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가탄마을·번평마을·수동마을 [경향신문 2006-11-03]

鶴山 徐 仁 2006. 12. 15. 21:04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 수동마을과 번평마을을 이어주던 섶다리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양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해 다리를 놓았으나 지금은 볼 수가 없다.

문득 전설이라는 낱말의 정의를 다시 헤아려 봤다. 그 내용을 함축하면 ‘한 지방이나 마을과 같은 특정지역에 대한 역사적인 내용이 민간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며 그 내용을 증거할 만한 바위나 나무와 같은 자연물이나 모티프가 남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구조는 언제나 지난 시간으로부터 시작해 현재로 이어진다. 곧, ‘옛날에’로 시작해 ‘지금도’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강을 걷다가 뜬금없이 전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나는 가수리로부터 시작되는 동강 언저리에서 20세기에 만들어진 전설과 같은 이야기들을 추억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급속도로 진행된 산업화의 과정에서 수많은 전설과 그 증거물들이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으며 또 사라지고 있는 즈음이지만 동강 언저리에 떠돌던 수많은 전설들이 알려졌으며 더구나 새로운 전설이 생겨나기도 했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러 1995년 늦가을부터 96년 봄이 오기까지의 농한기에 하루가 멀다 하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동강을 드나들었었다. 그리곤 조금이라도 곁을 주는가 싶으면 어른들마다 붙들고 조르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또 하나의 전설이 되고 만 그들의 삶의 현장을 서성이며 현실이 전설이 되어가는 과정을 눈여겨보기도 했다.

가수리에서는 개구리 뒷다리를 석쇠에 구우며 됫병 소주 빈병 두엇을 옆에 밀쳐놓은 채 비몽사몽으로 이야기를 듣기도 했으며 때로는 가탄마을의 작은 가겟방에서 매운탕과 소주를 앞에 놓고 마을 어른들로부터 밤이 이슥하도록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누구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그들을 위해 핑계 삼아 영정 사진을 찍어드리기도 하며 들은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옛날에’로 시작했으며 ‘지금은’으로 얼버무려지곤 했다. 이야기의 끝이 얼버무려지는 것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지 싶다. 그 무렵은 이미 동강댐 건설의 가부를 두고 정부와 환경단체, 그리고 주민들 간의 삼자대립 각이 첨예하게 곤두서기 시작할 즈음이었으니까 말이다.

더구나 ‘지금은’은 ‘지금도’와 사뭇 다른 경계를 지닌다. ‘지금도’라는 것은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어떠한 행위나 이야기의 증거물들이 존속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지금은’이라는 것은 그것이 사라지거나 변질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변화의 가장 중심은 길이었다. 정선읍으로부터 강기슭을 따라 뼝대를 바람막이로 길이 생겨난 것은 불과 20여년 전인 83년이다. 가탄마을에 사는 이강호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예전에는 담배농사를 많이 했다고 한다. 따로 ‘황새연초’라고 불렀던 담뱃잎을 말려서 가수리에서 너투니재를 넘어 정선의 북실리로 30리 길을 걸어야 했단다.



▲ 1998년 11월 15일, 섶다리를 놓던 날의 마을주민들.

왕복에 하루가 걸렸지만 새벽밥을 집에서 먹고 또 김치로 싼 주먹밥을 가지고 넘어 갔다 와야 했단다. 그것도 싫으면 강냉이밥을 해 가지고 짐 꾸러미 위에 올려서 길을 떠났는데 그이 말로는 강냉이밥은 요사이 개를 줘도 안 먹을 만큼 고약한 것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담배를 내다 팔 때는 겨울 초입이어서 때로는 길이 얼기도 하고 눈보라를 맞기도 했는데 꽁꽁 얼어 터진 그 밥을 먹으려고 시내에서 냄비를 빌려서 맨 물을 끓여 데워 먹어야 했다니 가슴 저미는 이야기에 그이도 나도 연신 소주잔을 들었다 놨다 해야만 했었다.

그나마 63년도부터는 광하리까지 강기슭으로 여울을 닦아 바퀴가 여섯 개나 달려서 ‘육빠리’라고 불리던 ‘지에무씨(GMC)’ 트럭이 가수리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것도 강물이 줄어드는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잠시였지만 그래도 정선으로 내다 팔 농작물이나 가지고 와야 할 생필품들의 운반이 한결 수월해졌으니 모두 박수치고 좋아했단다. 그처럼 이곳에는 강물이 줄어드는 이맘때가 되면 여름과는 또 다른 강의 모습을 내놓곤 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 하나가 다리이다. 깊은 산골 강마을이었으니 튼튼한 다리 하나 없이 배로 건너 다니는 불편함이란 그곳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길이 이어지지 않는 강 건너에 사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제대로 된 다리 하나 놓였으면 원이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니 강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려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해 다리를 놓곤 했는데 동강에 놓이던 것은 ‘섶다리’이다. 내가 눈으로 본 것만도 귤암리, 가수리, 운치리, 덕천리 모두 네 곳에 섶다리가 있었으며 귤암리와 가수리의 그것은 어느 해부터 모습은 섶다리이지만 위 상판을 나무판자를 깐 널다리로 바뀌었다. 그나마 운치리 수동마을과 번평마을을 잇는 다리와 덕천리의 연포마을로 건너가는 섶다리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방식으로 남아 있었지만 99년 이후로는 보지 못했다.

지금은 그 마을들 모두 시멘트로 만든 다리가 번듯하게 놓였으니 이제 더 이상 가을이 깊었다고 동강에 다리를 놓으려 분주히 오가는 주민들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다행인지 나는 동강에 놓이던 섶다리 중 가장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녔던 수동마을과 번평마을을 잇는 다리를 놓던 날인 98년 11월15일 그곳에 있었다.
가을걷이를 마친 마을 주민들은 그 전날부터 다리를 놓을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주로 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다듬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주 흥미로운 것은 길이 지나가는 번평마을과 강 건너인 수동마을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해 다리를 놓는다는 것이었으며 그들 모두 일을 정확하게 나누어서 하고 있었다.
가령 ‘다릿발’이라고 불리는 나무로 만든 교각을 12개를 세워야 했는데 각 마을이 6개씩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머지 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양쪽에 세운 다릿발을 가로로 서로 붙잡아주는 ‘머기미’도 또 다릿발과 다릿발을 세로로 길게 이어주는 긴 나무인 ‘널래’도 똑같이 나누었으며 널래 위에 상판으로 놓이는 솔가지인 ‘소깝’이나 소깝을 눌러주며 동시에 사람이 다니기 좋게 깔아 놓는 흙인 ‘저새’ 또한 어느 마을에 치우침이 없이 나누는 것이었다. 더구나 다리를 놓는 일은 더욱 흥미로웠다. 어느 한 쪽에서 다리를 놓아 오는 것이 아니라 각 마을 사람들이 자기 마을의 강기슭에서 따로 시작해 가운데에서 만나 서로 이어주는 것이었다.



▲ 번평마을 주민들이 배를 타고 다릿발을 세우고 있다.

그날은 각 마을마다 10명 남짓한 남정네들이 일을 했으며 여인네들은 수동마을 강기슭에 가마솥을 걸어 놓고 국수로 점심을 내놓았으며 고기를 구워 추위를 달래려 들이키는 소주의 안주거리를 만들기도 했다. 이윽고 뚝딱, 이른 아침부터 해거름까지 뛰어 다니더니 다리가 만들어졌다. 그러자 각 마을의 가장 나이 많은 어른들을 앞세우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마을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 것이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난 다음 두어군데마저 손을 보고 나서 모든 일이 끝났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멀리서 다리를 바라보는데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다리를 놓기 위해 설계도는커녕 디자인이라는 개념조차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저 지난해 했던 대로,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거나 지난해의 경험을 물림으로 만들었을 뿐이지만 강과 산, 그리고 마을에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울리는 것인 탓인가. 나는 그만 그 다리에 매료되고 말았었다. 그저 눈으로 보기만 하던 것과 그것이 만들어지는 공정을 모두 보고 난 다음에 느끼는 것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그 이듬해에도 나는 그것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곳에 섶다리는 더 이상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연포마을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길이가 수동마을의 그것에 비해 반밖에 되지 않기는 했지만 섶다리 대신 시멘트로 만든 토관을 묻고 흙을 덮은 다리가 놓이더니 이제는 아예 시멘트 다리가 놓이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을 마을 주민들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을 문화의 한 형태라고 이해하지 못하거나 도시의 문화가 산골의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묘한 순위 매기기에 급급해 껴안지 못하는 우리들의 잘못인 것이다. 문화라는 것이 근사한 미술관이나 음악당에만 있거나 작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만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생각해보라. 섶다리를 놓는 일은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우리들의 미풍양속인 두레나 향약, 그리고 어른 공경과 같은 것들이 알게 모르게 배어 있는 일이다.

동강을 이야기할 때 한결같이 입을 모아 생태 운운한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그곳에 살아가던 사람들이 일궈놓은 소박한 문화 또한 귀하고 소중한 것이지 않겠는가. 생태 운운하면서도 뻔뻔스럽게 관광객을 위해 아스팔트로 길을 닦는 일에 열중할 것이 아니라 ‘지금은’을 ‘지금도’라는 말로 이야기 할 수 있는 문화적 배려가 아쉽기만 하다. 다시 되짚어 생각해 보라. 우리들의 무관심으로 잃어버리는 것은 단지 유형의 그것뿐만이 아니다. 어느새 그것과 함께 무형인 우리들 자신도 황폐해지고 달라지는 것이 무서운 일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 북대에서 수미로 건너오는 아이들, 지금은 이 자리에 시멘트 다리가 놓였다.

가마솥걸고 국수 삶으며 스무명이 종일 뚝딱뚝딱

가수리는 모두 여섯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분교가 있는 수미, 강 건너인 북대, 그리고 영월 쪽으로 내려가면서 갈매와 가탄, 가탄 맞은편인 유지, 그리고 더 아래쪽의 강 건너 마을인 하미마을이다. 가수라는 이름은 가탄과 수미를 합하면서 첫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지금은 자동차가 다니는 길로 신동읍 방면으로 가지만 예전에는 가수리의 북대에서 강을 따라 펼쳐진 뼝대 위로 하미마을로 가곤 했다. 고개 이름은 구름 운자를 쓰는 운고개이며 지금도 옛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가수리에서 정선으로 갈 때는 너투니재를 넘었지만 신동읍으로 갈 때에는 가탄에서 곰봉을 지나 40리의 산길인 틀이재를 넘었다.

하미마을을 지나면 행정구역은 정선군 신동읍으로 바뀌며 정선에서 들어오는 버스는 하미마을에서 되돌려 정선읍으로 나가며 하루 네차례 다닌다. 하미마을에도 예전에는 섶다리가 놓였다고 하지만 직접 보지는 못했다. 대신 강가에 흔해빠진 돌을 쌓아 교각을 만들고 그 위에 긴 장대목을 걸쳐 놓은 다리는 본 적이 있다. 하미마을을 지나 2㎞ 남짓이면 강 건너로 수동마을이 보이고 왼쪽 산 위의 마을이 번평마을이며 번들이라고도 한다.

마을 앞 강 한가운데는 용바위라는 것이 있는데 큼지막한 바위의 가운데가 쪼개져 있다. 강에 살던 용이 용틀임을 하며 지나 간 흔적이라고 한다. 섶다리는 지금 놓여 있는 시멘트다리가 있는 곳보다 남쪽인 나루터 근처에 놓였다. 큰 바위를 시멘트 구조물로 떠받쳐 놓은 것이 있는데 그 앞에 다리가 놓였으며 마을 주민 20명이 아침부터 서둘러 오후 4시쯤이면 다리가 완성되었다. 길이는 50~60m 남짓, 폭은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은 30㎝ 남짓이었으며 강물에서 다리 상판까지의 높이는 가장 높은 가운데가 2m50㎝는 족히 되었다.

상판의 양 옆으로 주민들이 소깝이라고 부르는 섶을 풍성하게 까는 까닭은 아래로 물이 흐르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좁은 다리를 건너며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 어지럼증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 다리를 일직선으로 놓지 않고 S자로 휘어지게 놓았는데 이는 약한 다릿발이 거센 물살을 견디게 하기 위한 지혜이다. 섶다리는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사용했으며 봄비가 거세게 내린 다음날 강으로 나가면 물살을 견디지 못한 다리가 떠내려가고 없어, 해마다 다리를 새로 놓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