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政治.社會 關係

[류근일 칼럼] ‘中道’와 ‘평화’의 위장

鶴山 徐 仁 2007. 1. 9. 20:31

 

  • 류근일 · 언론인
    입력 : 2007.01.08 22:12 / 수정 : 2007.01.08 22:16
    • ▲류근일 · 언론인
    • 예상했던 대로 열린우리당 사람들이 ‘평화개혁’ ‘중도통합’ ‘급진좌파·수구냉전 배격’을 내세워 신당 창당을 추진하고 있다. 하기야 ‘중도’ ‘중용’ ‘평화’ ‘개혁’이란 말들의 사전적 의미를 굳이 탓할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그런 점에서라면 그들이 그렇게 나오는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일부에서는 평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봐주기에는 그들의 느닷없는 ‘말’의 성찬이 의심스럽고 그 진정성과 콘텐츠가 너무나 불확실하다.

      우선 중도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정의(定義)하든 진정한 중도는 전체주의, 1당 독재, 수령 독재와 양립할 수 없으며, 그런 것들에 대한 분명한 비판을 표출해야 한다. 전체주의도, 자유민주주의도 아니면서 폭정과 반(反)폭정의 중간쯤이라는 식의 중도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열린우리당의 통합신당 주동자들은 과연 80년대~90년대에서 200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이념적 위상을 확실하게 표출해 왔는가? 그들이 대한민국의 지나간 권위주의 시대에 저항했으며, 지금의 시점에서도 끝없는 ‘과거 청산’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이 “대한민국의 역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 “대한민국은 나라도 아닌 나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나라” 그래서 “6·25는 통일 내전(內戰)”이고 “민족 자주의 정통성은 북쪽에”라고 말하는 노 정권 지도부측에 대해 침묵하거나 동조해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남산’(과거 안기부)과 ‘빙고 호텔’(서빙고의 안가)의 인권 유린을 규탄한 그만큼의 열도(熱度)로 김정일 폭정에 대해 치열하게 대항해 왔는지, 그의 핵 개발, 마약 밀매, 위조지폐 제작, 공개처형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해 왔는지, 그리고 그들이 언급한 ‘급진좌파’에 대해서는 과연 지금까지 ‘배척’을 해왔는 것인지 분명하게 자문하고 그 답을 국민 앞에 제시해야 한다.

      세상은 그들이 “미국 의회의 북한 인권법 제정은 내정간섭” “북한 핵은 빈곤 때문” “전쟁하자는 것이냐?” “미국이 북한을 너무 몰아붙였기 때문에” 운운 하는 식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그들이 겉으로 내세운 ‘중도’의 선(線)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일반적인 인식을 이제 와서 자기네 탓 아닌 남의 탓, 수구냉전 세력 탓으로 몰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은 세월 따라 얼마든지 ‘중도’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밑도 끝도 없이 너무 홍두깨 식이거나, 앞뒤가 맞지 않거나, 구호뿐이거나, 다급한 선거용이거나, 언행 불일치일 경우에는 주위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예컨대 80년대 이래 NL(민족해방) 계열의 전직 ‘의장님들’이 어느 날 갑자기 ‘급진 좌파 배척’을 내세우며 마치 남의 말 하듯 하고 나선다면 보는 사람들로서는 어안이 벙벙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사람들은 그들이 바로 ‘급진좌파’라고 알았기 때문이다.

      평화라는 말 역시 김정일 폭정에 대한 몰가치적 침묵을 의미해서도 안 되고, ‘김정일의 전쟁’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인질적(人質的)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의 표를 얻으려고 무턱대고 “군대에서 썩는 기간을 단축시켜 주겠다” “저 사람들이 이기면 전쟁 난다”는 식으로 ‘평화’를 상품화하는 것은 더욱 위험한 포퓰리즘이다. 김정일이 핵을 가졌어도 ‘굳이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이라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투항’일 뿐이다.

      ‘평화’와 ‘중도’는 원래 성현(聖賢)의 말씀이었지만 때로는 선동가들의 위선이나 변장술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한다. 진품과 가짜를 가릴 줄 아는 날카로운 변별력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