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은 훈련이다. 그것은 ‘버리는 훈련’이다. 사람들은 소유에 집착하여 버리지를 못한다. 어느 시인이 쓰기를 “열살에 캔디에, 스무살에 연인에, 서른살에 쾌락에, 마흔살에 야심에, 쉰살에 탐욕에 넘어가지 않을 자 누가 있으리요”하였다. 그러나 인생은 본질적으로 소유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본질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에 이를 수 없다.
인간은 근본에 있어 소유하는 것(To have)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To be)이다. 그 존재도 일시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정희 시인은 ‘하나님 전상서’란 글에서 다음 같이 쓰고 있다.
신자보다 잘 사는 목회자를 용서하시고 사회보다 잘 사는 교회를 용서하시고 제자보다 잘 사는 학자를 용서하시고 부자보다 배부른 시인을 용서하시고 백성보다 살쪄 있는 지배자를 용서하소서. 그리고 우리가 저 대지의 주인일 수 있을 때까지 주여 재림하지 마소서.
하늘로써 임하는 참된 축복을 누릴 수 있는 한 가지 기술이 있다. 단순한 기술이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건 그것은 하늘의 선물임을 인식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내가 받은 것을 언제나 내놓을 수 있는 기술이다. 이 기술을 체득(體得)한 사람은 하늘이 주는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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