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삼국유사 - 3

鶴山 徐 仁 2007. 3. 24. 16:24

 고구려(高句麗)

 고구려(高句麗)는 곧 졸본부여(卒本扶餘)다. 혹은 말하기를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주(成州)라고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卒本州)는 요동(遼東)의 경계에 있었다.

<국사(國史)> 고려본기(高麗本紀)에 이렇게 말했다. "시조(始祖)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성(姓)은 고씨(高氏)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이보다 앞서 북부여(北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이미 동부여(東扶餘)로 피해 가고, 부루가 죽자 금와(金蛙)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금와는 태백산(太伯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여자 하나를 만나서 물으니 그 여자는 말하기를, '나는 하백(河伯)의 딸로서 이름을 유화(柳化)라고 합니다. 여러 동생들과 함께 물밖으로 나와서 노는데, 남자 하나가 오더니 자기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하면서 나를 웅신산(熊神山) 밑 압록강(鴨綠江) 가의 집 속에 유인하여 남몰래 정을 통하고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어서, 드디어 이곳으로 귀양보냈습니다'" 했다. (<단군기檀君記>에는 "단군檀君이 서하西河의 하백河伯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아서 부루夫婁라고 이름했다"고 했다. 지금 이 기록을 상고해 보면 해모수解慕漱가 하백河伯의 딸과 사사로이 통해서 주몽朱蒙을 낳았다고 했다. <단군기檀君記>에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夫婁라고 했다" 했으니 그렇다면, 부루夫婁와 주몽朱蒙은 배다른 형제일 것이다)

금와(金蛙)가 이상히 여겨 그녀를 방 속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방 속으로 비쳐 오는데,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빛은 다시 쫓아와서 비쳤다. 이로 해서 태기가 있어 알[卵] 하나를 낳으니, 크기가 닷 되[五升]들이 만했다. 왕은 그것을 버려서 개와 돼지에게 주게 했으나 모두 먹지 않는다. 다시 길에 내다 버렸더니 소와 말이 그 알을 피해서 가고 들에 내다 버리니 새와 짐승들이 알을 덮어 주었다. 왕이 이것을 쪼개 보려고 했으나 아무리 해도 쪼개지지 않아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어머니가 이 알을 천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놓아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영특하고 기이했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기골이 뛰어나서 범인과 달랐다.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 번 쏘면 백 번 다 맞히었다. 나라 풍속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고 하므로 그 아이를 주몽이라 이름했다.

금왕에게는 아들 일곱이 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으니 재주가 주몽을 따르지 못했다. 장자(長子)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만일 일찍 없애지 않는다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주몽을 시켜 말을 기르게 하니 주몽은 좋은 말을 알아보아 적게 먹여서 여위게 기르고, 둔한 말을 잘 먹여서 살찌게 했다. 이에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왕의 여러 아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장차 죽일 계획을 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이 기미를 알고 말했다. '지금 나라 안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고 하는데, 네 재주와 지략(智略)을 가지고 어디를 가면 못 살겠느냐.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해라.'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엄수(淹水)에 이르러 물을 보고 말했다.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손자이다. 오늘 도망해 가는데 뒤쫓는 자들이 거의 따라오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말을 마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어 건너게 하고, 모두 건너자 이내 풀어 버려 뒤쫓아오던 기병(騎兵)은 건너지 못했다. 이에 주몽은 졸본주(현토군玄토郡과의 경계)에 이르러 도읍을 정했다. 그러나 미처 궁실(宮室)을 세울 겨를이 없어서 비류수(沸流水)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고(高)로 씨(氏)를 삼았다(본성本姓은 해解였다. 그러나 지금 천제天帝의 아들을 햇빛을 받아 낳았다 하여 스스로 고高로 씨氏를 삼은 것이다). 이때의 나이 12세로서,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갑신(甲申)에 즉위하여 왕이라 일컬었다. 고구려(高句麗)가 제일 융성하던 때는 21만 508호나 되었다."

주림전(珠琳傳) 제21권에 이렇게 실려 있다. "옛날 영품리왕(寧稟離王)의 시비(侍婢)가 임신했는데, 상(相) 보는 자가 점을 쳐 말하기를, '귀하게 되어 왕이 될 것입니다'고 하자 왕은 '내 아들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했다. 시비(侍婢)가 말하기를 '무슨 이상한 기운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더니 임신한 것입니다'했다. 드디어 아이를 낳자 왕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돼지우리에 내다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보호해 주고, 마구간에 내다 버리니 말이 젖을 먹여서 죽지 않게 해 주었다. 이 아이가 자라서 마침내 부여(扶餘)의 왕이 되었다."(이것은 동명제東明帝가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왕이 된 것을 말한 것이다. 이 졸본부여卒本扶餘는 역시 북부여北扶餘의 딴 도읍이다. 때문에 부여왕扶餘王이라 이른 것이다. 영품리寧稟離는 부루왕夫婁王의 다른 칭호이다)


변한(卞韓)과 백제(百濟; 또는 南扶餘라고도 하는데 곧 泗차(비)城이다)

신라(新羅)의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가 즉위한 19년 임오(壬午; 前 39)에 변한(卞韓) 사람이 나라를 가지고 항복해 왔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는 모두 "변한(卞韓)의 후손들이 낙랑(樂浪) 땅에 있었다"했고, <후한서(後漢書)>에는, "변한(卞韓)은 남쪽에 있고,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고,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다"고 했다.

최치원(崔致遠)은 "변한은 바로 백제(百濟)"라고 했다.

본기(本紀)를 상고해 본다면, 온조왕(溫祚王)이 일어나서 나라를 세운 것은 홍가(鴻嘉) 4년 갑진(甲辰; 前 17)의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혁거세(赫居世)나 동명왕(東明王) 시대보다 40여 년이나 뒷 일이 된다. 그런데 <당서(唐書)>에, 변한(卞韓)의 후손들이 낙랑(樂浪) 땅에 살았다고 한 것은 온조왕(溫祚王)의 계통이 동명왕(東明王)에게서 나온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혹시 어떤 사람이 낙랑에서 나서 변한(卞韓)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 등과 대치한 일이 온조왕 이전에 있었던 모양이며, 그 도읍한 곳이 낙랑 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구룡산(九龍山)을 잘못 알고 역시 변나산(卞那山)이라고 불렀던 까닭에 고구려(高句麗)를 가지고 변한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대개 잘못일 것이다. 마땅히 옛날 현인(賢人)의 말을 좇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백제 땅에도 변산(卞山)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 하는 것이다. 백제가 전성(全盛)했을 때는 호수가 15만 2,300이나 되었다.

진한(辰韓; 진한秦韓이라고도 했다)

<후한서(後漢書)>에 이렇게 말했다. "진한(辰韓)의 늙은이가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한국(韓國)에 오자 마한(馬韓)이 동쪽 경계의 땅을 베어 주었다. 그리고 서로 부르기를 도(徒)라고 하여, 마치 진(秦)나라 말에 가까웠다. 그런 때문에 혹은 이곳을 진한(秦韓)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12개의 조그마한 나라들이 있어 각각 1만호(萬戶)나 되는데 저마다 나라라고 일컬었다."

또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했다. "진한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이 피난해 와 있던 곳이다. 그런 때문에 탁수(탁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읍(邑)과 마을을 사탁(沙탁)·점탁(漸탁)이라고 불렀다."(신라新羅 사람의 방언方言에 탁탁의 음音을 도道라고 했다. 때문에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 하는데, 양梁을 도道라고도 읽는다)

신라(新羅) 전성기(全盛期)에는 서울에 17만 8,936호(戶), 1,369방(坊), 55리(里), 35개의 금입택(金入宅; 부윤富潤한 큰집을 말함)이 있었다. 이것은 남택(南宅)·북택(北宅)·우비소택(우比所宅)·본피택(本彼宅)·양택(梁宅)·지상택(池上宅; 본피부本彼部)·재매정택(財買井宅; 유신공庾信公의 조종祖宗)·북유택(北維宅)·남유택(南維宅; 반향사하방反香寺下坊)·대택(隊宅)·빈지택(賓支宅; 반향사反香寺 북쪽)·장사택(長沙宅)·상앵택(上櫻宅)·하앵택(下櫻宅)·수망택(水望宅)·천택(泉宅)·양상택(楊上宅; 양부梁部 남쪽)·한기택(漢岐宅; 법류사法流寺 남쪽)·비혈택(鼻穴宅; 위와 같음)·판적택(板積宅; 분황사상방芬皇寺上坊)·별교택(別敎宅; 내의 북쪽)·아남택(衙南宅)·금양종택(金梁宗宅; 양관사梁官寺 남쪽)·곡수택(曲水宅; 내의 북쪽)·유야택(柳也宅)·사하택(寺下宅)·사량택(沙梁宅)·정상택(井上宅)·이남택(里南宅; 우소택우所宅)·사내곡택(思內曲宅)·지택(池宅)·사상택(寺上宅; 대숙택大宿宅)·임상택(林上宅; 청룡사靑龍寺의 동쪽으로 못이 있음)·교남택(橋南宅)·항질택(巷叱宅; 본피부本彼部)·누상택(樓上宅)·이상택(里上宅)·명남택(椧南宅)·정하택(井下宅)이 있었다.


우사절유택(又四節遊宅)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에서 놀았다.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성 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집의 처마와 담이 이웃집과 서로 연해 있었다. 또 노랫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村)이 있었다. 1은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村長)은 알평(謁平)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암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노례왕弩禮王 9년에 부部를 두어 급량부及梁部라고 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의 동촌東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2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니, 촌장(村長)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양梁은 도道라고 읽고 혹 탁탁으로도 쓴다. 그러나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여 구량벌(仇梁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태조高麗太祖 때에 설치한 것이다. 아래도 이와 같다).

3은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다. 촌장(村長)은 구(俱; 구仇라고도 씀)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혹은 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한다. 여기에는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소속된다.

4는 취산(자山) 진지촌(珍支村; 빈지賓之·빙지빙之라고도 한다)이다. 촌장(村長)은 지백호(智伯虎)로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 최씨(本彼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柴杷)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지금은 황룡사(黃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5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율사栢栗寺 북쪽 산)이다. 촌장(村長)은 지타(祗타; 혹은 지타只他)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는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미村)·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위의 글을 상고해 보건대, 이 여섯 부(部)의 조상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윤리왕倫理王) 9년(32)에야 비로소 여섯 부(部)의 명칭을 고치고, 또 그들에게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中興部)를 어머니로 삼고, 장복부(長福部)를 아버지, 임천부(臨川部)를 아들, 가덕군(加德郡)을 딸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 前 69, 고본古本에는 건호建虎 원년元年이라 했고,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3월 초하루에 상부(上部)의 조상들은 저마다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방자하여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을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에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치고 있다. 그리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굻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조사해 보았더니 거기에는 자줏빛 알 한 개(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함)가 있다. 그러나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를 얻으니, 그는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췄다.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이에 그 아이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이름하고(이 혁거세赫居世는 필경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해설하는 자는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을 때의 일이다. 그런 때문에 중국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한 말에, 어진 이를 낳아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 까닭이다"한다. 또 계룡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어찌 서술성모西述聖母의 현신現身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위호(位號)를 거슬감(居瑟邯)이라고 했다(혹은 거居西干이라고도 하니 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스스로 말하기를, "알영거서간閼英居西干이 한번 일어났다"한 그 말로 인해서 일컬은 것이다. 이 뒤부터 모든 왕자王者의 존칭이 거서간居西干으로 되었다).

이에 당시 사람들은 다투어 치하하기를, "이제 천자(天子)가 이미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 있는 왕후(王后)를 찾아 배필을 삼아야 합니다"했다.

이날 사량리(沙梁里)에 있는 알영정(閼英井;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 함) 가에 계룡(鷄龍)이 나타나서 왼쪽 갈비에서 어린 계집애를 낳았다(혹은 용龍이 나타났다가 죽었는데 그 배를 가르고 계집애를 얻었다고 했다). 얼굴과 모습이 매우 고왔으나 입술이 마치 닭의 입부리와 같았다. 이에 월성(月城)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다. 이 일 대문에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고 한다.

남산(南山)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궁실(宮室)을 세우고 이들 두 성스러운 어린이를 모셔다가 길렀다. 남자아이는 알에서 낳았고, 그 알의 모양이 박[匏]과 같았는데, 향인(鄕人)들은 박을 '박(朴)'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성(姓)을 박(朴)이라고 했다. 또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삼았다. 두 성인(聖人)은 13세가 되자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 전 57)에, 남자는 왕이 되어 이내 그 여자로 왕후(王后)를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지금 풍속에 경京을 서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이라 하고, 혹은 사라(斯羅)·사로(斯盧)라고도 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혹 나라 이름을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계룡(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일설(一說)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는데 닭이 숲속에서 울었다 해서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이라 했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는 국호로 정했던 것이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던 어느 날 왕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뒤에 그 죽은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러더니 왕후(王后)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한다. 나라 사람들은 이들을 합해서 장사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나타나더니 쫓아다니면서 이를 방해하므로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내어 오릉(五陵)을 만들고, 또한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했다. 담엄사(曇嚴寺) 북릉(北陵)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太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했다.

제2대 남해왕(南解王)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존장(尊長)에 대한 칭호인데 오직 남해왕(南解王)만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赫居世)요,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며, 비(妃)는 운제부인(雲帝夫人; 운제雲梯라고도 한다. 지금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는데 가뭄 때 여기에 기도를 드리면 감응感應이 있다)이다. 전한(前漢)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甲子; 4)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인 지황(地皇) 4년 갑신(甲申; 24)에 죽었다. 이 왕이 삼황(三皇)의 첫째라 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상고해 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진한(辰韓)의 말로 왕이란 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귀인(貴人)을 부르는 칭호라고 하며, 차차웅(次次雄)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김대문(金大問)은 말하기를, "차차웅(次次雄)이란 무당을 이르는 방언(方言)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드디어 존장(尊長)되는 이를 자충(慈充)이라 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사금(尼師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잇금[齒理]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했다.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죽자 그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 했다. 이에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한다"하고 떡을 입으로 물어 시험해 보았다.



고전(古典)에는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했다. 이것을 김대문(金大問)은 해석하기를, "마립간(麻立干)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方言)이다. 서열(序列)은 위(位)를 따라 정하기 때문에 임금의 서열은 주(主)가 되고 신하의 서열은 아래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왕(新羅王)으로서 거서간(居西干)과 차차웅(次次雄)이란 이름을 쓴 이가 각기 하나요, 이사금(尼師金)이라고 한 이가 열 여섯이며,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이가 넷이다. 신라 말기의 명유(名儒) 최치원(崔致遠)이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지을 적에는 모두 모왕(某王)이라고만 하고 거서간(居西干) 등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혹시 그 말이 야비해서 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인가.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하는 데 방언(方言)을 모두 그대로 두는 것도 또한 마땅한 일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들을 갈문왕(葛文王)이라고 불렀는데, 이 일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南解王) 때에 낙랑국(樂浪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또 천봉(天鳳) 5년 무인(戊寅; 18)에 고구려(高句麗)의 속국인 일곱 나라가 와서 항복했다.

제3대 노례왕(弩禮王)

박노례이질금(朴弩禮尼叱今; 유례왕儒禮王이라고도 함)이 처음에 매부(妹夫)인 탈해(脫解)에게 왕위(王位)를 물려 주자 탈해는 말했다. "대개 덕이 있는 사람은 이[齒]가 많은 법이오. 그러니 잇금을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 이리하여 떡을 물어 시험해 보니 왕의 이가 많았기 때문에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런 일로 인하여 왕은 잇금[尼叱今]이라고 한 것이다. 이질금(尼叱今)이란 칭호는 이 왕 때부터 시작했다.

유성공(劉聖公) 갱시(更始) 원년(元年) 계미(癸未; 23)에 즉위하여(연표年表에는 갑신甲申년에 즉위했다고 함) 육부(六部)의 이름을 고쳐서 정하고 여섯 성(姓)을 하사했다.
이 때 비로소 도솔가(兜率歌)를 지었으니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 또 비로소 보습과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건호(建虎) 18년(42)에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 해에 고구려(高句麗) 군사가 침범해 왔다.


제4대 탈해왕(脫解王)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니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함)은 남해왕(南解王) 때(고본古本에는 임인壬寅년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가까운 일이라면 노례왕弩禮王의 즉위 초년보다 뒤의 일일 것이니 양위讓位를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또 먼저의 일이라면 혁거세왕赫居世王 때의 일일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은 임인壬寅년이 아닌 것임을 알겠다)에 가락국(駕洛國) 바다 가운데에 배 한 척이 와서 닿았다. 이것을 보고 그 나라 수로왕(首露王)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법석이면서 그들을 맞아 머물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배는 나는 듯이 계림(鷄林)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의 아진포(阿珍浦)로 달아났다(지금도 상서지촌上西知村·하서지촌下西知村의 이름이 있다). 이때 마침 포구에 한 늙은 할멈이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고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赫居世王)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그는 이 배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에는 본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까치들이 모여들어서 우는가."
배를 끌어당겨 찾아 보니 까치들이 배 위에 모여들었다. 그 배 안에는 궤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척(尺)이오. 너비는 13척이나 된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매어 두었다. 그러나 이것이 흉(凶)한 것인지 길(吉)한 것인지 몰라서 하늘을 향해 고했다.

이윽고 궤를 열어 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가 하나 있고 아울러 칠보(七寶)의 노비(奴婢)가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을 7일 동안 잘 대접했더니 사내아이는 그제야 말을 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이오(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琓夏는 또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하니, 용성龍城은 왜국倭國 동북쪽 1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 우리 나라에는 원래 28 용왕(龍王)이 있어서 그들은 모두 사람의 태(胎)에서 났으며 나이 5, 6세부터 왕위(王位)에 올라 만민(萬民)을 가르쳐 성명(性命)을 바르게 했소. 팔품(八品)의 성골(姓骨)이 있는데 그들은 고르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소. 그때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王女)를 맞아 왕비(王妃)로 삼았소. 오래 되어도 아들이 없자 기도를 드려 아들 낳기를 구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卵] 한 개를 낳았소. 이에 대왕은 모든 신하들을 모아 묻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고금(古今)에 없는 일이다. 이것은 아마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 넣고 칠보와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뒤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아무쪼록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한 길을 이루도록 해 주시오'했소. 빌기를 마치자 갑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더니 배를 호위해서 지금 여기에 도착한 것이오."

말을 끝내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끌고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吐含山) 위에 올라가더니 돌집을 지어 7일 동안을 머무르면서 성(城)안에 살 만한 곳이 있는가 바라보았다. 산봉우리 하나가 마치 초사흘달 모양으로 보이는데 오래 살 만한 곳 같았다. 이내 그곳을 찾아가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아이는 이에 속임수를 썼다.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 놓고, 이튿날 아침에 문 앞에 가서 말했다. "이 집은 우리 조상들이 살던 집이오." 호공은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다. 시비(是非)가 판결되지 않으므로 이들은 관청에 고발하였다. 관청에서 묻기를, "무엇으로 네 집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하자, 어린이는 말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었소. 잠시 이웃 고을에 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는 터요. 그러니 그 집 땅을 파서 조사해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이오." 이 말에 따라 땅을 파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이리하여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南解王)은 그 어린이, 즉 탈해(脫解)가 지혜가 있는 사람임을 알고 맏 공주(公主)로 그의 아내를 삼게 하니 이가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어느 날 토해(吐解)는 동악(東岳)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떠 오게 했다. 백의(白衣)는 물을 떠 가지고 오다가 중로에서 먼저 마시고는 탈해에게 드리려 했다. 그러나 물그릇 한 쪽이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백의는 맹세하였다. "이 뒤로는 가까운 곳이거나 먼 곳이거나 감히 먼저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물그릇이 입에서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는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東岳) 속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세상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바로 이것이다.

노례왕(弩禮王)이 죽자 광호제(光虎帝) 중원(中元) 6년 정사(丁巳; 57) 6월에 탈해(脫解)는 왕위에 올랐다. 옛날에 남의 집을 내 집이라 하여 빼앗았다 해서 석씨(昔氏)라고 했다. 혹 또 까치로 해서 궤를 열게 되었기 때문에 까치[鵲]라는 글자에서 조자(鳥字)를 떼고 석씨(昔氏)로 성(姓)을 삼았다고도 한다. 또 궤를 열고 알을 벗기고 나왔다 해서 이름을 탈해(脫解)로 했다고 한다.

그는 재위(在位) 23년 만인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 29)에 죽어서 소천구(疏川丘) 속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뒤에 신(神)이 명령하기를, "조심해서 내 뼈를 묻으라"고 했다.

그 두골(頭骨)의 둘레는 석 자 두 치, 신골(身骨)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나 된다. 이[齒]는 서로 엉기어 하나가 된 듯도 하고 뼈마디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천하에 짝이 없는 역사(力士)의 골격(骨格)이었다. 이것을 부수고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 그랬더니 신(神)이 또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東岳)에 안치해 두어라"했다. 그래서 거기에 봉안케 했던 것이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탈해脫解가 죽은 뒤 27世 문호왕文虎王 때 조로調露 2년 경진庚辰(680) 3월 15일 신유辛酉 밤 태종太宗의 꿈에, 몹시 사나운 모습을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내가 탈해脫解이다. 내 뼈를 소천구疏川丘에서 파내다가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吐含山에 안치하도록 하라." 王은 그 말을 좇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제사를 끊이지 않고 지내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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