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개신교 안에서는 수도원 운동을 반대하는 분들이 있다. 수도원 운동이 현실을 도피하려는 운동으로 그릇 인식하는 탓이다. 기독교는 애초에 현실을 외면하고 피안의 세계를 동경하거나 내세만을 그리는 소극적 종교가 아니라면서 수도원 운동을 반대한다. 고행주의 생활은 기독교 본래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행주의는 이교에 속한 것이요 금욕주의 역시 성경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수도원 운동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어느 종교치고 종교인의 생활에 수도가 빠진 종교란 있을 수 없다. 예수님 자신이 사역을 시작하실 즈음에 인적이 끊어진 광야 사막으로 나가시어 40일 금식 수행하심에서 시작하셨다. 개신교의 원조격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 역시 본래는 수도사였다. 교회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어느 시대에나 교회의 깊은 영적 수원지는 수도원이었고 수도에 정진한 일꾼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수도원은 교회가 핍박 받는 시절에는 피를 흘리며 지켰고 교회가 세속주의에 빠져들 때에는 건져주었고 이단 사교가 득세할 때에는 바른 신앙으로 교회를 지켰다.
요즘 들어 개신교 안에서도 곳곳에서 수도원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나 작은 모임으로 수도생활을 실천하고 있는 분들도 적지 않다. 한국교회의 지나온 자취를 살펴보면 7,80년대에는 기도원 운동이 몹시 활발하였다. 그 시절에는 어느 기도원이나 찾는 사람들이 차고 넘쳤던 시대이다. 그러다가 90년대를 들어오면서 기도원을 찾는 발길이 뜸하여지면서 각 교회나 모임에서 이끄는 성경공부반이 활발하여졌다. 그러다가 이제는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영성운동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시대적인 요구에 응하여 개신교의 특성을 넉넉히 살려나가는 영성운동으로써의 수도원 운동이 꼭 필요한 때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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