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南北美洲.濠洲

[스크랩] 칠레

鶴山 徐 仁 2008. 2. 1. 20:02
공식명칭 : 칠레공화국(Republic of Chile)
인구 : 16,436,000
면적 : 756,096㎢
수도 : 산티아고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다당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
독립년월일 : 1810. 9. 18
화폐단위 : 페소(peso/Ch$)
국가(國歌) : Dulce patria, recibe los votos("Sweet Fatherland, receive the vows")
남아메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나라.
개요
칠레 /국기
칠레 /지도
수도는 산티아고이다. 파타고니아의 남단에서 북쪽으로 4,350km에 걸쳐 있다. 남위 17°30′~56°30′, 서경 66°15′~76°45′에 위치한다. 동서의 평균너비는 약 177km이다. 5,337km의 태평양 해안선이 서쪽 경계선을 이룬다. 북쪽으로 페루, 북동쪽으로 볼리비아, 동쪽으로 아르헨티나에 접한다. 면적 756,096㎢, 인구 16,436,000(2006 추계).
자연환경
지형학상 동서로 안데스 산맥, 중앙 저지대인 중앙 팜파스, 코스테라 산맥이 있는 해안지대 등 세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세 지역은 거의 전국토에 걸쳐 남북 방향으로 펼쳐져 있다. 안데스 산맥은 남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지역은 넓고 건조한 고원지대로 볼리비아 국경에서 남쪽으로 남위 27°까지 펼쳐져 있다. 2번째 지역인 좁은 중앙 안데스 고원은 남위 42°까지 남쪽으로 뻗어 있으며, 해발고도가 5,000~6,000m이다. 3번째 지역은 호수와 피요르드가 많이 있는 안데스 산맥 남부로 국토의 나머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안데스 산맥 남부에서는 아직까지 화산활동이 계속되고 있으며, 현대에 들어서도 지진이 여러 번 발생했다. 1647년에는 산티아고 시가 파괴되었으며, 20세기에는 지진으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안데스 산맥과 해안산맥 사이에 있는 중간의 저지나 세로로 뻗어 있는 골짜기가 북부의 여러 주(州)에 걸쳐 있는 아타카마 사막에서 시작된다. 아타카마 사막은 세계에서 가장 황량한 사막으로 꼽힌다. 이 중앙 저지는 남쪽으로 계속되면서 산맥이 중간중간 가로놓여 있기도 하지만 센트랄 계곡처럼 인구가 밀집된 평야지대도 있다. 그리고 남위 43° 부근에서 코르코바도 만 아래로 잠겨든다. 해안산맥은 동쪽의 웅장한 안데스 산맥보다 낮은 산맥으로 서쪽에서 중앙의 골짜기와 접하며, 이 산맥으로 인해 국토의 중앙부에서 바다로 나가기가 어렵다. 남위 43°에서 중앙 저지는 바다를 향해 남쪽으로 경사져 있으며, 이곳에서 해안산맥도 침수하여 남서 해안 앞바다에서 복잡한 군도로 솟아난다. 국토가 남북으로 길고 강들이 안데스 산맥에서 발원하여 중앙 저지와 해안산맥을 가로지르며 서쪽으로 흘러내려 강의 길이는 160~480km로 비교적 짧다. 중남부를 흐르는 비오비오 강은 해안산맥을 통과하는 유일한 주요 횡단 골짜기를 형성하므로 비중이 크다.
중부와 북부 대부분 지역에서는 기후가 온난하며, 부분적으로 지중해성기후를 보이기도 한다. 위도가 10°씩 높아지면서 평균온도가 약 4℃씩 떨어지지만, 평균강수량이 기후차를 보여주는 데 더 좋은 지표라 할 수 있다. 남위 30°의 북부 사막지역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다. 남위 30~40°인 중부의 평균강수량은 305~355㎜로, 대부분 5~8월의 겨울에 비가 내린다. 남부지역은 강수량이 많은 편이다. 위도 약 40°의 발디비아에는 2,300㎜ 이상, 파타고니아 서부에 있는 섬들에는 4,100㎜ 이상 내린다. 경작이 가능한 토지는 전국토의 7%를 약간 넘는데 대부분 남위 30~42°의 중부에 있다. 약 16%의 땅은 소와 양을 대규모로 방목할 수 있는 영구목초지이며 21%는 임야이다. 40°선에 걸쳐 있는 발디비아 군은 풍부한 우림지대로 국내 목재품의 대부분을 공급한다. 국토의 나머지 56%에는 사막과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고산지 등 황무지가 많다. 야생동물로는 알파카·비쿠나·라마·퓨마·게말사슴·안데스고양이 등이 있다.
국민
스페인의 식민지가 시작되기 전 칠레에 살았던 토착민으로는 디아기타·피쿤체·마푸체(아라우카니아)·우이이체·페운체·쿵코 등의 인디언 종족이 있었다. 16, 17세기에 스페인인들이 도착했으며, 18세기에 바스크인들이 들어왔다. 그후 강력한 문화적 통일을 배경으로 메스티소를 중심으로 한 비교적 동질적인 국민이 형성되었다. 비중이 큰 소수민족으로는 테무코 일대의 마푸체족이 있다. 지리적으로 칠레인의 90% 이상이 북부의 코피아포와 남부의 푸에르토몬트 사이와 살기에 어려운 산악지대를 피해 중간 저지에 거주한다. 인구는 보통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이민의 유입이 별로 없어 인구성장은 대부분 높은 출생률과 낮은 사망률과 같은 내부 요인에서 비롯된다. 영아사망률이 꾸준히 감소하고 있지만 여전히 높은 편이다. 전체인구의 약 1/3이 15세 이하로 비교적 젊은 층이 많고, 4/5 이상이 도시에서 생활한다. 거대도시인 산티아고는 규모에 있어서 다른 도시들을 압도한다.
경제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이 공존하는 혼합경제로서 서비스업·광산업·제조업 등에 주로 기반을 둔 자유시장경제가 부분적으로 발달했다. 국제 구리가격의 하락과 자유시장경제의 과감한 도입으로 인해 1980년대 국민총생산(GNP)이 감소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GNP가 인구보다 빠르게 성장했으며, 1인당 GNP는 라틴아메리카 평균수준을 웃돈다. GNP는 금융·보험·부동산·국가행정·국방·레스토랑·호텔 등이 전체의 1/3을, 광산업·제조업이 1/4 이상을, 도매업·소매업이 1/6을 차지한다. 좁은 경작지로 농업이 그다지 발달되지 않아 전체인구가 필요로 하는 식량을 공급하기에는 부족하다. 관개시설이 되어 있는 땅은 주로 북부의 반건조지역인 노르테치코 주에 몰려 있다. 경작되는 농작물은 곡물류로 밀이 주종을 이루며 옥수수·벼·귀리 등도 재배된다. 그밖에 사탕무, 포도주용 포도, 감자, 보리, 사과, 토마토, 말린 콩 등이 있다. 양·소·돼지의 목축도 한다. 방목되는 소의 1/5은 젖소이다. 산림에서 공업용 통나무가 생산되며, 풍부한 페루(훔볼트) 한류 때문에 긴 해안선을 따라 좋은 어장이 많다. 바다물고기가 주종을 이루는 어획고는 세계최고수준이며, 정어리류가 총어획량의 약 1/2을 차지한다.
칠레는 상당량의 석유, 천연 가스, 석탄, 철광석 등을 생산할 뿐 아니라 구리의 최다생산국(세계시장의 1/5)이자 몰리브덴(세계매장량의 1/5)과 요오드의 세계 최대생산국이다. 금·은·망간·아연·납·셀렌·석회암·천연질산염 및 수경성 석회 등도 채굴된다. 주요공산품으로 시멘트·셀룰로오스·어분·밀가루·조동(粗銅)·정동(精銅)·조강(粗鋼)·무쇠·원료당(原料糖)·신문용지·맥주·판유리·궐련 등이 생산된다. 면직물, 압축 파이버 패널, 형광막, 펜, 자전거, 조립 자동차, 트럭, 텔레비전 수상기, 라디오 수신기, 냉장고, 전기계량기, 축전지 등도 생산된다. 전기는 수력발전에 70%, 화력발전에 30%를 의존한다. 1973년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부를 전복한 군사혁명정부는 아옌데 정부가 국유화했던 산업체(광업부문 제외)를 대부분 민간업자에게 반환했다. 또한 대규모 농장들도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었으며, 자유시장경제를 재구축하고 외국인 투자를 장려하며 수입관세를 내렸다. 이러한 자유시장정책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던 경제가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주기적인 불경기, 실업증가, 외채부담 등으로 타격을 입고 있다.
철도는 90%를 국가가 소유하고 운영하며, 전체도로망의 15% 미만이 포장되어 있다. 내륙수로가 몇 개 있으며, 10개의 주요 태평양 항구가 있다. 아리카와 산티아고 부근에 2개의 국제공항이 있으며, 포장 활주로를 갖춘 국내선 비행장이 여러 개 있다.
수출품은 구리 원광과 정련된 구리가 주종을 차지한다. 정련된 구리는 전체수출의 2/5를 차지한다. 그밖에 공산품·과일·야채·종이·종이제품·화학제품·석유제품 등이 수출된다. 주요 수출대상국으로는 미국·일본·독일·브라질 등이다. 수출액이 수입액보다 약간 많아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주요수입품으로는 기계장비, 전기장비, 광물제품, 화학제품, 수송장비, 금속, 금속제품, 직물, 합성 플라스틱 고무 등이 있는데 주로 미국에서 수입하며, 그다음은 일본·브라질·독일의 순이다.
정치·사회
남아메리카의 한 공화국으로서 1970~80년대의 상당 기간 동안 국가원수인 대통령 임명권한을 가진 4명의 사령관으로 구성된 혁명정부가 통치했으며, 1990년부터 민선 대통령이 통치했다. 사법부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법관으로 이루어진 최고재판소를 정점으로 한다. 양원제인 의회는 4년 임기로 선출되는 120명의 하원과 47명의 상원으로 구성된다. 상원의원 47명 가운데 38명은 8년 임기로 선출되며, 5명은 대통령과 최고재판소에서 임명하고 나머지 4명은 육해공군 및 경찰군의 최고사령관이 차지한다. 1987년 군사정부는 여러 해 동안의 정치활동 금지조처를 해제하고 미리 짜여졌던 국민투표를 준비하면서 비좌익 정당의 창설을 허용했다. 이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대통령후보로 나선 혁명정부의 후보에 대한 찬반 투표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8년 10월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대다수 유권자들은 군부가 내세운 후보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리하여 1989년 12월 차기 대통령을 뽑기 위한 공개선거에서 야당의 파트리시오 아일윈이 당선되었다.
사회보장제도는 집권당에 의해 꾸준히 확대되었으며, 1981년에는 운영권이 민간인에게 이전되었다. 프로그램은 노인·산모·신체장애자·병자 등을 대상으로 한다. 정부는 1명당 지출되는 보건비를 높이고 있으며, 국민보건 서비스를 재조직해서 중앙조직에서 탈피하여 지방보건소를 늘리고 있다. 보건환경의 개선으로 평균수명이 남자 68세, 여자 75세로 늘어났다. 도시지역에는 주택난이 심각하여 거처할 곳을 찾지 못한 시골 이주자들은 종종 도시 가장자리의 카얌파라고 불리는 무허가촌으로 몰려든다.
칠레는 남아메리카에서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편이며, 성인문맹률은 5%로 매우 낮다. 초등교육은 6~13세의 아동에게 무상·의무로 실시된다. 대학이 여럿 있으며, 그 가운데 라틴아메리카에서 알려진 대학도 있다. 몇몇 출판물과 민간 라디오 방송에서 정부활동에 대해 비평할 수는 있었으나 칠레의 보도매체에 대한 군부의 감시와 규제는 엄격한 편이었다.
문화
예술 분야에서는 가브리엘라 미스트랄과 파블로 네루다와 같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 클라우디오 아라우 같은 음악가, 로베르토 마타 에차우렌 같은 화가들이 있다.
역사
스페인 식민시대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스페인사). 16세기 스페인인들이 발견했을 당시 아라우카니아 인디언은 주로 비오비오 강 남쪽에 살면서 다른 부족을 지배하던 유목민이었다(→ 아라우칸인). 스페인인들은 19세기 내내 아라우카니아 인디언과 싸웠으나 끝내 그들을 정복할 수 없었다. 스페인은 1536년 디에고 데 알마그로의 지휘 아래 세력을 뻗어가기 시작했으며, 1541년 페드로 데 발디비아가 산티아고를 세웠다. 대토지에 기반을 둔 농업이 주요경제활동이었고, 이로 인해 부유한 지주계급이 생겼다. 1808년 프랑스의 스페인 침공으로 인해 독립운동은 활기를 띠었다. 1810년 산티아고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1814년에 스페인이 통치권을 재천명했지만 애국 지도자 베르나르도 오이긴스가 아르헨티나로 피신했다가 호세 데 산 마르틴이 이끄는 군대와 함께 돌아와 1817년 차카부코에서 스페인군을 물리쳤다. 오이긴스는 국가원수로 선포되었으며, 이듬해 2월 12일 공식적으로 독립이 발표되었다. 1861년까지는 헌법으로 보장된 지주들의 과두정치가 행해졌고, 그후 정권은 자유당으로 넘어갔다. 로마 가톨릭의 권위가 축소되었으며, 유럽의 정치적·지적 흐름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879~83년에 있었던 볼리비아와 페루와의 전쟁으로 두 나라로부터 옛 영토를 되찾아 영토가 확장되었다.
19세기에 토지를 소유한 이전의 소수 독재자들이 국내 정치계에서 계속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20세기초,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도시중산계급이 출현했다. 그후 10년 동안 급진당·사회당·기독교민주당 등과 같은 새 정당이 창설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초 약간의 정치적 불안과 혼란이 있었지만 평화적인 정치발전이 계속되어 민주적 정권교체가 가능했다. 1938~52년에 급진당에 속한 대통령들이 줄곧 통치했으나, 1964년에는 중도파인 기독교민주당이 집권당이 되었다. 이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정치행정에 채용하는 개혁을 시도했다. 1969년 사회당과 공산당은 급진당과 기독교민주당에 소속된 몇몇 좌파들과 연합해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과반수를 득표했다. 그들의 후보였던 살바도르 아옌데가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아옌데는 미국 소유의 구리광산을 몰수하고 여러 가지 사회주의정책을 실시했다. 그후 2년도 안 되어 미국이 자본투자 거부를 주도하여 경제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많은 중산층 사람들이 아옌데 정부에 등을 돌렸으며,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육군사령관이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옌데 정부는 전복되고 군사혁명위원회가 들어섰다. 군사평의회의 수반인 피노체트는 엄격한 자유시장정책을 제도화했으며, 군부통치에 반대하는 국내 저항세력들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1980년 새 헌법이 승인되었고, 피노체트가 대통령으로 뽑혔다. 헌법에 명시된 대로 1988년 10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이 투표는 군사정부의 후보인 피노체트의 8년간 재임 추진을 위해 실시된 것이었지만, 대다수의 유권자들이 피노체트를 거부했다. 결국 피노체트는 물러났고, 1989년에 실시된 선거로 다시 민간정부가 들어섰다.
기독교민주당(Christian Democrts/PDC) 출신의 아일윈 대통령은 군부정권에 살해·실종된 정치범들에 대한 증거를 조사하기 위해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했다. 10개월 후인 1991년 2월 위원회는 1973~90년 군부독재 기간 동안의 인권 침해 사례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279명이 사망했고, 그중 1,068명이 고문·총살·처형당했다. 보고서는 1973~77년 군보안경찰인 디나(DINA)가 '체계적인 학살 정책'을 수행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보고서에는 가해자의 이름이 빠져있었으며, 아일윈 대통령은 희생자들 일부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겠지만 인권재판은 열지 않기로 한 결정을 재확인했다.
1993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PDC에 에두아르도 프레이가 당선되었다. 1980년 자신에 의해 제정된 신헌법에 힘입어 피노체트는 여전히 군총사령관의 자리에 남아 있으면서 상원의원 9명을 지명하는 권한을 유지함으로서 우익에 힘을 실었다. 프레이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인 1994년 2� 칠레 의회는 대통령 임기를 8년에서 6년으로 단축했다. 프레이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군부가 지명하는 상원 의석 8석을 폐지할 것을 국회에 제안했다. 또한 내각에 사회주의 계열 인사 4명을 임명하므로써 군부가 고위관직에 대한 사회주의 계열 인사 임명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金美仙 글
한국과의 관계
1962년 6월 12일 한국 정부와 국교를 수립했다. 한국은 1966년 1월 산티아고에, 칠레는 1969년 11월 서울에 각각 상주공관을 설치했고, 1966년 11월 주(駐)칠레 한국대사관이, 1969년 11월 주한 칠레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북한과는 1972년 6월 1일 수교했으나 그해 9월 19일 단교한 뒤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지지하고 있다. 1977년 12월 무역협정, 1978년 10월 항공협정, 1983년 12월 문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산티아고에는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지사 및 6개 해외상사의 지사가 설치되어 있다.
2003년 2월 15일 한국은 칠레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다. 2004년 4월 1일부터 발효된 이 협정으로 칠레는 우리나라의 첫 자유무역협정 국가가 되었다. 한국-칠레 FTA는 농업을 포함한 모든 산업뿐만 아니라 서비스·투자·무역규범·정부조달·지적재산권·동식물검역 조치까지 자유화 대상에 포함하는 포괄한다. 칠레와의 FTA는 우리나라 기업의 중남미지역 진출 교두보로서 가치가 높다.

 

칠레의 역사
1557년부터 18세기 말까지 페루 부왕령 (副王領)의 일부로 에스파냐 통치를 받았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불만과 독립의 욕구가 나폴레옹의 에스파냐 침입을 계기로 표면화되어 1810년 9월 18일 소집된 산티아고 시의회가 자치정부를 수립,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에스파냐는 페루 부왕에게 명령을 내려 칠레에 군대를 파견하였고, 칠레군은 호세 미겔 카레라·베르나르도 오하인스의 지휘 아래 격렬하게 맞섰지만 1814년 랑카과 싸움에서 패하였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로 달아난 오하인스가 1817년 이 나라의 호세 데 산 마르틴의 지원 아래 반격하여 차카부코와 마이포싸움에서 에스파냐군을 무찌르고 이듬해 2월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 초기 에는 정치 형태를 둘러싸고 지배계급 내부에서 대립이 있었지만 당시의 부통령 디에고 포르탈레스가 내전을 수습하고 신헌법을 공포하여 유럽형 입헌정치를 확립시켰다. 1830년대 북부의 페루·볼리비아  국경 사막지대에서 구리와 초석(硝石)이 개발되면서 칠레경제는 급속히 발전하였다. 1879년 초석개발과 관련, 볼리비아·페루를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1879∼1883)에서 승 리함으로써 초석산지인 안토파가스타와 볼리비아 일부를 획득하였으나 주요한 초석광산은 영 국 자본이 독점하였다. 이어 1886년에는 발마세타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광산의 국유화를 비롯한 자립경제 정책을 추구하였으나 영국 자본과 이해를 같이 하는 지배계급의 반대로 1891년 실각하였다. 제1차세계대전 후에는 동산업(銅産 業)을 중심으로 미국 자본이 진출한 데다 세계 공황에 기인한 사회불안을 배경으로 1937년 사회·공산·급진정당들의 지지를 받은 아기레 세르더의 인민전선(人民戰線)정부가 발족하였다. 그 다음에는 공산당의 지지를 받은 곤잘레스 비델라 정부가 출현하였으나 실제로는 공산당을 불법화하는 정책을 폈다. 이어 이바네스 정권(1952∼1958), 보수파의 알레산드리 정권(1958∼1964), 중도 좌파의 플레이 정권(1964∼1970)을 거쳐 1970년 9월 선거에서 공산당의 S. 아옌데가 당선, 세계 최초로 의회에 의한 사회주의정권을 탄생시켰으나 1973년 9월 우익 군사쿠데타로 붕괴되고 피노체트 대통령이 이끄는 군사평의회가 16년간 독재정치를 하였다. 1989년 12월 실시된 선거에서 17개 야당연합이 공동후보로 내세운 기독민주당 소속의 아일윈후보가 당선되어 16년 만에 군정이 종식되었다.
 

설명


남아메리카 남서부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칠레공화국(República de Chile). 면적 75만 6626㎢, 인구 1549만 8930명(2002). 동쪽은 안데스산맥의 능선, 서쪽은 태평양과 접한 남북 4200㎞, 동서 평균 180㎞의 좁고 긴 국토로 북쪽 사막에서 남쪽 빙하지대까지 다양한 기후 지역을 포함한다. 페루·볼리비아·아르헨티나 3국과 국경을 접하고, 거대한 석상(石像) 모아이로 알려진 이스터섬과 후안페르난데스제도(諸島) 등 남태평양 많은 섬들을 영유(領有)하고 있으며, 남극의 부분 영유를 주장하면서 군 관측기지를 두고 있다. 수도는 산티아고.

칠레의 자연
국토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안데스산맥과 해안산맥, 그리고 양 산맥 사이에 끼어 있는 고원과 평야로 되어 있다. 안데스산맥은 북부에서 산티아고에 이르는 부분이 해발고도 3000m 이상으로 높고 남쪽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진다. 해안산맥도 북부에서는 2000m가 넘지만 중앙부, 남부에서는 1000m로 낮아진다. 양대 산맥 사이에는 북부에 아타카마사막 등 고원이 자리잡고 있고 중부에 해발 500∼200m의 선상지 및 퇴적평원이 있으며 남부에는 랑코호·양키우에호 등의 호수가 많다. 푸에르토몬트 이남에서는 해안산맥과 함께 평지의 연장 부분이 바다에 잠겨 칠로에섬 등 많은 섬과 연결되어 있다. 이와 같이 지형적 차이가 크기 때문에 남북의 기후 차이도 현저하다. 대략 북부·중부·남부 3지역으로 나눌 때, 북부는 페루 국경에서 남위 30˚의 코킴보에 이르는 지역으로 아타카마사막·타라파카사막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세계에서 손꼽히는 건조지역이다. 코킴보에서 비오비오강(남위 37˚) 부근까지의 중부는 여름이 건조하고 겨울에 비가 많은 지중해성기후로서 칠레의 중요한 농업지대이다. 남부는 2000∼5000㎜의 다우지대이고 상록활엽수·침엽수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빼어난 삼림지대이다. 남부 중에서 푸에르토몬트 부근까지는 농업·목축이 성하지만 그 남쪽 파타고니아 지방은 세계적인 강설지역이며, 안데스산맥으로부터 내려온 산악 빙하가 해안까지 펼쳐진다. 또한 국토를 뒤덮고 있는 화산대와 지각구조 때문에 세계 지진 최다발국의 하나이며 오스르노화산을 비롯한 활화산이 많다.

칠레의 정치
국회는 양원제로 상원 48석, 하원 120석이다. 아일윈의 당선으로 피노체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나 1980년의 신헌법에 따라 1994년까지 총군사령관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피노체트는 군정 16년 동안 발생한 수많은 인권침해 등 부정에 대한 조사를 막기 위해 군인사와 예산에 정부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게 하고 현역군인에 대한 수사를 금지시키는 등의 예방조치를 강구해 놓았다. 이에 아일윈 대통령은 1991년 3월 피노체트 정권하의 인권침해 사례보고서를 발표, 군사정권의 부정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함께 군예산 삭감 등을 추진하였다. 1998년 3월 피노체트는 육군사령관을 퇴임, 헌법규정에 따라 종신 상원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런던 체재중에 군정하의 에스파냐계 시민학살이라는 <인도상의 범죄> 용의로, 에스파냐 판사 요청에 따라 체포·구속되었다. 1999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파 여당연합인 R. 라고스가 당선되었다. 라고스는 칠레의 당면 최대현안인 피노체트 처리문제에 봉착, 군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검찰로 하여금 기소하는데에는 성공했으나 2002년 7월 칠레대법원이 건강 등의 이유로 피노체트에 대해 기소중지르 결정함으로써 칠레판 <추악한 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총병력은 육군 4만 5000명, 해군 해군, 공군 1만 2500명(2002)이고 징병제이며 복무기간은 1년이다. 2002년 국방비 지출액은 11억 달러이다.

칠레의 경제·산업
칠레의 주요산업은 세계 제일의 동광업(銅鑛業)으로 1995년 기준 수출총액의 41.1%를 차지하여 국가경제의 기간이 되고 있다. 또한 구리 이외의 광업으로 철광석·초석·몰리브덴의 비중도 높다. 농업으로는 국토의 약 5%인 농경지에서 밀·귀리·보리·쌀 등이 재배되고 15% 가량을 차지하는 초지에서 소·양 등 목축이 이루어진다. 자연조건이 포도·사과·멜론·복숭아 등 다양한 과일재배를 가능하게 하고, 길게 뻗은 지형 탓으로 남부와 북부의 생장기가 교대로 반복되기 때문에 시장성은 아주 좋은 편이다. 특히 포도주는 주요한 수출품으로 세계적으로 그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목축은 식육용 소와 가금류의 비중이 높으며 남부지역에서 나는 양털은 일부 수출된다. 산림은 연료용 목재 남벌로 많이 훼손되었다. 몬더레이 소나무 조림지가 자재·펄프용 등 경제성있는 임산업의 원천이 되고 있으며 화학처리를 거친 펄프가 대표적인 임산가공품이다. 수산업은 상당히 발달한 편인데 어획량의 대부분이 고단백 가축사료인 어분(魚粉)으로 가공되고 있다. 주로 앤초비(멸치의 일종)어획에 의존하는 어분산업은 세계시황과 간헐적인 환경변화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제조업은 장기간에 걸친 공업화에 의해 대부분의 소비재와 중간재의 일부가 국산화되고 종이·펄프·농산가공품 등이 수출된다. 전기제품·자동차 등도 한때 활성화되었으나 자유화정책에 의한 수입품과의 경쟁으로 생산이 감소하였다. 외자정책에 관해서는 1974년 정령(政令) 600호(외자법)를 제정하고 1977년 다시 이를 완화, 투자자본 및 이윤의 해외 송출을 보장하고 있다.

칠레의 사회·문화
주민의 대부분은 백인이지만 그 중에는 남부의 아라우카노족을 비롯한 인디오와 백인의 혼혈도 포함되어 있다. 순수한 원주민은 2%에 지나지 않는다. 백인은 에스파냐계가 대부분이고 발디비아·오소루노를 비롯한 남부에는 독일계·이탈리아계·영국계도 많다. 도시화의 빠른 진전으로 도시인구의 비율이 85.8%를 넘어섰으며, 특히 수도 산티아고의 인구는 총 인구의 34%를 차지한다. 1970년대의 경제 위기로 약간 후퇴하였으나 사회보장제도도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고,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하며 지위도 높다. 이런 사회적 진보와 도시화는 공업의 발달뿐 아니라 충실한 교육제도의 영향이 크다. 6세부터 시작되는 의무교육은 8년이고 상급학교 진학률도 높다. 대학은 국립칠레대학·칠레가톨릭대학 등 17개교로, 한때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온 유학생도 많았다. 예술과 문화활동도 활발하여 시인 G. 미스트랄과 P. 네루다가 1945년과 1971년에 각각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고, 또 《밤이 음란한 새》로 알려진 초현실주의 소설가 J. 도노소, 피아니스트 C. 아라우 등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전통 음악은 기타 반주에 맞춰 남녀가 쌍쌍으로 춤을 추는 무곡(舞曲) 쿠에카(cueca)가 있다. 축구는 국민적인 스포츠이고, 농촌에서는 말을 탄 2사람의 목동이 소를 쫓는 우와소라는 로데오도 인기가 있다.

칠레와 한국과의 관계
1962년 6월 국교가 수립되고 1966년 상주 공관을 설치하였다. 1977년 12월 양국간 무역협정이, 1978년에는 항공협정이 체결되면서 경제적 교류가 활발해졌고,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지사 및 해외상사의 지사들이 설치되어 있다. 2002년 대한수입은 4억 5399만 달러, 대한수출은 7억 5393만 달러이다. 수산 및 어업 분야에서 한국 자본·기술참여의 전망이 높다. 2003년 교민수는 1762명, 체류자수는 108명이다. 북한과는 1972년 6월 수교하고 1978년 단교하였다가 1992년 12월 회복하여 현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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