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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징비록 [懲毖錄] - 국보 제 132 호 -

鶴山 徐 仁 2008. 7. 15. 20:51

 

징비록 [懲毖錄] - 국보 제 132 호 -


1. 개요

선조(宣祖)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쓴 임진왜란 야사(野史).

2. 내용

활자본. 16권 7책. 이 책은 현재 4종이 전하는데 저자 자신의 필사원본인 《초본징비록》(국보 132)과 16권으로 된 《징비록》, 2권으로 된 간본(刊本), 필사본이 있다. 1592(선조 25)~98년까지 7년에 걸쳤던 임진왜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한 책으로, 전란이 끝난 뒤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로울 때 저술한 것이다. ‘
징비’란 《시경(詩經)》의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役患)”는 구절에서 딴 것이다. 이 책의 체재 내용을 보면, 권1∼2는 제목이 없고, 권3∼5는 근포집(芹曝集:箚 瑪 ·啓辭), 권6∼14는 진사록(辰巳錄:狀啓), 권15∼16은 군문등록(軍門謄錄:文移) ·난후잡록(亂後雜錄) 등으로 되어 있다.
이는 임진왜란의 중요한 사료로서, 저자의 빼어난 문장에도 힘입어 널리 읽히고 있다. 군문등록 중의 잡록은 당시의 정세를 부기한 것인데, 소설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일종의 군담소설류라 할 수 있다.

초간은 저자의 아들 진(珍)이 1633년(인조 11) 《서애집(西厓集)》을 낼 때 함께 수록하였고, 10년 후에 다시 독립된 16권의 《징비록》을 간행하였다. 1695년(숙종 21) 일본 교토[京都] 야마토야[大和屋]에서 중간하였으나, 숙종은 《징비록》의 일본 수출을 엄금하였다는 1712년의 기록도 있다.

1936년 조선사 편수회에서 경북 안동(安東)의 종가 소장인 저자 친필의 필사본을 30부 한정판으로 영인 ·간행하였고, 1958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 ·간행한 《서애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담정(潭庭) 김려(金 제 )의 《광사(廣史)》 제3집에도 전 4책으로 필사되어 실려 있다.

3.서문

<징비록(懲毖錄)>이란 무엇인가 ? 임난이 일어난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인데 그중 임난전의 일도 가끔 기록한 것은 그 발단을 소상하게 밝히기 위한 것이다.
오호라 ! 임진의 화는 참혹 하였 도다. 10 여일 사이에 3 도(都)가 떨어지고 8 도(道)가 무너져 임금이 몽진하였던 것이다.

그렇고 서도 우리 나라가 오늘이 있음은 하늘이 도와준 까닭이다. 그리고 선대의 여러 임금들의 어질고 두터운 은덕이 백성들 속에 굳게 침투되어 있어서 이들의 조국을 생각하는 충정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임금님의 이웃 명나라를 섬기는 극진한 정성이 명나라의 황제를 감동시켜 구원병을 여러 차례 출동 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이 없었더라면 조국의 운명은 위태하였을 것이다. <시경(詩經)>에 <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뒤에 환난(患難)이 없도록 조심한다 >고 한 말이 있다.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이와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나라의 중책을 맡아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 못하고 기울어지는 형세를 붙들지 못한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시골구석에 살아남아서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가고 있으니 어찌 임금님의 너그러우신 은전(恩典)이 아니겠는가 ! 근심과 뛰는 가슴이 조금 진정되매 지난날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황송하고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다.

이에 한가로운 틈을 타서 그 듣고 본 바를 임진년에서 무술년까지의 일을 대강 기록하니 이것이 얼마 가량 되고 또한 장계(狀啓). 소차(疏箚). 문이(文移) 및 잡록(雜錄)을 그 뒤에 붙였는데 비록 보잘 것은 없으나 역시 이 모두가 당시의 일들이므로 버리지 못했다.

이것으로써 시골에 살면서 삼가 나라에 충성 하고자 하는 나의 간절한 뜻을 표시하고 또 어리석은 신하가 나라에 보답하지 못한 죄를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柳成龍 1542∼1607(중종 37∼선조 40)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본관은 풍산(豊山).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69년(선조 2) 성절사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사가독
서를 하였다.

그 뒤 이조좌랑·검상·응교를 거쳐 78년 사간이 되고 다음해 직제 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조참의를 거쳐 80년 부제학에 올랐다.

82년 대사헌에 승진하여 왕명으로 <황화집서(皇華集序)>를 찬진하고 83년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 사·제학을 겸하였으며 85년 왕명으로 <정충록발(精忠錄跋)>을 지었
다. 89년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그 해 정여립(鄭汝 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90년 우의정 에 오르고 광국공신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9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올랐으며, 왜란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형조정랑 권율(權慄)을 의주목사에, 정읍현감 이순신(李 舜臣)을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다.

92년 4월 일본이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 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하였으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義州)에 이르러 평 안도도체찰사가 되어 93년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되찾고, 이어 충청·경상·전라 삼도의 도제찰사가 되어 파주(坡州)까지 진격하였다.

이 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 도제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는데 이때 군대양성·화기제조 및 성곽수축을 건의, 군비확충에 노력 하였다.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 훈련도감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였다. 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진상 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고 관작(官爵)을 삭탈당 하였다.

1600년 복관(復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문장·글씨·덕행으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 을 받았다.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서애집》 《신종록》 《징비록》 《운암잡기》 《상례고증》 《무오당보》 《침경요의》 등 과 편저에 《대학연의초》 《황화집》 《구경연의》 《정충록》 《효경대 의》 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