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한국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의 98번째 작품 ‘취화선(醉畵仙)’이 ‘춘향뎐’에 이어 칸영화제 본선 경쟁부문에 들었다. 5월24일
개막되는 칸영화제에서 ‘취화선’이 상을 받게 되면 임감독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중흥기를 맞은 한국 영화계의 경사다.
임감독은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해 여러 차례 최다 관객동원 기록을 경신했다. 1990년에는 ‘장군의 아들’로 서울
단성사에서만 68만명을 동원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1993년 ‘서편제’는 전국에서 35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는 예술가로서 대중성과 예술성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드문 행운을 누리고 있다. 국제영화제의 상복도 적지않게 따라주었다. 강수연이
1986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씨받이’로,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여우주연상을 탔고 1987년에는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신혜수가 ‘아다다’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모두 그의 작품이다. 1993년에는 ‘서편제’가 제 1회 상해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오정해)을
받았다.
‘서편제’는 흥행에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칸영화제 본선 진출에 실패해 임감독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한국 최초로 칸영화제 본선에
들어선 영화는 ‘춘향뎐’이다. 그러나 흥행에는 참담하게 실패했다. 50억∼60억원(한국영화 평균 제작비)을 들여 찍은 영화가 개봉관에서 일찌감치
간판을 내리면 영세한 제작자는 그야말로 존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고 감독은 죄인이 된 기분에 빠져든다.
언론은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과 정일성 촬영감독, 임감독을 ‘노인 트리오’ 라는 불경스러운 호칭으로 부른다. 노인트리오는 요즘
‘취화선’ 일로 늘 함께 다닌다. 개봉 전날 시사회에도 극장 입구에 세 사람이 함께 서 있었다. 영화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 세 영화인들의
얼굴에서 대학입시를 치르고 발표를 기다리는 수험생 같은 초조함을 읽을 수 있었다.
태흥영화사는 서울 한남동 단국대학교 후문 근처에 있다. 이태원 사장이 옛날에 살던 집을 개조해 영화사 사무실로 쓰고 있다.
궁합 잘 맞는 ‘노인 트리오’
반백의 스포츠머리를 한 임감독은 기침을 하면서도 줄담배를 피웠다. 임감독은 말이 어눌한 편이다. 대답이 짧고 생각이 잘 안나면
‘뭐인가’하고 더듬는다.
―이태원 사장은 “두 번씩이나 불러놓고 설마 이번에는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겠지” 하고 기대가 대단하던데요.
“두 번 왔다고 해서 인정으로 주어지는 상이 아니거든요. 작품 자체의 질이 수상을 결정합니다. 상에는 운도 따라요. ‘취화선’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 성향의 심사위원이 많으면 유리하고 그렇지 않으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칸영화제 본선 진출 및 수상이 그렇게 어려운 겁니까.
“세계에서 알아주는 큰 영화제로 칸, 베니스, 베를린, 모스크바영화제를 꼽습니다. 모스크바영화제는 망했지만. 내 영화는
베니스·모스크바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베를린에서는 상을 못 받았지만 본선 경쟁에 두 번 올랐습니다. 칸은 본선에 들어가기도
힘들지요. 내가 1980년대 초부터 칸영화제에 출품하기 시작해 2000년에야 ‘춘향뎐’으로 본선에 들어갔으니 20년이 걸렸죠. 그렇게 벽이 높은
영화제입니다.”
―남양주에 있는 서울종합촬영소에서 영화미술사상 최초로 21억원을 들여 조선말기 서울거리를 재현했다지요. 영화 찍고는 그 아까운 걸
철거하는 겁니까.
“영화진흥위원회에서 6억원을 지원했습니다. 우리가 영화 찍고 난 다음에는 진흥위원회가 넘겨받아 관람객에게 공개할 계획이죠.”
‘JSA’의 촬영 세트도 거기에 있다. 서울종합영화촬영소는 로스앤젤레스 유니버설스튜디오처럼 유명 영화의 세트를 관광객에게 보여주고
입장료 3000원을 받는다. 주말에는 손님이 몰려들어 꽤 장사가 된다고 한다.
‘취화선’은 조선말기 천재 화가 장승업(1843∼97)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오원(吾園) 장승업은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과 함께 조선시대의 3원(園)으로 불린다. 아무 것에도 얽매이기를 싫어해 궁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궁에서 뛰쳐나갔다가 붙잡혀
들어오기 예사였다. 술과 여자를 좋아해 미인이 곁에서 술을 따라야 좋은 그림이 나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김홍도 신윤복에 대한 자료는 풍부하지만
장승업은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마흔 살에 화명(畵名)을 얻어 기행으로 얼룩진 삶을 살다가 쉰둘의 나이에 갑자기 전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소설 작품을 영화로 만드는 경우가 많던데 ‘취화선’은 소재를 어디서 취했습니까.
“기록과 구전을 토대로 도올 김용옥 교수와 내가 함께 시나리오를 썼지요.”
―언제 장승업을 영화화하겠다고 마음 먹었습니까.
“1978년 유신시절에 장승업을 찍어볼까 생각했죠. 왕이 불러서 그림을 그리라고 해도 자기가 싫으면 뛰쳐나가는 용기를 지닌
화가였습니다. 유신정권이 우리의 숨통을 완벽하게 조이던 시대에 자유인의 치열한 삶을 영화로 담아보려는 구상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여의치 않아서
덮어두었다가 이번에 하게 된 거죠.
‘춘향뎐’과 ‘서편제’에서는 판소리를 영상과 만나게 시도했습니다. 소리와 영화를 조화롭게 만나게 해서 판소리를 살려내고 영화로서도
성공시키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취화선’에서는 동양화와 영화가 만났습니다. 줄거리 자체는 장승업이라는 화가의 삶을 다루었지만 영상으로 그린
한국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취화선’에서는 서화, 도예, 판소리, 기악, 의상, 다도 등 한국 예술의 모든 부문이 등장하더군요.
“‘서편제’ 이후 내가 영화를 한다고 하면 도와주려는 쪽이 많아졌어요. 과거에는 외부의 도움 없이 미숙하고 모자란 대로 우리 안에서
해결했어요. ‘서편제’ 이후 문화 전반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영화에 얽히는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했어요. ‘취화선’에서 그런 참여가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진작 이런 풍토가 돼있었으면 우리 영화가 더 빨리 성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동안
서로 너무 갇혀 살고 있었는데 이제나마 열려서 고마울 뿐입니다.”
―‘춘향뎐’에는 조상현씨의 판소리가 영화 중간중간에 끼어들던데요. 춘향, 향단, 이도령, 방자, 월매가 서양 뮤지컬 영화처럼 각자
판소리를 하는 방식으로 했으면 어땠을까요. 판소리와 연기를 모두 잘하는 배우를 구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조상현씨 판소리가 자주 길게 나오니까
영화의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각자 소리를 하는 창극식으로 해갈 것인가, 아니면 한 사람이 주는 소리의 감동을 일관성 있게 해갈 것인가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나눠서 하면 서양의 오페라하고 다를 게 뭐 있어요. 아마 외국에 나갔을 때 아무도 평가해주지 않았을 거예요.
서양음악의 아류 방식이거든요. 영상이 갖는 효과와 소리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서 영화의 평가가 높아집니다. 판소리의 맛에 빨려 들어오지 못하는
분에게는 아무 감흥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 안에 빨려 들어오면 지루함이나 단절감이 안 생깁니다. 우리의 원형을 추구하려는 모험적
시도였습니다.”
동양화와 영화가 만난 ‘취화선’
―100편에 가까운 작품 하나하나에 애착이 가겠지만 그중에서 대표작 하나만을 남기고 모든 필름을 버려야 한다면 어떤 작품을 고르고
싶습니까. 신문 인터뷰에 보니까 ‘서편제’는 나의 얼굴이라는 얘기를 했던데요.
“나의 얼굴 운운은 내가 한 말이 아닙니다. 기자가 그렇게 표현한 거지요. 기자들이 대표작 하나만 꼽아보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감독
입장에서 보면 흠 잡을 데가 없이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되는 영화는 없습니다. 단지 객관적으로 드러난 성과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서편제’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우선 흥행면에서도 한국영화 사상 최고 관객 동원 기록을 깼죠. 젊은 세대로부터 멀어져가는 판소리가 가치 있는 우리의 음악이라는 걸
영화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서편제’를 계기로 전반적으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다고 합니다.”
―‘서편제’는 왜 그렇게 흥행에 성공했다고 봅니까.
“이태원 사장에게도 이 영화는 절대 흥행이 안될 거라고 김 빠지는 이야기를 했지요. 이사장도 동의하더군요. 단지 판소리의 맛을
영상에다가 끌어 담아 관객한테 전달해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필름에 대해 그렇게 엄청난 반향이 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감독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가 워낙 먹고사는 데 급급한 세월을 살다가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면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와 ‘서편제’의
제작이 맞아 떨어졌던 것 같아요.”
‘춘향뎐’은 상영 기간이 짧아 극장에서 보지 못하고 이번 인터뷰를 위해 비디오테이프로 봤다. ‘춘향뎐’은 칸영화제 본선에 진출하면서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흥행에는 참담하게 실패했다.
“너무 잘 아는 소재를 다루어 관객들의 호기심을 끌지 못했어요. ‘춘향전’은 14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지요. 누구나 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소재를 영화로 해 그런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칸영화제 본선에 진출해 세계 시장에 배급돼 해외 교포들이 많이 봤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만 4개월을 상영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할리우드 아류의 한국영화와는 달리 평가가 썩 좋았습니다. LA타임스와 뉴욕타임스가
극찬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감독으로서 입지를 확실하게 굳혔고, 세계 속에서도 한국 영화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영화사로서는 출혈이 컸지만 크게
봐서는 소중한 것을 얻었다고 얘기할 수 있어요.”
그의 고향은 전남 장성이다. 판소리 발원지가 호남지방이다보니 성장기에 판소리를 들을 기회가 더러 있었다. 그렇지만 ‘서편제’ 찍기
전까지만 해도 텔레비전을 보다가 판소리가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릴 만큼 관심이 적었다고 한다.
―언제부터 판소리를 영화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했습니까.
“해방 직후에 임방울 선생 공연을 본적이 있지만 판소리를 좋아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 이청준씨의 ‘서편제’를 읽고
나서 언젠가는 영화로 만들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긴 몇 가지 안되는 것 중에 하나가 판소리인데 소멸돼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서편제’를 찍을 당시에도 판소리에 대해서는 아마추어 수준이었습니다. 아마 감독이 소리의 깊은 세계에 빠져 있었으면 ‘서편제’ 같은
영화는 못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소리의 깊은 맛을 살려내려면 ‘서편제’와는 빛깔이 다른 영화가 나와야 했을 겁니다. ‘서편제’가 감독의
아마추어적인 수준을 영화에 담았기 때문에 관객들이 이해하기 쉬웠을 거라고 생각하죠. 깊은 소리의 세계를 담다보면 관객이 부담스러워집니다.
‘서편제’를 할 무렵에 조상현씨의 춘향전을 듣게 됐어요. 조상현씨의 소리를 짤막짤막하게 들어봤지만 5시간 넘게 이어지는 완창을 들을
기회는 없었습니다. 누가 완창을 들어보지 않고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고 해서 조상현씨의 춘향전 완창을 들어보고 그 소리가 주는 감동에 매우
놀랐습니다. 춘향전 줄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 뻔한 내용을 판소리로 하면서 사람을 엄청난 감동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래서
‘서편제’를 하면서 언젠가 내가 소리에 좀더 빠지면 소리와 영상이 만나는 영화를 한번 해보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소리와 영상의 조화로운 만남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 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춘향뎐’에서 방자가 춘향이 부르러 뛰어가는 장면을
봄 여름 초겨울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찍었지만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만큼 어렵습니다. ‘서편제’를 찍으면서 판소리를 듣는 귀가 열려
‘춘향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 귀가 그렇게 높은 수준은 아닙니다. 판소리는 내부 깊은 곳을 건드리는 감동이에요.”
―‘서편제’와 ‘춘향뎐’은 지금 국립극장장하는 김명곤씨가 각본을 썼죠.
“조정래씨의 ‘태백산맥’을 영화화하려고 준비하는데 문화부에서 아직 이념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룰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작사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도리 없었지요. 1년 후면 노태우 대통령이 물러나고 김영삼씨와 김대중씨 중에서 누구든 대통령이 될 것이고 그리되면 형편이 풀릴
것으로 판단하고 한 1년 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다 느닷없이 ‘서편제’ 생각이 난 거예요.
김명곤·오정해와의 만남
1970년대에는 연기자 중에 소리를 정식으로 배운 소리꾼들이 없었어요. 동학교주 최시형 선생을 그린 ‘개벽’이라는 영화에서 김명곤씨가
전봉준 장군 역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판소리를 너무 잘해 연기자 중에 저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알고 지냈습니다.
김명곤씨는 월간지 ‘뿌리깊은나무’의 기자로 있을 때 판소리꾼들을 많이 취재하고 이 분야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김명곤씨를 만나 내가
‘서편제’를 만들고 싶은데 당신의 도움이 없으면 절대 될 수 없는 영화이니 도와달라고 했더니 선뜻 수락했습니다.
우연히 텔레비전으로 전북 남원에서 열리는 춘향선발전 행사를 보는데 카메라가 오정해 얼굴을 탁 잡았습니다. 아마 준결승인가에서 그
아가씨가 그 자리에서 판소리를 하더군요. 이런 연기자들을 입력하고 있다가 ‘서편제’에서 써먹게 됐죠.”
최근 한국영화는 제2의 중흥기를 맞고 있다. 한국영화는 지금까지 할리우드영화에 종속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부는 한동안
방화 육성책으로 방화 4편을 찍으면 외화 1편의 수입쿼터를 줬다. 한국영화는 외국영화 쿼터를 배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설렁설렁 찍고 정작
돈벌이는 수입 외국영화로 했다. 한국영화에는 저질 싸구려라는 말이 붙어다녀 관객들로부터 점점 외면당했다.
그러나 작년에는 한국영화와 외국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거의 비슷해졌다. 외국영화도 무제한으로 들어오다 보니 관객으로 하여금 시간과 본전
생각나게 하는 저질도 적지 않다. 영화인들이 사활을 걸고 스크린 쿼터제 폐지를 반대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한국은 수입 장벽이 아니라 영화
자체의 실력으로 할리우드에 뺏긴 시장을 수복했다.
조폭영화와 대리만족
―한국영화의 미래가 안 보이던 시대가 한 때 있었잖아요. 그런데 최근에 한국영화가 국내 시장에서는 할리우드영화를 누르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한국영화가 성공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영화판에 양질의 인력이 많이 들어왔어요. 외국 유학 갖다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텔레비전과 함께 성장한 영상문화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만드는 자본도 과거에는 지방 배급업자들에게 의존했지만 지금은 금융회사에서 펀딩을 합니다. 1960년대를 한국 영화의 황금기라고
했지요. 그 뒤로는 쇠퇴의 길로 치달았습니다. 나는 1960년대에 감독을 해본 사람으로서 지금이 그보다 더 좋은 황금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기계와 기술도 좋아지고 유능한 인력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손님도 늘어나 옛날에는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제작비를 투여할 수 있게 됐습니다.”
―19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하던 영화가 1970년대부터 왜 쇠퇴했다고 봅니까. 텔레비전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요.
“물론 텔레비전 영향도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이 결정적으로 숨통을 조인 거예요. 영화는 어떤 소재든 자유롭게 다룰 수 있어야 손님이
모입니다. 그런데 안보 환경 등을 이유로 도무지 영화로 만들 소재를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제작사들은 국산영화로는 타산을 맞출 수가 없었지만
1년에 4편 만들면 영화수입 쿼터를 주니까 날림으로 만들어냈습니다. 그 시절에는 1년에 수입되는 외화가 20편 정도에 불과하니까 어지간하면
흥행이 되었습니다. 한국영화가 숨쉴 공간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우수영화라고 찍어 수입 쿼터만 따먹고 극장에서 개봉도 못해보고 묻혀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최근에 ‘친구’ ‘조폭 마누라’ ‘신라의 달밤’ 등 관객 동원에 성공한 영화 중에는 조폭 시리즈가 많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실망스러운
대목이 있어요. 마피아 영화에도 ‘대부’ ‘언터처블’ ‘애널라이즈 디스’ 등 명화가 많지요. 우리는 이 수준에 현저히 못미치는 것 같아요.
임감독도 ‘장군의 아들’이라는 조폭 영화를 찍어 히트한 바 있지만 조폭영화의 유행이 언제까지 갈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조폭 영화를 본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합니다. 세상이 너무 어지럽다보니까 힘의 논리로 사는 사람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는 관객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대리만족에서 그쳐야지 동경의 대상이 돼서는 안됩니다. 조폭 영화가 히트하다가 유행처럼 수그러들면 코미디나 멜로 드라마로 바뀌어갈
겁니다. 조폭 시리즈가 언제까지 인기를 누린다고 할 수는 없죠. 대부 같은 좋은 영화가 안나오는 것은 아직 우리 영화계에 숙련된 인적 자원과
첨단 기술 기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친구’에서 살인법을 아주 상세하게 지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을 확실하게 죽이려면 허파에 칼을 꽂아서 90도 틀어주라는 식으로.
할리우드의 잘된 마피아 영화를 보면 너무 끔찍한 장면은 생략하거나 암시로 끝내잖아요. ‘친구’를 보면서 과연 저런 살인기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장면들이 영화에 그대로 나와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화뿐만 아니고 텔레비전도 그런 기능을 하고 있잖습니까. 가령 사람을 납치해 신용카드를 사용해 돈을 빼내는 구체적인 내용들이
나오잖아요. 영화뿐만 아니고 텔레비전도 사회에 대해서 밝고 건강한 쪽으로 이바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끔찍한 사건들이 빈발하다 보니 유난히
그런 생각이 절실해집니다.”
임감독은 1970년대까지는 흥행사의 요구에 따라서 영화를 마구 찍던 싸구려 저질 감독이었다고 스스로 술회한다. 영화 두 편을 동시에
‘가케모찌(겹치기)’로 찍었다는 전설도 있다. 1962년 데뷔해 1972년까지 10여 년 동안 50여 편을 찍었다. 한해에 평균 다섯 편
꼴이다. 지금은 2년에 한 편 만들고 있으니 그때는 엄청나게 찍어댔다고 할 수 있다.
70년대까지는 싸구려 감독
―액션 영화감독에서 예술영화 감독으로 전환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영화촬영이 스케줄대로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고 어떤 연유로 촬영이 늦어져 새 작품과 시기가 겹치면 가케모찌를 했습니다. 완전히 흥행만을
목적으로 찍은 허황한 영화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삶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허구의 쓰레기들이었습니다.
10여 년 그런 생활을 하면서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허황한 영화만 찍다보면 내 인생도 허황한 것으로 끝날 게 아니냐는 자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삶 자체의 목적을 영화 만들기에 두고 있는 나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도 거짓 없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60년대 후반부터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제작하는 현실이 그렇게 한가하지 않았습니다. 영화 제작자들이 입도선매식으로 지방 판권을
팔아 돈을 마련했습니다. 호남 영남 충청 강원 경기 등의 배급업자들이 자기 지역의 판권료를 미리 내고 사는 거죠.
3류 감독으로 살던 사람이 진지한 작품을 하고자 해도 누가 믿어주나요. 저질 영화를 찍는 감독으로 꼬리표가 붙어있었으니까. 그래서
변신의 몸짓으로 ‘잡초’(1973)라는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지방업자들에게 판권을 팔아 직접 제작했는데 흥행에서 참패했습니다.
그러나 저 친구가 진지한 영화도 찍을 수 있는 감독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지금까지 만들어 온 작품 성향에서 벗어나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10여 년 동안 저급한 취향이 체질이 돼 있었지요. 이런 독소를
빼내는 작업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1970년대는 한국영화사상 최악의 암흑기였습니다. 유신정권 때는 흥행과는 무관하게 단지 건전한
영화를 찍어 편 수를 채우거나 쿼터가 배정되는 영화제에 출품해 상을 타면 됐습니다. 흥행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한 10년 동안
작품에서 저급한 취향을 빼냈지만 그러다보니까 정말 영화가 재미없어져요. 굵직한 주제는 있으되 영화로서의 흥미는 없는, 뼈만 있고 살은 없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1970년대에 10여 년간 그런 과정을 거쳐 1980년대 들어와 ‘만다라’(김성동 원작) 같은 영화를 하게 됐습니다.”
―영화 ‘태백산맥’은 원작하고 지향성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은 좌파 이데올로기를 미화했다는 이유로
검찰 수사를 받기도 했지요. 소설을 영화화할 때 원작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까. 아니면 새롭게 창작한다는 기분으로 임합니까.
“‘만다라’도 원작이 하고자 했던 테마와는 다른 내 생각을 넣었기 때문에 원작자는 불만이 많았어요. 원작은 주인공이 소승적 수도를
해가다가 대승적 세계로 들어가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것보다는 소승적이든 대승적이든 관계없이 각(覺)을 향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찍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원작이 해놓은 걸 일부러 비틀 이유는 없지만 테마를 보는 견해가 원작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령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은 조금
좌편향적인 느낌이 드는 작품입니다. 좌와 우의 충돌, 그런 혼란의 시대를 체험한 세대가 직감적으로 갖는 생각이 있어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구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회의라고 할까요. 6·25라는 동족끼리의 참담한 전쟁을 일으켜 좌와 우 쪽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 하는 거죠. 국토는 황폐해지고 사람들한테 엄청난 희생만 요구했던 거죠.”
임감독의 집안은 좌편에 가담하고 있었다. 임감독의 할아버지 3형제 중 큰 할아버지의 둘째아들(당숙)이 일본 유학시절 사회주의에 물들어
옥고를 치르고 귀국했다. 그의 영향으로 집안의 젊은이가 모두 사회주의 운동에 나섰다. 찬탁 반탁을 두고 시국이 들끓던 시절에 임감독은 어른들의
지시에 따라 서투른 글씨로 ‘신탁통치 지지하자’는 전단을 만들어 경찰 모르게 동네 곳곳에 뿌리고 다녔다.
좌익이었던 집안 어른들
빨치산이던 삼촌은 보급투쟁(식량조달)에 나섰다가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죽고, 아버지도 빨치산에 가담해 산생활을 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아버지는 자수했지만 사회와 절연한 생활을 하며 병을 앓다가 1965년에 작고했다. 임감독은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에 참석했다가 지리산
빨치산들이 건설하려고 했던 사회주의 국가의 실체를 씁쓸하게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태백산맥’은 군경에 쫓기고 굶주림과 동상에 시달리며 지리산 골짜기를 헤매고 다니는 좌익 이념의 투사들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목숨을 바쳐 건설하려던 사회주의 조국 북한의 모습을 보면 지하에서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합니다.
“우리 집안은 지주 집안이었습니다. 집안의 근거지가 전남 장성군 남면이었지만 할아버지가 나주(지금의 광주시 평동)에도 위토를 갖고 있어
소작료를 받아들였습니다. 지금도 소작인들이 세워놓은 할아버지 송덕비가 남아 있어요. 파묻어 버려야 할 물건이긴 하지만. 당숙이 일본 메이지대학에
유학가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했어요.
당숙은 일본에서 옥고를 치러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명단에 들어가 있습니다. 호남지방의 좌익운동은 농민들이나 무산대중들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유학 다녀온 지주집안의 자제들이 선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지주계급의 사람들이 이상적인 사고에서 평등사회를 부르짖으면서 무산대중의
편에 섰던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분들의 한 많은 삶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망하기 직전의 동구 국가나 소련을 둘러본 소회가 복잡하더라고요. 지리산 일대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그들이 꿈꾸던 사회주의 이상향이 그런 모습으로 전락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구체적으로 소련의 어떤 모습에 대해서 크게 실망했습니까.
“전체주의가 갖는 획일성, 비능률성이라고 할까요. 개인에게 자유가 허용되지 않고 조직에 눌려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태도가 한심했습니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발전적으로 실천되지 않고 그 자체의 모순 때문에 형편없이 주저앉은 실체를 보고 돌아온 거지요. 지리산 빨치산들이 꿈꾸던
이상이 그런 결과를 가져올 줄 사전에 알았겠어요? 하여튼 소련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상세계를 구현하겠다고 개인의 삶은 물론 집안을
풍비박산냈던 사람들이 피땀 흘린 결과가 그런 참담한 모습으로 드러난 것을 보고 충격을 넘어 허탈감을 느꼈습니다.”
“이청준 소설 좋아한다”
―이청준씨 소설 중에서 ‘서편제’와 ‘축제’를 영화로 만들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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