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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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들어야 보기] 정진석

鶴山 徐 仁 2006. 7. 9. 08:38
2006년 7월
 
지난 6월6일, 충북 음성 꽃동네를 찾은 정진석 추기경은 어머니 묘지 앞에서 머리 숙여 부모를 위한 기도문을 나지막이 암송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주기 되는 날이었다. 칠순을 넘긴 나이인데도 어머니 생각만 하면 그의 눈가는 어느새 젖어 든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신 후부터 침실에 영정을 걸어두고 잠자리에 들 때, 또 일하러 나갈 때 생전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슴으로 나눠 왔지만 묘 앞에 서니 다시 그리움이 사무친다. 육신은 사라졌으나, 어머니는 그의 마음속에 따뜻하게 살아 있다.

그가 입은 선홍색 추기경 예복은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쳐 피운 한 송이 꽃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생전에 ‘희생’과 ‘절제’를 스스로 실천하면서 아들을 가르쳤다. 그 삶이 추기경의 오늘을 이끌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는 혼자 키운 외아들을 사제로 ‘봉헌’함으로써 신에게 받은 모든 것을 돌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 아들이 지난 2월22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세계에서 193명밖에 없는 추기경에 임명됐다. 한국 천주교는 김대건 신부가 처음 사제 서품을 받은 뒤 160년간 4,382명의 신부를 배출했고, 그중 두 명이 추기경이 됐다. 이 모습을 직접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에게는 행복한 헌신이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 이복순 씨는 스무 살에 아버지 정원모 씨와 서울 명동성당에서 결혼했다. 양가가 모두 4대를 이어온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다. 부친은 서울 종로구 수표동에서 경대(낮은 화장대)를 만드는 가구공장을 운영해 넉넉했던 장인집에서 처가살이를 했다.

아버지 鄭元謨에 대한 아픈 사연

정 추기경은 어머니가 23세 되던 해인 1931년 12월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였던 당시 부친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하면서 빈번하게 옥살이를 했고, 생활이 그렇다 보니 거의 집을 떠나 있었다. 친척들에게 단편적으로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이런 부친의 삶과 재산가였던 외할아버지의 삶은 조화를 이루지 못해 집에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가 태중에 있을 때인 1931년 여름, 부친은 ‘조선공산당 재건 국내공작위원회 사건’의 핵심 인물로 구속돼 3년의 옥고를 치렀고, 1944년 다시 ‘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으로 구속돼 경기도경에서 조사받던 중 해방을 맞아 석방된 뒤 북으로 떠났다.

그가 아버지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 것은 서울대 공대 화공과에 입학했을 때 호적초본을 떼어 보고서였다. 어머니는 그에게 아버지가 일본으로 간 뒤 연락이 끊겼다고 했을 뿐 다른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당시 냉전체제 속에서 북한으로 떠난 남편으로 인해 아들의 앞길에 어려움이 닥칠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그는 처음 본 부친의 한자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북으로 넘어가 새살림을 차렸고, 1950년대에는 공업성 부상(차관)까지 지내다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33년 당시 ‘조선공산당 재건 국내공작위원회’ 사건의 핵심 인물로 일간지에 보도된 부친의 사진을 최근 확인할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못 만난 아버지였지만, 그는 사진을 보고 자신이 아버지를 닮은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성장기에 아버지의 빈자리는 외할아버지가 채워 주었다. 맏딸이었던 어머니는 삼촌과 이모들은 물론, 공장에서 일하는 직공 25명의 식사 수발까지 도맡았다. 외할아버지는 당시 명동성당 신도회장으로서 성당 지도자답게 모범적인 가정을 이끌었다. 비록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된 인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에 그는 늘 감사한다.

어머니의 교육은 엄했다. 어린 시절 밖에서 욕을 배워 들어온 그는 어머니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좀처럼 큰소리를 내지 않던 어머니의 그 모습을 보고 ‘욕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굳게 자리 잡아 그 이후 단 한 번도 욕을 해 본 일이 없다. 그렇게 만들어진 부드러운 인성은 훗날 한국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그를 죽음의 위기상황으로부터 구한다.

어머니는 정 추기경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하고 복사(服事:신부 옆에서 미사 진행을 돕는 소년)를 하도록 하면서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살아가는 길로 이끌었다. 계성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어머니와 함께 겨울이나 여름이나 새벽 미사에 한 번도 빠짐없이 나가 복사 일을 했다. 어머니는 그가 새로 사 준 연필과 공책을 가난한 아이들에게 나눠 주고 빈손으로 돌아와도 아무 말 없이 다시 사 주었다. 베푸는 삶의 가치를 어머니는 그런 식으로 가르쳤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10년간은 하루에 책 한 권을 읽을 정도로 책을 읽는 일에 빠져 살았다. 중앙고등학교 시절의 생활도 ‘범생이’ 그대로였다. 이때 그의 꿈은 발명가가 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면서 살겠다고 결심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비록 길은 달라졌지만, 그렇게 갖게 된 독서 습관은 그가 교회법의 대가인 사제로 성장하고, 또 23권의 저서와 13권의 번역서를 출간할 정도의 학구파로 명성을 높이는 데 바탕이 됐다. 그는 오래된 습관대로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글을 쓴다. 요즘의 화두는 많은 사람이 읽기 쉽도록 성서를 해설하는 일이다.

한국전쟁… 그 고난의 시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 봄, 그는 서울대 공대 화공과에 입학했다. 중앙고등학교에서 44명이 서울대에 진학했는데, 그는 담임의 권고에 따라 화공과에 지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누구네 집 자식이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것은 큰 자랑이었다. 비록 아버지는 없었지만 유복한 가정에서 어려움 없이 성장해 서울대에 입학한 그가 전쟁을 겪지 않았다면 사제의 길로 들어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해 6월25일 전쟁이 터졌고, 순간 그의 삶도 혼돈 속으로 빠졌다. 남한정부가 반격 중이라는 말을 믿고 피난하지 않았던 청년들은 인민군에게 잡혀가 낙동강 전투에 투입돼 떼죽음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는 지금도 당시 국민을 남겨 두고 자신들만 도망한 정부 인사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심정이다. 그해 9월28일 서울 수복이 이뤄질 때까지 석 달 동안 그는 인민군에 차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숨어 지내야 했다.
 
그해 12월에는 중공군이 개입해 다시 피난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어머니는 12월 초 먼저 부산으로 떠났고, 그가 집에 남아 재산을 지키던 중이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정부는 강제로 피난하게 했다. 그때 그는 동네마다 조직된 국민방위군에 들어갔다. 창경궁 자리에 소집돼 괴나리봇짐 같은 것을 하나씩 지고 죽음의 행진을 시작했다. 전 재산을 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마산까지 이어진 행진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언 강을 건너다 얼음이 꺼져 물속에서 아우성치며 죽어 가는 광경을 바라봐야 했다. 또 경북지역에 도착해서는 바로 앞에 가던 사람이 지뢰를 밟아 주변에 있던 사람이 몰살당하는 처참한 광경도 목격했다. 마산에 도착해서는 초등학교를 하나씩 점령해 분산배치한 후 철조망을 쳐 놓고 집단생활을 하게 했다.

한겨울에 아무런 온기도 없이 짚을 깔고 자는 생활 속에서 매일 아침 일어나면 한두 명은 얼어 죽어 있을 정도였다. 이런 그들을 전쟁터에 내보내기 위해 국군이 나타나 운동장에 줄을 세운 채 현역으로 차출해 갔다. 주먹밥으로 겨우 허기나 때우던 청년들은 그렇게 전선으로 불려 나가 죽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머무르던 초등학교를 책임지고 있던 소령이 기간 사병이 필요하다며 중학교 이상 나온 사람을 찾았다. 그는 기간 사병이 되면 전쟁터의 총알받이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손을 번쩍 들어 기간 사병으로 뽑혔다. 그즈음 국민방위군사관학교가 생겼고, 여기에 들어갈 만한 사람을 선발하는 업무를 맡았던 그는 자원해 2,000명에 이르는 사관생에 포함돼 한 달 반 정도 교육받고 소위로 임관했다.

하지만 대구 국민방위사령부에서 부식을 떼어먹은 사건이 탄로나 사령관과 책임자 몇 사람이 사형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국민방위군이 해산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오갈 데가 없어진 그는 대구에 있던 미군 보급창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 미군은 영어를 할 수 있는 공대생인 그를 통역관으로 채용했다. 그러면서 자동차 정비를 하는 한국인 노무자 100명을 관리하도록 했다.

지뢰로 둘러싸인 군부대 철조망 안에서 일하는 전시의 노무자들은 거칠었다. 노름으로 시간을 보냈고 여차하면 사람 죽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두려운 존재들이었다. 그래도 그의 말은 들었다. 그가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들에게 욕을 하며 함부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또한 어머니의 가르침이 그를 보호한 경우다.

얼마 후 미군부대를 따라 부평으로 올라온 그는 천주교회 보육원을 운영하던 김영식 신부와 인연이 닿아 미군부대에서 부식과 건축자재를 얻어다 주며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동참했다. 당시 보육원에서 생활했던 이인복(전 숙명여대 교수) 나사렛성가원 원장은 원생들이 그를 ‘작은 오빠’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를 따라 부평으로 올라와 삯바느질을 시작했다.

전쟁을 겪으면서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유복한 가정에서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기 때문에 전쟁의 상처는 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울에서 마산까지 걸어가는 죽음의 행렬을 겪으며 “내 생명은 오늘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는 주어진 1분 1초를 최선을 다해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답은 사제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제일 큰 문제는 어머니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대를 잇지 않고 사제가 되겠다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1954년 초였다. 어머니에게 그간의 심정과 자신의 결심을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웬만한 일에는 내색을 안 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성격이었는데, 어려운 결정인지 즉답을 하지 않았다. 이틀 후 아들을 불러 앉힌 어머니는 번뇌 없는 모습으로 “뜻대로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죽는 순간까지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신에게 ‘봉헌’한 아들에게 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철칙을 지켰다.

아들 주교 서품 소식에 어머니 기절

그는 허락을 받고 바로 가톨릭대 신학부에 입학했다. 7년간 이어진 신학교생활은 엄격했다. 그는 5시 10분 전에 일어나 오후 10시면 잠을 자는 신학생으로서의 생활을 철저하게 지켰다. 사제가 되는 길은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보다 생활규범을 따르는 일이 더 힘들기 때문에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사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 생활습관은 지금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1961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서울대교구 중림동 보좌신부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성신고등학교 교사로 7년간 재직한 뒤 로마 우르바노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 교회법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후 교회법의 대가로 한국 가톨릭에 큰 업적을 남겼다. 1986년부터 2001년까지 15년간 중단 없이 15권의 교회법 해설서를 냈다.

아시아 국가 중 자국 언어로 된 교회법 해설서가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세계에서도 이런 해설서를 출간한 나라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가톨릭계에서는 큰 업적으로 기록돼 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허영엽 신부는 “교회법 해설은 번역과 달리 법전을 해석해 실용화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하고, 시간을 쏟아 붓는 정열이 필요한 일이어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작업”이라고 했다.

그는 1970년 귀국하자마자 39세의 나이로 주교 서품을 받았다. 최연소 기록이었다. 기자들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 하고는 그대로 정신을 놓을 정도로 기뻐했다. 주교가 된 직후 그는 어머니에게 감사의 선물을 전하고 싶어 원하는 것을 물어봤다. 이에 어머니는 사진 한 장을 같이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아들과 찍은 사진 한 장을 어머니는 보물처럼 아끼며 머리맡에 두고 살았다.

아들이 주교가 된 상황에서도 그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삯바느질을 쉬지 않으면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 염을 하고 기도해 주는 봉사를 하는 천주교 연령회원으로 일했다. 사제에게 사사로운 가족의 일은 방해가 될 수 있다며 사제가 된 이후 아들에게 단 한 번도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주교가 지금 기도를 할 거야” “주교가 지금 번역할 시간이야”라며 그리움을 표현하고는 했다고 한다.

당시 부평 한 성당에서 그의 어머니를 만난 이인복 원장은 “주교의 어머니가 왜 혼자 외롭게 여기서 사시느냐”고 물었다. 어머니의 답은 간단하고 감동적이었다. “성직자로 바쳤는데 어떻게 같이 살아? 그럼, 봉헌이 아니게?”라는 것이었다.

정 추기경은 주교가 되면서 청주교구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주교로서 안락할 수 있는 생활을 마다했다. 어머니를 생각해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켜지 않고 지냈으며, 바지 한 벌을 18년 동안이나 입을 정도로 청빈하게 생활했다. 근검절약은 그의 상징과도 같다. 이면지 사용을 중시해 교구청 내 별명이 ‘이면지의 제왕’이 될 정도였다. 또 지금도 사용하는 서류가방은 20년째 사용하는 것이다. 철마다 옷이 한두 벌이어서 여름철이면 세탁하는 아주머니가 아주 힘들어 한다.

그는 식사 초대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소외감을 느낄까 봐 아예 외부 초대를 받지 않고 교구 내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절제된 생활을 했다. 이렇게 생활하는데도 신자들이 “생활비에 보태 쓰라”며 한두 푼씩 내놓은 돈을 40년 동안 모아 어머니의 유산과 합해 5억 원을 만들어 1999년 어머니가 묻혀 있는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학에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어머니는 그가 청주교구장으로 재직하던 1996년 별세했다. 노환으로 스스로 거동할 수 없게 된 어머니는 1995년에야 부평을 떠나 아들이 있는 청주에서 가까운 음성 꽃동네로 이사했다. 오웅진 신부가 세운 꽃동네는 그가 청주교구장으로 있으면서 설립 당시 큰 도움을 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노환 중에도 어머니는 “죽어서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며 사후 안구 기증 의사를 밝혔다.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어머니가 1996년 6월6일 세상을 뜬 직후 행해진 안구적출수술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것이 어머니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시대의 아픔 치유해 주는 정신적 지도자 갈망

그는 어머니의 장례를 마친 후 유산을 모두 정리해 그중 일부로 충북 증평군 증평읍 초중리에 땅을 사 초중성당을 건립하고 본당의 이름을 ‘성녀 루시아’로 지었다. 루시아는 어머니의 세례명이다. 로마시대 두 눈을 잃고 순교한 성녀 루시아의 삶을 따라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보물인 아들을 신에게 바치고 두 눈마저 기증하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삶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그는 얼마 전 초중성당을 방문해 루시아 성녀의 그림을 증정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2년 후인 1998년, 그는 대주교가 돼 서울대교구장을 맡아 자신이 태어나 자란 명동성당으로 돌아왔다. 이어 지난 2월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1969년 추기경으로 임명된 뒤 37년 만에 한국의 두 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추기경 서임이 발표된 직후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면 무엇을 해 드리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절을 하고 싶어. 끝없이 많이…”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희생과 기도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그도 없었을 것임을 헤아리는 아들의 마음이 그대로 담긴 말이었다. 그는 지금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 칠순을 넘겼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어리광을 부리는 아들의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

교황청에서 그를 추기경으로 승품한 이유는 한국에서 가장 크고 상징적인 서울대교구장인데다 평양교구장서리를 함께 맡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 서독 출신인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분단국가와 공산권 국가 선교에 많은 관심을 나타내 왔다는 것도 배경이 됐다.

오늘날 한국은 남과 북, 동과 서의 대립, 그리고 빈부격차 등 온갖 어려운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이런 갈등과 분단의 아픔을 치유해 주는 정신적 지도자를 갈망하고 있다. 그의 세례명은 니콜라오다. 우리에게는 산타클로스로 알려진 성자다. 유아세례를 받은 지 75년이 지난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산타클로스를 닮았다. 흰 머리와 흰 눈썹, 부드러운 살구 빛을 띠는 양 볼이 그 모습이다. 수심 없이 웃는 모습도 비슷하다. 그가 산타클로스처럼 한반도 전역에 살고 있는 모든 힘든 이들에게 골고루 많은 선물을 나눠 줄 수 있을까? 서울대교구 집무실에서 요란한 굉음을 내는 구식 에어컨 소리를 들어 가며 현안에 대한 대화를 나눠 보았다.

-추기경이 되고 나서 삶에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인지요?

“서울대주교의 책임이 막중한데 추기경으로 발표되니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것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특히 외국인들이 나를 대하는 자세에서 새삼스럽게 내 책임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낍니다. 일상생활에는 전혀 변화가 없어요. 신학생으로 몸에 밴 생활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최근 소설 <다빈치 코드>가 영화화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성서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붙고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어떤 입장입니까? 추기경께서는 읽으셨는지요?

"읽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합니다. 사람들이 흔들릴까봐 걱정했는데 너무 황당해 안 믿는다고 하더군요. 간혹 신앙과 지식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알아야 믿는다는 말인데, 그 말은 모순입니다. 알면 그냥 아는 것이고, 알 수 없으니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온갖 기계로도 병의 원인을 밝혀 내지 못한다고 해서 의사의 치료를 포기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으로 믿을 수 있는 겁니다. 물론 회의적 시각에 대해서도 야박하게 반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회의를 거쳐야 합니다. 또 모순이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순이 없다는 것 자체가 불확실한 것이기도 합니다.”

-<다빈치 코드>가 세계적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핵심은 예수의 결혼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성배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라는 시각이 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구체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빈치 코드>는 ‘당시 율법에 따르면 유대인 남자는 결혼해야 한다’는 주장을 근거로 예수님이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결혼했다고 말하고, 더 나아가 후손까지 낳았다고 주장하는 소설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주장은 <다빈치 코드>가 처음이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빈치 코드>가 이 책들을 근거로 예수 결혼설을 이야기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주장입니다.

<다빈치 코드>… 너무 황당해 안 믿는다는 사람들

사실 유대의 관습은 남성이 결혼하지 않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시대 독신으로 지낸 에세네파를 들 수 있습니다. 또한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결혼했다는 기록이 성서 어디에도 없고, 전승에도 없습니다. 예수 부활을 부인하는 주장은 초기 교회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떤 대응도 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신지요?

“외국에서는 가톨릭에서 분명히 영화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신자들에게 지침을 주는 나라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우리나라 가톨릭에서는 공식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역으로 홍보효과를 줄 수도 있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의 지적 수준이 논픽션과 허구를 분명하게 인식할 줄 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혹시 갈등을 겪는 일반 신자들을 위한 교육자료와 요약된 가르침을 준비해 서울의 각 성당에 보내려고 합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얼마 전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과거 10년 동안 한국에서 천주교는 74%의 성장을 보였다. 다른 종교의 신도는 감소하는데 천주교만 대폭 성장한 것을 보면 <다빈치 코드>와 같은 소설에 부정적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그의 시각은 맞는 것 같다.)

-가톨릭은 진보적 입장에서 현실참여적 입장을 보였습니다. 이번 평택사태에서도 문규현·문정현 형제신부가 단식투쟁을 하는 등 강도 높은 투쟁의 대열에 서 있는데, 사제의 현실참여는 어는 정도가 적정수준이라고 보십니까?
 
"기본적으로 사제들이 준수해야 하는 교회법을 기준으로 말씀 드리면, 교회의 사회참여는 신자들이 사회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현실화하기 위해 행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사회참여는 복음 선포의 본질적 요소의 하나이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인류 구원을 위해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규정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유리될 수 없고 어떤 형태로든 사회참여는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1995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공포한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에 따르면 모든 교회 단체와 성직자와 수도자는 정치단체나 사회단체와 더불어 인간을 위해 봉사하고 공동선과 사회 발전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나 그들과 혼동되는 행동은 피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 정치공동체 내에서 사회적 불균형과 사람 사이의 분열이 심화하는 경우 교회는 선한 의지의 표시로써 이에 대해 항의하고 간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활동은 복음의 정신과 그 가르침에 따라야 하며 화해와 일치를 그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또한 사제들의 모든 사회활동은 교구장의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평택사태를 바람직하게 해결할 방안이 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대화와 타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아닙니까? 다양성이 공존하고 존중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무엇보다 비이성적인 폭력적 충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타협을 위해서는 모두 한걸음씩 물러나 지금의 사태에 관해 냉정함을 되찾아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진정으로 대화한다면 무엇을 풀 수 없겠습니까? 폭력이나 강압에 의한 해결 방법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봅니다.”

-중앙과 지방이 완전히 갈라진 이번 지방선거의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주주의는 투표하는 사람이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미래 운명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이번 5·31 지방선거 결과 가장 우려되는 점은 한쪽으로 지나치게 쏠림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민주주의에서는 견제와 균형이 중요합니다. 중앙과 지방정부 양쪽 모두 이번 결과를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더욱 좋은 해결책으로 찾아 국민에게 신뢰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여당과 야당이 서로 국정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해 나가는 것이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민심을 따르는 길이라고 봅니다.”

-종교와 정치의 공통점은 국민의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해 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통합을 이뤄 내고 있다고 보십니까?

폭력·강압의 해결 방법 바람직하지 않다

“저는 누구든지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하기에 앞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양심과 선의를 믿습니다. 대통령을 포함해 어떤 정치 지도자가 국민의 갈등과 분열을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나약한 인간입니다. 항상 누구나 예외 없이 부족함을 갖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뜻을 가져도 실행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은 완성이 아니라 과정·도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통합이란 정파·경제력·학력·지역 등으로 갈라지거나 구분된 국민을 하나로 일치시켜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치는 모두를 같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간직한 채 공존하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화해·통합 등의 가치는 내가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고 양보하고 포용할 때만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추기경께서도 교사생활을 오랫동안 하셨는데요, 요즘 교권이 바닥에 있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학교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걱정스럽지 않으신지요?

“교권의 중요성은 단순히 학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의 장래와 긴밀하게 관계되는 중대사입니다. 지난번 언론을 통해 무릎 꿇은 교사 사건을 접하고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또한 이런 사건을 바라보는 어린 학생들이 받았을 상처도 무척 심각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건이 우발적이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널리 잠재돼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교사와 학부모가 공통으로 원하는 것은 학생의 올바른 교육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사나 학부모 모두 본래 자신의 자리와 역할을 찾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언어적 폭력이나 물리적 폭력은 안 됩니다. 목적이 좋다고 수단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사회가 너무 조급하고 빠른 것이 안타깝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찾고 조금 천천히 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급하면 실수도 크고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한국 교육 시스템은 여러모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하는데요.

“모든 가치는 정직과 진실에 바탕 둬야”

"오늘날 우리 학교에는 학생은 있지만 제자는 없고, 교사는 있지만 스승은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중·고교 시절은 인생의 싹이 트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최선의 목표가 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 사회는 하루빨리 학생들을 우리 국가뿐 아니라 세계적 지도자로 배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교육의 문제는 법조항 한두 개를 바꾸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일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인 16∼18세의 청소년들이 수능만능주의에 물들고 점수기계가 돼버린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지금이라도 원인을 찾아 함께 해법을 찾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두드리면 열리는 법입니다.”

-황우석 박사를 직접 만나시기도 했는데요. 지난 사태를 지켜보시면서 어떤 소회를 가지셨는지요?

“말하기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논문이 조작됐다니 허망할 뿐입니다. 그래서 논평도 못하겠습니다. 내가 황 박사를 만난 것은 학자로 본 것이기 때문에 그 전제가 무너졌다면 전체가 허망한 것 아니겠습니까? 황우석 사태가 남긴 교훈은 인간의 모든 가치는 정직과 진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국익을 위해 윤리나 도덕을 무시한다면 우리의 삶은 실패하고 맙니다. 거기에는 진리와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다음 세대 지도자로는 어떤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보십니까?
“국가의 미래를 내다보고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또한 지도자는 국민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경제발전만 이룬다고 해서 국민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를 주는 ‘정신적 가치’입니다. 저는 지난해 모세에 관한 책(추기경은 지난해 12월 <민족해방의 영도자 모세>라는 책을 냈다)을 쓰면서 성서에 나타나는 모세의 인격에 대해 많이 묵상했습니다. 특히 지도자들은 모세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세대 지도자는 우선 겸손한 덕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겸손은 지도자에게 제일 요긴한 덕목입니다. 성서에서 교만은 멸망의 시초라고 했습니다. 또한 충성스러운 지도자여야 합니다. 모세의 봉사는 오직 충성으로 일관했습니다. 국민에게 충성하는 지도자야말로 진정한 지도자 아니겠습니까? 또한 관용을 가진 지도자여야 합니다. 다양한 그룹을 통합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은 관용이고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입니다. 이런 지도자를 현명한 국민이 선택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평양교구장서리를 지내셨고, 아버지 문제도 있어 북한문제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계실 것 같습니다. 우리가 대북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으로 보십니까. 또 통일이 이뤄질 것으로 보시는지요?

“민족의 통일이 일시에 찾아오리라고 기대하는 이는 드물 것입니다. 결국 꾸준한 남북 간 교류와 서로 이해를 통해 진정한 화해의 길을 걸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통일과 화해보다 남북이 서로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 달라’고 가슴을 열고 이야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북문제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생각만으로는 이루어지기 힘든 문제입니다. 저는 인도적 측면에서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한 민족, 한 핏줄인데 배고프고 굶주린 이들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대교구는 지난 10년간 100억 원에 달하는 물자를 원조했는데, 이는 선교 차원이 아니라 동족을 위한 인류애적·동포애적 표현으로 원조한 것입니다. 상황이 많이 나빠져 북한을 도와준다는 것이 전보다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인도적 차원에서의 노력은 계속할 것입니다. 이런 원조에 따른 눈에 띄는 성과는 보이지 않지만 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북한에의 상주 사제 파견, 선교활동 보장, 추가 성당 건립 등 과제는 산적해 있습니다.”

(정 추기경은 ‘내 탓이오’를 남북문제 해결의 화두로 삼기 위해 경기도 파주시 통일동산 안에 ‘민족화해센터 및 참회와 속죄성당’을 건립하는 계획을 세우고 그 첫걸음을 내디뎠다)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동력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인재라고 생각합니다. 유능하고 바른 성품의 세계적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대학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대학교육이 직업인과 기술인을 배출하는 데 그치기 때문입니다. 또 대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가르치고 공동선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야 합니다. 개인과 사회의 온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학교에서 기술지식을 습득하는 것 외에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인지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줘야 합니다. 또한 우리 사회가 윤리와 생명윤리 의식을 회복하는 일도 시급한 일이라고 봅니다. 비윤리적 사회가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했는데요. 인구가 줄면 인재가 등장할 가능성도 줄어드는 것 아닙니까?

“생명을 경제이론으로 풀려고 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높은 가치인 생명을 물질적 복지와 연결하면 안 됩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아주 하급 가치인 물질로 생명문제를 풀려고 하니 안 되지요. 경제를 발전시킨다며 산아제한을 구호로 내걸고 결과적으로 낙태를 조장하지 않았습니까?
낙태가 뭡니까? 초기 낙태는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태아는 수태 직후부터 미래의 인간입니다. 수정란에서 강아지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생명체를 함부로 다루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은 억지 주장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형제도 폐지가 논의되고 있습니다. 죄인에게도 사형을 면하게 해 주자면서 자신의 잘못이 0.1%도 없는 태아는 사형당하는 것이 바로 낙태입니다. 사형 집행인은 엄마입니다. 의사는 엄마의 부탁을 받아 집행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머니가 자신의 자식을 죽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형장은 가장 안전해야 할 모태입니다. 사형 방법도 가장 잔인한 찢어 죽이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극악무도한 죄인이나 반역자를 그렇게 죽였습니다.
우리나라 낙태건수는 10년간 해마다 150만 건이라고 합니다. 현재 비율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인구가 6배인 미국에서 한 해에 시행되는 낙태 건수가 이 정도니 인구비율로 치면 6배가 많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낙태되는 아기들이 태어난다면 저출산이 절대로 아닙니다.”

-추기경으로서 평생 할 일로 뜻을 세워 놓으신 일이 있을 법합니다.

“비윤리적 사회는 발전하지 못한다”

“제가 사제 서품을 받는 예식 중 엎드려 모든 성인 성녀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면서 ‘제가 사제로 눈감기 전에 우리나라의 가톨릭 신자가 10%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어요. 당시 2% 정도의 신자가 있었기 때문에 아주 터무니없는 기도라고 생각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루어 주셨지요. 그리고 제가 청주교구 2대 주교로 발령받은 것이 1970년입니다. 초대 교구장님은 미국 메리놀회 신부님이셨고, 부임 당시 한국 신부님이 6명, 미국 메리놀회 신부님이 20명이고, 본당이 22개였습니다. 다수가 미국 신부님이어서 사제회의를 할 때는 영어로 회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어요. 메리놀회는 한국인 주교가 발령받아 오자 이제는 자신들의 사명인 선교가 끝났다며 서서히 철수하는 분위기였지요.

그래서 청주교구에 부임한 날부터 하느님께 ‘청주교구에 사제 100명을 주십시오’라는 청원기도를 드렸어요. 저는 28년간 청주교구장으로 있는 동안 어디를 가든지 사제의 존귀함을 알리면서 신부님이 많이 배출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노력을 했어요. 1998년 6월27 청주교구를 떠나게 됐는데, 떠나기 직전인 23일 사제 서품식이 있어서 그때 사제가 106명이 됐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번 추기경 서임 때도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기도를 했느냐고 질문하는데, 하느님께 말씀 드린 것이니 나중에 밝혀야겠지요?(웃음) 지난번 청주교구에 갔을 때 사람들은 아마도 내가 평양교구장서리를 겸임하고 있으니 남북통일에 관해서였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추기경으로서 처음 서임 발표 때 말씀 드린 것처럼 제가 국민에게 받은 많은 은혜에 작은 것이라도 보답해야 하겠지요. 저는 능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는 작은 별빛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임도경/월간중앙 객원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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