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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걸 어쩐다? 이번에 여행코스로 잡은 곳이 하필 유적지다. 하지만 걱정은 나중에 하자. 이젠 ‘여유’라는 선물이 생겼다. 쫓기듯 버스에 올라 이동에 이동을 거듭해야 했던 수학여행의 안 좋았던 기억을 털어버릴 때도 됐다.
백마강이 유유히 흐르는 백제 땅 충남 부여. 1400년 전 멈췄던 시계가 다시 돌아가고 있는 곳이다. 고색창연한 이 고장은 한창 ‘탈피’ 중인 가을의 색깔과 딱 어울리는 여행지다. 백제가 위례성(서울)에서 웅진(공주)을 거쳐 마지막 도읍지로 삼은 부여는 지금도 당시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생생한 역사체험 장소다.
그러나 더 이상의 깊은 역사이야기는 잠시 접어두자. 이번 여행은 ‘공부’하는 여행이 아니다.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초가을 백제의 분위기에 취하는 여행’ 쯤으로 해두자.
예전에 다녔던 답사코스와 순서를 반복할 필요도 없다. 정림사지 등 특히 판에 박힌 장소는 되도록 나중으로 미루자. 그런 의미에서 ‘궁남지’는 백제 여행을 시작하기에 더 없이 좋은 장소다.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궁남지는 연꽃 천국이다. 읍내에서 남쪽으로 1㎞쯤 떨어진 곳에 커다란 연못공원이 있는데 이곳이 ‘마래방죽’이라고도 불리는 궁남지다. ‘궁의 남쪽에 만든 연못’이라 해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백제 무왕 ‘서동’의 탄생 전설이 깃든 못이기도 하다. 기록상으로 따지면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이다. 신라 안압지와 일본 조경의 모델이 된 유명한 장소다.
궁남지의 연꽃은 이제 거의 질 때다. 지난 여름 홍련과 백련, 가시연, 노랑어리연 등 수많은 연들이 꽃대를 밀어올리자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기에 바빴다. 철시한 바다처럼 요즘의 궁남지는 한가하고 고적하다.
궁남지에서는 연꽃의 열매인 연자를 첫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볼 수 있다. 연자는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 하나 ‘툭’ 꺾어 그 안의 열매를 털어보니 아직은 덜 여물었다. 연자가 다 여물면 껍데기가 암갈색으로 변하고 딱딱해진다. 연자는 위장, 신장 등에 좋다고 소문이 나 있다.
궁남지 한가운데는 커다란 누각이 세워져 있다. 누각까지 다리가 놓여져 정취를 더한다.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궁남지 한 귀퉁이에는 아주 작은 연못이 있다. 주차장에서 들어오다 보면 이 작은 연못이 오른쪽으로 보이는데 마치 단풍이 든 것처럼 연잎들이 형형색색 옷을 갈아입고 있다. 사이사이 작은 홍련들이 함초롬히 꽃을 피웠다. 이 작은 연못에 가을을 다 가두어 놓은 듯하다.
궁남지에서 북쪽으로 1.5㎞쯤 떨어진 곳에 부소산이 살포시 앉아 있다. 사실 산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높이다. 그 키가 겨우 106m에 불과하니 한달음에라도 달려 올라갈 기세다. 그러나 이곳은 무시할 수 없는 부여의 명산이다. 사비성이라고도 불리는 부소산성이 허리띠처럼 둘레를 두르고 있고 삼천궁녀 전설이 깃든 낙화암도 품에 안고 있다.
부소산은 산책하듯 곳곳의 유적을 답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부소산성을 따라 산을 한 바퀴 둘러보는 데는 2시간가량 걸린다. 이 산성은 왕궁을 수호하기 위해 흙을 돋워 만든 것이다. 산성의 길이는 약 1.5㎞. 성 안에는 반월루, 사자루 등의 누각과 군창지 등의 건물터가 산재해 있다.
매표소를 지나 산성 안으로 들어가면 길이 양 갈래로 나뉜다. 보통은 삼충사 쪽으로 난 우측으로 돈다. 삼충사는 절이 아니라 사당이다. 백제가 망할 때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계백 등 세 명의 충신을 모신 곳이다. 산성에는 삼천궁녀를 기리는 궁녀사 등 삼충사 같은 사당이 두 개 더 있다. 삼충사를 지나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면 영일루와 궁녀사 등에 곧 닫는다. 주변은 온통 소나무숲이다. 아직 심술이 남은 더위가 땀을 뽑아내지만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도 싱그럽다.
부소산성은 부여 최고의 전망대인 백화정을 가지고 있다. 궁녀사에서 20분쯤 걸으면 백화정이다. 삼천궁녀가 백마강으로 몸을 던진 낙화암이 백화정 아래에 있다. 조용했던 산이 갑자기 아이들의 목소리로 소란스럽다. 수학여행을 온 초등학생 무리다. ‘몇 시까지 주차장으로 가야 하니 얼른 가자’는 선생님의 목소리. 다녀간 장소에 대한 추억이 남을 리 없다.
낙화암에서 굽어보는 백마강은 절경 그 자체다. 강가에는 벼들이 황금처럼 반짝이고, 흐르지 않는 듯 고요한 강물 위로 유람선이 미끄러진다. 선착장은 백화정에서 200m 아래에 있는 고란사에 있다. 삼천궁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절이 바로 고란사다. 유람선 탑승 요금은 고란사에서부터 구드래공원까지 편도 2700원, 수북정까지는 5000원이다. 왼쪽으로 낙화암과 벼루처럼 이어진 푸른 강벽이 아름답다.
부여 여행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백제역사문화관도 들러봄직하다. 올 3월 개관한 이곳은 위례성, 웅진, 사비 등 백제의 역사와 백제 사람들의 생활상 등을 보여주는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특히 이 문화관에는 사비도성 복원모형과 돔영상 프로젝트, 각종 영상하드웨어 69종과 백제금동대향로 탐사 등 영상소프트웨어 23편을 설치, 찬란했던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이곳이 여타의 박물관과는 달리 어린이체험실을 따로 마련해 백제의 문화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생활에서도 사용이 가능한 전통공예품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고, 금동대향로 관람 후 비파와 비슷한 ‘완함’이라는 악기 만들기에도 도전해 볼 수 있다.
2층 전시실에서 바라보면 문화관 뒤편으로 엄청난 공사가 진행 중인데 백제역사재현단지를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무려 100만 평 규모에 옛 부여의 모습을 재현할 예정이다. 2010년 완공이 목표다.
읍내 곳곳에서는 발굴작업이 한창이다. 부소산성에서 구드래공원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백제유적 발굴현장이 있다. 일반에게 개방돼 있다. 서논산IC 방향 4번 국도변에도 발굴현장이 있다. 능산리사지로 불리는 이 절터에서 그 유명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다. 사지 옆에는 고분군이 있다. 백제시대 왕들의 무덤이 여인네의 젖가슴처럼 솟아 있는 고분군 산책도 호젓하다.
한편 9월 28일~10월 2일 닷새 동안 부여에서는 백제문화제가 펼쳐진다. 그야말로 백제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여행 안내
★길잡이: 경부고속국도→천안JC→천안·논산 간 고속국도→서논산IC→4번 국도→능산리고분군→부소산
★잠자리: 부여 읍내에 부여문화관광호텔(041-835-5252)이 있다. 이외에 그다지 마땅한 숙박업소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읍내에서 서북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외산면 만수산자연휴양림(041-830-2348)의 ‘숲속의 집’을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먹거리: 구드래조각공원 근처에 있는 구드래돌쌈밥(041-836-9259)이 유명하다. 돌쌈밥은 각종 야채와 편육을 돌솥에서 방금 한 밥에 싸먹는 것이다. 이 밥은 인삼과 각종 한약재를 넣어 몸에 좋고, 유기농 야채는 싱싱하고 향이 일품이다. 인삼돌쌈밥 1만 3000원, 인삼돌쌈정식 1만 8000원.
★문의: 부여군청 문화관광과(http://www.buyeotour.net) 041-830-2252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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