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으로 폐허가 된 1950년대 후반, 화가 박수근(1914~1965)은 초라한 양복 차림으로 미군부대나 서울 반도호텔(현 조선호텔) 안에 있는 외국인 회사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어렵게 그림을 팔았다. 박수근의 ‘오리지널 컬렉터들’은 그래서 대부분 외국인, 특히 미국인들이다. 그들은 ‘블루칩 화가’ 박수근에게 투자한 게 아니라, 한국의 풍경을 담는 ‘소박한 화가’ 박수근을 후원했다.
박수근이 남긴 편지와 자료에는 마거릿 밀러, 실리아 짐머맨 등 당시의 컬렉터들 이름이 남아 있다. 그중 한 명인 미국인 존 릭스(John Ricks·81)씨가 최근 모습을 드러내 화제가 됐다. 박수근이 1960년대에 미국인 컬렉터였던 마거릿 밀러 여사에게 쓴 편지 중에 “존 릭스씨는 홍콩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박수근의 ‘오리지널 컬렉터들’ 중 공개적으로 인터뷰를 한 사람은 릭스씨가 처음이다.
그림 팔기 위해 반도호텔에 자주 들러
인터뷰의 계기는 연초 진위 공방이 붙었다가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에 의해 진품으로 결론 난 박수근의 유화 ‘빨래터’였다. 존 릭스씨는 이 작품을 1950년대 중반 박수근에게 직접 받아 가지고 있던 소장자였다.
- ▲ 존 릭스씨(오른쪽)가 지난 1월 29일 미국에 있는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박수근의 장남 성남씨(왼쪽)를 만나 이야기 하고 있다. / photo 이규현 조선일보 기자
- 존 릭스씨는 지난 1월 29일 오후 미국 켄터키주 모처에 있는 그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박수근의 장남 성남(61)씨, 서울옥션 관계자와 기자를 함께 만났다. 그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당신은 박수근과 직접 알고 지냈던 컬렉터 중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라고 말했더니, “내가 조지 워싱턴이라도 되는가요?”라며 웃었다.
존 릭스씨가 펼쳐 놓는 과거 이야기는 마치 우리 근대미술사의 한 부분을 들춰내는 듯했다.
“저는 1954년부터 1956년까지 ‘헤닝슨 컴퍼니’의 한국과 일본 지사장으로 근무했어요. 펄프·중장비·약품·화학섬유 등을 거래하는 무역회사였어요. 사무실이 서울 반도호텔에 있었는데, 어느 날 우리 사무실에서 일하던 조군실이라는 한국 군인이 박수근을 사무실로 데려와 내게 소개해줬어요. 통역관을 옆에 놓고 대화하곤 했는데, 박수근도 질문에 간단한 대답은 하는 정도였습니다. 박수근은 매우 말이 없는 젠틀맨이었고, 그림을 팔기 위해 반도호텔 안을 늘 바쁘게 돌아다녔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때 반도호텔에 외국 회사가 많이 들어와 있었거든요. 박수근은 초라한 양복을 입고 두꺼운 안경을 낀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늘 슬퍼 보이는 표정도 기억이 나요. 생활이 어려워 보였지만, 그는 직접 그림을 사 달라고 구걸한 적은 없어요. 단지 제가 매달 일본에 갈 때면 조군실을 통해 제게 부탁을 했어요. 물감과 캔버스 등 필요한 그림 도구 리스트를 적어 주며 사다 달라고요. 그리고 그림 도구들을 사다 주면 고맙다는 인사로 그림을 주곤 했지요.”
그는 표지가 너덜너덜해진 낡은 여권 두 개를 보여줬다. 1954년 1월부터 1956년 12월까지 한국에 머물 때 쓰던 것으로, 출입국 확인 도장이 여럿 찍혀 있었다.
“평생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았는데, 여권을 보면 정확히 언제 어디 있었는지 기억해내는 데 도움이 돼요. 당시 한국은 전후의 불안한 상황이어서 가족들의 거주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세 아이는 일본 도쿄에 있고 저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일본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 ▲ 지난 1월 9일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에서 오광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왼쪽)과 엄중구 감정위원(오른쪽)이 박수근의 ‘빨래터’의 감정결과 ‘진품’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 photo 채승우 조선일보 기자
- 릭스씨 사무실에서 일하던 군인 조군실씨는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조씨의 딸 성애씨는 최근 성남씨를 만나 존 릭스씨를 기억한다고 말했다. 성애씨는 현재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을 하는 화가다.
매년 직접 만든 카드 보내와
“‘빨래터(Wash Place)’ 역시 박수근이 물감을 사다 줘 고맙다며 직접 사무실로 들고 와서 준 그림이에요. 저에게 주기 위해 일부러 그린 것이라고 생각해요. 돈을 주고 사지 않은 것은 제가 잘못한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스물일곱 살이었고 세 아이를 키우는 가장이었기 때문에 그림을 살 시간과 돈의 여유는 없었어요. 제가 가지고 있었던 박수근 작품은 모두 보답의 선물로 받은 것이었어요.”
존 릭스씨는 부유한 집안 출신은 아니다.
“아버지는 위스콘신 출신의 미국 해군이었는데 1914년에 중국으로 가셨어요. 저는 중국에서 태어났지요. 모두가 가난했던 1930년대에 자라서 저는 가난이 무엇인지 알아요. 게다가 아버지는 1941년엔 일본군의 포로가 됐어요. 2차 세계대전 이후 아버지가 풀려나고 저는 미국으로 와서 교육을 받았지만, 부모님은 다시 중국으로 가셨어요. 거기에서 아버지는 중국 공산당의 포로가 돼 오랫동안 수감돼 있었어요.”
그는 1954년 처음 서울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이 “오, 또 이렇게 살긴 싫어(Oh my god, not again…)”였다고 말했다. 말을 잇는 릭스씨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한국사람들이 박수근의 그림을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를 제가 알아요. 그때 한국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거예요. 그때 사람들은 지붕이 없는 집에 살며 굶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미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일어서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릭스씨는 “개인적으로 박수근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나 역시 당시 젊은 가장이었기 때문에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애쓰는 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성남씨 손을 꼭 잡으며 “당신의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박수근이 1954년부터 1958년까지 직접 만들어 연말마다 보내줬던 크리스마스 카드와 봉투의 일부를 꺼내 보여줬다. 존 릭스씨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