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신경림은 70년대 시골 장터 서민들 삶을 이렇게 노래했다. 오랜만에 장터에 나와 반가운 얼굴과 한 잔 걸치고, 해질 무렵 하얀 고무신 한 켤레나 조기 한 마리 들고 불콰해서 집에 돌아간다. 그러나 가슴 한편은 가뭄에 조합 빚 걱정으로 무겁다.
▶서민(庶民)의 '서(庶)' 글자 모양새를 보자. 무엇인가의 아래쪽에 많은 것이 졸망졸망 우글거리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다. 숫자가 많은 것치고 귀한 것은 드물다. 일설에는 서(庶)가 구황식품인 기장을 가리키는 서(黍)와 발음이 통하는 것을 들어 서민이란 말에 기장·좁쌀로 근근이 보릿고개를 넘기는 사람들이라는 뜻도 담겨 있을 것이라고 한다.
▶'서민'이나 '중산층'이나 보통사람을 가리키지만 둘 사이엔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중산층을 '월평균 소득 300만원 이상, 30평대 아파트에 살며 2000㏄ 정도의 차를 타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서민은 통상 '중산층 이하'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숫자상의 차이보다 더 피부에 와 닿는 것은 두 단어가 갖는 느낌의 차이다. 중산층엔 왠지 '꿈'이란 말이 어울리고 서민엔 '애환' '시름'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먹을 것, 입을 것, 사는 환경이 지금보다 못했지만 국민 70~80%가 "나는 중산층"이라고 자처했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은 중산층에 못 끼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꿈이 모두를 기운 나게 했다. 하지만 1998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사정이 달라졌다. 노무현 정권에서 국민을 상위 20%와 하위 80%로 나눠 대립을 부추기면서 "나도 중산층"이란 생각은 더 설 땅이 없어졌다. 2006년 한 조사에서 '중산층'이라 대답한 사람은 네 명 중 한 명으로까지 떨어졌다.
▶그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조사에서 19세 이상의 86%가 자신을 서민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중산층 가구는 많이 줄었다지만 2009년 현재 56%를 유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실제보다 훨씬 낮춰 보고 있다는 얘기다. 중산층 붕괴보다 중산층 의식의 붕괴가 심각하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것이란 희망이 없는 사회는 불안한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