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구려 궁중비사] 5. 無恤王子의 奇計

鶴山 徐 仁 2007. 1. 30. 00:11
풍속도제2 왕자 해명이 죽게 되니 제3 왕자 무휼(無恤)이 왕위 계승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무휼왕자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녹록치 않게 무용이 절륜했지만 슬기로운 그는 그것을 표면에 나타내지 않았다.
 
해명왕자가 죽은 해 8월 부여왕 대소는 사자를 보내어 유리왕을 책망했다.
 
“나의 선왕께서 그대의 선친 동명왕을 극진히 보호했으나 그는 그 은혜를 배신하고 신하들을 꼬여 그 곳으로 도망가서 나라를 세웠는데 그것만으로도 죄송히 여기고 우리를 섬겨야 할 것이거늘 끝내 순종치 않았으니 그 죄 마땅히 징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일은 잠시 덮어두고 오늘의 형편만이라도 생각해 보라. 예로부터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는 법인데 너희는 작은 나라로서 어찌 큰 나라를 섬기려 들지 않느냐? 지금이라도 그대가 예의를 갖추어 나를 섬기게 된다면 나라를 오래 보전 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는 다면 사직을 보전하기 어려울 줄로 알아라.”
 
실로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분쟁을 싫어하는 왕은 그 모욕도 감수하려고 했다.
 
“우리는 나라를 세운지 아직 오래되지 않고 군사도 부여를 당해낼 만큼 못하니 한때 욕을 참고 굴복했다가 뒷날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렇게 말한 다음 부여에서 온 사신을 향해 말했다.
 
“과인이 외진 구석에 살며 예의를 알지 못한 탓으로 허물이 많소만 대왕의 가르치심을 듣고 비로소 취할 바를 깨달았소이다. 대왕의 명을 따라 삼가 섬길 것이니 그와 같이 아뢰도록 하오.”

이렇게 간곡히 말했다. 이 말을 듣자 부여사신은 의기양양해서 위세를 부렸지만 신하들 중에 뜻있는 자들과 특히 왕자 무휼은 지나치게 유약한 왕의 태도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무휼은 총명한 소년이었다. 부왕과 맞서서 미움을 사는 태도를 피하면서도 고구려의 국위를 과시하는 계교를 짜냈다. 그는 부왕이 없는 틈을 타서 사신을 향해 말했다.
 
“우리 선조께서는 그대 나라를 배반했다고 했지만 첫째 그것이 틀린 말이요. 우리 선조께서는 원래 현명하고 다재하셨으므로 그대 임금이 질투한 나머지 부왕께 참소하고 죽이려하기에 하는 수 없이 도망친 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 임금은 자기 허물은 뉘우칠 생각도 없이 군사의 힘만 믿고 우리를 업수히 보니 어찌 그렇듯 무도한 일이 있겠소? 내 사신에게 일러두겠는데 돌아가거든 그대 임금께 이렇게 전하시오.”
 
어린 소년답지 않게 사리를 따져 차근차근 말하는 것을 듣고 부여 사신은 어안이 벙벙했다.
 
“여기 달걀을 쌓아 놓았으니 만약 대왕이 그 알을 헐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왕을 섬길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대왕을 섬기지 않겠소.”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사신은 그 말뜻을 새기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서 대소 왕에게 보고했다.
 
부여왕 대소는 무휼왕자의 말 뜻을 얼른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래서 여러 시신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시신들 역시 그 뜻을 해석하지 못하므로 하는 수 없이 널리 나라 안에서 슬기 있는 자들을 모아들였다. 그랬더니 한 노파가 무휼왕자의 말을 풀이해 아뢰었다.
 
“달걀이란 원래 둥근 것입죠. 그러므로 그것을 쌓아 올리기는 대단히 힘든 일일뿐더러 비록 쌓아 올렸다 하더라도 조금만 건드리면 곧 허물어질게 아닙니까? 이것은 무휼왕자가 우리 부여와 고구려의 사이를 비유한 말로 볼 수 있읍죠. 가만히 내버려 두면 서로 편안할 수 있지만 잘못 건드리면 두 나라가 다 화를 입을 것이라는 뜻입죠.”
 
노파의 설명을 듣자 대소는 입맛을 다셨다.
 
“거 어린놈이 제법 꾀가 많은걸. 그 말대로 잠시 건드리지 말고 기회를 보는 것이 좋을듯하다.”

이렇게 되어서 고구려는 나라 위신을 깎이지 않고 부여를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달걀을 쌓아 올린 것 같은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유리왕 32년 11월, 엄동을 무릅쓰고 부여군은 고구려 변경을 침입했다. 달걀로 쌓은 평화를 깨뜨리고 만 것이다.
 
아무리 국력이 약하더라도 쳐들어오는 적은 막지 않으면 아니 된다. 평화주의자 유리왕도 마침내 무휼왕자에게 군사를 주어 적군을 방어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부여군에 비해서 너무나 열세였다. 정면으로 대전한다면 적군에게 여지없이 짓밟힐 것은 환한 일이었다.

무휼왕자는 한 가지 기계(奇計)를 생각해냈다. 복병 전술을 쓰게 한 것이다. 즉 부여군이 통과할 산골 양편 언덕 바위틈에 고구려군을 숨겨 두었다가 부여군이 그 곳까지 진격해 왔을 때 일제히 일어나서 협격하자는 것이었다.
 
고구려군이 잠복한 산골길은 좁고 험한 길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부여의 대군은 그 좁은 산골로 모여들었다. 때는 왔다. 무휼왕자는 높이 손을 들었다. 양편 언덕에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군은 일제히 함성을 올리고는 적군을 향해서 활을 쏘아대고 창을 던지고 암석을 굴려 떨어트렸다.
 
뜻하지 않은 기습에 부여군은 당황실색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지휘관의 명령은 서지 않고 병졸들은 제 목숨만 살려고 날뛰었다. 좁은 계곡에서 수많은 대군이 혼잡을 이루니 말은 사람을 밟아 죽이고 사람들은 서로 자기편끼리 아귀다툼을 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휼은 다시 고구려군에게 명령을 했다. 고구려군은 일제히 계곡으로 달려 내려가서 혼란한 적군을 닥치는 대로 무찔렀다. 이렇게 해서 부여군은 거의 전멸을 당하고 어린왕자 무휼은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싸움을 싫어하는 유리왕이었지만 승리는 역시 기쁜 것이다.
 
33년, 정월 왕자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고 태자를 삼는 한편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겼다.  이후부터 유리왕도 태자 무휼의 진언을 받아 국세를 확장하기에 힘쓰게 되었다. 즉 그 해 8월에는 선왕 때부터의 공신 오이(烏伊), 마리(摩離)등에게 명하여 군사 二만을 거느리고 서쪽에 있던 양맥(梁 )을 습격하여 국위를 떨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37년 10월 왕이 두곡(豆谷)의 이궁에서 승하하자 유리명왕(瑜璃明王)이라 호하고 무휼태자가 그 뒤를 계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