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3인의 성공기 | 사장 출신 택시기사 김기선
임기 1년 남기고 저축은행 CEO 자진사퇴 …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신나면 OK
택시만 몰았다면 잘 모를 일이지만, 저는 39년 동안 직장을 다녀보지 않았습니까? 택시에 타면 자주 접하는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처럼 집에만 들어가면 세상만사 모두 편하게 내려놓을 수 있어 참 좋습니다.하루에 딱 10만원만 벌려고 합니다. 그 정도면 우리 부부 충분히 살 수 있거든요. 물론 운 좋은 날도 있죠. 2만원만 더 벌어도 기분이 엄청 좋습니다. 그런 날이면 통닭과 맥주를 시켜 아내와 실컷 먹거든요. 그런 게 사는 재미 아니겠어요?”
김기선(66) 씨는 흥이 나 있었다. 한눈에 봐도 택시기사임을 짐작하게 하는 복장의 그는 “제육볶음이 세상에서 가장 맛난 음식 중 하나”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제육볶음이 기사식당의 특급메뉴예요. 기사 일을 하고 나서야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입에서 살살 녹아요, 녹아.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밥맛이 그리 좋을 수 없어요.”김씨는 꽤 유명한 택시기사다. 다소 이색적인 그의 경력 때문이다. 2001년 11월1일, 사표를 던지고 운전대를 잡기 전 그의 직급은 최고경영자(CEO), 즉 사장이었다.
광복 한 해 전 충남 온양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상경해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를 졸업했다. 은행원의 주가가 한창이던 1963년 서울은행에 입행해 대리로 승진한 후 중앙투자금융으로 자리를 옮겨 영업부장까지 지냈다. 이후 고려투자금융 이사, 동아증권 상무 등을 거쳐 영풍상호저축은행 대표이사로 취임해 금융권에서는 매우 드문 ‘3연임 수장’을 지내는 기염을 토했다.
한마디로 너무 잘나가던 그였다. 이렇듯 39년간 승승장구하던 그가 임기를 1년이나 남겨두고 CEO 자리에서 갑자기 물러나자 주변에서는 온통 놀란 눈치였단다. 여기서 한 걸음 더, 그는 “택시기사로 새 인생을 살 것”이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왜 그런 힘든 일을 사서 하느냐”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등의 말이 주위에서 쏟아졌다. 가족의 반대도 거세 몇 개월간 승강이를 벌였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염두에 두었던 새 직업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고이면 썩는다, 박수 칠 때 떠나라
“직장에 다닐 때부터 퇴직하면 택시기사를 할 것이라고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시작하려니 체면 때문인지 가족 모두 반대하더라고요. 아마도 아내는 친구들로부터 ‘너희 남편, 주식투자 잘못해 망했냐’ 같은 소리를 들을까 겁났나 봐요. 대한항공 기장을 하는 큰아들도 ‘용돈 드릴 테니 안 하셨으면 좋겠다’고 말리는데, 제가 그랬죠. ‘너나 나나 같은 운전수인데 왜 그러느냐? 나는 배고프면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먹을 수 있지만 너는 그럴 수 있어? 사실 택시가 더 재미있다’고 말이죠.”
이어 그는 “10년이 지난 지금, 아내 친구의 남편들은 퇴직 후 놀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일을 계속하니 얼마나 좋으냐”고 했다.
1억원대 고액연봉자였던 그가 고수입이 보장된 1년을 마다한 채 직장을 박차고 나온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소위 박수 칠 때 떠나자는 것.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죠. 높은 자리를 나 혼자 차지하고 있으면 조직은 물론 개인에게 뭐 그리 도움이 되겠어요? 미련을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임기가 끝나면 ‘이제 나가시죠’ 소리를 들을 텐데, 그 말 듣고 서운해할 필요 없이 멋진 모습으로 나올 요량이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꼭 환갑기념으로 개인택시를 마련하고 싶었단다. 그런데 개인택시를 몰기 위해서는 법인택시를 3년간 운전해야만 한다. 그 기간을 맞추기 위해 58세에 회사를 그만두고 택시회사에 들어갔다. “그 3년이 너무나 재미있었어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던 시기였고, 제가 스스로 원했던 일이기에 재미있을 수밖에요. 덕분에 3년 동안 만근(滿勤)할 수 있었답니다.”
그는 왜 택시 운전이 즐거운 것일까?
“어느 직장에 다니든 스트레스가 많잖아요? 의사·변호사와 같은 전문직도 마찬가지이고요. 택시기사도 여러 손님을 태우다 보면 마찰이 일어나는 등 스트레스가 있죠. 하지만 그 스트레스는 직장인의 스트레스와 차원이 다릅니다. 직장에서는 상사의 질타 등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계속 따라다니게 마련인데, 택시기사는 그 손님만 내리면 금방 잊어버리거든요. 그때만 지나면 그만인 셈이죠. 물론 처음부터 택시만 몰았다면 잘 모를 일이지만, 저는 39년 동안 직장에 다니지 않았습니까? 택시에 타면 자주 접하는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처럼 집에만 들어가면 세상만사 모두 편하게 내려놓을 수 있어 참 좋습니다.”
노동 자체가 주는 행복도 언급했다.
택시 운전이 마냥 좋을 수만은 없을 터. 그가 생각하는 단점을 물었다. 이에 그는 사고 위험과 육체적 고달픔, 두 가지를 꼽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단점이 그에게는 큰 문제가 아닌 듯했다.
“사고 위험 때문에 택시 운전을 하지 못한다면 저는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봅니다. 미국에서 9·11 테러가 있기 전에 어느 누가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측했겠습니까? 대구지하철 화재는 어떻고요. 어느 정도 운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고달픔도 마찬가지예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제 아내만 봐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로 수백 명분 음식을 만들고 와도 힘들다는 내색 한번 안 합니다. 아무리 몸이 힘들고 고달파도 자기가 신나 하는 일이면 즐겁게 마련이죠.”
김씨는 고혈압 약을 복용하기는 하지만 건강에도 자신 있어 보였다. 30년째 거의 매일 운동센터에 나가 탁구와 헬스를 즐기는 데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도 틈틈이 운동을 한다는 것. 그만의 비법은 간단하면서도 부지런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앉아만 있는 직업이어서 택시 운전사들이 허리가 아프다며 직업병 운운하는데, 저는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조물주가 만들어준 운동시간이 있기 때문이죠. (웃음) 소변이 마려우면 저는 반드시 지하철역 화장실을 이용합니다. 일부러 역에서 멀리 주차한 뒤 운동 삼아 가볍게 뛰어가죠. 그리고 지하철역 계단이 좀 많습니까? 그걸 오르락 내리락하다 보면 또 저절로 운동이 되죠.”
이어 그는 “손님으로 의사들을 자주 만난다”면서 “덕분에 공짜 상담도 받고 일석이조”라고 택시 운전의 장점을 또 하나 늘어놓았다. 이처럼 택시 운전은 그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는 듯했다.
그는 3년간 법인택시를 몰며 얻은 여러 이야기 등을 모아 2005년 <즐거워라 택시인생>이라는 책으로 엮어낼 수 있었다. 책에는 그가 운전하면서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 그리고 그만의 소회 등이 듬뿍 담겨 있다. 책을 내고 받는 인세는 그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해주었다.
운전하며 쓴 책 덕분에 아내와 남극여행
“최근 남극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비행시간만 33시간일 정도로 먼 거리였지만, 참 남는 것이 많은 여행이었습니다. 아들이 항공사에서 근무하다 보니 항공료는 거의 무료여서 다행히 큰돈은 들지 않았어요. 여러 가지로 여건이 맞아 그런 오지여행도 가능했던 셈이죠.”
덧붙여 그는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며 자리를 비워도 누구 하나 간섭하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어 개인택시가 좋은 것”이라고 빠뜨리지 않고 말했다. 그의 택시예찬론을 듣고 있자니 불현듯 떠오르는 질문이 있었다. 자신처럼 ‘제2의 인생’을 멋지게 펼칠 후배들을 위한 조언이 궁금했다.
“3년 전부터 1년에 네 차례씩 정기적으로 포스코 인재개발원에서 예비퇴직자들을 상대로 강연합니다. 그때마다 제가 제일 강조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눈높이를 낮추고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은퇴를 눈앞에 둔 베이비붐 세대에게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이어지는 그의 충고.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퇴직 준비라고 하면 연금·보험 등만 따졌습니다. 즉, 경제적 노후대책만 중요시 여겼다는 것이죠.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옛날과 달리 퇴직 후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은 세상을 살고 있다는 점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먹고만 사는 것이 노후대책이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무엇을 통해 먹고사느냐? 이른바 ‘삶의 질’이 더 중요한 시대입니다. 황혼자살이 느는 이유가 뭡니까? 허무해서입니다. 젊어서는 무엇을 해도 즐거웠으나 지금은 재미없다, 이런 논리죠. 때문에 저는 단호히 노동을 추천합니다. 정년을 앞두고 생각하면 늦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 봐야 잘 보입니다. 5~10년 뒤를 걱정하십시오. 돈 안 들이고 힘든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유교적 전통이 강한 탓인지, 소위 체통을 중시한다. 특히 고위직 관료나 CEO 등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퇴직자라면 그런 경향이 더 강한 편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대학 총장을 예로 들며 우리 사회의 잘못된 시선을 꼬집었다.
“외국에서는 대학 총장이 일을 그만두면 그 대학의 수위를 하는 경우가 있답니다. 자신이 그 학교를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봉사한다는 마음에서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즐거워 하는 일이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사례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설령 그런 생각을 품은 사람이 나온다고 해도 어디 마음 놓고 하겠습니까? 아마도 ‘보증을 잘못 서서 그러나’ ‘선거에 나가려고 그러나’ 등 온갖 예측이 난무할 것입니다.”
얽매이는 일 없는 1인기업 살맛 나
그는 “퇴직 후에는 일뿐만 아니라 주거환경도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고 강조했다.“아파트만 봐도 복도식 서민아파트가 훨씬 인간미가 넘칩니다. 남에게 베푸는 것을 즐기는 것이 서민사회죠. 위로 가면 폼만 잡고 거들먹거릴 뿐 인간미가 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나이가 들수록 서민층으로 내려와야 살 맛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퇴직 후 어떤 일이 좋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얽매이는 일이 적은 택시기사 같은 1인기업이 좋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굳이 택시기사를 권하지는 않는다”고 정정하며 멋쩍은 듯 웃었다. 택시 운전이 그리도 신날까? 그는 부인 눈에도 자신의 얼굴이 몰라보게 달라진 점을 귀띔하기도 했다.
“아내가 그러더군요. 옛날에는 매일 술 마시고 찡그리더니 요즘은 못 벌면서도 매일 신나 보인다고요.(웃음) 에어컨이 있다 해도 여름철에는 20분만 차 안에 있어도 견디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저 멀리 손님이 보이면 쏜살같이 달려가 낚아채죠. 그 손님이 장거리 손님이라도 되면 대어를 건져 올린 기분이고요. 오늘은 조금만 더 벌면 목표달성이구나 하는 생각에 시간도 빨리 간답니다. 그리고 새벽에 집에 들어가 지폐를 세어보며 혼자 신나 한답니다.”
그는 언제까지 이 즐거운 택시 운전을 하고 싶은 것일까?
“서울에도 80세 이상 운전자가 꽤 많습니다. 몸이 허락하는 한 91세가 목표입니다.”
김기선 씨가 꼽은 택시 운전의 즐거움
1.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다. 2. 가정이 화목해진다. 3. 밥은 맛있고 잠은 달다. 4. 육체노동 후에는 상쾌한 기분이 찾아온다. 5. 봉사활동이 가능하다. 6. 80세가 넘어도 일할 수 있으니 정년이 없다. 7. 쉬는 날에는 등산이나 축구 등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8. 자본이 필요 없으니 망할 염려가 없다. 9. 종업원 관리 등으로 골치 아플 필요가 없다. 10. 늘 새로운 손님과 목적지를 만나니 지루하지 않다. 11. 사회 이면을 체험할 수 있고, 인생상담도 가능하다. 12. 나이나 직업의 제한 없이 대화 상대가 다양하다. 13. 혼자 하는 일이니 남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다. 14. 일과가 끝난 후 집으로 일거리를 들고 갈 필요가 없다. 15. 일정한 수입이 있어 자식에게 손 벌릴 필요가 없다. 16. 늘 긴장하고 자극을 받으니 치매도 예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