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軍事 資料 綜合

전차

鶴山 徐 仁 2007. 2. 18. 23:47

 
□ 개 관
전차는 1916년 3월 영국에 의하여 최초로 개발되었다.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지상전의 왕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전차는 대구경의 화력과 장갑에 의한 방호력 그리고 신속한 기동력이라는 점에서 잇점이 있으므로 세가지 분야에서 경쟁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구경은 최초 75미리-88미리에서 90미리, 100미리/105미리, 120미리/125미리로 확대되고 있고 강선포에서 대구경 활강포로, 방호력면에서의 장갑의 두께는 부위별로 60-120미리에서 최대 200미리 이상으로, 장갑의 재질면에서 방사된 우라늄 등의 신 소재로 그리고 반응장갑, 복합장갑 등 수동형 방호와 회피, 대응등 능동형 방호체계로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다. 기동력면에서 속도와 항속거리 등 주행성능면에서 발전하고 있으며, 명중률과 사격편의성 향상을 위하여 사격통제체계에서 경쟁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미국은 50년대의 M-47/M-48전차에서 60년대의 M-60, 그리고 70년대말의 M1계열로 발전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T-34로 시작하여 50년대의 T-54/55, 60년대의 T-62/64, 70년대의 T-72 그리고 최신의 T-80U로 발전하고 있다. 그 외 전차를 개발한 국가는 영국, 독일, 프랑스, 중국, 일본, 이스라엘, 한국 등이다.
 
 
세계 주력전차의 현재와 미래

유럽에서의 정치적인 변화와 함께 동서진영의 직접적 대립이 종식됨에 따라 세계적으로 무기체계 생산이 감소하게 되었으며 특히 신형 주력전차의 개발과 획득이 상당히 저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두고 전차가 지상군의 선봉이라는 전통적 역할을 상실했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현재 재정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여러 나라가 최소한 기존 전차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과거 수년간 국방비의 급격한 감소로 인하여 세계적으로 장갑전투차량 생산수량이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문제는 육군 기획담당관들이 직면하는 딜레마로, 가용 재원을 기존 기갑부대를 위한 현대화 프로그램에 투자를 해야 할지 아니면 새롭고 미래지향적인 장갑전투차량 개발에 집중을 해야 하는지의 선택의 문제이다. 많은 경우 성능개량이나 개선 프로그램 쪽으로 선택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 이유는 대체로 이를 선택함으로써 즉각적으로 업계가 관여하게 되고 따라서 관련산업기반을 최소한 중기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현대화 프로그램은 군수 및 훈련 소요부문에 미치는 충격이 훨씬 미약하다. 미국과 독일은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로 양국은 자국의 주전차 부대를 위한 성능개량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프랑스는 예외로, 신형 르끌레르 전차의 인도를 1992년 1월부터 시작하였다. 현재 연간 35대 정도의 르끌레르 전차 생산량은 60년대말 서방진영의 월평균 주력전차 생산량과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챌린저2 프로그램은 절충적인 방안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전차의 포탑은 새로 개발한 것이며 차대는 이전 챌린저1에서 채택한 기술을 적용한 것이다. 완전히 신형 주전차의 설계와 개발비용은 적어도 6억불을 상회하며 대당 가격은 6백만~8백5십만불 내외가 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여러 나라에서 신형 주전차의 개발을 위한 독자적인 사업을 연기하거나 완전히 취소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현재 설계형을 비판적으로 분석해보면 각국의 주력전차들이 더 이상 최적의 시스템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전투중량 62~65톤, 8미터가 넘는 차체길이 등은 장갑전투차량이 적절한 기동성을 지니고 모든 지형을 가로지르기 위해서는 수용할 수 없는 규모이다. 현재 독일과 미국에서 연구하고 있듯이, 장차 실내면적 2.5평방미터의 "콤팩트" 전투격실에 탑승인원을 2명으로 줄이고, 엔진을 더욱 소형으로 하는 추세가 계속된다면 45톤급의 새로운 주력전차가 개발될 터전이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탄도방호능력 증대 및 포구 에너지 증대가 되는 주력무기에 대한 소요가 부상하고 있기 때문에 중량을 대폭 감소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최적 용량의 설계에 의해서도 55톤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든 주요 전차생산국가의 국방비 감소로 인해 가까운 장래에 실로 혁신적인 전차가 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보다는 성능개량이나 현대화 프로그램을 통해 지휘 및 정보 시스템, 전방반응장갑 등의 새로운 기술을 기존 차량에 점진적으로 채택하게 될 것이다.


전차의 등장과 그 활약의 역사

□ 전차에 패배한 독일

당시 독일군 지휘부는 영국군의 신무기인 전차를 과소평가하고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전차의 등장으로 전선이 돌파되고 공황현상까지 나타나자 A-7-V형 전차(30톤, 37밀리 직사포 1문, 기관총 6정, 장갑 15~30밀리, 시속 10키로미터, 항속거리 35키로미터, 100마력)를 개발해서 1918년 3~7월에 걸쳐 6차례의 최후공세에 투입하였다. 전차수량 부족과 기타 전력의 절대적 열세로 최초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4월에 있었던 제2차 공세 때는 사상 최초의 전차전에서 독일군은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독일 전차의 37밀리 직사포는 영국의 전차를 손쉽게 파괴했는데 당시 영국군 전차는 기관총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차의 적은 전차라는 사실을 깨달은 영국군은 황급히 47밀리 직사포를 탑재한 비커스 전차를 개발하여 투입함으로써 전차에 의한 대전차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독일군이 마지막으로 취한 공세를 맞아 연합군은 550대의 전차를 집중해서 돌파구를 협공, 독일군 10개 사단을 격멸하고 공세를 무력화시켰다. 이어서 공세로 전환 8월에는 670대의 전차를 집중하여 아미엥 전투에서 독일군 7개 사단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킴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

당시 독일군의 루덴돌프 참모차장은 "전차에 졌다"고 독백했다고 한다. 연합군이 베르사이유 조약을 통해 독일의 전차 /항공기 제조를 금한 것은 이 무기들이 다음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무기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 전쟁 교훈을 살리지 못한 영국과 프랑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각국은 전사연구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다음 전쟁에 대비했다. 그러나 똑같은 전쟁을 겪은 국가라고 해도 국력과 나라형편, 국민성이 다르면 교훈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다. 각국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 21년 후에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명암이 엇갈리게 된다.전차의 최초 발명국인 영국은 전차 300대를 근간으로 한 기계화사단의 창설을 제창하였다.

그래서 전차군단(9개 여단으로 편성)을 편성했는데 사회개혁에 바빴던 노동당 정권은 이 부대를 해체하고 4개 대대로 축소하였다. 그래서 영국군은 경전차 200대, 중전차 117대, 보병엄호전차 90대로 제2차 대전에 임하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풀러는 전격전의 기초이론이란 책을 통하여 장차의 전쟁은 전차가 주도하는 전장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나 이 책은 영국군에게는 읽히지 않고 오히려 적국인 독일군에서는 장교의 필독도서가 되기도 하였다. 군사개혁자의 선구적 성과를 되새기지 않아 결국 전쟁을 부르고 그 전쟁에 패배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는 장래의 전쟁도 진지전의 재판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마지노선을 구축하는 등 전략적 수세를 군의 기본 전략지침으로 설정하였다. 이 때문에 전차의 역할도 수세를 만회하기 위한 반격력으로 여겨져 새로운 교리의 개발에 등한시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제2차 대전이 시작된 시점에서는 3개의 기갑사단(전차 158대)과 쾌속 기계화사단이라는 적지 않은 기갑부대를 갖추었지만 전차와 보병의 불균형과 기동력의 열세(수세전략에 의한 화력위주의 전차를 보유), 수세적 교리등으로 독일군이 마지노선을 돌파하여 폴란드 침공작전을 벌여도 영국과 프랑스군은 어떻게 손을 써보지 못한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 영국의 연구성과를 활용한 독일

패전국 독일에서는 연합국이 독일의 전차 제조를 금한데 대해 불만을 품은 구데리안 대위가 전차에 관한 문헌을 연구하기 시작함으로써 기계화사단의 창설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전사연구에 따르면 전차는 분명히 전투의 3대 요소인 화력, 기동력, 방호력을 겸비한 무기이지만 독일이 전차에 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연합국이 전차를 집중 투입했어도 한번도 독일군의 진지를 돌파해서 기동전으로 이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데리안은 "그렇게 우수한 신무기를 가졌으면서도 연합군은 왜 마지막 결전을 주도하지 못했는가?"를 연구주제로 설정하였다.

연구결과 각종 원인이 밝혀졌지만 기본적으로 기동력을 말에 의존해 방어력이 없는 보병/포병/공병 등의 지원부대가 전차와 협동작전을 할 수 없었다는 점, 전차의 항속거리가 짧아 전략적인 운용이 불가능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기동력을 강화한 전차를 주축으로 말 대신에 엔진을 사용하고 장갑으로 방호력을 향상시킨 보병/포병/공병 등과 결합시킴으로써 기갑사단을 편성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구상은 원래 영국의 풀러나 리델하트 등이 제시했으나 오히려 영국에서는 간과되고 적국인 독일에서 꽃피우게 된 것이다.

1933년에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구데리안의 구상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이 때문에 히틀러가 1935년에 재군비를 선언했을 때는 2개 기계화사단의 창설을 끝마쳤고, 1938년의 오스트리아 진군으로 그 전략적 기동력을 실험했다. 위와 같은 실험결과를 기초로 장비와 편제를 개선한 후, 다음해인 1939년 초여름까지는 전차여단(전차 16개 중대, 중대는 21대형), 차량화 보병여단(12개 중대), 105밀리 곡사포 2개대대(24문), 기갑정찰연대, 공병대대, 지원부대 등으로 이루어진 기갑사단(전차대수 320대) 3개, 전차와 보병을 1:1 개념으로 편성한 기계화사단 3개, 경장갑사단 4개를 편성하여 새로운 개념에 의한 전격전을 구상하였다. 독일군 기갑사단에 부여된 임무는 공군의 근접지원하에 적의 방어선을 돌파, 숨쉴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 적의 지휘본부를 타격함으로써 적에게 심리적인 공황을 유발, 전격적 기동에 의한 마비전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 미국, 구소련, 일본의 전차 개발

미국은 당초 보병엄호전차를 중점적으로 개발했지만 서구의 추세를 받아들여 기갑사단의 편제를 개편, 1940년 7월에는 2개 기갑사단을 창설했다. 보유전차는 M-3경전차(13톤, 37밀리 직사포 1문, 기관총 5정, 장갑 47밀리, 시속 50키로미터) 273대와 M-3중전차(28톤, 75밀리 직사포 1문, 37밀리 직사포 1문, 기관총 2정, 장갑 35~80밀리, 시속 40키로미터) 108대 였다. 유연한 사고와 뛰어난 과학기술력을 토대로 제2차 대전시에는 M-4 셔먼 시리즈(76밀리 직사포)와 M-26 패싱 전차를 갖게 되었다.

소련은 어느 열강보다 앞선 1932년에 전차군단(2~3개의 전차여단, 기계화 보병여단, 포병여단이 근간)을 창설했다. 그러나 스페인 내란을 통한 실험결과에 실망하여 이 부대를 해체한 뒤 단위부대를 2~4개의 전차대대로 편성한 전차여단을 개편, 임무를 보병엄호로 바꾸었다. 주력전차는 1934년에 개발한 BT전차(쾌속전차라는 의미, 11톤, 45밀리 직사포 1문, 기관총 1정, 장갑 6~13밀리, 시속 50~80키로미터, 항속거리 120키로미터, 400마력 디젤 엔진)이다. 1938년에 일어난 장고봉 사건에서는 각 1개씩의 전차여단과 기계화여단을, 다음해인 1939년에 일어난 노몽한 사건에서는 5개 전차여단을 투입하여 일본군에게 일격을 가했다.

소련도 독일의 기갑사단에 자극받아 전차사단의 필요성을 인식하였지만 스탈린의 신념은 전쟁의 신은 포병이다라는 것이었다. 특히 1939~40년에 걸쳐 일어난 핀란드와의 전쟁경험은 전차사단의 편성에 제동을 걸었다. 독일측 자료에 의하면 독소전이 시작될 때 소련군은 BT전차(12,000대~24,000대)를 주축으로 75개 여단과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2개 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일측은 몰랐지만 소련은 T-34/76A(26.3톤, 77.2밀리 직사포 1문, 기관총 2정, 장갑 18~70밀리, 시속 53키로미터, 500마력 수냉식 디젤엔진)을 개발해서 매월 1,000대를 생산하고 있었다.

일본은 노몽한 사건 때 2개 전차연대를 근간으로 참전했지만 한 차례의 전투로 전투력을 상실했다. 2차대전시에는 중전차(15.3톤, 57밀리곡사포 1문, 기관총 2정, 장갑 25밀리, 시속 38키로미터, 170마력 디젤엔진, 나중에 47밀리직사포를 새로 달고 Ⅰ식이라고 개칭)와 95식 경전차(7.4톤, 37밀리직사포 1문, 기관총 2정, 장갑 12밀리, 시속 40키로미터)여서 열강의 경전차/장갑차 수준이었다.

전격전의 실험무대 폴란드 침공

1939년 9월1일, 독일군은 6개 기계화사단을 3개 집단으로 나누어 세 방면으로 폴란드를 침공, 18일만에 작전을 종료하였다. 이때를 두고 구데리안 기갑부대장(당시 기갑사단 1개, 기계화사단 2개로 편성된 19군단장)은 "기계화부대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새로운 병과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라고 회상했다.

기갑사단은 국경진지를 일거에 돌파해서 폴란드의 전략예비부대를 격파했으며 편성 중이던 예비군을 기습해서 괴멸시킨 다음, 지휘,통신,보급 조직을 파괴하면서 바르샤바와 그 동북지역을 향해서 돌진을 계속, 폴란드군에 대응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않고 괴멸시켰다. 당시 폴란드군은 기병위주로 편성되어 있어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고자 했으나 이미 기병부대는 독일군 기계화부대의 상대가 아니었다. 미래전을 예측해 전력을 준비한 부대와 과거에 얽매여 있던 부대와의 전투는 시작 전에 이미 그 승패가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 치른 실전이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부족한 점도 발견되었다. 사용된 전차는 Ⅰ형(6톤, 기관총 2정, 장갑 20밀리, 시속 50키로미터)과 Ⅱ형(8.9톤, 20밀리직사포 1정, 기관총 1정, 장갑 35밀리) 경전차였기 때문에 파괴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후에는 11년에 걸쳐서 개발한 Ⅲ형(23톤, 50밀리 직사포 1문, 기관총 2정, 장갑 57밀리, 시속 40키로미터)과 Ⅳ형(21톤, 75밀리 곡사포, 장갑 60밀리, 265마력)을 주력전차로 삼게 되었다. 또한 경장갑 사단의 전력이 부족해서 기갑사단이 고립되어 위기에 빠진 쓰라린 경험 때문에 4개의 경장갑 사단을 기갑사단으로 개편해서 10개의 기갑사단(전차대수 2,439대)으로 다음 전투에 임하게 된다.

□ 전격전의 승리 프랑스 전역

독일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정면에 전개한 B집단군에 2개의 기갑사단, 중앙의 A집단군에 8개의 사단을 편성하여 1940년 5월1일에 공격을 개시했다. 목표는 영국과 프랑스의 주력군이 아르덴느 삼림과 마지노선의 연장선인 세당 부근을 선회측으로 삼아 벨기에로 진공해서 독일군의 슐리펜 계획에 대처하려는 것을 간파하고 A집단군에게 세당부근을 돌파하고 영불해협으로 돌진하여 적을 포위 섬멸하고자 하였다.

A집단군의 선봉을 맡은 클라이스트 장군의 기갑부대(기갑사단 5개, 그 중 3개는 구데리안의 제19군단 예하부대)는 공군의 급강하폭격기의 지원을 받으면서 세당을 돌파, 솜므강 북안을 따라 일거에 600키로미터를 돌진해서 5월말에는 해협에 도달했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플란다스 평원에서 포위했다.

프랑스군은 드골의 제 3기갑사단 등을 앞세워 포위를 뚫었고 포위된 영국군은 2개 정예 전차대대를 앞세워 탈출을 꾀했지만 모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이어서 독일군은 6월 초순에 제2차 공세를 시작했다. 선봉을 맡은 구데리안 기갑부대는 파리를 우회해서 마지노선의 배후로 진출, 프랑스로 하여금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게 압력을 가하였다. 구데리안의 기치는 "포성을 향해서 악셀레이터를 밟아라"였다. 결국 프랑스는 독일이 공격을 시작한지 44일만에 전세계의 경악속에 항복을 한 셈이다. 히틀러는 "가물렝 장군은 프랑스군 병사의 사기가 프랑스의 방패라고 말했다. 그러나 독일은 적 전차를 관통하는 대전차포와 적의 대전차포에 관통되지 않는 전차의 장갑으로 프랑스의 방패를 뚫었다."고 큰소리를 쳤다.

1차대전식 전쟁에 연연한 프랑스군의 마지노선이 전차라는 새로운 무기와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전술의 독일군에 여지없이 패배하는 순간이었다. 독일군의 주력전차는 Ⅲ형이 349대, Ⅳ형이 278대에 불과했다. 반면에 프랑스군은 627대의 전차를 가지고도 궤멸당했다. 공군과 전차를 주축으로 한 기계화부대의 승리였다.

□ 패배로 끝나고만 독소전

1944년 6월 22일. 독일군 145개 사단은 3개 부대로 편성되어 소련군의 의표를 찔러 기습, 노도와 같은 진격을 시작했다. 북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에는 1개씩의 기갑부대가, 중앙 집단군에는 2개의 기갑부대가 배속되어 있었으며 그 기본 전략은 쐐기와 햄머전략으로 기갑부대가 쐐기를 박고 넓은 포위망을 형성하면 뒤따르는 보병부대가 좁은 포위망을 구성해서 적을 섬멸하는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스탈린의 오산에 힘입어 기습에 성공한 것과 BT전차를 압도하는 독일군의 마크 Ⅲ형 전차의 위력으로 작전이 순조로웠다.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로 육박했고 중앙 집단군은 민스크, 이어서 스몰렌스크에서 소련군을 포위, 대전과를 올렸으며 남부 집단군은 우크라이나 깊숙이 진격했다. 마크 Ⅲ형 전차대 소련의 BT 전차의 전차전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굶주린 늑대가 양떼를 사냥하는 양상으로 독일군은 빛나는 전과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중앙집단군의 일부 주력부대를 남부로 돌려서 키에프 전투를 주도한 후 모스크바 공략을 다시 시도했을 때는 전세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10월에 처음으로 전장에 등장한 T-34/76형 전차는 독일의 Ⅲ형 전차에 쉽게 공략되지 않는 전차였으며 가을비에 의한 진흙탕과 동장군의 엄습은 독일 기갑부대의 진출을 제한하였다. 11월에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기갑사단 4, 기계화사단 3, 보병사단 5)이 모스크바 남쪽에 있는 투라의 공격에 나섰을 때는 그 기간전력인 24기갑군단의 선봉전력은 전차 50대, 포 11문에 불과했다. 소련의 광활한 땅과 매서운 추위, 소련군의 집요한 저항, 특히 T-34/76전차의 반격으로 제 2기갑군은 궤멸하고 말았다.

소련이 T-34/76형 전차를 모스크바의 수호신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42년 여름 독일군은 대반격을 감행하였지만 전력의 절대적 열세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전차의 양과 질이 승패를 가른 것이다. 당시 전차생산량은 소련이 3만대, 독일이 4,512대였다. 이후에는 소련의 질풍같은 동계공세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소련의 T-34형 전차에 대응하기 위하여 2차대전시 등장한 최강의 중전차로 불리워지는 Ⅴ형(75밀리 직사포)과 Ⅵ형(88밀리 직사포)을 동원 쿠르스크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한 전투를 실시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 참고 자료

ㅇ 중령 고진석, "전차의 발전과 역사", 합참 전력분석실 전력분석과


주요전차의 종류

20 T-54/59
19 90식
18 C1
17 74식
16 T-90S
15 SABRA
14 K-1
13 M-48
12 Merkava
11 Leopard

10 Leclerc
9 Chieftain
8 Challenger
7 M-55S-1
6 T-84
5 T-80U
4 T-72
3 T-62
2 M60
1 M1(Abr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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