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그곳에서 가슴이 먹먹하고 서글펐다.

鶴山 徐 仁 2007. 7. 30. 23:10

[오마이뉴스 조영님 기자]

▲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사용하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가 이곳에 있다.
ⓒ2007 조영님
첫 번째 답사 코스인 예원(豫園)에서 나온 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로 갔다. 10분이 걸리지 않아 도착하였다.

주소는 중국 상해 마당로(馬當路) 306농(弄) 4호이다. 대로에서 멀지 않은 일반 가정집이 즐비한 곳에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니 좌우에 건물이 들어서 있고 오른쪽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와 관련된 몇 개의 안내판이 보였다.

1층 매표소에서 15원에 표를 사고 들어가니 안내원이 먼저 비닐 덧신을 신으라고 전해 주었다. 아마도 청사 안의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인 듯하였다. 2층에 들어서자마자 오랜 세월에 누렇게 된 태극기와 김구, 이돈녕, 홍진 선생 등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이런 나 역시 한국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들 녀석이 컸을 때에도 저 태극기를 보고 가슴이 먹먹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스쳤다. 이곳에는 화장실, 부엌 등이 있고, 당시에 사용하였던 선풍기, 전화기 등과 같은 물품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3층에는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 두 분이 찍은 사진이 보이고, 김구 선생 집무실과 회의실, 당시의 문서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쓰신 '애기애타(愛己愛他)'와 석오 이돈녕 선생이 쓰신 '광명(光明)'이라는 글귀도 보였다. 다시 1층으로 와서 비디오 상영을 하였다.

저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고...

▲ 빛바랜 태극기를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이 사진밖에 찍을 수 없었다.
ⓒ2007 조영님
지금 본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사용하던 곳이다. 32년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하 사건이 있은 후 임시정부청사는 부득이 상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애초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실로 이렇게 협소한 곳이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청사였다고 하니 가슴이 짠하고 서글펐다. 머나먼 타국에서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숱한 고생을 하면서 오직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던 저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고, 내가 있고, 아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또 속에서 울분 같은 것이 끓어올랐다. 저분들이 그토록 외쳤던 것이 대한민국의 독립이었건만 지금 우리는 진정 독립을 한 상태인지? 우리 역사는 저분들과 그 후손들을 제대로 예우하고 있는 것인지? 여전히 친일파 후손들이 대를 이어 요직을 꿰차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였다.

몇 년 전 어느 대학의 교양강좌를 맡았을 때의 일이 생각 난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새내기 대학생들에게 정체성 확립과 자아탐구라는 주제에 부합되는 과제로 '나의 멘토' 즉 나의 스승, 내 인생의 길잡이에 대하여 기술해 보라는 과제를 내 준 적이 있었다.

나는 중학교 때인지, 고등학교 때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세계적인 위인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복사해서 작은 핸드북을 만들어서 한동안 책가방 속에 넣어 다닌 적이 있었다. 훌륭한 분들을 닮고 싶어했던 사춘기 시절의 일이었다. 물론 학교 숙제는 아니었다. 그때 제일 먼저 올라와 있던 인물이 '김구' 선생이었다.

이런 나의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학생들의 보고서를 받아보고 실망을 금치 못하였다. 학생들의 멘토에 김구 선생의 이름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었다. 그들의 멘토는 대개 서태지, HOT, 터보, 강동원 등의 연예인이 주를 이루었다. 물론 학생들의 사유와 문화를 인정하고 본받고 싶은 연예인이 많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긴 인생에 스승이요 길잡이 역할이 될 인물이 연예인에만 국한된다면 너무 서글픈 일이 아니지 않은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백범일지에서 발췌)

한국인들이 노신공원에 오는 이유는?

▲ 노신공원에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임을 알리는 석물이 있다.
ⓒ2007 조영님
자주독립을 그토록 소원하였던 김구 선생을 생각하면서 임시정부청사를 나와서 노신(루쉰)공원으로 향했다. 노신공원은 예전에 홍구공원이라 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하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윤 의사는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어 몰골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두들겨 맞고서 그 해 12월 총살형을 받고 순국하였으니 당시 나이 25세였다.

▲ 노신공원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인 매정이다.
ⓒ2007 조영님
노신공원에 들어가니 '매정(梅亭)'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표지판이 안 보이더라도 시끄럽게 떠들며 지나가는 한 떼의 한국 사람들을 보고 따라가면 그곳이 바로 매정이다. 한국인들이 노신공원에 오는 이유는 노신을 보러 오는 것이기보다는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입장료는 15원이다.

윤봉길 의거 현장임을 알리는 석물 앞에서 아들이 듣도록 큰 소리로 읽어 주었다. 다 읽고 아들을 돌아보니 내 뒤에 열 명이 넘는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손뼉을 치면서 수고했다고 하는데 좀 멋쩍었다.

기념관 안에는 윤봉길 의사의 흉상과 각종 사진, 문서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태 윤 의사가 던진 것이 도시락을 위장한 폭탄으로 알고 있었는데, 도시락에는 거사가 끝난 후에 자결하기 위한 폭탄이 들어 있었고, 실제 투하한 것은 물통으로 위장한 폭탄이었음을 여기 와서 알았다.

@IMG@앉은 자세로 두 팔이 묶이고 두 눈은 하얀 천으로 가린 채 이마에 총알 구멍이 커다랗게 난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서거 사진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누군가 "용서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래, 잊어서는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쉽게 잊어버리면 우리의 역사는 또다시 수렁에 빠지는 것이 된다. 그래서 잊지 않기 위해 역사 교육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너희들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육으로 성공하기를.

윤봉길 의사가 강보에 싸인 두 아들에게 보낸 유서를 떠올리며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가 내 아들의 멘토가 되어 넓고 깊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살기를 바라며 착잡한 마음으로 노신공원을 나왔다.

/조영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