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想像나래 마당

[스크랩] [6.25 특집]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은 한국전쟁 자료들

鶴山 徐 仁 2008. 6. 25. 18:35

 

 

 

 

 

어느 인민군 아내의 편지

 
▲ 북한 노획품 상자에서 발견한 인민군 아내의 편지
 
ⓒ NARA

사랑하는 당신에게

흘러가는 세월은 어느덧 흘러서 당신이 떠나간 지도 벌써 8개월 경과하였습니다. 지난 8월에 소식 알고 아직까지 소식 몰라 답답하기 짝이 없는 저는 1월 22일 이른 저녁에 편지를 받아본 저의 마음은 매우 만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 부모님도 안령하시고 가족들도 다 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4월 15일 몸을 풀었습니다. 그리하여 기섭(아들)이 누이동생을 탄생하였으며 장난꾸러기 기섭이도 잘 놀고 있습니다.

금년도 농사는 잘 하지 못하였으며 생활이 곤란하여 문암리 농촌에 가서 아버님과 함께 생활하려고 1월이나 2월에 가게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당신은 몸 건강하여 미 제국주의자들과 힘껏 싸워달라는 것을 부탁하면서, 저는 후방에서 승리의 그날까지 국가사업에 로력하면서 당신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이상 순서 없는 말로 몇 자 편지를 올림. 금강리 1반 김두칠 기록함. 1952년 1월 23일.

 


 

 


나는 2007년 2월 26일부터 3월 12일까지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제3차 한국전쟁 기록물 리서치(탐사) 작업을 하였다. 이 편지는 NARA에서 마지막 검색날인 3월 9일 오후 2층 검색실에서 북한노획물 상자를 뒤지던 가운데 RG242 Box146에서 나온 것이다.

 
▲ 동해남부전구 빨치산사령부 발행 '원호증'으로 민폐를 끼친 민간인에게 해방 후에 갚는다는 증서다.
 
ⓒ NARA

숱한 북한 노획문서 가운데 유독 이 편지를 떠듬떠듬 읽는 순간 나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한 지어미가 지아비를 그리는 순결한 진정성에 가슴 뭉클하였다. 이 글은 전선으로 간 남편에게 보낸 한 인민군 아내의 편지로, 마을에서 글을 아는 이가 대필한 듯하였다.

이 편지의 주인공들이 휴전 뒤 다시 만났는지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였다.

이밖에도 북조선로동당 당원증명서, 빨치산들이 민폐를 끼치고 주민들에게 준 동해남부전구 빨치산 사령관 발행의 원호증, 경상남도 진주시 인민위원회가 거리에다 붙인 식량과 피복 원조를 부탁한 벽보, 조선인민유격대 전라남도 곡성군 유격대 대장 김훈 이름으로 만든 선전 삐라 등 처절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짐작케 하는 문서들이 쏟아졌다.

또 인민군이나 중공군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가족이나 전우들의 사진, 그리고 공산군 측이 노획한 미군들의 소지품 가운데서 나온 가족사진과 다시 미군이 노획한 사진도 있었는데, 사진 속 주인공들의 이후 삶이 못내 궁금하였다.

 
▲ 미 해군 전투기가 신의주 상공에서 압록강 철교 중 남쪽 부분을 폭파하고 있다(1950.11.15).
 
ⓒ NARA
 

승자도 패자도 없는 '끝나지 않은 전쟁'

 
▲ 한국전쟁 당시 북한측 선전벽보
 
ⓒ NARA

1950년 6월 25일 평화롭던 일요일 새벽, 먼동과 함께 북위 38선 일직선에서 울려 퍼진 포성과 탱크 캐터필러 소리로 시작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원한의 휴전선에서 포성이 멎으며 끝났다.

3년 남짓 동안 지루하게 계속된 한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끝나지 않은 전쟁' '잠시 쉬는 전쟁'으로 일단 그 막을 내렸다.

이 전쟁으로 피아 150만 명의 전사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낳았고,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으로 전란의 생채기를 앓았다.

그리고 반세기가 훌쩍 지나갔다. 그때 길거리를 헤매던 전쟁고아들은 그새 노인이 되고, 혹독한 전쟁을 겪은 기성세대들은 대부분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이제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전쟁을 체험한 일부 세대에게만 가물가물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 한국전쟁 중 다리를 잃은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고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그의 다친 몸과 무거운 표정이 우리 민족의 수난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1950.10).
 
ⓒ NARA
 

나는 2004년 1월, 여러 네티즌의 도움으로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갔던 바, 5층 사진자료실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보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한국전쟁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하늘에서는 쌕쌕이(전투기)들이 굉음과 함께 폭탄을 염소 똥처럼 쏟았고, 산이나 강 들판너머에서는 총성과 포성, 그리고 탱크가 캐터필러를 굴러 돌진해 오는 소리들이 되살아났다.

순간 NARA 자료실의 사진들을 몽땅 한국으로 옮겨다 전후 세대에게 한국전쟁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히 NARA 자료실에서 스캔이 가능해 동포의 스캐너를 빌려 한국전쟁 사진들을 부지런히 담았다. 이를 즉시 오마이뉴스에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연재로 주요 사진 모두를 공개한 다음, 사진전문 눈빛출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제목으로 한국전쟁 사진집을 펴냈다.

이 사진집이 나오자 매스컴에서 대서특필해 주고, 독자들의 성원도 커서 2005년 11월에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시 NARA에서 제2차 한국전쟁 기록물 리서치 작업을 한 뒤 귀국하여 눈빛출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2>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 장면>을 펴냈다.

이 사진집 또한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 2007년 2월에 다시 제3차 한국전쟁 기록물 리서치 작업 길에 올라 500여 점의 사진과 문서를 입수하여 <지울 수 없는 이미지·3>을 펴냈다.

 
▲ 인천상륙작전 때 유엔군에게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인민군 병사들(1950. 9. 15).
 
ⓒ NARA
 

 

 
▲ 전란의 상흔으로, 탱크도 사람도 망가진 채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도로.
 
ⓒ NARA

 

 
전쟁은 사람을 짐승으로도 만든다

[6·25 특집]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서 찾은 한국전쟁 자료들② 
박도(parkdo45) 기자   

 

 

 
▲ 사람인가? 멧돼지인가? 총구 앞에서는 사람도 짐승이 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인민군 전사가 짐승처럼 기어오면서 투항하고 있다(1951. 9. 20).
 
ⓒ NARA
 

새삼 기록의 무서움을 깨닫다

나는 제1~3차 70여 일 검색기간 동안 내내 수백만 파일의 기록물이 보관된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자료실에서 마치 광맥을 찾는 탐사자로 연일 눈에 핏발을 세우며 한국전쟁 관련 문서 상자를 훑었다. 영어에 어둔한 내가 감히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곁에서 도와준 재미 동포 박유종 선생 덕분이었다.

그분은 조부 백암 박은식(상해 임시정부 대통령, 사학자)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은 까닭에 한국전쟁 역사자료 복원 일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심지어 생손앓이까지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시간 약속을 어기거나 일방으로 쉬신 적이 없었다. 솔직히 그 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한국전쟁 자료를 한 점도 입수해 올 수 없었다.

서울에서 미국으로 출국 전, NARA에 북한에서 노획한 자료가 소장되었다는 정보를 가지고 갔지만, 문외한이 방대한 NARA 자료실에서 북한 측 자료를 입수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정말 운 좋게 20여 년 NARA를 드나들며 한국관련 문서 리서치 작업에 전력해 오신 재미 사학자 방선주 박사를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분 도움으로 북한 측 노획물 180 자료 상자를 검색할 수 있었다.

내가 방 박사였다면 당신이 수십 년간 노고 끝에 알게 된 검색방법을 아무 대가도 없이 쉬 가르쳐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분은 역사의 진실을 찾아 후세에 남기려고 만리 타향을 찾아온 한 문사의 열정을 가상히 여겨 쉬 마음의 문을 열었으리라. 이 자리를 빌려 깊이 감사드린다.

북한 노획물(RG 242) 상자에서는 별 것이 다 나왔다. 각종 작전보고서, 지령문, 신문 잡지 등. 마치 빗자루로 쓸어 담은 것처럼 북한 문서들이 고스란히 NARA에 옮겨져 있었다. 특히 Box 23에서 나온 '남하(남파) 공작원 명단'을 보고서는 새삼 기록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세포수첩의 암호문에서는 비밀 공산당 조직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는데 내 실력으로는 암호들을 풀이할 수가 없었다. 

 
▲ 로동당 간부들이 소지한 듯한 세포수첩.
 
ⓒ NARA
 

 이번 제3차 한국전쟁 기록물 리서치 작업에서 특이점은 앞선 제1차, 제2차 작업과는 달리 NARA에 소장된 북한 측 노획문서를 리서치한 점과 맥아더 장군의 고향 버지니아 남쪽 항구 노폭(Norfolk)까지 달려가서 맥아더 기념관의 자료도 수집해 온 점이다.

버지니아 남단 맥아더 기념관을 찾다

 
▲ 미국 버지나아 주 노폭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
 
ⓒ 박도
 

2007년 3월 6일, 재미 동포 이도영 박사의 길안내로 버지니아 남단의 '노폭'이라는 도시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을 찾았다. 그 곳 기념관에서 맥아더 장군의 전 생애, 특히 만년의 맥아더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유엔군 측의 대역전 전환점이 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전선 시찰, 그리고 만주 북폭 주장으로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진다"면서 맥아더 장군이 물러나는 장면까지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었다.

중앙청 메인홀 9·28 서울 수복 기념식장에서 맥아더 장군의 손을 잡고 대한민국을 지켜준 데 대한 감사를 표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눈에는 눈물이 서린 듯 보이는 사진도 있었다.

이 맥아더 기념관에 소장된 한국전쟁 관련 사진들은 모두가 대한민국 역사의 귀중한 한 장면들이라 시간이 허용한 대로 최대한 복사해 왔다. 또, 이 기념관에 소장된 한국관련 앨범에 수록된 사진들 중 한국전쟁 이전의 좌익사범 처형 장면은 호기심 많은 나그네를 흥분시켰다. 하지만 한 장 당 복사비로 거금(100달러)을 요구해 주머니가 얇은 나그네는 대신 디지털카메라에 담아왔다. 그네들이 거금을 요구할 만큼 끔찍한 장면이 많았다.

 
▲ 인천상륙작전 후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1950. 9. 17).
 
ⓒ NARA
 

 

 
▲ 맥아더 기념관에 소장된 한국관련 앨범으로 주로 한국전쟁 이전의 좌익사범 및 빨치산 처형 장면이 많았다.
 
ⓒ 박도
 

매우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

이번 제3차 한국전쟁 기록물 리서치 작업에서도 가장 감동적이고 기분 좋았던 장면은, 전란 가운데도 설날을 맞아 한복으로 예쁘게 설빔을 차려 입은 소녀들이 동네 마당에서 널뛰기놀이를 하는 장면이었다. 구김살 없는 소녀들의 표정이 어찌나 맑은지 전란을 겪는 소녀들의 모습 같지 않았다. 고난 속에서도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온 백성들이기에 전후 잿더미를 딛고 오늘의 경제대국 번영을 이루어낸 듯하다. 새삼 우리 겨레의 강인한 저력을 확인케 하는 사진이었다.

 
▲ 전쟁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널뛰기를 하고 있다(1953. 2. 19).
 
ⓒ NARA
 

한국전쟁 사진 자료의 보고(寶庫)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일 수밖에 없는 것은 1950년 당시 우리나라 언론기관은 질과 양에서 오늘날과 견줄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백성들은 피란 다니기에 급급해 전쟁 실상을 제대로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카메라가 무척 귀한 시절인 데다가 전 전선에 투입할 만큼 인적 자원이 넉넉하지 못했다. 이에 견주어 유엔군들은 부대별 홍보 사진사와 각 언론기관 종군기자로 그날그날 전황을 전 세계에 타전해 사진자료가 비교적 풍부한데다가 전쟁 후 미 정부에서 이를 통합하여 NARA에 영구 소장하면서 방대한 자료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세 차례 70여 일간 NARA에 머무르면서 한국전쟁 사진자료는 대부분 섭렵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곳에는 워낙 방대한 자료가 소장돼 있기에 섣불리 그 자료들을 다 보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3차 리서치 작업을 끝내고 떠나오면서 NARA 소속 아키비스트에게 작별인사를 하자 낯이 익은 그들은 한결같이 나에게 "Mr Park, See you again!"이라고 말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 한 인민군 전사의 소지품에서 나온 사진으로 김용호, 리영록, 김기원, 김용생, 김두형, 주중환 여섯 동무가 568연대 직속 사격장 밑에서 촬영하였다고 기록돼 있었다.
 
ⓒ NARA

처음부터 끝까지 곁에서 도와주시던 박유종 선생도, 그곳에 사는 제자도 꼭 다시 NARA에 찾아와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를 계속 발간하기를 기원하였지만 나로서는 확답을 드리지 못하였다. 솔직히 아직도 미국 출입국이 그리 쉽지 않고 비용도 만만치 않다.

아무튼 그동안 수집한 사진과 문서들이 우리나라 기록문화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기를 바란다. 특히 현대사 자료가 빈곤한 작가, 방송인, 영화인 등 예술인들에게는 그 당시의 모습과 상황을 바로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번 제3차 방미는 시차부적응과 피로누적으로 여느 때보다 매우 힘들었지만 그런 가운데도 열심히 일했기에 어느 때보다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검색 중, 좋은 사진이나 문서를 발견할 때의 그 기분은 월척을 낚은 강태공의 손맛보다 더 좋았다.

이번 방미 길에도 곁에서 줄곧 도와 준 박유종 선생, 북한 측 자료 검색방법을 자상하게 일러주신 방선주 박사, 맥아더 기념관 길안내를 해주신 이도영 박사님께 심심한 사의를 드린다. 그리고 그동안 이 일에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도.

 

 

 

 

 

 

 

 
▲ 남하(남파) 공작원 명단, 기록은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 NARA

 

 
[사진] 한국전쟁 때 내한한 마릴린 먼로

 

  

 

 

 

 
ⓒ 박도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위문공연차 한국을 방문한 마릴린 먼로의 사진이 최근 공개됐다.

출처는 최근 발매된 박도씨의 <지울 수 없는 이미지 3>. 저자가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발굴한 이 한 장의 사진은 1954년 2월 26일 촬영됐다.

마릴린 먼로가 종전 뒤 전선에 배치된 미군을 위문하기 내한한 것으로 군복을 차려입은 먼로가 부축을 받으며 들어서고 있는 모습이다.

이 사진 외에도 먼로가 부상당한 병사를 위로하는 장면, 장병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 지프차와 탱크를 탄 상태의 사진이 이미 소개된 바 있다.

 
1961년 3월 22일 문바우골을 향해 먼 길을 떠난 적이 있다. 교통이 무척 불편했던 시절이라 당시 서울 숭인동에 있던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아침 일찍 횡성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오후 1시께나 되어 그곳에서 하루 두 번 다니는 서석행 버스를 갈아타던 생각이 난다.

장가든 지 두 해가 되던 해라 첫 돌을 바라보는 귀여운 딸의 재롱도 잠시 미루고 신혼여행 때 쓰던 가방에 그분의 한복 한 벌과 양말 서너 켤레 그리고 명동 태극당에서 산 과자 한 상자를 담아들고 서석에서 내렸다. 그 분의 아들인 김학성씨가 벌써부터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은 그 분의 72회 생신이었다.

 
▲ 1961년 3월 23일 내 생명의 은인이신 김자 중자 경자이신 어르신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이 필자.
 
 
대소 집안 어른들이 집 안팎으로 분주했고 전 부치는 기름 냄새는 산골마을 가득히 배어 있었다. 북으로 올려다 보이는 문암산은 아직도 많은 눈을 이고 있었고 개울가 버들강아지는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릴 차비를 차리고 있었다.

그 분 아들의 손에 이끌려 생명의 은인이신 '김'자 '중'자 '경'자이신 어르신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렸던 그때 그 감격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후 14년이 지난 1975년에 또 다시 그곳을 방문했을 때는 그 분이 작고하신 지 7주기여서 그 분의 영정 앞에서 흐느끼며 향을 피워야 했다. 그때 잊혀지지 않는 슬픔은 더욱 내 가슴에 남는다.

이 분과의 인연은 한국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10개월이 되던 1951년 봄이었다. 강원도 인제 남동쪽 현리라는 곳에서 우리 국군은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에 포위를 당했다. 작전상 후퇴를 택한 수많은 아군 병력은 눈물을 머금고 북녘하늘을 흘겨가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남으로 또 남으로 집결지 창촌을 향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쓰러질 듯 지친 몸을 질질 끌면서 방태산 개인산 명현봉 등 표고 1000미터가 넘는 험산 준령을 오르내리면서 때로는 비어 있는 어느 민가에 들어가 솥바닥에 남아 있는 강냉이 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도 했고 적군의 눈을 피해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는 산 속을 걸어 집결지 창촌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어느날 저만치 바라다 보이는 들판에 서서 피곤에 지친 몸을 잠시 풀려는데 어디선가 적군이 쏘아대는 AK소총 소리에 그만 혼비백산하여 외나무 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전우들이 내린천 급류로 뛰어들어 떠내려가던 그 비통한 참상은 지금도 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고 있다.

남과 북은 형제인데 누가 우리를 이렇게 갈라놓았단 말인가. 우리는 같은 피가 흐르는 한겨레이건만 누가 이렇게 우리가 서로 총뿌리를 겨누게 했단 말인가. 3개 사단이라는 엄청난 병력이 포위망을 헤쳐 남으로 후퇴했다. 저쪽 산등성에서 아군 보병이 엄호 사격을 하고 야광탄은 밤하늘을 수놓았다. 교전하는 총성 그리고 부닥치는 총탄의 불꽃 그리고 조명탄이 하늘에서 대낮처럼 불을 밝혔다.

아! 어느 불꽃놀이가 이토록 장엄할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전장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참전용사들만의 특권이다.

어느 날이었던가. 나는 두 전우와 같이 문암산 밑 어느 민가에서 아침을 얻어먹고 얼른 몸을 피해 그 집이 내려다보이는 가까운 산 속에 숨어 있었다. 한낮쯤 되었을까. 중공군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깜짝 놀라 수풀을 헤치고 우리가 아침을 먹고 나왔던 그 집을 내려다 보았다.

무전기를 등에 진 중공군 서너 명이 그 집 안 마당에 버티고 서 있었다. 얼마 있으니 집안에서 그 집 식구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온다. 중공군들은 사정없이 그 집 구석구석을 따발총으로 갈겨댔다. 아마 국방군이 있었다는 정보라도 들었나 보다. 중공군들은 그 집 식구들을 끌고 저 아래 산모퉁이를 돌아 내려갔다.

그 순간 앞으로 닥칠 불길한 예감이 우리들 머리를 스쳐갔다. 10분이 10년 같은 길고도 긴 시간이 숲 속에서 숨어 떨고 있는 우리들의 가슴을 쥐어 뜯었다. 참으로 오랜 시간만에 나무 그림자가 길게 뻗어 나가더니 굼벵이 같은 저녁 해가 문암산을 마냥 넘었다. 해가 지고도 어두워질 때까지 우리들은 가슴을 졸이다가 마침내 숲속 탈출을 시도했다. 서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금살금 문암산을 기어올랐다.

그런데 달빛은 어쩌자고 이렇게 교교하단 말인가. 온 몸이 노출되어 적군에게 곧 발각이라도 될 것만 같았다. 우리는 달빛을 피해 숨을 죽이고 오르고 또 올랐다. 우리는 아마도 사자밥을 지고 저승길을 오르나 보다.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그런데 거의 산 중턱쯤 올랐을 때였다. 달빛이 갑자기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산 속은 금세 어두워지고 장대 같은 빗줄기가 문암산을 두들긴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하늘이 우리를 도우셨나보다. 우리 세 사람이 비범벅이 되어 문암산을 넘었을 때 달은 또 다시 검은 비구름을 열고 전율이 맴도는 어느 으스스한 마을을 비쳐주었다.

저기 음침한 호롱 불빛이 어느 초가에서 새어나왔다. 잔뜩 긴장한 시야에는 정적이 감돌고 가끔씩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가 우리 세 사람을 더욱 움츠리게만 했다. 우리는 숨을 죽여가며 호롱불빛이 새어나오는 초가 앞으로 갔다.

나는 검지 손 끝에 침을 발라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토담집 문 창호지를 뚫었다. 그리고 뚫린 구멍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는 촌로 한 분이 입에 물었던 장죽을 손에 쥐고 목침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그 순간 우리는 방문을 벌컥 열고 방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갑자기 들이닥친 우리 국군을 보고 놀란 촌로 앞에 엎드려, 갈수록 적중 탈출이 난감함을 설명하면서 우리들의 은닉을 호소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촌로가 입을 열었다.

"이 사람 같으면 옷을 갈아입고 내 아들 행세를 해도 괜찮으련만…"하면서 한 전우의 거친 손을 잡았다. 그 전우는 농촌 출신이었다. 피부나 몸매가 그분 아들 행세를 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전우가 혼자 남기를 거부하자 그 촌로는 비장한 어조로 우리 모두 생존할 수 있는 묘안을 우리들에게 제시했다. 적중에서 우리 국군을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우리는 그 즉시 촌로의 집을 나와 숲 속으로 몸을 피해 손톱이 이지러져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맨손으로 우리 세 사람이 들어갈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주워 모아 구덩이 위를 덮고 구덩이 속에서 뜬눈으로 무릎을 맞대고 쪼그리고 있었다.

동이 틀 무렵 인기척이 나면서 중공군들이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우리들은 깜짝 놀라 모두 초죽음이 되어 숨도 쉬지 않았다. 지난밤 어둠 속에서 급히 서두르다 그만 구덩이를 길가에 팠나 보다. 아침 햇살이 구덩이를 덮은 나뭇가지 사이로 밤새 안녕했느냐는 듯이 쪼그리고 있는 우리 세 사람을 들여다 보았다.

얼마 있더니 멀리서 쇠방울 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이 들려오면서 그 촌로의 헛기침 소리도 들렸다. 우리들의 위치를 알리라시는 암호였다. 나는 구덩이를 덮었던 나뭇가지를 제치고 목을 내밀었다. 그리고 주위를 살펴보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우리들의 위치를 알렸다.

소를 몰고 구덩이 앞으로 다가온 촌로는 한참동안 서성거리다 얼른 망태기 하나를 던져 주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망태기 속에는 풀잎에 잘 싸인 강냉이밥과 고추장이 들어 있었고 다른 주머니 하나에는 볶은 콩이 들어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이 먹을 양식인 것이다.

이러기를 며칠이 지났다. 언제 살아서 나가리라는 기약 없는 구덩이 속의 목숨들이 되고 말았다. 언제 아군의 반격이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어쩌면 적군에게 발각되어 세 사람 모두 한 구덩이에 묻혀 종종 산새들이나 찾아와 울어줄 아무도 모를 무덤으로 남아 버릴지도 모른다.

그 촌로의 가족 역시 국방군을 숨겨준 이적죄로 처참한 죽음을 맞고 억울하게 구천을 맴돌아야 할 비운이 닥칠지도 모른다. 이렇게 우리는 참으로 가슴 졸이며 구덩이 속에서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살아남는 길보다 저승길이 더 가까운 길목에 앉아 오늘도 그 촌로가 던져 줄 망태기 하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서서 그 며칠이 지났던가! 멀리서 미풍에 실려 냄비 속에서 콩 튀는 듯한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더니 이번에는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지나 바람을 가르고 북쪽으로 날아가는 105mm 포탄 소리를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구덩이 속에서 서로 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아군의 반격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적군에게 발각이 되지 않는 한 생존할 확률이 있었다. 구덩이 속에서 햇빛도 못 보고 세 사람이 무릎을 맞대고 쪼그리고 있은 지도 벌써 일곱 날이 넘었다.

멀리서 교전하는 소총 소리가 더 가깝게 들려왔다. 슬피 우는 부엉이 울음소리에 생명에 대한 애착을 더욱 강하게 느꼈다. 드디어 적중 잠복 10일! 우리가 구덩이 속에서 지낸 지 열흘째 되던 아침이었다.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서 중공군이 다 물러갔다고 크게 소리 질렀다. 촌로의 아들이었다. 우리는 소스라칠 사이도 없이 그간의 악몽을 떨쳐버리고 구덩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4월의 햇살이 따사로웠다. 지게를 지고 앞서 가는 촌로의 아들을 따라 그 집 안 마당에 이르렀다. 마당이 넓었다. 촌로 내외분과 식구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우리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 넓은 마당이 흠뻑 젖도록 흐느껴 울었다.

생명의 은인 앞에서 갚을 길 없는 감격의 울음이었다. 촌로가 안으로 들어가 농주를 바가지 하나 가득히 퍼가지고 나와 우리들에게 건네주었다. 우리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이렇게 살아 돌아가는 순간에 축배까지 내려주시는 어르신의 깊은 사랑을 우리 가슴 가득히 마셨다. 그저 쏟아지는 눈물 뿐 드릴 말씀이 없었다.

문암산을 넘어 오기 전부터 적지 민간인들은 언제나 우리 국군을 도와주었다. 나는 큰 바가지를 입에 대고 크게 마셨다. 한 모금 두 모금 바가지 속의 막걸리가 위아래로 출렁인다. 내 영혼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우리는 그 어르신 내외분께 눈물로 작별을 고하고 집결지 창촌을 향해 내 생애에 다시 없을 즐거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 집 아들이 지게를 지고 또 앞장을 섰다. 그토록 전율이 맴돌던 산하는 아름다운 강원도의 절경을 자랑하고 개울 흐르는 물소리 그리고 지저귀는 산새들의 노래 소리는 마치 살아 돌아가는 우리들을 전송이라도 하는 듯 정감이 넘쳤다.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 흐르는 개울가에 떠 있는 징검다리를 딛고 나는 고개를 돌려 뒤돌아 보았다.

여린 솔잎 사이로 문암산이 보였다. 저 문암산을 넘어오던 날 억수같이 쏟아지던 빗속에서 절규하듯 내 가슴 속에서 울부짖던 내 기도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우리는 개울을 건너 산허리를 돌아 시야가 확 트인 언덕에 서서 그 집 아들과 헤어졌다. 아스라이 내려다보이는 창촌을 바라볼 때는 나도 모르게 벅차 오르는 뜨거운 눈물이 내 볼을 적시고 있었다.

저 아래 아군 탱크들이 준엄한 자세로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아! 내가 정녕 살아 돌아가는 것인가. 온몸에 피가 끓어오르고 빗물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여기 저기 골짜기, 골짜기에서 우리와 같은 전우들이 세 명씩 다섯 명씩 짝지어 걸어왔다. 저들은 또 어디서 저토록 저들의 승리를 위해 잠복해 있었단 말인가.

이렇게 문암산 문바우골은 아군의 잠복지였다.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던 적지에서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데는 아군을 도와준 문바우골 사람들의 숨은 공이 있었다.

창촌이 가까워졌다. 어서 가서 내 소속 부대를 찾아야 하고 헤어졌던 전우들을 다시 만나야 한다.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어 전선으로 다시 향할 내 늠름한 모습을 그려가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약동하는 봄은 벌써 나뭇잎에 푸른 옷을 입히고 산천은 이미 생기에 가득 차 있었다.
 
2007-06-2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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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재경동기회
글쓴이 : 카페지기(여정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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