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法家의 나라”
<반론>“조선은 어디까지나 法사상 가미된 유교 이념의 국가”
입력 : 2007.04.1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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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Hobsbawm)은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과거 역사의 기억들 중 상당수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역사가 현재의 잣대에 의해 자의적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사 역시 여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일까? 최근 역사학자와 정치학자가 ‘통일신라’와 ‘조선왕조’에 대해 내놓은 새로운 해석은 서로 다른 접근 방법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통념(通念)을 깨는 도발적인 주장으로서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아직 ‘정설’과는 거리가 있다.
- 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 조선 왕조가 유교(儒敎)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국가였다는 것은 별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박종성(朴鍾晟)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는 9일 출간된 저서 ‘조선은 법가의 나라였는가’(인간사랑)에서 이런 통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조선은 유교적 덕치(德治)가 아니라 잔혹한 형벌(刑罰)에 의해 유지됐던 법가(法家)의 나라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만약 덕치에 의해 다스려졌던 나라였다면 ‘태평성대’로 알려진 시대에 형벌이 적었고 ‘난세’에는 늘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면밀한 통계를 내 본 결과는 정반대였다.
‘형벌’이 가장 많이 언급된 횟수는 중종(674회), 세종(544회), 고종(518회) 순이었다. 모두 개혁을 추진한 군주들이었던 반면, 형벌 언급 횟수가 줄어든 때는 인조·현종·경종·순조처럼 ‘보다 평범한’ 군주들의 시대였다. 박 교수는 “정치적 단호함이 두드러지는 개혁 군주의 시기에 형벌 논의가 폭증하고, 반대로 실덕과 패륜의 이미지가 높아질 때 형벌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고 설명했다.
법으로 정해진 오형(五刑:笞·杖·徒·流·死)이 아니라 주뢰(周牢)·압슬(壓膝)·난장(亂杖)·자자(刺字)와 같은 법외형(法外刑)이 두드러지게 집행됐던 시기를 조사해 보니 역시 개혁 군주에 해당하는 광해군(293회), 세종(284회), 영조(158회) 순이었다. 박 교수는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 때조차 형벌에서의 휴머니즘은 전혀 도모되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때문에 “조선왕조에서 군주의 인의(仁義)와 백성의 충효(忠孝)가 자동으로 작동했다는 인식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박 교수는 지적했다. 실제로 왕조를 유지했던 것은 덕치와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유교 이데올로기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죄와 벌’의 통치공학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학계는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해석이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반응이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세종·성종·영조 등의 시기에 법전 편찬이 추진됐기 때문에 형벌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며 “조선은 어디까지나 법 사상이 가미된 유교 이념의 국가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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