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人物情報 參考

이생진

鶴山 徐 仁 2008. 12. 8. 10:26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시를 찾아서
이생진
 
1 섬과 섬 사이에서
언제부턴가 내 어깨에 걸머지고 다니는 가방이 있다. 그 가방에는 한 자루의 볼펜과 한  권의 노트와 한 권의 책이 들어 있다. 이 가방은 나의 휴대용 서재다. 나는 이런 모양새로 어디든지 간다. 결혼식장에도 가고 장례식장에도 간다. 그리고 오가는 시간에 책을 읽고, 눈에 띄는 것을 그리고, 떠오르는 것을 그 자리에서 적는다. 망설이다가는 그 순간을 영원히 놓치기 때문이다. 이런 버릇은 아주 젊어서부터 몸에 밴 버릇이다.

무책임한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유치하게 살았다. 그 이야기를 하는 지금도 나는 유치하다. 그런 까닭에 고상한 이야기가 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거의 혼자 아무렇게나 자란 것처럼 너무 유치하게 살고 있다. 고명한 스승에게 맡겨진 적도 없고 명문학교에서 교과과정에 따라 차근차근 학문을 배운 것도 아니어서 내 인생의 허리에 단단한 뼈가 들어 있을 리가 없다. 그저 태어난 데서 태어난 대로 즐거우면 즐겁게 슬프면 슬프게 외로우면 외롭게 살았을 뿐이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을 따로 두지 않았다. 또 그럴 형편도 아니었다. 학교에 갈 때에도 길을 걸으며 책을 읽었다. 차도 없고 오토바이도 없던 시절이라 걸어가며 책을 읽어도 아무 탈이 없었다. 차에 치거나 오토바이 때문에 놀라는 일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걸어가면서도 방안에서처럼 독서가 가능했던 것이 신기할 정도다. 집에서 직장까지 대개 3-4km 떨어진 것은 보통이다. 그래서 30-40분간 걸어가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길을 걸으며 읽은 책이 책상 앞에 앉아서 읽은 책보다 많다. 나는 지금도 전철에서 책을 읽는다. 앉으면 가방에서 꺼내는 것이 책이다. 아니 전철을 기다리면서도 책을 읽는다.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에서 책을 사면 5호선을 타고 동대문운동장역까지 오면서 책을 읽는다. 그리고 4호선으로 갈아타고 쌍문역에 내릴 때까지 책을 읽는다. 그러다가 두서너 역을 지나서 되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계속해서 책을 읽을 수 있어 다행으로 여긴다. 나는 책 이외의 것과 사귀는 것이 서투르다. 말벗을 책으로 대신한다. 옆 사람보다 책이 좋을 때가 많다. 이것은 나를 외롭게 만드는 방법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는 지금도 유치하기 짝없다.
 
섬을 만나면 우선 걸어갈 준비부터 한다. 가방에서 노트나 스케치북을 꺼낸다. 섬을 그린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글을 쓴다. 그렇게 메모한 수첩 노트 스케치북이 수십 권에 이른다. 그것이 없이는 내 생활에 내가 형성되지 않는다. 나는 그래야 사는 것 같다. 기차를 타는 시간 버스를 타고 승용차를 타는 시간이 아깝다. 그러나 혼자 걷는 시간은 조금도 아깝지 않다. 나는 섬에 가면 무조건 걷는다. 길이 있건 없건 걷는다. 만재도에서는 길이 없어서 산길을 헤치고 험한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뱀을 피하기 위해 나뭇가지로 수풀을 헤치며 올라갔다. 울릉도를 걷다가 여러 번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다. 가거도(소흑산도)를 걸었다. 가거도 독실산을 올라가다가 뱀을 만났다. 무섭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우이도를 걸었다. 우도를 걸었다. 상추자도 하추자도를 걸었다. 횡간도를 걸었다. 말도를 걸었다. 대장도 장자도 선유도 무녀도를 걸었다. 청산도도 걷고 여서도도 걸었다. 울릉도도 걸어서 돌았고 제주도를 걸어서 일주했다. 제주도는 3년에 걸쳐 걷고 또 걸었다. 걸어야 시가 나온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다섯 시간 기차를 타고 가도 별로 쓸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목포을 떠나 도초도에 내려 걸으면 금세 쓸 거리가 생긴다. 걸어가며 생각하고 걸어가며 쓴다. 걸어가며 보고 걸어가며 그린다. 생각하다 멀리 수평선을 바라본다. 수평선상에 무언가 떠오른다. 그것이 시다. 걸어가며 구름을 본다. 구름과 함께 가는 것이 있다. 그것이 시다. 풍성한 염전을 지나간다. 저수지 둑에 열린 산딸기를 따먹는다. 발 밑에서 팔짝 뛰어가는 메뚜기 풀밭에서 우는 여치 소리가 시다. 이런 경험이 10년 20년 30년 50년 쌓이고 나니 내 몸은 온통 고독질(孤獨質) 피부로 바뀌고 말았다.  
 
  2 섬과 사람 사이에서
나이 80이면 오래 살았다. 이렇게 긴 세월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다닌 두 발이 고맙다. 손보다 발이 고마운 것은 그만큼 걸어온 길이 험했기 때문이다. 나의 시는 걸어다니며 얻은 것이 대부분이다. 그 동안 펴낸 시집 30권 중 다음 13권은 모두 섬에서 얻은 것들이다. 
 
바다에 오는 이유(1972), 그리운 바다 성산포(1978), 섬에 오는 이유(1987), 내 울음은 노래가 아니다(1990), 섬마다 그리움이(1992), 동백꽃 피거든 홍도로 오라(1995), 먼 섬에 가고 싶다(1995), 하늘에 있는 섬(1997), 거문도(1998), 외로운 사람이 등대를 찾는다(1999), 그리운 섬 우도에 가면(2000), 혼자 사는 어머니(2001), 독도로 가는 길(2007) 등.
문제는 왜 외로웠으며 외로운데 왜 섬으로 가느냐 이거다. 이제 생각하면 그것 조차 아무 것도 아닌데 자꾸 거기에 집착하는 것 같아 사람들에게 특히 시를 쓰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부끄럽다. 그래서 나는 이것마저 유치한 짓이라고 전제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나에게서 어떻게 시가 뿌리내리는가를 알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다소나마 흥미거리가 되리라고 믿는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나는 아홉 살 때를 회상한다.
 
구름이 산을 넘듯/쇠똥구리가 고독을 굴리며/산을 넘는다/나도 그렇게 넘어가다가/바윗돌에 앉아 땀을 씻는데/바로 옆자리에/패랭이꽃이 앉는다/패랭이꽃은/내가 아홉 살 때 일을 기억하고 있다/더 앉아 있으면/자꾸 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패랭이꽃이 입을 열기 전에/그 자리를 떠난다 - 시집『섬마다 그리움이』(14쪽)
굶고 굶기는 것이 뼈아픈 일인 줄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닌 바닷가에서 먹구름이 낀 세상으로 바뀌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온종일 뻘에서 망둥이처럼 뒹굴고 진흙을 온몸에 바르고서도 즐거움이 남아 돌던 시절,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쉽게 세상이 바뀔 줄 몰랐다. 아버지가 장티푸스(장질부사)로 갑자기 떠나시고 나는 열 여섯. 열 셋 여덟 다섯 그리고 세 살, 이 나이의 어린 동생이며. 서른 여섯에 혼자되신 어머니, 우리 가족은 아버지에 이어 모두 장티푸스에 걸려 멀리 떨어진 병막에서 아무런 대책도 치료도 없이 한달 동안을 갇혀 있었다. 그때부터 세상은 서럽고 어둡고 무섭기만 했다.

한동안 나는 취직을 하기 위해 이력서 쓰기가 두려웠다. 적어도 고등학교 대학 대학원 이렇게 차례대로 써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학력이 없었다. 심지어 국어교사를 채용하는 학교에서도 시인이 되기 위해 섬을 떠돌아다녔다던가 시집을 자비로 펴냈다던가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생전 이력서를 쓰지 않을 것처럼 떠돌았다. 그러나 심각한 것은 시는 배고파도 나오는데 발걸음은 배고프면 앞으로 나가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밥벌이를 위해 생각한 것이 맨주먹으로 도전하는 검정고시다. 운 좋게 두 개의 자격증(영어와 미술)을 얻었다. 그것을 밑천으로 취직해서 공부를 시작했으니 내 이력서의 연대는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내 이력에서 가장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목숨을 걸고도 살아남은 병역이다. 6.25를 맞아 37개월(1951.10-1954.11)을 착실하게 복무했다. 그 덕에 매달 8만원이 나온다. 나는 그것을 책 사는데 다 쏟아 붓는다. 그때 죽었으면 시도 못 쓰고 책도 못 읽었을 것이다. 군복무 시절 제일 목마른 것이 독서였는데 이제 죽을 때까지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역설이지만 나의 신발 창은 가난으로 닳았다. 아버지가 계실 때에도 가난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가난했다. 그러고 보니 시는 나에게 사치였을지 모르나 내가 섬을 찾아 다닌 것은 사치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고독한 위안이었다. 이런 경우 나는 나를 극도로 왜소하게 만들었다. 나는 나를 소외시키는데 익숙해졌고, 나는 나를 버리고 싶기까지 했다. 이것은 내가 세상을 알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바뀐 비극이다. 이것이 시가 되는 줄은 한참 후에 알았지만 시가 되든 그림이 되든 혼자 걸었다. 중단하지 않고 걸었다. 그 덕에 다리의 근육이 아직도 단단하게 남아 있다. 나는 손보다 그런 발이 눈물 날만큼 고맙다.
물론 섬 없이도 시는 씌어진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그 섬이 없이는 그 시가 씌어지지 않는다. 이는 나만의 비극이다. 나는 평생 섬을 떠돌며 이런 비극을 안고 다녔다. 나의 경우 시는 희극에서보다 비극에서 왔다. 희극에서 왔다 하더라도 그 원인(遠因)은 비극에 있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어느 섬이 제일 좋으냐고. 그러나 그 섬의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하는 거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고기가 잘 물리는 섬이 좋고, 회를 좋아하는 사람은 회를 맛있게 요리하는 섬을 좋은 섬이라고 할 것이다. 나는 섬이 세월을 보내기 좋아서 섬에 가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휴양할 생각으로 섬에 가지는 않는다. 나는 아직 낚시를 모르고 회 맛을 모른다. 나는 외로워서 섬에 갈 뿐이다.
그들은 만재도에 와서 재미를 못 봤다고 했다/낚싯대와 얼음통을 짊어지고 배를 타기 직전까지도/그 말만 되풀이했다/나보고 재미 봤느냐 묻기에/나는 낚시꾼이 아니고 시인이라고 했더니/시는 어디서 잘 잡히느냐고 물었다/등대 쪽이라고 했더니/머리를 끄덕이며 그리로 갔다 -시집 『하늘에 있는 섬』(119쪽)
 
제주도를 찾은 지(1951) 꼭 47년(1997)만에 찾은 만재도는 나에게 새로운 충격을 안겨줬다. 만재도는 먼 데 있는 섬이다. 목포에서 흑산도를 경유해서 가거도, 가거도에서 다시 여러 개의 무인도를 지나 상태도 중태도 하태도를 거쳐야 만재도에 닿는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배가 이틀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그런 아득한 곳에 있는 섬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배에서 내리자 마자 소나기처럼 시가 쏟아지더라는 사실이다. 짐을 민박집에 내려놓으면서도 시를 썼고, 고구마밭 언덕길을 헤쳐가면서도 시를 썼고, 큰산 절벽을 기어오르면서도 시를 썼고, 산꼭대기 낡은 등대까지 하늘을 찾아가듯 오르면서도 시를 썼고, 떨어지는 해를 보며 시를 썼고, 어두워지자 물소리가 항변처럼 사나워지는 것을 들으며 시를 썼고, 밤길을 걷다가 반딧불이에 부딪치며 시를 썼고, 선착장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서 모기에 물어뜯기면서도 시를 썼다. 정신 없이 시를 썼다. 쏟아져 나오는 시를 틀어막을 수가 없었다. 사흘 만에 150여 편을 썼다. 그 시를 가지고 돌아와서 한달 동안 다듬었다. 그것을 100편으로 줄여가지고 다시 만재도로 갔다. 그리고 하나하나 현장에서 소리 내어 읽었다. 절벽에 관한 시는 절벽에 올라가서 읽고, 등대에 관한 시는 등대 앞에서 읽고, 일몰에 관한 시는 석양 앞에서 읽었다. 그렇게 해서 93편을 뽑아낸 것이 시집 『하늘에 있는 섬』(작가정신•1997)이다. 만재도에 발을 디딘 지 6개월 만에 펴낸 시집이다. 나는 이 시집이 나오자마자 이 시집을 들고 만재도로 갔다. 그곳에 있는 민박집 주인 윤민순씨에게 제일 먼저 건네 주고 그가 끓여 주는 커피를 마셨다. 그것은 나에게 가장 즐거운 출판기념 파티였다. 그때 돌담 넘어 파도소리가 축하해줬다.
 
도망칠 만한 곳이 어디인가/시정배들이 발목을 잡은 것도 아닌데/도심 한복판에서 비명을 질러야 할 처지도 아닌데/왜 외로운 엉겅퀴 앞에 서 있는가/만재도/만재도가 나를 도망자로 몰지나 않을지/살금살금/이장댁 돌담 너머 창문을 두들긴다/ “나여, 나.”/ “나라니?”/ “나도 몰라, 나/달밤에 나갔다 돌아오는 나여.”–시집『 하늘에 있는 섬』(12쪽)
 
 3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윤민순씨는 그 시집을 머리맡에 놓고 잔다. 그는 나보다 여섯 살 아래다. 10년 전만해도 아내가 건강해서 알뜰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었는데 몇 년 전에 아내를 잃고는 담 너머로 수평선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는 홍어잡이 어선에서 왼손을 잃었다. 그로 인해 그의 황금어장을 잃고 실의에 빠져 술로 세월을 원망하다가 이제 절주를 하면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그의 머리맡에 그 시집이 없다.
“윤선생, 그 시집 없네”
“그거 누가 가져가 버렸어”
그는 여름이 시작되면 나에게 전화를 건다.
“여기 만재돈데 언제 올란교?”
만재도,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자갈밭에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나의 귀를 잡아 끈다. 지금 당장 하면서 나는 배낭에 노트와 스케치북을 담는다. 고추장과 볶은 멸치는 필수다.
“배가 언제 있는데”
“짝수 날”
“그럼 내일 모래 갈게”
나는 기차로 목포에 가서 흑산도로 가는 배를 타고 흑산도에서 하루를 묵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흑산도를 떠나 가거도를 거쳐 상태도 중태도 하태도를 거쳐 만재도에 닿는다. 전에는 선착장이 없어 작은 나룻배가 객선 뱃머리에 와서 손님을 받아갔는데 지금은 큼직한 제방이 생겨서 오르내리기가 편리해졌다. 내가 배에서 내리면 윤씨는 한 팔로 나를 꼭 껴안는다. 그리고 빙긋이 웃는다. 만재도까지 단숨에 달려온 것이 반가워서 그런다. 그의 집으로 간다. 그는 깨끗이 청소를 해놓고 내가 들어갈 방에는 모기장까지 미리 쳐놨다. 그리고 웃으면서 ‘온다기에 어제 통발을 바다에 던졌더니 그 속에 우럭이 들어서 매운탕을 끓였지’ 하며 반긴다. 그의 주방에는 아내가 없다. 오른손 하나로 끓여내는 매운탕은 나를 서럽게 한다. 식사를 다하고 나서 ‘커피는 내가 끓이지’ 하며 일어서는 나의 다리가 가볍지만 커피도 그가 끓인다.
 
 아무에게나 옷을 벗어 보이지 않는 섬 만재도/해남 윤씨 5대째 지킨 돌담/150년 전에 들어온 조상의 얼굴/그 얼굴은 왜 들어왔을까/자식들 다 육지로 떠나고/갯가에 남은 두 늙은이/주름살에서도 파도소리가 난다/아내는 교회 나가고/남편은 깨알 만한 수첩 돋보기로 넘기는 이장/앞으로 몇 해 더 살면 윤씨의 만재도는 끝이 나는가/배표를 살 때 잡았던 손 저물어도 놓지 않고/정이 입을 막아 말 못하는 얼굴/나는 시끄러운 서울에서 온 남자/이 사람 앞에서 하나도 장할 것이 없는 이력/ “왜 왔어?” 그 말에 눈물이 난다 –시집『 하늘에 있는 섬 』(22쪽)
 
10년 전 그의 아내가 살아 있을 때의 그에 관한 시다. 지금은 수평선을 보며 혼자 산다. 만재도에 관한 나의 시도 10년 전에 끝났지만 그곳에 가면 아직도 시는 아름다운 자연의 품에 안겨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러나 끌리고 끌리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 살아 있는 사람끼리의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만재도를 잊지 못한다.
나의 시 중에는 무인도에 관한 시가 더러 있지만 결국 생각나는 것은 사람이다. 그리운 사람이다. 내 시는 언제고 사람이 그리워 고독해진다. 이것이 사치라면 시 역시 사치이지만 사치가 삶을 의욕적이게 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더욱이 정신적이 사치는 보석보다도 삶의 빛을 더해준다.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흑산도에 유배되었고/최익현 선생도 흑산도 진리에 유배되었다는데/여기 만재도는 섬 그 자체가 유배된 섬/흑산도에서 유배된 섬 가거도로 가고/가거도에서 유배된 섬 만재도로 가고/만재도에게 유배된 섬/'나'/내 섬엔 이름이 없다/'나'에게서 유배되면 어디로 가나//떠나지 못하는 것/그 자리에서/떠나지 못하는 것은 섬이다/외로움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섬이다/외로움에 눌려 바위가 된 것은 섬이다/내가 너에게서 떠나지 못하는 것은 섬이요/네가 나에게서 떠나지 못하는 것도 섬이다/섬이 되지 않으려고 태양은 바다에서 떠났고/별도 바다에서 떠났지만 그들은 하늘에서 섬이 되었다/떠나지 않는 것들도 섬이다/그러나 한 시대의 섬이 되는 것도/한 시대의 고독을 기억할 수 있어 좋다/너는 만재도 쯤에서 섬이 되라/언젠가는 저 별도 이 섬으로 올 거다 –시집『 하늘에 있는 섬』(17-18쪽)
 
4 섬과 도시 사이에서
 이젠 사람들 속에서 시를 찾아야겠다고 뛰어든 곳이 서울 인사동이다. 한마을에 사는 박희진 시인과 매월 마지막 월요일 인사동에서 시낭송을 한지 8년이 지났다. 그리고 인사동과 섬을 왕래하며 펴낸 시집이 『인사동』(2005)이다. 그러나 인사동은 마음 놓고 시를 읽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것은 상혼(商魂)과 시혼(詩魂)과의 시각 차 때문에 그렇다. 힘들게 자리를 마련해서 시를 읽다 보면 얼마 안 가서 그 자리를 내놔야 했다. 그 중 하나가 ‘시인학교’*인데 문을 닫는 바람에 그 옆에 있는 다방에 들러 시를 읽겠다고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인학교:인사동에 있는 전통찻집. 1983년에 정태승 시인이 문을 연지 21년 만에 정동용 시인이 이어오다가 문을 닫았다.
‘바람 부는 섬’ 옆에/‘시인학교’가 있었다/그곳에서 김종삼의 ‘시인학교’를/브란덴브르그에 기대어 읽다가/리모델링 바람에 내 마음이 헐리고 허전해서/바람 부는 섬에 와 있다/-이 섬도 헐리나요?/“아뇨”/-그럼 여기서 시를 읽어도 되나요?/“……..”/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마음이 없다는 소리/그래서 나는 도시의 섬을 버리고/진짜 바람부는 섬 마라도로 왔다//여기서 시를 읽어도 되나요?/아무도 거절하는 사람이 없다 –시집 『인사동』(13-14쪽)
 
인사동에서는 시가 안 된다고 낙담한다. 서울의 도심 소위 문화의 거리라는 인사동에서 시가 안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투덜대면서도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반갑다. 지금 보리수 카페에서 6년째 버티고 있는 것은 보리수 측의 호의는 물론이오 끊이지 않고 찾아와 격려해주는 다정한 사람들의 덕이다. 그런 힘이 도시 한복판에 시를 심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기쁘다.
청계천 물이 바다로 가듯/나도 바다로 간다/인사동을 빠져 나와/지하철 계단에서 얻어맞은 둔기를 버리러/바다로 간다/청계천 물도 바다에 가봐야 청계천인 줄 안다/결코/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자는 게 아니다/그보다 넉넉하게/너와 내가 넉넉하게 있자는 거/강촌에 가지 않아도 도시 한복판에 강촌이 있다는 거/그리고 벤치에 앉아 시를 읽는 서울의 모습은/누가 만들 것인가/시인이여/화가들이여/이 도시에 신바람을 불어넣어 신나게 살자/나는 바다로 간다 –시집 『인사동』(122쪽)
시낭송이 끝나면 다시 섬으로 간다. 고향인 서산을 거쳐 젊어서 헤매던 태안 앞바다를 지나 근흥 그리고 안흥, 안흥엔 신진도가 있다. 신진도 다리 위에서 가의도로 가는 뱃길을 본다.

신진도는 아버지가 일제 말 징용을 피해 숨었던 섬이다. 그 섬에서 장티푸스를 만났고 그로 인해 한달 후 세상을 떠나셨다. 그 서러움이 나에게 시의 씨를 뿌린 것이다. 그 씨앗은 가난에서 자라 외로움의 바다를 헤쳐 나왔다. 그 외로움을 달래러 섬으로 간다는 것은 다분히 역설이다. 그러나 그것을 탓하지 마라. 그저 신진도를 건너 가의도로 가고 싶다. 가의도는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사고로 희생된 마지막 현장이다. 그 섬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그 나무 밑에서 이런 시를 쓴다.
 
지난 겨울/(2007년 12월 7일)/태안 앞바다가/원유 유출사고로 숨이 콱 막히던 날/꽃게도 황바리도 바지락도 굴도 미역도 다시마도/바위도 자갈도 모래알도 숨이 콱 막히던 날/갯마을 사람들은 땅을 치며 울었고/갈매기는 기름 묻은 날개를 파닥이다 쓰러지고/양식장은 시커멓게 사그라져/아무것도 살아 남을 재간이 없었는데/100만의 자원봉사자가 기름을 걷어내고/바위와 돌과 모래알을 씻는 동안/검은 기름띠가 가의도*로 몰려와/은행나무의 우듬지까지 기어오르려 했는데/다행히 악몽을 떨치고 황금빛으로 되살아나는군/그게 무슨 힘일까/이 가을에 무슨 힘일까/바보 같은 바다야 /다시 만나니 눈물이 난다

*가의도:태안군 근흥면 가의도리에 속하는 섬. 인구 40여명,
이 마을엔 수령 450년의 은행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오늘 아침에도 이곳 주민들은 바다를 살리기 위해 방제복을 입고 작업장으로 나간다. 거의가 다 노인들이다. 70에서 80이 넘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들. 자원봉사자들의 발길이 끊어진 후 마을 사람들만의 손으로 남아 있는 기름을 제거한다. 바다를 살려야 살아 있는 목숨이 산다는 절박감에 검은 악몽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있다. 누가 이들에게 이처럼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했나. 가의도는 외롭고 생명은 서럽게 강인하다.
<주> 이 글의 일부는 『 문학의 문학 』(2007 가을호)에 발표한 것임
 
 
 
이생진(李生珍) 연보
1929년 충남 서산에서 출생
1949 서산농림학교 졸업
1951-1954 군복무
1965-1969 국제대학 영문학과 졸업
1954-1993 중고등학교 교사생활
 <시집>
1955 산토끼
1956 녹벽(綠壁)
1957 동굴화
1958 이발사(理髮師)
1963 나의 부재
1972 바다에 오는 이유
1975 자기(自己)
1978 그리운 바다 성산포
1984 山에 오는 이유
1987 섬에 오는 이유
1987 시인의 사랑
1988 나를 버리고
1990 내 울음은 노래가 아니다
1992 섬마다 그리움이
1994 불행한 데가 닮았다
1994 서울 북한산
1995 동백꽃 피거든 홍도로 오라
1995 먼 섬에 가고 싶다
1997 일요일에 아름다운 여자
1997 하늘에 있는 섬
1998 거문도
1999 외로운 사람이 등대를 찾는다
2000 그리운 섬 우도에 가면
2001 혼자 사는 어머니
2001 개미와 베짱이 (곤충시집 『내 울음은 노래가 아니다』 증보판)
2003 그 사람 내게로 오네
2004 김삿갓, 시인아 바람아
2006 인사동
2007 독도로 가는 길
2008 반 고흐, ‘너도 미쳐라’
<시선집>
1999 詩人과 갈매기
2004 저 별도 이 섬에 올 거다
<시화집>
1997 숲속의 사랑(시:이생진/사진:김영갑)
2002 제주, 그리고 오름(시:이생진/그림:임현자)
 
<수필집 및 편저>
1962 아름다운 天才들
1963 나는 나의 길로 가련다
1997 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 
2000 걸어다니는 물고기
<시화전>
1971 시화전
<동인활동>
1971-1985 분수동인(윤강로 이봉신 신협 신용대 김준회 이생진) 활동
1986-2006 우이시동인(임보 홍해리 채희문 이생진) 활동
1995-2005 성산포 일출봉에서 시낭송(채바다와 2인)
2005-2008 현재 제주 다랑쉬오름 시낭송 활동
2000-2008 현재 인사동 시낭송 (박희진과 2인) 활동
<추천.수상>
1969『현대문학』을 통해 김현승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
1996 윤동주 문학상 수상 
2001 제주도 명예도민이 됨
2002 상화(尙火)시인상 수상
<주소>서울 도봉구 방학3동 신동아 아파트 101-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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