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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아프리카

[스크랩] 마틴 루터 성지(독일 아이슬레벤)

鶴山 徐 仁 2005. 12. 22. 14:32

루터의 생가

 

잘레 강가의 도시 할레의 서쪽 약 20km에 있는 예전의 광산 도시 아이슬레벤에 마르틴 루터의 생가가 있다. 그는 이 곳에서 생후 몇 개월을 지냈다. 

 

루터의 생가

 

루터의 생가

 

루터의 생가

 

루터의 생가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교회와 제단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교회와 제단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교회와 제단

 

루터가 임종한 방

 

데스 마스크가 있는 루터의 임종의 방.  루터가 마지막 설교를 한 안드레아스 성당에서 가까운 장소에 있다

 

 

멜랑흐톤


루터의 평생 동역자였던 멜랑흐톤이다. 그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비텐베르크대학의 그리스어 주임교수로 부임했던 천재적인 학자였다. 그는 본래 신학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비텐베르크대학에 와서 루터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영향으로 종교개혁운동에서 충실한 루터의 동지가 되었다. 대석학이었던 멜랑흐톤은 루터가 그의 신학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됐고,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다.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할 때, 어학 대가였던 멜랑흐톤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터성경’을 오늘날까지 독일 사람들의 사랑 받는 번역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루터가 이끈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은, 루터 곁에 충성스런 동역자 멜랑흐톤이 있었다. 오늘날 비텐베르크시 광장에는 루터의 동상과 멜랑흐톤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어, 종교개혁이 두 사람이 함께 이룬 대업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작센안할트주아이슬레벤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르틴은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도보여행 중 낙뢰(落雷)를 만났을 때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수도회에 들어갔다.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司祭)가 되고,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루터가 1483년에 태어나 1546년에 생애를 마감한 것은 아이슬레벤이었으나, 그가 활동한 중심 비역은 비텐베르크였다.  마르틴 루터는 때때로 태어난 고향을 방문할 때가 있었다.  1525년 6월13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시민들의 축복을 받으며 카타리나와 결혼했다. 이때 루터의 나이는 42세,신부는 26세였다. 후일 루터는 자신의 결혼에 관해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주님은 갑자기 나를 결혼으로 몰아넣으셨다.” 오늘날도 루터의 결혼기념일이 돌아오면 비텐베르크 도시 전체는 축제분위기가 되고 루터의 결혼식을 재현하는 잔치가 벌어진다.  루터는 교황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에게만은 달랐던 것 같다. 결혼 초기 루터의 글을 보면 카타리나를 ‘나의 아내’라는 뜻의 라틴어 ‘도미나’(Domina)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호칭은 ‘나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도미누스’(Dominus)로 바뀌었다. 또한 부인의 이름이 카타리나였으므로 애칭으로 ‘캐티’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애칭도 점차 ‘케테’로 변했다. 케테란 독일어로 ‘묶는 사슬’이라는 뜻이다. 루터는 가정살림에는 전혀 무관심했고, 살림을 꾸려가는 것은 전적으로 카타리나의 몫이었다. 결혼 후 10여년간 루터 부부는 경제적으로 무척 쪼들렸다. 루터의 명성은 높았지만 당시 대학교수의 봉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우선 루터의 집안은 대식구였다. 자신의 자녀 6명과 많은 조카들, 병으로 죽은 친구의 자녀들까지 돌봐야 했다. 루터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은 끊이지 않았고 여행이 쉽지 않은 시대였음으로 손님들은 금방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유 없는 살림에 식솔은 많고 식사 준비, 빨래 등 뒤치다꺼리는 끊이지 않았다. 틈을 내어 닭과 돼지도 치고 채소도 심어 가계에 보탬을 줘야 했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불평하지 않고 억척스럽게 모든 일을 감당해나갔다.  그러나 그런 카타리나에게도 걱정거리가 있었다. 루터의 건강문제였다. 건장해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루터는 지병이 많았다. 특히 담석증은 루터를 계속 괴롭혔다. 루터의 건강을 돌보는 일도 카타리나의 중요한 몫이었다. 루터는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글 쓰는 일에 집중할 때는 서재에서 식사도 거른 채 며칠씩 두문불출했다.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는 아내로서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루터 집안의 식탁은 언제나 공동식사였다. 학생 방문객 동료교수들로 식탁은 언제나 붐볐고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식탁에서 오가는 대화를 기록한 것이 유명한 루터의 ‘식탁대담’(Tischreden)이다. 그에 따르면 카타리나는 단순히 식사시중을 드는 주부만이 아니었다. 그는 신학적인 대화에도 적극 참여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루터로부터 “당신은 로마 교황청의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알고 있구려”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루터와 카타리나는 3남3녀를 두었다. 그 가운데 두 딸을 잃는 슬픔도 경험했다. 루터는 父情만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1000년 동안 어느 주교에게도 허락지 않으셨던 크나큰 축복을 내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내 자녀들은 독일과 보헤미아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내게는 소중하고 귀합니다.” 루터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 과묵한 독일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아내 카타리나에 대한 아름답고 따뜻한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았다. “만일 내가 아내를 잃는다면 비록 여왕이라 할지라도 나는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하지 않으리라.” 1546년 1월 말에 3명의 아이를 데리고 돌아온 것이 그 마지막인데, 그것은 만스펠트의 백작들 사이의 다툼을 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1546년 2월 18일 죽기 사흘 전, 그는 아이슬레벤의 안드레아스 성당에서 다시 한번 설교단에 올랐으나, 약해진 육체는 마지막 설교를 마치지 못하게 했다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생가는 1689년에 화재로 거의 전소되어 1693년에 재건되었는데, 임종의 집은 별 흠집 없이 보존되고 있다. 생가가 재건될 때, 위층은 안뜰 쪽으로 아케이드만큼 불거져 나왔으나, 후기 고딕 양식의 중심 부분은 보존되었다. 의자가 딸린 현관, 입구의 각진 곳을 깎아 낸 평평한 천장, 1층의 아래쪽 계단 등 이전 건물의 요소가 새로운 건물에 도입되었다. 루터의 초상화와 오리지널 편지, 복제 데스 마스크가 있는 루터의 임종의 집도 간소하다. 용골 모양 아치로 테를 두른 의자가 딸린 현관이 파사드를 장식한다. 특히 임종의 방을 포함한 각 방은 역사적인 고증을 거친 치밀한 복원 작업을 통해 추억의 장소답게 꾸며져 있다


 
출처 : 블로그 > 성화사랑 | 글쓴이 : bae sung soo [원문보기]

 
출처 : 블로그 > 은혜(恩惠) | 글쓴이 : 은혜 (恩惠)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