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초기 성당
3개의 본당으로 이루어진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으로 바실리카식 평면의 전형적인 예이다
성당 세례당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은 세례식을 치르기 위해 로마 시대의 목욕을 개조해 세례당을 만들었다. 세례반을 중심으로 원주 16개가 늘어서고, 바닥은 동식물을 묘사한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다. 지금은 바닥에 비닐을 깔고 그 위에 모래를 뿌려 보호하고 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선사시대 이래 인간거주지로 초기에 그리이스의 식민지였고 이어 로마의 도시로 편입, 다시 비잔틴 정부 아래서 번영을 구가하다가 베니스의 지배 이후 중세 말까지 방치된 도시였다. 현재 각 시대별 도시 발달을 나타내는 건축학적 유적의 잔흔이 남아 있다. 수호성인의 보호를 받으며, 병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지는 성수가 담긴 샘. 고대 로마인들은 이 샘 옆에 의약과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모시는 신전을 세웠다
요새 성문
고지대에 있는 비바리트 요새의 성문으로 입구 윗부분에는 사자와 소의 사투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원형 극장
고대 로마의 기술자들은 그리스인이 건설한 극장을 손질해 더 웅장한 원형 극장을 완성했다
방벽, 성벽, 그리고 평원이나 호수 같은 천연의 방벽이 부트린트를 지켜 왔다
부트린트의 고고유적 ( Butrinti )
1992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으로 1999년에 위기에 처한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선사시대 이래 인간 거주지로 초기에 그리이스의 식민지였고 이어 로마의 도시로 편입, 다시 비잔틴 정부 아래서 번영을 구가하다가 베니스의 지배 이후 중세 말까지 방치된 도시이다. 현재 각 시대별 도시발달을 나타내는 건축학적 유적의 잔흔이 남아 있다. 이곳은 수호성인의 보호를 받으며, 병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지는 성수가 담긴 샘이 있어 고대 로마인들은 이 샘 옆에 의약과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모시는 신전을 세웠다. 그리스의 전설에 따르면, 예언력이 있는 트로이의 왕자 헬레노스가 트로이 전쟁으로 함락되어 폐허가 된 고향을 재건하기 위해 부트린트 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호수와 늪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견고한 방비를 갖춘 항만 식민 도시였다는 기원에 관해서는 의문이 풀리지 않아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요새의 흔적, 아크로폴리스나 극장, 공중 목욕탕 등의 유적을 통해 지난날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 초기 그리스도교의 유적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신앙 생활을 엿볼 수 있다. 고고학자들의 비문 해독으로, 옛 도시 부트린트의 법제도 등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부트린트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앞쪽에는 케르키라 섬이고, 내륙부의 부트린트 호와 이오니아 해를 잇는 비바리 수로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누가 언제 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는지 단정짓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곳은 군사 요충지이자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라는 점 때문에 예로부터 식민지 대상이 되었다. 도시를 둘러싼 견고한 성벽은 기원전 6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당시에 이미 이 도시가 상당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부트린트 시는 일정한 도시계획을 바탕으로 건설되었다. 시는, 연안 저지대에 있는 도시와 고지대에 형성된 도시인 아크로폴리스 등 2구획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 도시 부트린트는 기원전 6~3세기에 걸쳐 최고의 번영을 누린 것으로 여겨지며, 당시의 인구는 1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측된다.로마 제국과의 합병
부트린트에는 번영의 절정기를 대변하는 공중 목욕탕이나 이오니아식 신전, 집터 등이 남아 있다. 이러한 건축물들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원형 극장이다. 기원전 3세기에 건설된 이 극장을 통해 당시 부트린트의 문화 수준이 꽤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형 극장은 아크로폴리스 기슭에 있는데, 관객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으로 건설되었으며, 훗날 로마 제국이 부트린트를 지배했을 때 2000명 수용 규모로 확장되었다. 계단 좌석 대부분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관람석은 23단이 남아 있다. 원형 극장 양 옆에는 신전 2개가 서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모신 신전이다. 지난날 둥근 지붕이 얹혀 있던 신전 중앙의 안쪽에는 샘이 있고, 이 곳에는 병의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샘물이 솟는다. 신전의 서쪽 정면에는 법령이나 계율, 노예의 해방에 관한 글이 새겨진 석판이 복원되어 원래의 자리에 붙어 있다. 부트린트는 기원전 2세기에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로마화와 함께 분수 3개, 공중 목욕탕 3개, 모자이크로 포장된 실내 경기장 등 참신하고 훌륭한 건축물이 잇달아 건설되었다. 그 중 특히 두드러진 것은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치세에 건설된 수도교이다. 그 밖에도 황제는 도시를 지키기 위해 성벽도 새로이 건설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유적
부트린트에는 5~6세기 사이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왔으며, 이 시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건축물은 성당과 세례당이다. 길이 31m, 폭 22.5m의 우묵하게 팬 토대 위에 건설된 삼랑식 바실리카 성당은 전형적인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의 좋은 예이다. 로마 시대의 목욕탕을 개조해 만든 세례당은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세례반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세워진 화강암 원주 16개가 목조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 같다. 바닥은 크고 화려한 모자이크로 덮여 있고, 동물을 소재로 한 원형양각(medallion)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모자이크나 부조의 장식 배치 등은 마케도니아 서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말해 준다. 부트린트 고지대에는 불규칙한 오각형 토대 위에 망루를 갖춘 비바리트 요새가 우뚝 솟아 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설되기 시작한 요새의 성문 위에는 사자와 소의 사투 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야말로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적지 발굴품
11세기의 노르만인 침입과 12세기의 대지진, 14세기에는 지하수가 스며드는 데다가 전염병이 돌아, 도시는 폐허가 되고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 부트린트는 잊혀지고 말았다. 15~20세기에 걸친 오스만투르크의 지배하에서 도시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홍수로 진흙 속에 묻히고, 초목이 그 위를 덮어 부트린트의 유적은 자취를 감추었다.
가까스로 20세기 초가 되어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다. 초목이 제거되어 감춰졌던 고대의 보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이루어진 발굴 조사에서는 대규모 건축물 외에도 엄청난 양의 화폐가 발견되었다. 부트린트에서 발견된 발굴품은 지난날 중세 유럽의 불명료했던 영역을 밝혀내는데 역사적 가치가 큰 유산이다.
알바니아
아드리아해 동서쪽에 있고 바다 건너로는 이탈리아가 있다. 남쪽으로는 그리스(Greece), 동쪽으로는 마케도니아(Macedonia), 북쪽으로는 유고슬라비아(Yugoslavia) 및 혼란 상태인 코소보(Kosovo)와 인접해 있다.아드리아 해안에 위치해 있는 작지만 따뜻한 나라 알바니아는 오랫동안 가난과 전쟁, 문맹, 수 차례에 걸쳐 실패한 5개년 계획들로 인해 고통받아 오고 있다. 보다 나은 삶을 향해 수 년 동안 떠돌아다니고 있는 난민들도 있지만 알바니아는 지중해의 전통적인 매력과 소련식 효율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나라다. 수니파 이슬람교부터 알바니아 정교는 물론, 전원풍의 해안 리조트 및 바위산 봉우리부터 잘 경작된 들판에 이르기까지 종교, 문화, 환경들이 어지러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나라가 바로 알바니아이다. 동유럽 국가 중 독재정권의 잔재로 가장 오랫동안 고통받아 왔던 이 곳에는 감귤 과수원, 올리브농장, 포도밭 등이 도처에 있다. 오늘날 알바니아인의 조상인 일리리아인(Illyrian)은 BC 2000년 경 발칸 반도 서쪽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그 주위로는 호전적 성향이 짙은 나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BC 7세기경 그리스인들이 들어와 자치 식민지를 건설했고, BC 4 세기경에는 고유 부족 국가를 이룬 일리리아인과 평화적인 무역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다가 그리스는 알바니아 남부를 점령했는데 그리스는 오늘날까지 이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고 있다. 강성 로마 제국은 쉬코드라(Shkodra; 현재 알바니아 북부)를 중심으로 발전해 가던 일리리아 왕국을 넘보기 시작했고, BC 228 년에는 급기야 군함 200척을 앞세워 침략해왔다. BC 167 년 발칸 전역이 급기야는 로마의 지배하여 들어가게 되었는데, 농지에서 일하던 노예 이외의 일리리아 인들은 그나마 평화와 번성을 누릴 수 있었다. AD 5세기- 6 세기 사이, 로마가 쇠퇴기에 이르자, 이번에는 고트족, 훈족, 슬라브족의 침략이 잇따랐다. 11세기 동로마, 불가리아, 노르만족은 일리리아 북부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두고 서로 다투기도 했는데, 로마가 이 곳을 정복하기 이 전 일리리아는 한 때 다뉴브강 북부에까지 그 세력을 떨쳤다. 세르비아(Serbia), 오스만 터키 왕조(Ottoman Empire), 베네치아(Venetians) 등도 알바니아를 거쳐갔는데, 오스만 왕조(터키)가 1479년 마침내 이 곳을 손에 넣었고, 그 이후 1912년까지 터키의 지배하에 들게 된다. 외세의 침략을 겪으면서 알바니아는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몰락하게 된다. 프리센(Prizen; 현재의 유고슬라비아의 코소보)의 알바니아 연맹은 1878년 창설됐고, 자치권을 얻기 위한 분투를 오늘날까지 계속하고 있다. 1881년 터키 군대는 독립에 대한 이러한 작은 희망을 무참히 짓밟았으며, 1910년-1912년 독립을 선언하고, 즈마일 케말리(Ismail Qemali)가 이끄는 지방정부가 들어서자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다 1913년 런던에서 개최된 '6개국 대사 회담'을 통해 알바니아 면적의 거의 절 반 가까운 코소보를 세르비아에게 넘겨주며 대망의 독립국으로 승인되어 그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기에 이른다.
세계 제 1차 대전 발발로 그리스, 세르비아.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의 열강들에게 차례로 침략을 겪으면서 독립운동은 잠시나마 휴지기를 갖게 된다. 그러다가 1920년- 1939년 알바니아는 자체 정부를 수립해 아메드 조그(Ahmet Zogu)가 대통령이 되었고, 그러면서 무솔리니가 이끌고 있던 이탈리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런 상황은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이탈리아의 침입을 겪으면서 직접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엔버 호자(Enver Hoxha)가 이끌던 공산당은 이탈리아를 상대로 저항운동을 전개하였고, 1943년 이후에는 독일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의 주역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4년 10월무렵에는 소련의 지원을 받지 않고 동유럽에서는 유일하게 독일군을 격퇴시키기도 한다. 전쟁이후 공산당들이 권력을 장악했고, 1946년에는 알바니아 공화국이 탄생되었다. 2년 뒤에는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과의 연합을 꾀했다. 공산당의 입지를 막으려는 시도가 영국과 미국에 의해 일기도 했지만 공산체제를 전복시키지는 못했다. 1960년에는 후르시초프(Khruschchev)가 알바니아에 잠수함 전진기지를 둘 것을 요구하자 소련과의 관계마저도 단절하고 말았다. 196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자 알바니아는 바르샤바 조약에서도 탈퇴했다.
알바니아의 자체 방어 정책으로 전국 곳곳에는 75만 개가 넘는 이글루 모양의 벙커와 토치카가 있는데 그 중에는 밝은 색상으로 채색된 것도 있다. 1960년 소련과 국교를 단절한 이후 알바니아는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 나갔고 1966년-1965년에는 문화 혁명에도 동참을 하게된다. 그러다가 1978년 이 관계도 종식되고 만다. 1985년 호자(Hoxha)가 사망하자 그 후임인 라미즈 알리아(Ramiz Alia)는 민주화 및 세계 각 나라와의 외교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 1990년 동유럽 대부분 나라에서 공산체제가 무너지자 알바니아에서도 동일한 기대가 팽배해 지면서, 12월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자 정부는 야당의 존재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1991년 총선에서 공산당이 승리했지만 5월 총파업이 거세지면서 사회당은 야당인 민주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1991년, 중앙에서의 경제 계획은 실패했고, 공장 가동이 중지됐으며 식량 배급도 끊긴 채 였다. 1991년 말엽까지 알바니아는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고 급기야 12월에는 식량 폭동까지 야기됐다. 대량 난민 사태 위기에 봉착하자 EU는 경제 원조를 시작했고, 이탈리아군은 식량 배급선 감독을 위해 두르레스(Durres) 남부에 군 기지를 건설했다. 1992년 선거를 통해 47년 동안의 공산체제는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됐고, 민주당은 즉각적으로 과거 공산당원들 및 관리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작업에 들어갔다. 1933년 국제인권 단체는 점점 악화되어 가는 인권 문제에 발동을 걸기도 했다. 알바니아는 1992년 터키와 군사협약을 맺고 북부 알바니아 지역(그리스는 이 지역을 '북부 에피로스'라고 부른다)에 대한 그리스의 영토 주장에 맞서기 위해 이슬람 단체에 가담했다. 겨우 싹트기 시작한 민주주의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난항을 겪으면서 1990년 중반부터 말까지 수상과 대통령들이 수시로 바뀌었다. 국민들은 자국을 벗어나 난민으로 떠도는 신세로 전락했고 이 중 몇몇은 이탈리아 해변으로 몰리면서 알바니아의 정치 상황은 날로 악화되기에 이른다. 후임 지도자들은 코소보에서 행해지는 알바니아인에 대한 탄압을 게속 지탄하고 있는데 이 지역은 20세기 이후 유럽의 탄약고 같은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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