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들, 한국 증시에서 떼돈 벌었다."
익숙한 신문 제목, 일년에도 서너 번 듣게 되는 얘기다. 작년 말, 올 초에도 역시 그랬다.
이른바 '외국인 대박론'이다.
외국인들은 작년 한 해 동안 한국 증시에서 약 90조원을 벌었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한국 증시에서 가지고 있는 주식의 가치(시가총액)가 1년간 120조원 정도 불어났는데,
이들이 작년에 한국에서 사들인 주식이 약 30조원어치이니 이를 제하고도 벌어들인 돈만 90조원.
3배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작년 한 해 우리나라의 자동차와 반도체 수출액을 다 합해야 70조원 내외인데,
90조원이나 되는 엄청난 돈이 증시에서 외국인에게 흘러갔다는 얘기다.
막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외국인들 앞에 우리 개미 투자자들은
그저 돈 바치는 역할뿐이란 얘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외국인 대박론은 실은 반쪽짜리 진실이다. 90조원이란 엄청난 액수는
그들이 실제 벌어간 돈이 아니라 '장부상 수치'일 뿐이고, 장부로만 따지면 재작년 이후
그들도 18조원 이상 한국 증시에서 손해를 봤다는
사실은 그냥 넘어간다 해도 짚어봐야 할 게 있다.
작년 국내 증시(유가증권시장)에서 불어난 돈은 약 310조원이다.
이 숫자를 근거로 계산해 보면, 외국인 주식가치가 120조원 불었다는 것은,
남은 190조원을 국내 펀드나 개미투자자가 차지했다는 얘기다.
외국인들이 30조원어치를 사들여 90조원을 벌었다는 얘기의 이면에는
국내 투자자들도 30조원어치 주식을 팔았지만 전체 주식평가액은 190조원이나
늘어난 상태라는 사실이 있다. 따라서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돈을 가져갔다기보다는
그들이 한국인들로부터 주식을 사준 덕분에 한국 투자자들이 덩달아 이익을 봤다고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은밀한 정보를 쥐고 돈을 쓸어가는 외국인이 있고,
우리는 피해자라는 해석과 기사는 많은 사람을 분노하게 하는 한편으로 위안도 준다.
주식시장에서 손해 본 사람들도, '패배자'보다는 '피해자'가 되는 것이 더 속이 편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 외국인 투자자들의 능력은 별다른 게 없다. 나라 밖 외국인들이,
우리 기업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
투자의 승패는 오히려 누가 상승·하락시기의 주도권을 쥐었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외국인의 증시 투자를 무조건 고맙게 생각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외국인 자금이 몰려다니면서 멀쩡한 나라의 환율을 흔들어놓고,
해괴한 금융기법과 편법마저 동원해 주식시장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패배의식이나 피해의식을 자가 발전해 키우는 것은 곤란하다.
'외국인 대박=개미 피해'라는 잘못된 등식 뒤에 숨으려고 해선 금융 2류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 제조업이 그랬듯이 금융업도 결국은 '계급장을 떼고'
선진국과 격돌해 그들을 넘어서야 할 것이고 그 출발점은
외국인이나 우리나 같은 룰을 사용하는 대등한 투자자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도 외국 증시에서 돈을 벌어온다.
재작년 금융위기로 인한 투자 실패 때문에 가려졌지만,
한국인들은 작년 한 해 동안 해외 주식투자펀드에서 약 3조원가량 돈을 빼냈는데도,
펀드 자산이 재작년 말보다 약 14조원 늘어났다. 합하면 약 17조원가량 되는데,
올해 민생안정 예산과 비슷한 규모의 돈이다.
우리 펀드도 해외에 나가면 그 나라에선 날고 기는 '외국인'인 것이다.
- 최흡 경제부 차장대우 pot@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