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유럽 아프리카

[스크랩] 쾰른 대성당 (독일)

鶴山 徐 仁 2005. 12. 22. 14:31

 

 

화려한 남쪽 정면 출입구는 네오고딕의 지극히 화려한 형태들을 보여 준다. 모자이크 장식을 한 구리제 문은 1948~54년에 에바르트 마타레가 새로 디자인한 것이다

 

 

 

서쪽에서 신랑을 통해 내진을 바라본 사진으로 우뚝 솟은 신랑부는 천장까지의 높이가 43m 이상이나 된다. 당초에 쾰른 대성당의 모델이 된 것은 프랑스의 大아미앵 성당이었다

 

 

 

 

미완의 쾰른 대성당은 300년간 이 같은 모습을 쾰른 시민들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1798년의 채색 동판화에서는 높이 59m의 하부 구조 위에 건설용 크레인을 얹은 남쪽 탑이 왼쪽에 보인다

 

 

1996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이다.  6세기에 건립된 쾰른 대성당은 중세 및 근대 유럽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영속성과 강렬함을 나타내주는 유력한 증거이다.  2차 세계대전으로 손상된 것을 전후 복원하였다.  라인 강의 왼쪽 강가에 있는 쾰른 옛 시가지에 있는 쾰른 대성당의 쌍탑이 늠름하게 솟아 있다. 쾰른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성페타 문트 마리아 대성당이다. 왼쪽에는 그로스 성마르틴 성당의 완강한 듯한 교차부 큰 탑이 보인다

 

쾰른 성당 ( Cologne Cathedral )

 

중세의 대성당은 대개 몇 세기에 걸쳐 완성된 건축물이다. 그러나 쾰른 대성당의 건설 기간은 1248~1880년으로, 완성되기까지 걸린 무려 632년이라는 수치는 282년의 중단 기간이 있었다고는 해도 평범한 것은 아니다. 1842년의 제2기 공사가 시작되기까지, 내진, 남쪽 탑의 하부와 외진, 익랑의 일부만으로 구성된 거대한 미완성의 건물이 도시 경관을 지배했던 것이다. 드디어 1880년에 완성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애국적인 동기를 바탕으로 한 중세에 대한 회고 의식 없이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세 건축 예술의 정수 - 하인리히 하이네가 쾰른 대성당의 완성 사업에 대해 격양된 어조로 말한 1844년은, 1560년에 일시 중단되었던 공사가 재개된 지 2년이 지난 때였다. 먼 과거의 충동을 새삼 되살리려 하는 일 따위는 시인의 생각으로는 자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애초 중세의 신앙심은 부흥할 수나 있는 것일까? 그것 없이 대성당은 착공되지 않았다. 맨 처음 대성당의 건축가였던 게르하르트 또는 1270년쯤에 그의 후계자가 된 아르노르트, 1308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은 아르노르트의 아들 요하네스, 1353년에 건축 책임자가 된 미하엘 등의 정신세계에 가담하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불손한 일인가? 그들은 동방박사 3인의 유골에 걸맞은 존엄성을 부여하기 위해 장대한 고딕 양식의 대성당을 바친 것이다. 소규모였던 쾰른 대성당의 전신은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건립되었는데,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소박한 형식을 답습하고 있었다. 그 곳이 화재를 입어 재건되었는데, 대규모로 고쳐 짓게 된 것이 이 장대한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 탄생하게 된 출발점이었다. 북프랑스에서 초빙된 게르하르트가 설계를 맡아, 내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다른 거장들의 손길을 거쳐 공사는 익랑, 정면의 탑, 외진으로 확대되어 갔다. 공사를 관장한 바우휘테라는 장인 조직은 각지의 조직과 교류하고, 대성당의 공사에 다양한 지혜와 기법을 투입해, 유럽 수준의 뛰어난 품질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지 오래되었다. 1814년에 다름슈타트의 비녀장 지붕 뒤에서 14세기 초기의 서쪽 파사드(정면) 도면 원본이 우연히 발견되는 센세이셔널한 사건이 있었고, 또한 운좋게 발견된 도면의 부족한 조각을 보완한 것이, 2년 후에 파리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된 중세 후기의 계획안이 결국, 신의 처소를 계속해서 짓개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고딕 양식을 보증했을 뿐만 아니라 서쪽 파사드에 대한 미술사에서의 논의를 정리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외진의 마인드, 익랑, 조각류의 조형 방법에 대해 당시의 도면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의견이 서로 대립되어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예술학자 즈루피츠 보와슬레의 독보적인 지식이 여기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그는 괴테로 하여금 이 계획에 감동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또 [독일, 겨울 이야기]에서 낭송한다. “쾰른 대성당, 그것은 결코 끝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 유명한 시대 정신은 지금도 일찍이 해방 전쟁 이후에 생긴 애국심의 포로가 되어, 혼자 나아가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공사를 계속하는 것을 종교 재생의 상징이라며 환영했고,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이 중세의 문화유산을 사회 정책에서의 사명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바로크 시대에는 위험하고 암울하게 느껴졌던 중세가, 바야흐로 영광스런 새로운 양식이 개화하는 시대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어, 쾰른 대성당은 ‘중세 건축 예술의 정수’로 추대되었다. 시민도 군주도 후원 - 가장 영향력이 있고 엄격한 신고전주의의 권위자였던 건축가 카를 프리드리히 슁켈은 즈루피츠와 메르히오르의 보와슬레 형제, 그리고 대성당 건축가 에른스트 츠비르너와 나란히, 공사가 진전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에 하나였다. 그들은 시민 계급에 호소했다. 정치적인 복고 현상은 시민 계급의 해방을 저해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시민 계급은 대성당을 민족적 고유성이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파악했다. 무엇보다도 재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대성당의 세금과 기부와 헌금으로 비용을 다 충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대성당의 건축 계획은 최고층 인물에게서도 재촉되었다. 빈 회의 이후 쾰른과 그것을 둘러싸는 라인란트 지방은 프로이센의 소유가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서프로이센에 눈에 보이는 상징물을 두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중요하게 인식된 것이다. 황태자 시절 때 즈루피츠 보와슬레에게 감명을 받았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로서도 공사 재개 쪽에 힘을 실어줄 이유가 충분했다. 즉 그에게 이 대성당은 왕권신수설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왕위 계승 이후 대성당에 대한 연도별 국가의 재정 원조를 5배로 했다. 국왕이 당초에 좋아했던 슁켈의 간소화한 계획안은 이윽고 폐지되었고, 1843년에 국왕은 ‘엄밀히 원래의 도면에 따라’ 시공할 것을 명했다.

성스러운 민족 기념비로서 - 종교 재생의 표시, 민족 고유성의 시각적 표현, 신의 은혜를 받은 군주제의 상징, 그것들은 쾰른 대성당의 완성을 제창하는 데서는 일치하지만, 각각 다른 정치적 동기가 있었다. 바이에른 루트비히 1세는 여기에 또 하나의 동기를 부여해 해방 전쟁을 상기시키면서 이 건물을 ‘베프라이웅크스하레(해방기념당)’라고 부른 것이다. 쾰른 대성당이 중세에 주춧돌을 얹은 이후 완성되기까지는 632년이라는 세월이 걸렸고, 이 간격이 대성당이 상징하는 바를 결정적으로 바꾸었다. 당초 신의 이름과 명예를 위해 시작되어, 풍요로운 시민들의 자랑과 자의식을 높이려던 것이, 1880년 10월 15일에는 민족 기념비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대성당에 설치된 ‘황제의 종’은 보불 전쟁의 전리품인 대포를 녹여 만든 것이다. 이 날 높이 156m인 남쪽 탑 꼭대기에 마지막 돌이 올려졌을 때,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는 마치 독일의 땅에서 가장 저명한 종교 건축을 자신의 수중에 넣은 것 같았다. 신생 독일 제국은 찬가, 나들이 옷을 차려 입은 소녀들, 개선 행진, 축하연, 축전 행사를 위한 엄청난 깃발 장식으로 뒤덮였고, 그 중심에 황제가 있었다. 반면 성직자들은 얌전한 조연으로 폄하되었다. 사실, 축전의식과 찬미가는 추기경을 개재시키지 않고 개최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네덜란드로 망명한 몸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국가와 교회 사이에 일어난 문화 전쟁의 그늘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대성당의 완성은 바로 군주제 아래에서의 시민 계급의 축제이지, 교회의 그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쾰른 대성당은 다른 여러 가지의 사건도 포함해, 다양한 분쟁 속을 헤쳐 나왔다. 거기에는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제2차 세계대전도 포함된다. 그러나 1880년 10월 15일에 아버지 나라의 영광, 그리고 정치적인 권력 투쟁이라는 세속적인 사연을 초월해 건축 작품으로서의 본질과는 좀 다른 의미를 내포했다. 즉 632년 후에, 쾰른 대성당은 19세기 사람들의 손으로 중세 고딕 양식을 전수받게 된 것이다. 1560년 이후 길었던 공사에서 중단 가간 없이 고딕 양식을 지키며 일관된 형태로 완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가까운 시기인 바로크 시대에 성당 건축의 개조 열기가 뜨거웠으며, 만약 쾰른 대성당이 그 영향을 받았다면 19세기가 된 후 옛날 도면에 충실하게 다시 공사를 계속하는 일은 틀림없이 저지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19세기에 중세를 재발견했을 때, 보와슬레 형제, 츠비르너 등의 사람들에게는 나중의 1900년 전후의 이른바 ‘빌헬름 시대’와 같은 역사 양식의 두꺼운 화장이 아니라, 중세 태생의 소박한 예술성이 소중했는데, 그것이 쾰른 대성당에게는 다행스러운 고유한 정신성이었다


 
출처 : 블로그 > 성화사랑 | 글쓴이 : bae sung soo [원문보기]

 
출처 : 블로그 > 은혜(恩惠) | 글쓴이 : 은혜 (恩惠)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