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만해… 산천 정기 받아 태어난 인물
“산천의 정기가 모여 인물이 태어난다”는 옛말이 맞아서인지 오서산과 용봉산 자락 아래 자리 잡은 충남 홍성에서 빼어난 인물이 많이 태어났다. 고려 말의 최영과 사육신 성삼문, 그리고 고승(高僧) 보우의 고향이 홍성이다. 청산리 전투의 명장 김좌진은 갈산면, 만해 한용운은 결성면 성곡리에 태를 묻었다. 한용운은 동학혁명에 참가했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향했고 백담사에서 불문(佛門)에 들어갔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집 ‘님의 침묵’을 펴냈다.
“님은 갔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지금도 뭇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시를 지은 만해의 고향 아래자락에 보령이 있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충청도에서 산천이 가장 훌륭하다”고 하였던 보령은 토정(土亭) 이지함(李芝含)과 ‘관촌수필’(문학과지성사)이라는 연작소설을 쓴 소설가 이문구의 고향이다. 보령시 대관동의 관촌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관촌수필’에 실린 ‘녹수청산’이라는 글은 “대복이네 집은 울타리를 돌아가며 우리 집 푸성귀밭이었지만, 부엌에서 누룽지 긁는 소리가 우리 사랑에 앉아서도 들리네” 등 우리 말의 맛깔스러움을 그대로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문구는 또 생육신 김시습의 생애를 그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문이당)이란 소설을 썼다. 나라 곳곳을 정처 없이 떠돌았던 김시습이 정착한 곳이 바로 보령과 인접한 부여의 무량사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와 ‘매월당집’을 비롯한 여러 저술을 지은 김시습을 두고 이율곡은 ‘김시습전’에서 “한 번 기억하면 일생 동안 잊지 않았기 때문에 책을 가지고 다니는 일이 없었다”고 적었다. 그는 무량사에서 쉰아홉살에 쓸쓸히 병들어 죽었다.
“살아 생전 희비애락(喜悲哀樂)은 물결 같은 것”이라고 말한 김시습의 글을 떠올리며 부여에 이르면 민족시인 신동엽을 만나게 된다. 1959년 장시(長詩)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여 문단에 나온 그는 대하서사시인 ‘금강’(창작과 비평사)을 통해 백제에서 동학을 거쳐 4·19혁명을 연결시켰다.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이라고 외쳤던 그는 4·19 혁명이 미완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분단의 이데올로기에서 찾았다. 동학농민혁명은 공주의 우금치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는데, 동학을 주제로 쓴 소설이 북한소설가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깊은샘)과 송기원의 ‘녹두장군’(창작과비평사)이다.
한편 공주의 마곡사는 동학 신도였던 백범 김구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를 죽인 뒤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머리를 깎고 숨어 지냈던 절이다. 마곡사에서 머리를 깎은 김구는 운수승(雲水僧)으로 떠돌다가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고된 중국의 망명생활 중에
지금도 널리 읽히는 ‘백범일지’(범우사)를 썼다.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라는 옛 사람들의 말을 온 몸으로 실천하며
세상을 살았던 사람이 한용운, 매월당, 그리고 김구였다. [신정일 황토현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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