아테네 가는 배>를 영어로 번역한 이보경 교수의 아버지가 이형근대장으로서
김천사람이다.
내가 어릴 적에 이형근대장의 도움이라면서 김천국민학교의 교실을 짓는 것을 보았었는데, 우리 두 사람은 김천과의 인연으로 서로들 웃은 적이 있었다. 6.25 직후라 교실이 없어서 천막교사로 공부하던 시절이라, 교실을 지어받을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후 나는 단 한번도 김천에 발을 디딘직이 없다.
그러나 이 시절 한번 소풍을 갔던 김천 직지사의 기억은 어렴프시 남아 있었다. 아주 흐린 기억이었으나, 오직 <천불상>만은 비교적 뚜렷했다. 불상을 천 개를 만들어 진열해놓은 것이었는데, 그 인상이 독특하여 머릿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난 토요일(9/11),
나는 김천 직지사를 방문할 기회를 잡았다.
<한국문인 산악회>라는 단체가 있는데, 이 단체에서 김천 직지사를 방문하니 참석해 달라는 초청이 온 것이다.
이 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나하고는 정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라 나는 기꺼이 수락하였다. 이들 인사들 중에는 오양호(인천대), 이재인(경기대), 장윤유(성신여대), 김병억(성신여대), 이동희(단국대) 등 과거 동업자들이 있어서 아주 홀가분한 기분으로 이 모임의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출발하기 전 나는 수많은 주저를 하였다.
어딘가로 마구 쏘다니는 것을 이제는 그만두고 싶었다. 집에 가만히 친잠하면서 독서와 사색과 집필에 빠지는 것이 더 유익하고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나의 뇌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김천 직지사의 흐린 기억을 찾아 보아야 한다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였다.
뻐스는 정확히 8시에 사당역을 출발하였다.
비가 억수처럼 내렸으나 오히려 여행자의 여수를 한결 북돋우어 주었다.
먼저 뻐스는 황악산 아래 이동희씨의 농민문학관에 도착했다.
근 열두시가 되어서 먼저 식사부터 하였다. 식사는 이동희씨가 제공하였는데 올갱이국이 참 좋았다.
이동희씨는 단국대학교 출신으로 이학교에서 근 35년 이상 근무하면서 그야말로 농민문학에 전념하였다.
<농민문학>이라는 문예지를 근 30년간 발행하였다.
서울의 아파트를 팔아서 고향인 영동에 농민문학관을 지었다 하여 보러온 것이다.
이런 사업은 요사이 주로 지방자치단체에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벌리는 것이 상례화되어 있는데, 이 교수는 미련스럽게도 자비로 이 사업을 하고 있었다. 농민문학관은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그런데로의 외모는 갖추어져 있었다.
이 자리에서 오양호씨가 월북시인 백석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백석은 시인으로서 보다, 오늘날 실상사라는 절로 변한 요정의 여주인공 때문에 유명해진 사람이다. 과거 법정스님에서 이 절을 희사하여 실상사라는 절로 만든 주인공인데, 백석 시인의 연인이었다. 백석은 과연 변절하지 않는 민족시인이었나 하는 문제를 오양호 교수는 치밀하게 연구한 듯했다.
일행중 일부는 황학산을 넘어 김천 직지사로 산행하였고(한 시간 30분 소요), 대부분은 관광뻐스로 직지사로 갔다(15분 소요)
직지사는 뭐니 뭐니 해도 동국제일가람이라는 별칭답게 그 규모의 어머어마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내가 가본 절 중에 그 규모의 어마어마함은 그 어느 대찰에도 빠지지 않았다. 통도사, 해인사, 화엄사, 불국사, 송광사 등 대찰 어느 것에도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것들을 능가하는 면도 있었다.
우리는 직지사의 국토지리적인 측면의 특징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직지사(김천)에서 부산까지가 218킬로, 서울까지가 230킬로미터 이다. 직지사는 국토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통일신라가 한반도 전체가 아니었고, 오히려 지금의 분단된 남한과 비슷하였다.
직지사가 창건된 것이 눌지왕 2년(418) 이라고 하니 이 때는 신락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이었고, 불교가 국교로 정해지기도 전이었다. 당시 묵호라는 이름을 가진 승려가 몰래 고구려로부터 입국하여 여기 황악산 아래 직지사를 지어 포교의 본산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묵호 화상이 직지사를 여기에다 짓기 시작한 것은 이곳이 바로 지정학적으로 신라국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고 포교지로서 적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묵호화상이 바로 아도화상이다. 신라에 불교를 전한 사람이 고구려의 아도화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배워서 알고 있다.
직지사는 지금 조계종 8본산 중 하나로서 그 위상을 과시하고 있다.
직지사에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임진왜란이 낳은 위대한 인물 유정 사명대사의 부도와 영정 그리고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명대사는 물론 해인사에서 입적하였지만, 출가사찰인 직지사에 영정사당을 지었다.
임진왜란이 낳은 어려 영웅들 중에 이순신 장군을 제외한다면 유정 사명대사의 이름은 그 윗 자리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직지사 경내를 돌아보는데 근 한 시간이상이 걸렸다. 수많은 암자와 사우를 샅샅이 다 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오늘날의 직지사를 키운 인물로 녹원화상의 이름도 기억할만 했다.
나는 꽤 감개무량하였다.
내 어린 시절의 흐린 추억이 한 가락이 오락가락하는 김천 직지사-
나에게 생명을 준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나 자신 직장에서 정년한 지금 가슴을 쓸어가는 만감을 가눌 수 없었다.
빗줄기 쏟아지는 경부선 길을 달려 뻐스는 귀경길을 독촉했다.
나는 여러 분들의 집중되는 요구로 두 차례나 노래를 불렀다. 애창곡인 <그리운 금강상><고향의 노래>
그리고 박수를 받으면서 이 모임에 가입하는 가입비를 냈다. 이 나이에 무슨 단체 가입인가.
일주일에 한번씩 하는 산행을 나는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양해를 받았다.
회고의 감정에 흠뻑 젖었던 모처럼의 즐거운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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