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2일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 5층 회의실에서 작은 세미나가 열렸다.
미국의 보수적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의
한반도 전문가 브루스 클링너(Klingner) 선임연구원을 불러
'오바마 정부의 대한반도 정책'을 들어보는 자리였다.
1시간가량의 발표가 끝난 뒤 방청석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한 방청객이 "북한이 궁극적으로 핵을 포기할 것으로 보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자,
클링너 연구원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개인적으로는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우리는 협상이 불가능한 것을 협상하려는 것일 수 있다"고 답변했다.
클링너 연구원의 답변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북한은 25일 오전 9시54분 함북 길주군 풍계리에서 2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북한은 또 25~26일 이틀간 5발의 단거리 미사일을 잇달아 발사했다.
마치 북한 김정일이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소 다로 일본 총리를 향해
'언제든지 당신들 머리 위로 핵미사일을 날릴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듯한 양상이다.
이번 2차 핵실험을 계기로, '협상을 통해 북핵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란
국제사회의 기대는 '착각'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지난 16년 동안 대북 협상론자들은
'북한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북핵을 막을 수 있다'는 가정(假定) 위에 6자 회담 등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이 가정은 북한 정권의 생리를 잘 모르는 순진한 상황인식이었음이 판명 났다.
여러 탈북자의 말을 종합하면, 김정일은 '김일성의 유훈(遺訓)사업'인 핵무기 개발을
단 한시도 포기한 적이 없다고 한다. 북한은 핵개발을 체제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로 본다.
이 때문에 김정일은 국민이 굶어 죽든 말든 바닥난 국가재정을 수십년간 쥐어짰을 뿐 아니라,
한국과 국제사회를 상대로 '큰 사기'를 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북한이 절대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점은, 핵개발의 역사와 그간의 행태에서 드러난다.
북한은 6·25전쟁 휴전 직후인 1954년 인민군 내에 '핵무기 방위부문'을 설치하고,
2년 뒤 30여명의 핵물리학자를 소련에 파견했다. 이어 1959년 조소(朝蘇)원자력협정을 체결하고,
1962년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에 핵연구학과를 두어 인재양성에 나섰다.
그해 영변에 원자력연구소도 설치했다.
1965년에는 소련으로부터 IRT-2000이라는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한국의 박정희 정권보다 훨씬 앞선 움직임이었다.
북한은 또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1차 핵위기) 때부터 올해 2차 핵실험에 이르기까지
16년 동안, 국제사회를 상대로 핵을 포기하는 척 '위장'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벌며 핵 기술 개발에 진력해왔다.
특히 한국의 김대중 정부와 미국의 클린턴 정부가 '햇볕정책'을 통해
북한에 '퍼주기'를 하던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북한의 '위장전술'은 극에 달했다.
당시 제네바 합의로 영변 핵시설을 이용한 플루토늄 추출이 어려워지자,
북한은 파키스탄의 압둘 카디르 칸 박사와 비밀리에 접촉해
고농축우라늄(HEU) 기술과 장비를 제공받았다.
이번 2차 핵실험의 파괴력이 1차 때보다 훨씬 강력했다는 것은,
지난 몇 년간 국제원자력기구(IAEA) 요원들이 영변 핵시설을 감시하고 있는 사이,
북한은 다른 장소에서 '쉬지 않고' 핵 기술을 발전시켜 왔음을 보여준다.
북한 핵은 필연적으로 일본의 핵무장을 자극하게 되어 있다. 이상희 국방장관 얘기처럼
'핵에는 핵으로 대응하는 것이 기본전략'이다.
이제 한국은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한 위에서, 국가안보전략을 크게 수정할 때가 되었다.
- 지해범·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