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불고 있는 ‘평화 바람’의 발원지는 워싱턴이다. 부시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변신은 네오콘의 퇴장, 베를린 회동, 2·13 핵합의 등을 가져왔고,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던 미국과 북한은 귓속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한국도 바람의 영향권 내에 있다. 핵해결 기대감이 확산되면서 남북 정상회담 이야기가 피어나는가 하면, 보수야당이 화들짝 놀라고 있다. 이제 북한은 남한의 집권구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된 모양이다. 방코델타아시아(BDA) 구좌 건을 빌미로 북한이 4월 15일까지 취하도록 되어있는 ‘핵폐쇄’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만, 중요한 사안은 아니다. 북한이 어차피 조치를 취하게 되어 있는 구도에서 폐쇄 일자에 골몰하는 것은 숲을 외면한 채 한 그루의 나무만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강풍이 몰고 올 큰 그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핵게임의 MVP는 북한이다. 특유의 ‘정면돌파‘와 ’버티기‘로 결국 체면과 실리를 모두 챙기게 되었으니, 평양으로서는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할만하다. 반면 부시 대통령은 모습은 무척 초라하다. 중동사태에 �기는 중에 중간선거에서마저 대패한 그의 심정은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나, 어쨌든 부시 대통령은 'ABC(anything but Clinton),' 즉 클린턴 정부가 펼쳤던 대북정책은 모두 틀렸다고 외치면서 내걸었던 ‘3불(不) 원칙’을 스스로 포기했다. ‘직접 대화 불용’ 원칙을 포기하고 베를린에서 북한과 밀담을 나누었고, ‘나쁜 행동에 대한 보상 불가’ 원칙을 저버리면서 푸짐한 보상을 약속했으며,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해체) 이외의 타결 불용‘ 원칙을 포기하고 ’폐기‘아닌 ’폐쇄‘에 합의했다.
제3의 선택
이제 북한은 또 하나의 선택권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이 CVID를 주장하던 시절 북한이 가졌던 선택은 ‘핵을 고수하고 벌을 받는 것’과 ‘핵을 포기하고 상을 받는 것’ 뿐이었지만, 지금은 ‘어중간한 핵해결의 대가로 모든 상을 받을 수 있는’ 제3의 선택을 욕심낼 수 있게 되었다. 즉, 기존 핵무기와 플루토늄 그리고 HEU 프로그램을 지키는 상태에서 추가적인 핵생산을 포기한다는 약속만으로 많은 반대급부를 받아내는 것이다. 이제 북한의 김계관 부상은 부시 정부가 깔아주는 레드 카페트를 밟고 미국을 방문해서는 빨리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고 대적성국교역법 적용을 종료하라고 부시 대통령을 다그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핵합의를 무력화시키고 핵개발로 컴백할 수 있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 2·13 핵합의에는 ‘지뢰밭’들이 많다. 합의가 제대로 이행되기 위해서는 ‘불능화’의 구체적인 내용과 절차에 대한 후속합의가 이어져야 하며, 합의의 이행을 검증하기 위한 IAEA와 북한 간의 협상이 성사되어야 한다. 또 하나의 핵무기 제조경로인 농축에 대한 언급은 아예 생략되어 있으며,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 또는 플루토늄을 규명하는 문제도 빠져 있다. 북한이 2·13 합의를 깨고 싶다면 언제든 ‘지뢰밭’을 가동하면 된다. 북한은 지금까지도 BDA 구좌를 언제든 상대를 지치게 만들 수 있는 기만기(decoy)로 활용해왔다. 북한은 이를 이용하여 회담장을 박차고 나갈 수도 있었고 생색을 내면서 돌아올 수도 있었으며, 시간 벌기를 원할 때 이를 이용하여 회담을 중단시켰다. 북한이 만든 ‘가짜 관건’을 늘 ‘핵해결의 최대 관건’으로 보도해준 언론들도 북한 핵외교의 성공을 도운 조력자들이었다.
대남정책에서의 자신감
평양은 대남정책에서도 자신감을 느낄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평화 바람’은 당연히 긍정적인 변화이지만, 문제는 북한이 악용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평화 바람’은 대북지원 재개를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만들고 있으며, 아직 핵이 폐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북지원에 신중론을 주문하면 ‘수구냉전 세력’으로 내몰리기 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북핵의 장래는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불투명성을 강조하면 ‘전쟁세력’으로 내몰리기 쉽다. 한국은 대북지원 재개를 위한 수순들을 밟아가고 있으며, 북한에게 있어 매년 수십만 톤 씩 쌀과 비료는 결코 적지 않은 실리이다. 갈팡질팡하는 야당을 내려다보면서 남한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생각도 하고 있을 것이다. 남한이 제공하겠다는 경제지원은 수락하기만 하면 되고, 남북정상회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를 원하는 정치세력이 있어 도움을 요청한다면 심사하면 된다. 평양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게다가 북미 대화는 남한사회를 분열시키는 특효약으로 활용할 수 있다. 당장 한국의 우파들이 동요하고 있다. 북미대화는 한국 국민으로 하여금 전쟁도 없고 주한미군도 필요없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으로 믿게 만드는데 효력이 크다. 지금까지 이런 가능성을 경계해온 한국의 우파세력들에겐 시련이 아닐 수 없다. 이들에게 있어 부시 대통령의 급선회는 그 자체가 ‘반란’이었다. 지금까지 반미운동의 토양이 되어왔던 ‘개혁세력’이 미국의 대북접근 정책에 찬사를 보내는 중에 한미동맹을 수호하기 위해 애써온 ‘보수세력’이 미국을 비난하는 역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역반미감정 현상’이다. 이런 현상들은 북한에게 있어 즐기거나 악용할 수 있는 자산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을 우려해 왔지만, 이제는 남한을 요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네 개의 시나리오
이론상 북한 앞에 놓인 시나리오는 네 가지이다. 첫째, 북한이 당장 핵포기를 거부하고 핵개발 복귀함으로써 국제제재가 재개되는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는 어려움이 없다. 지뢰밭 중 하나를 가동하면 된다. 둘째, 북한이 완전한 핵포기를 받아들이면서 많은 반대급부를 챙기는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북한은 핵폐기 과정을 엿가락처럼 늘려갈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시나리오의 가능성은 높지 않다. 북한은 ‘평화 바람’이 몰고 오는 ‘양호한 여건’들을 저버리면서까지 당장 핵개발로 복귀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반세가가 넘는 세월동안 강한 집념을 가지고 추구해온 ‘핵억제력’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때문에 ‘어중간한 핵해결만 허락하면서 최대한의 반대급부를 받아내는’ 세 번째 시나리오가 더욱 유력하다. 이 경우 북한은 대체로 2·13 핵합의를 준수하는 행동들을 취할 것이며, 추가적인 플루토늄이나 핵무기를 생산하는 일도 중단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핵폐쇄 조치를 며칠 더 일찍 또는 늦게 취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다. 어쨌든 북한은 ‘성의’를 보이면서 동시에 활발하게 대미접촉을 전개하면서 테러지원국 해제, 대적성국 교역법 적용 종료, 한반도 평화협정 등을 요구할 것이다. 기존 핵무기와 플루토늄, HEU 등에 대해서는 차일피일 미루거나 “핵무기 폐기를 원한다면 핵국 대 핵국의 입장에서 별도의 핵군축 회담을 열어야 한다” 등의 주장으로 맞서나갈 것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 모두는 항구적인 핵해결이 되지 않는다. 얼핏 두 번째 시나리오가 정답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북한이 완전히 핵을 포기하는 경우 주어질 반대급부는 당연이 ‘체제 및 정권에 대한 보장’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령독재 체제는 더욱 공고해지며, 즉결 처형, 탈북자, 정치범 수용소 등 인권부재의 모순들은 지속될 것이다. 이는 북한 주민은 삶의 질을 개선하기는커녕 그들을 더욱 확실하게 암흑의 체제에 가두는 일이다. 인권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비가 재개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며, 북한은 또 다시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수단을 필요로 할 것이다. 북한은 또 다시 핵개발을 재개할 수도 있고, 화학무기나 생물무기를 다음의 카드로 활용할 수도 있다. 정답은 ‘핵포기와 함께 개혁개방 및 체제개선 수용’이라는 네 번째 시나리오에 있다. 북한이 민주화되고 주민의 삶의 질이 개선된다면, 그런 체제는 국제사회와 마찰을 빚을 이유가 없으며,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핵무기를 가질 필요도 없다. 이것이 항구적으로 핵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최대의 장애물은 체제수호에 목숨을 걸고 있는 북한의 지배층이다. 그들에게는 개혁·개방과 체제개선은 동독식 소멸이나 차우세스쿠식 죽음을 의미할 수 있다. ‘선군정치’나 ‘고난의 대행진’은 그 자체가 개혁·개방을 거부하고 체제를 부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렇듯 북한문제의 해결은 네 번째 시나리오에 있지만, 현실적으로 북한이 수용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도 ‘평화 바람’이 몰아치는 시기에 이 논리가 화두로 등장하기는 어렵다. “겨우 북한을 달래 핵해결의 길로 들어서려는데 왜 체제개선을 강요하여 판을 깨느냐”라는 핀잔을 듣기 쉽다.
3대 과제
이 상황에서 한국 앞에는 3대 과제가 놓여 있다. 첫째, 미국이 북한과 나눈 귓속말에 대해 미국에게 질문해야 한다. “북한이 추가적인 핵개발과 핵무기 확산을 하지 않겠다고 합의하면 보유중인 핵무기와 플루토늄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치겠다고 약속해 주었는가?” “미북 평화협상의 조기개최를 약속해 주었는가?” 미국이 실제로 기존핵을 불문에 부치겠다고 약속해주었다면 이는 미국의 정책이 ‘핵제거’에서 ‘’핵관리‘로 바뀐다는 의미이다. 바다로 이격된 미국이나 일본의 안보에는 문제가 없지만 협소한 공간을 북한과 공유하는 한국에게는 치명적인 안보문제가 남는다. 이와 동시에 한국도 미국이 동맹으로부터의 피로감이나 탈한(脫韓) 심리로 인해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서두른 측면이 없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둘째, 한국과 국제사회는 일단 북한을 네 번째 시나리오로 가도록 하는데 총력을 경주해야 한다. 북한은 당연히 세 번째 시나리오를 선호할 것이나, 어떻게든 비핵화와 함께 개혁·개방을 수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최대의 걸림돌은 체제를 잃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북한의 지배층일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적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쪽의 욕심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때문에 네 번째 시나리오를 변형한 다섯 번째의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만큼 당근과 채찍을 사용해야 한다. 대북지원이 필요하다면 제공해야 하지만, 투명하고 당당한 지원이어야 한다. ‘하사형’ 지원도 곤란하지만 ‘조공형’ 지원은 더욱 곤란하다. 줄 것을 주도 받을 것을 받는 당당한 ‘거래형’ 지원이어야 한다. 분배의 투명성이 보장되어 직접 북한 주민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지원 그리고 북한의 선행에 연계되는 지원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끌어내는데 도움이 되지만, ‘불투명한 조공형 지원’은 북한당국을 오만하게 만들고 북한 주민을 더욱 공고한 체제 속에 가두는 것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 북한이 성공적으로 세 번째 시나리오를 밟아나갈 때 한국사회는 최악의 위기를 맞이할 수 있으므로 이를 유념하고 극복해야 한다. 북한이 이 시나리오를 선호할 것으로 예상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추가적인 핵활동 중단만을 약속했는데도 ‘성공’에 목말라하는 부시 대통령이 보상을 약속하면서 매달리고 있지 않는가. 한국도 핵실험으로 미루었던 대북지원을 재개하겠다고 나서고 있지 않는가. 핵무기를 포기한 것도 아닌데도 ‘평화 강풍’이 남한을 강타하고 있지 않는가. 이 강풍 앞에 경제력 30배의 남한이 보혁으로 쪼개지고 있지 않는가. 북한이 이토록 유리한 여건들을 외면할 것 같지는 않다. 북한이 악용하기에 따라서는 이때가 한국에게는 가장 힘든 시기가 될 수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불순한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북한은 과거 대남 적화전략을 추구함에 있어 ‘북한 스스로의 혁명역량,’ ‘국제적 혁명역량,’ ‘남한내 혁명역량’ 등 3대 혁명역량을 강조했었다. 경제실패로 인해 북한 스스로의 역량은 현저하게 감소했지만, 북한을 봉쇄하는데 앞장섰던 미국이 ‘한국전쟁 종전 선언 용의’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 용의’ 등을 밝히면서 다가오는 것은 국제역량의 증가를 의미할 수 있다. 남한내 친북 NGO의 영향력 증가, 보혁 분열, 한국 국민의 안보의식 희석, 반미정서의 확산, 한미동맹의 약화,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감, 미국의 대북정책 선회에 대한 남한 우파의 혼란 등은 남한내 혁명역량 증대를 의미할 수 있다. 정치상황도 그렇다. 정치세력들 간의 대선경쟁은 자체적으로는 합법적이고 정당한 것이지만, 북한이 활용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북한의 전략가들은 경선 승리를 놓고 내분을 빚고 있는 야권, 당장 유력한 대선후보는 없지만 분진합격(分進合擊)을 벼르는 여권, ‘좌우 대결’ 그림을 피하기 위해 기회주의적 우파인사들을 내세우려 할 만큼 한 수 위의 역량을 보이는 진보세력 등을 지켜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지도 모른다. ‘평화 바람’을 최대한 활용하려 할지도 모른다. 이럴 때 한국사회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면 우월한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국가정체성을 상실한 채 북한이 각색한 수순에 끌려 다니면서 분열과 자멸의 길로 들어설지도 모른다. 이런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중심을 지켜야 할 때
한국인들은 2·13 핵합의와 함께 불기 시작한 ‘평화 바람’이 ‘훈풍’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바람을 타고 전달되는 북한의 의도가 순수하고 바람직한 것이기를 바란다. 미북 대화가 수교와 함께 북한의 개혁·개방과 국제사회 동참을 끌어내고 항구적인 평화를 촉진하는 것이 되기를 기대한다. 정상회담이 개최되는 경우에도 그렇다.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북한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정상회담, 핵을 폐기하고 군사긴장을 완화하는 정상회담, 그리고 국군포로와 납북자를 석방하는 정상회담이 되기를 바란다. 한국은 더 큰 정성으로 화답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북한이 스스로는 변화하지 않으면서 한미동맹의 와해만을 기도한다면, 또는 남한을 분열시키거나 남한의 정치에 개입하려고 시도한다면, 그러한 미북 대화나 정상회담은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축배를 들 시간이 아니다. 초기이행조치를 놓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할 때도 아니다. 지금은 중심을 지키면서 ‘평화 바람’이 가져다 줄 큰 그림을 내다봐야 한다. 기회가 오면 포착해야 하며, 위기가 온다면 극복해야 한다. 아직은 냉정하게 북한의 진의를 확인해야 하며,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가 돌이킬 수 없는 대세인지도 좀 더 두고 보아야 한다. 북핵 문제는 지난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많은 기복을 보여 왔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반복될 수 있다. 이러한 때에 우파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며, 우파들을 향해 ‘과거 잘못’을 사과하라고 욱박지르는 좌파의 모습은 경박스러운 일이다. 한국사회가 닻줄이 끊긴 배처럼 중심 없이 흔들린다면, 북한은 더욱 세 번째 시나리오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김태우 핵전문가/뉴라이트정책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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