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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아프리카

[스크랩] 샤르트르 대성당 (프랑스)

鶴山 徐 仁 2005. 12. 22. 14:30

1979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

1145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194년에 화재 이후 26년 동안 재건축되었다. 프랑스 고딕 양식의 정점을 이루는 곳으로 12~13세기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돋보이는 성당이다. 탑 2기와 커다란 익랑. 내진 외부의 가벼운 버팀 구조가 특징이다

 

 

 서쪽 정면에 솟아 있는 서로 다른 첨탑

 

남쪽에 있는 ‘옛 탑’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16세기에 벼락을 맞은 북쪽의 ‘새 탑’은 첨탑부를 후기 고딕 플랑부아양 양식으로 재건해 놓았다

 

내진과 앰뷸러토리를 나누는 성가대석 칸막이에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생애에 관한

많은 조각이 있는데, 후기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이 공존한다

 

남쪽 앰뷸러토리를 장식하고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 [아름다운 그림 유리의 성모]. 진홍색 배경에 성모 마리아의 옷 색깔인 ‘샤르트르 블루’의 파란 색이 돋보인다. 12세기

 

북쪽 익랑 정면에 있는 5연창의 스테인드 글라스  어린 마리아를 안고 있는 성안나를 중심으로 왕이자 사제였던 멜키세덱과 다윗왕, 솔로몬왕, 대사제 아론이 눈부시게 화려한 옷을 입고, 위엄에 찬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서쪽 정면에 있는 ‘왕의 문’ 남쪽 입구 위를 장식하고 있는 문설주 조각. 그리스도의 유년 시대를 나타낸다

 

왕의 문’을 장식하고 있는 인물상 원주. 조각이 건물의 일부인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벗어나 건축 구조에 구애받지 않는 독립된 조각상을 이룬다. 고딕 양식으로 바뀌는 과도기를 보여 주는 귀중한 인물상이다. 수직선을 강조해 원주의 세로 틀에 붙어 있으면서도 통나무 조각에 가까운 입체감을 주는 머리 부분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부드러운 얼굴을 조각해 놓았다. [구약성서]의 인물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

 

서쪽 정면에 있는 ‘왕의 문’

 

가운데 문 위쪽의 팀파눔은 4명의 복음서 기자의 상징물에 둘러싸인 ‘영광의 그리스도’를,

그것을 에워싼 여러 겹의 아치는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24명의 장로와 찬사들을, 그 밑에 있는 문설주에는 12사도를 각각 새겨 놓았다. 3개의 문 양 옆은 고딕 조각의 여명을 알려주는 인물상 원주가 둘러싸고 있다

 

 

샤르트르 대성당

 

샤르트르 대성당은 고딕 성당의 대명사이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새로 개발한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신랑에 여러 개의 커다란 창문을 만들 수 있었다. 총 2000㎡가 넘는 스테인드 글라스 창을 통해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와 동시에 스테인드 글라스가 선명하게 빛나면서, 석재의 흰 빛과 대조를 이룬다. 성모 마리아를 모신 이 성당에는 그리스도를 낳을 때 성모가 입었다는 옷 조각을 귀중하게 보관해 놓았다. 이 성유물을 참배하려고 샤르트르를 찾는 순례 행렬이 800년 이상 끊이지 않고 있다.  1994년 가을에는 대성당 건립 800주년 기념제가 열려 중세 도시가 재현되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샤르트르 대성당이 잿더미로 변해 버린 것은 1194년이었다. 858년, 1020년, 그리고 파사드가 불탄 1134년에 이어 4번째 화재였다. 그리하여 원래의 건물 구조를 최대한 존중해서 재건한 지금의 건물은 프랑스 고딕 건축을 대표하게 되었다. 나중에 이 건물을 본받아 랭스 대성당과 아미앵 대성당 등이 만들어졌다. ‘프랑스판 아크로폴리스, 조용한 전당’. 보주 평원의 자그마한 언덕에 자리잡은 샤르트르 대성당을 로댕은 이렇게 불렀다. 대성당은 안길이가 130.2m, 중앙 신랑의 너비가 16.4m, 높이가 36.5m에 이른다. 멀리서 바라보면 이 성당은 ‘옛 탑’(높이 106m), ‘새 탑’(높이 115m)이라고 불리는 2기의 탑이 있다. 중세 때 샤르트르 대성당은 채색되어 있었고, 많은 부분이 금빛으로 빛났다. 안으로 들어가면 삼랑식 신랑이 멀리까지 뻗어 있고, 천장을 보면 당시 종교 건축의 상식을 뛰어넘어 까마득히 높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성당 안으로 쏟아지는 빛의 홍수, 거기에 여러 개의 사는 원주가 궁륭을 떠받치고 있다. 12~13세기에 만든 빨강, 파랑, 보라를 기조호 한 스테인드 글라스는 지금도 변함없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앰뷸러토리에는 카롤루스(샤를마뉴) 대제의 생애에 관한 작품과 성인전을 소재로 많은 작품이 있다. 이 스테인드 글라스는 19~20세기에 여러 차례 복구 작업을 했다. 심하게 훼손된 창틀과 함께, 낡아서 빛이 스며들지 않는 스테인드 글라스도 교체해 원래의 선명한 색상이 회복되었다.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답게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곳곳에서 성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앰뷸러토리 창에 있는 ‘아름다운 그림 유리의 성모’가 인상적이다. ‘샤르트르 블루’라는 파란 색 옷을 입고 그리스도를 무릎에 앉힌 이 성모를 보려고, 지금도 순례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또한 이 곳에는 성모 마리아가 입었다는 성유물을 보관해 놓았다. 그리스도가 신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이 성유물은, 876년에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왕 샤를 2세가 기증한 것이다. 이 성모의 성유물이 있었기에 샤르트르 대성당은 11~12세기에 프랑스에서 절정을 이룬 성모 신앙의 중심이 되었고, 많은 순례자를 모여들게 할 수 있었다. 이 성유물을 넣어둔 상자는 몇 세기 동안이나 봉인된 상태로 있다가 프랑스 혁명 때 처음으로 개봉되었다. 그 속에서 한 장의 베일과 커다란 천조각이 나왔는데, 현재는 그 일부만 남아 있다. 1194년에는 큰 불이 나서 주교관과 함께 대성당이 몽땅 타 버렸다. 사람들은 간신히 모신 성모 마리아의 유품이 잿더미가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성유물은 성직자들이 재빨리 대성당 지하 예배실로 옮겨 놓아 화를 면했다. 지하 예배실의 철문이 화재를 막아 준 것이다. 그 뒤 13세기에 재건된 대성당은 더할 나위 없이 장엄하고 화려하다. 현재의 샤르트르 대성을 지은 건축가가 누구인지 전해지지 않지만, 그 건축가는 당시 고딕 건축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공법을 대담하게 혁신했다. 높이가 36m나 되는, 리브를 댄 신랑 궁륭의 하중을 플라잉 버트레스로 떠받치는 구조를 도입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리브와 플라잉 버트레스를 통해 무게가 밖에 있는 버팀벽에 걸리게 함으로써, 측면 벽이 떠받치고 있던 궁륭의 하중을 밖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최초로 도입한 공법이었다. 그 덕분에 성당 벽에 창을 낼 공간이 넓어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내부 구조가 단순해졌으며, 트리뷴을 없애고 커다란 아케이드와 트리포리움, 높은 창의 3층 구조로 되었다. 파리 근교에 있는 생드니 수도원의 원장 쉬제가 강력히 추진하여 프랑스 고딕 양식의 물꼬를 텄다. ‘룩스 콘티누아(끊임없는 빛)’, 즉 성당 안으로 빛이 계속 흘러 들어오게 한다는 쉬제의 뛰어난 생각이 샤르트르에서 처음으로 완벽하게 실현되었다. 대성당 헌당식은 1260년 10월 24일에 성왕 루이 9세가 배석한 가운데 치렀다. 1194년의 화재로 소실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왕의 문’을 비롯한 서쪽 정면과 지하 예배실뿐이다. 3개의 문이 달린 ‘왕의 문’은 1150년경에 완공한 것으로, 프랑스 고딕 건축의 여명기에 그 작품의 예를 보여 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가운데 문 위에는 4명의 복음서 기자를 상징하는 천사, 날개 달린 소, 날개 달린 사자, 독수리에 둘러싸인 ‘영광의 그리스도’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3개의 문마다 각각 양 옆을 장식하는 인물상 원주에 19점의 국왕상과 그 밖의 것들이 새겨져 있어 고딕 조각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서쪽 정면에는 13세기의 장미창이 3연창 위에 있다. 3연창에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양 옆에 그리스도의 계도인 ‘이새의 나무’와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3연창 위에 배치된 지름 13.5m의 장미창에는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는데, 깊은 인상을 준다. 그 위에 있는 ‘왕들의 갤러리’도 13세기 작품이다. 남쪽 익랑의 회색 마루 위에는 금빛 금속 굴대가 붙은 햐얀 돌이 있다.  고딕 양식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16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건축가, 작가였던 조르조 바사리이다. ‘고딕’은 ‘고트족처럼 야만적’이라는 말로, 경멸의 뜻이 담겨 있었다. 예술의 역사를 연구했던 바사리에게는 고딕 양식이 ‘야만’으로 비쳤던 것이다. 18세기에도 그것은 여전히 독선적이고 어수선한 양식으로 간주되었다. 그렇지만 고딕 양식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이더라도 스트라스부르의 대성당과 같은 걸작을 한번이라도 보면, 틀림없이 열렬한 신봉자가 될 것이다. 고딕 양식은 12세기에 일드프랑스, 그 가운데서도 파리 근교의 생드니 수도원 성당에서 발달했다. 이 양식은 건축만이 아니라 조각과 그림에서도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냈다. 건축에서는 리브를 댄 궁륭을 채택함으로써, 그 리브를 받아 바닥까지 수직으로 뻗어 나간 기둥이 뾰족 아치와 맞물려 천장이 더욱 높게 느껴지며, 실제로도 높아진다. 샤르트르, 랭스, 아미앵으로 대표되는 전성기 고딕 양식의 대성당은 삼랑식이 특징인데, 플라잉 버트레스와 버팀벽을 사용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겉모습이 가벼운 느낌을 준다. “바탕이 튼튼한 거대한 건조물이 지금도 가볍게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듯하다.”는 것이 괴테의 말이다. 고딕 건축에서는 궁륭에 댄 리브, 뽀족 아치와 버팀벽, 플라잉 버트레스가 있어 벽에 걸리는 하중이 줄어든다. 그 덕분에 벽에는 장식이 많으며, 커다란 창을 만들어 스테인드 글라스를 끼워 넣었다. 그러나 후기 고딕기에 접어들면, 시토회 양식을 본받아 창이 차지하는 비율이 다시 줄어드는 경향이 나타난다. 수직성을 강조한 고딕 양식은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고, 나라마다 나름의 양식을 선보였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초기 영국식, 장식식, 수직식 같은 양식이 생겨났다


 
출처 : 블로그 > 성화사랑 | 글쓴이 : bae sung soo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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