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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내의 美 CIA -
韓國現代史의 뒤안길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歷代 지부장 12명의 이력서 한국 현대사의 뒷무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미국CIA 한국지부는 대사관5층에 있다. [대사특별보좌관]이란 직명을 가진 역대 지부장들은 4ㆍ19, 5ㆍ16,
유신선포, 金大中납치, 10ㆍ26의 격변기에 어떻게 행동했던가, CIA캐이시 부장과 그리릴 극동국장의 극비방한은 무슨 의미를 지녔는가. 이 글은
미CIA의 한국 내 활동36년을 추적한 최초의 보고서다. <1986년 2월
월간조선> CIA를 다루는데 있어서... 대한민국에서 이뤄지고
있는 미국 중앙정보부(Central Intelligence Agency : CIA)의 활동을 보도함에 있어서, 지난 70년대에 미국언론과 의회가
미국 안에서 활동한 한국 중앙정보부를 까발린 식으로 할 생각은 없다. 미국사람들은 망명한 전직 중앙정보부장, 뉴욕분실장, 워싱턴책임자들을
청문회에 불러내 거의 자학적으로 국가정보기관의 내막을 폭로하도록 유도했다. 우리 정보기관원의 신원은
물론이고 대미(對美)공작계획서 같은 기밀문서, 미국 국회의원들이 한국의 대통령과 중정부장에게 보낸 사신(私信)까지도 노출시켰다. 그런 식으로 미
CIA의 한국 내 공작을 폭로할 생각은 없다는 말이다. 미CIA나 미군정보기관의 활동에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두 번이나 우리 나라의 대통령을 암살하거나, 쿠데타로 뒤엎으려는 모의에 관계했다. 한국 수사기관에 쫓기고 있는
한국인들을 몇 차례 외국으로 탈출시켜 주었고 그들의 치외법권적 시설을 반정부 모의에 제공하기도 했으며, 대통령집무실을 도청했다. 우리 정보기관이
미국에서 활동한 것에 비교하면 질이나 규모에서 상대가 안 되는 일을 하고도 여짹沮?한번도 본격적인 취재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던 미국CIA
한국지부를 알리는 데 있어서, 미국의 언론이나 의회보다는 훨씬 자제할 생각이다. 특히, CIA 종사자들의 인명을 밝히는 데 있어서는,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노출시킴으로써, 이미 보호할 가치가 없어진 범위 안에서만 할 것이다. 보고들은 것을 다 쓰지는 않을 것이다. 미 CIA
한국지부는 그래도 한국인을 위해서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을 더 많이 한다고 믿고싶기 때문이다. 테니스
2관왕이 12대 지부장 지난해 11월초 서울 장충 테니스 코트에서는 전한국 테니스선수권대회가 10일간
열렸다. 45세 이상의 선수들이 참여한 장년부의 개인 및 복식에서 모두 우승, 2관왕이 된 사람은 제임스 E딜래니(James E
Delaney)란 56세의 미국인이었다. 6척 장신에 반백의 머리카락, 벗겨진 머리, 불그스레한 얼굴, 안경을 낀 이 사람은 한국 테니스인들에겐
널리 알려져 있다. 테니스 선수단의 미국 방문 때는 비자문제를 척척 해결해주고, 미국에서 연습을 잘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편의를 봐 주기도
한다. 마음씨 좋은 촌 늙은이처럼 생긴 그는 태국과 일본에서 일한 적이 있고, 일본어도 꽤 한다. 용산의 미 8군내 사우드 포스트 관사에 살고
있다. 그는 도요다 크라운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 [외교 01-004]란 차번호는 그가 주한 미
대사관에서 서열이 대사, 부대사, 문화원장에 이어 네 번째란 표시다. 그의 사교범위는 넓다. 골프장과 테니스장에서 그와 어울리는 한국인들
가운데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많다. 조찬, 만찬, 오찬, 파티 등등의 자리를 빌어 그는 여권과 야권의
인사들을 두루 만난다. 한국에 와 있는 미국인들 사회에서도 그는 약방의 감초처럼 중요한 자리엔 꼭 낀다.
지난해 5월25일 아침엔, 미국 문화원을 점거중인 학생들을 만나러 현장에 나타났다가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는 6ㆍ25때 육군
장교로 참전한 바 있어 지난 83년8월 한국에 부임하기 전에도 우리 나라 실정에 어둡지 않았다. 그의 사무실은 미국대사관 8층, 워커 대사의
바로 옆방이다. 그의 대외적 직함은 대사특별보좌관(Special Assistant to Ambassador)이다. SAA로 약칭되는 딜래니씨는
그러나 파티에서 만난 한국인에게 서슴없이 말한다고 한다. [나는 CIA에서 왔습니다.](I came from CIA).
그는 미국 CIA 한국지부의 제12대 지부장이다. 역대 지부장들은 CIA의 관례에 따라 모두 대사특별보좌관이란 직명을 갖고
있었다. 딜래니씨의 옆방엔 또 한 사람의 특별보좌관이 있다. 애드거 E 플레이어씨. 그는 CIA 한국지부의 부지부장, 즉 제2인자다.
플레이어씨는 한국지부의 36년 역사에서 처음 보는 흑인이다. 아내도 흑인. CIA의 간부진엔 미국 정부의 어떤 부서보다도 유색인종이 적기로
유명하다. 인맥의 주류는 미국 동부지역의 명문대학 출신 백인이다. 플레이어씨의 한국 내 교제범위는 좁다는 평이다.
RU로 불리는 본부엔 20명 근무 미 대사관의 7층은 무전실이다. 한때 청와대를
도청하는 곳이란 의심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미국대사관에서 가장 보안이 엄중한 곳이다. 지정된 사람만 출입할 수 있다. 암호로 본국과 교신하는
장소이니까, 24시간 계속 근무한다. 5층엔 RU(Research Unit)란 부서가 있다. 84년5월에 발행된 미 대사관의 전화번호부에는,
조사부란 뜻의 이 RU에 근무하는 미국인의 이름이 실려있다. 딜래니, 플레이어씨 이외에 김 진악, 필립 선우, 제임스 D 쉘던, 브리짓드
모로우, 캐더린 다이아먼드씨 등 모두 일곱 명이다. 김 진악, 필립 선우씨는 미국국적을 가진 50대의 한국인이다.
필립 선우씨의 경우, 평양이 고향인데, 어릴 때 중국에서 생활하다가 해방 직후 미국에 건너갔다. 미국여인과 결혼했고 3년 전
서울에 왔다. 쉘던씨는 6ㆍ25에 참전한 장교출신으로서 RU부서의 책임자, 즉 한국지부의 제3인자였다. 최근 정년으로 은퇴 귀국했다. 쉘던씨는
지난 83년10월의 버마 아웅산 폭파 사건 때 경호협조임무를 띠고 현장에 파견 나가 있었다. 참사가 나자 중상을 당한 李基百 대장을 필리핀으로
긴급 후송, 목숨을 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RU부서는 물론 CIA 서울지부의 본부다. 미국인과
한국인 운전기사, 사무원까지 합치면 20명 안팎의 이원이다. 미군 정보기관이나 CIA정보원이 보내는 갖가지 보고서를 모아서 정리, 분석하는
내근부서의 구실을 맡고 있다. CIA 한국지부의 조직 가운데 공개된 부분인 셈이다. CIA 서울지부의 정규직원이 몇 명이냐 하는 데는 여러 설이
있다. 대체로 40∼50명 선이란 얘기가 지배적이다. 비상시엔 1백명 선으로 늘어난다고 한다(사이공 지부는 3백명이었다).
RU이외의 부서에서 이들 직원이 어떤 신분으로 활동하는가 하는 것은 월남 등 외국에서 드러난 CIA의 활동상으로 미뤄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미국회사의 상사원, 평화봉사단의 단원, 미국 문화원의 직원으로 박혀 일하거나 대사관의 정치과, 무관실, 미군 기관 등에
파견돼 있기도 한다. 캐이시 CIA부장의 비밀방한 딜래니씨 등
정보요원들의 행동은 늘 지상과 지하로 구분돼 있다. 지상의 양지에서 바라다 보이는 그들은 한결같이 세련되고 교양이 풍부한, 매력적인 신사들이다.
그러나, 일단 무대 뒤로 돌아서면 그들은 음모자가 될 수 있고, 살인자나 절도로 변하기도 한다. 한 정권이나 나라의 악역을 떠맡는 그들은
[익명(匿名)에의 정열](Passion for Anonymity)을 직업상의 명예로 삼는다. 화려한 주인공 역은 정치인에게 돌리고, 추한 역을
자청하는 그들에겐 독특한 논리와 윤리기준이 있을 것이다. 딜래니 지부장은 전임자들에 비해 편한 근무를
하고 있다. 부임하자마자 아웅산 사건이 있었지만, 그것은 미국과 크게 관련된 일이 아니었다. KAL007사건은 한국지부의 수준에서 신경을
쓰기에는 너무 큰 일이었다. 2 12총선 이후 그는 학생들의 잇단 반미데모와 미국문화원 점거사태로 조금 바빠졌다. 야당과 재야권 인사와 접촉이
빈번해졌다. 그는 정부, 여당 인사와의 접촉은 공개적으로 하지만 야권 인사와의 면담은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히 하려고 한다. CIA직원들은
재야나 야당 인사를 만날 땐 관용차를 쓰지 않고 개인차를 직접 운전한다고 한다. 최근 그는 신민당 비주류의 거물 李모 의원과 비밀리에 만났다.
딜래니씨의 재임기간 중 윌리엄 케이시 미 CIA부장이 두 차례 한국을 다녀간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84년 여름과 85년 봄, 두 번 전용기편으로 오산을 통해 서울에 온 케이시 부장은 盧信永총리 등 정부 고관들도 만나고 갔었다. 딜래니씨보다 더
편하게 있었던 사람은 81년1월∼83년6월 사이에 재임했던 11대 지부장 로버트 케네디씨였다. 올해 58세인 그는 70년대에 부지부장으로
서울에서 근무했던 사람이다. 영화배우 클라크 케이블을 닮은 미남자였다. 한미관계나 국내정세가 무난했던 시기에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떠난 그는
李奎浩 당시 문교부장관과 각별히 친밀했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설명이 잘 안 되는 사건은 미국CIA를
끌어들임으로써 해답을 구해보려는 심리가 생겼다. 4 19를 CIA가 조종했다, 金載圭가 CIA에게 이용당했다, 심지어 5 16도 CIA의
양해하에 일어난 쿠데타라는 식의 루머를 통해서 CIA는 무소불능의 기관으로 과대포장 되기가 일쑤다. 10 26에 CIA가 개입했다는 루머의 한
근거로 金載圭가 육본 벙커에서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말했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었다. 그러나,
79년10월26일 밤9시30분께 육본 벙커에 도착했던 金致烈 당시 법무장관은 기자에게 정반대의 증언을 했었다. [어떻게 앉다가 보니 金載圭와
마주 앉게 됐습니다. 살기가 등등하고, 초조해 보이더군요. 연신 물을 마셔댑디다. 金載圭는 [기금 각하께서는 유고입니다. 전방경계를 강화하고,
이 사실을 최소한 48시간 국내외에 비밀로 붙여야 합니다. 그리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해야 합니다]고 말했어요. 그는 또 [미국에도 비밀로 해야
한다]고 덧붙였어요. 제가 반박을 했어요. 어떤 이유에서 48시간이나 보안에 붙여야 되느냐고요. 金載圭는
북괴남침 위협 때문이라고 해요. 저는 그런 보안은 불가능하다고 반대했지요. 북괴남침 위협이 있다면 출동준비가 있어야 하고, 미국에 알려야
효과적인 대비책을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지요. 옆에 있던 朴東鎭외무부장관도 [미국에 비밀을 붙이는 것은 한미우호정신에도 어긋난다]고
거들었어요] 10 26직전 관광여행간 지부장 10 26사태 때
CIA한국지부장은 제10대인 로버트 브루스터(Robert Brewster)씨였다. 그때 52세였다. 78년 말에 한국에 온 브루스터씨는
6대지부장인 존 리처드슨씨 밑에서 부지부장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공군장교 출신인 그는 눈이 아주 크고 시원한 인상에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한국에 오기 직전 그는 방광암(췌장암이었다는 설도 있음)수술을 받았었다. 그런 몸으로 격변의 79년을 한국에서 맞게 된 것이다. 10월16일
부산, 10월18일 마산에서 격렬한 시위가 터져 부마사태로 발전했을 때 그는 현장으로 요원들을 보내 정보수집에 분주했다.
그러나 부마사태가 가라않고, 다른 도시로 확산이 되지 않자 그는 10월21일∼24일 사이 경주, 동해안, 설악산 등지로
관광여행을 갔다. 그 급박한 시점에 관광여행을 다녔다는 것이 오히려 오해를 살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가족끼리의 관광이었음은 우리 쪽 정보에서도
확인됐다. 관광에서 돌아온 지 이틀만에 10 26이 나자 그는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27일 아침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와 정보부를 찾아갔으나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는 용산 유엔촌에 있는 전 대통령 경호실장 朴鐘圭씨(당시 공화당 의원) 집을 찾아갔다.
이때 브루스터씨를 목격한 朴씨의 한 측근은 그가 굉장히 초췌한 표정이었다고 했다. 답답할 때 CIA지부장이 찾은 사람이 朴씨였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점이 많다. 그 18년 전 5월16일 아침에 당시의 CIA지부장 피어 드 실버씨는, 브루스터씨와 꼭 같은 암중모색의 상황에서
朴鐘圭소령과 처음으로 우연히 만나, 쿠데타 주체세력과 대화채널을 확보하게 됐었다. 나중에 쓰겠지만 이
만남은 주체세력에 대한 CIA의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됐었다. 그 뒤로 朴鐘圭씨는 역대 CIA지부장들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반미성향이
강한 朴正熙대통령 측근에서 친미적 파이프라인을 갖고 있었던 것이 朴鐘圭씨였다. 우연하게도, 朴鐘圭씨는
10 26 뒤 등장할 군의 신진세력과도 깊은 인간적 유대를 갖고 있었다. 12 12사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 장성들 가운데는 5 16당일과
직후 朴소령 밑에서 朴正熙의장 경호요원으로 일했던 사람들도 많다. 브루스터 지부장이 그런 시기에 朴씨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10 26뒤의
사태 발전에 대비하는 데 큰 보탬이 됐다. 어쨌든 브루스터씨의 10 26전후 행적으로 봐서도 이 시해사건에 미 CIA가 관련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확실해지는 것은, 10 26이 金載圭의 즉흥적 단독범행이었다는 사실이다.
朴정권 시절, 역대 미국CIA한국지부장이 업무상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은 한국의 중앙정보부장과 국군보안사령관이었다. 특히 중앙정보부장관과는 한
달에 두 세 번은 만났다. CIA지부장은 꼭 한국 측 두 기관장을 찾아가 만난다. 한국과 미국 사이엔 지난 1958년에 군사정보교환 협정이
맺어져 있다. 이 협정에 따라 CIA한국지부와 정보부는 연락관을 통해 정보를 교환해 왔다. 미8군의 한국통
고문들 10 26 뒤 한국군의 동향에 대해선 미8군사령부 산하의 군 정보기관 쪽보다도 CIA측이 더
정확하게 감을 잡았다는 평이다.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 안에는 3군별로 군정보기관이 따로 있다. 이들이 따로 올리는 보고는
국방정보부(Defense Intelligence Agency)에 가서 종합된다. 주한미군 산하에는 또 통신감청을 주 업무로 하는
국가안보국(NSA=National Security Agency)의 부대가 있는 것으로 외국에선 보도된 바 있다. 이들 여러 정보기관의 활동은
CIA지부장에 의해 통합, 조정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협조관계이지 CIA지부장이 미군 정보기관에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대체로 한국군에 대한 정보활동은 미8군 정보부대가, 한국의 정치 경제에 대한 것은 CIA가 맡도록 업무분담이 돼 있다.
미8군도 막강한 정보기능을 갖고 있다. 군사정보수집이란 본연의 기능 이외에도 한국의 정치문제에 대해서도 초연하지만은 않다. 미8군 쪽에는 한국의
군 및 정계에 깊은 인맥의 뿌리를 갖고 있는 한국통이 많았다. 이들은 미8군 부사령관의 국제정치담당 고문이나 미8군 정보부대의 문관 자격으로
일해 왔다. 가장 유명한 한국통은 하우스맨씨였다. 그는 해방직후 미 군정시절에 한국에 왔다. 당시는
대위였다. 대령으로 진급할 때까지도 李承晩대통령은 그를 [캡틴 하우스맨]이라고 불렀다. 그는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고문으로서 한국군의 창설기에
산파역을 맡았다. 초창기 장교들의 양성소였던 군사영어학교나 그 뒤의 육군사관학교 설립에도 관계했다. 정부수립 후 국군창설안을 李承晩대통령에게
브리핑한 것도 하우스맨이었다. 그 브리핑 때 통역을 맡았던 고정훈(高貞勳)씨(전 新社黨총재)에 따르면 하우스맨씨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특별히
강조했었다고 한다. 그의 지도 아래서 배출된 새파란 장교들이 그 뒤 장성이 되고 5 16을 거치면서 이
나라의 권력 핵심에 자리잡게 됐으니, 그의 영향력도 막강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우스맨씨는 줄곧 미군사고문단에서 일하다가 제대한 뒤에는
부사령관 보좌관이 되어 한국의 정치정세에 대한 조언을 하게 됐다. 그는 80년대 초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미8군 부사령관 고문자격으로 국내정치에
관한 자문을 하다가 지금은 하와이에 돌아가 살고 있다고 한다. 로버트 키니씨는 아버지가 한국에서 선교사로
있었던 사람이다.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그는 미군정 때부터 주한미군의 자문역으로서, 나중엔 8군 부사령관 고문으로서 일했다. 한미행정협정
위원회 미군측 간사도 지냈다. 4년 전 은퇴, 하와이에서 한국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지금 부사령관 고문으로 있는 캐롤 핫지스씨는 군사고문단
참모장을 역임했고, 교수경력도 있다. 한미재단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아내는 한국의 수많은 심장병어린이를 미국으로 데려가 무료수술을
시켜주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핫지스 할머니」로 통한다. 미국 CIA나 국무성·국방성에선 이들처럼
어느 나라에 정통한 사람은 퇴직 후에도 촉탁으로 계속 쓰는 관습이 있다. 그들이 가진 지식과 인맥과 정보망을 활용하기 위해서다. 미
CIA월남지부는 월남군 고문단장을 역임한 팀즈 장군이 은퇴하자 특별한 요원으로 고용, 월남군과의 연락관 역할을 하도록 했었다.
10·26전후에 미군의 판단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또 한 사람의 한국통으로는 8군사령부
고문인 스티픈 브레드너씨가 있었다. 1950년대부터 그는 미8군의 정보기관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일해 오고 있다. 일부 한국인은 그를
CIA직원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는 미8군 정보기관과 CIA한국지부 사이를 자주 오가며 연락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농구선수
朴信子씨의 남편인 브레드너씨는 올해 55세. 미국 로드 아일랜드에서 출생, 예일대학과 하바드대학원을 나왔다. 6·25때 한국전에서 싸운 경력도
있다. 그의 석사논문(1963년)은 「1960년의 선거위기에 있어서 학생운동」이다. 4·19때 브레드너씨는 미8군에 있었기 때문에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이 논문을 썼다. 4·19에 대해서 외국인이 쓴 가장 뛰어난 논문으로 꼽힌다. 10·26 뒤 감
빨리 잡은 CIA 이런 한국통이 미8군 주변에 있었지만 10·26이후 제5공화국 출범까지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은 미군의 의도보다는 CIA의 노선에 더 가깝게 추진됐음이 확실하다. 5·16뒤에 매그루더 사령관 휘하 주한 미군의 강경정책이
국무성과 CIA의 온건노선에 밀린 것과 흡사한 경과였다. 미군 정보기관에 대한 CIA의 이런 우세는, 정변 이후 권력의 향방에 대한 감을 제대로
잡았고, 한국의 정치질서를 안정시키는 쪽으로, 또 기성사실화하는 쪽으로 현실적인 정책을 건의했기 때문이었다. 10·26에서 12·12까지는
권력의 공백기였다. CIA는 이 중요한 시기에 새로 대두될 세력에 대한 탐색작업을 진행했다. 그런 문제에 대해 브루스터씨는 이미 확실한 채널을
갖고 있었다. 미국본부에서도 한국통을 가동시켰다. 10·26사태 5일 뒤인 10월31일 워싱턴에선
흥미있는 모임이 있었다. 그때 현대건설 대표이사로 있던 장우주(張禹疇)씨(59)·전 국방부관리차관보·예비역 소장)는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워싱턴에 와 있었다. 張씨는 주한 미국대사관이나 주한미군 사람들과는 수십년 동안 교분이 두터운 미국통이다. 그는 워싱턴에서 두 CIA본부
간부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1976∼78년 사이 CIA한국지부장이었고 그땐 극동담당국장이던 로버트 그리릴씨(Robert Grealy)와
73∼75년 사이 한국지부장이었고 그땐 국가안보회의에 파견 나가 있던 도널드 그랙씨(Donald Gregg)는 張씨에게 10·26이후의
사태진전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張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3金씨가 거론되고 있지만 집권하기엔
어려울 것이다. 권력이란 것은 집권하기엔 어려울 것이다. 권력이란 것은 집권 의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권능력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한국에선 그런 능력이 군부의 지원 아래서만 나올 수 있다』 張씨는 이어서 정규육사출신 장교집단의 부상(浮上)과 세대교체의 조짐, 그리고
全斗煥장군의 리더쉽에 대해서 설명했다고 한다. 그랙은 全장군의 이름을 메모할 만큼 열심이었다고 한다.
11월1일치 일본 마이니찌 신문은 일본 외무성 소식통을 인용, 「全斗煥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란 좀 성급한 기사를 썼다.
「…이 소식통은 비상계엄령 하의 한국에서는 군부가 치안·국정 전반을 장악하고
鄭昇和계엄사령관·金鍾煥합참의장·全斗煥보안사령관 등 군수뇌가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全사령관에 대해서는
①朴대통령을 사살한 金載圭 전 중앙정보부장이 군부를 끌어들이려 했을 때 보안사령부를 동원하여 이를 저지하고 평온을 유지하도록
했다는 정보를 갖고 있다 ②군의 젊은 엘리트를 배출한 육사11기생의 실력자로서 동기생들이 실전부대의
사단장으로 있다 ③사건 수사의 최고책임자로서 군의 질서유지에 있어서 중심인물이라는 점등을 들어 군의 실권은
鄭계엄사령관 등 군의 장로들이 아니라 全사령관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뒤에 정확한 예측으로 판명된 이런
기사에도 불구하고 위컴 사령관측에선 유교적 전통에 입각한 군의 서열질서가 유지될 것으로, 사태를 안이하게 판단하고 있었다고 한다. 주한 미군의
정보 안테나가 한국군의 장로들 쪽으로 편향돼 있어서 군 내부의 새로운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뒤에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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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과 투병, 격동기 치른 CIA맨 12·12사태가 났을 때
CIA 한국지부는 10·26때보다, 또 미8군보다도 훨씬 덜 당황했던 것 같다. 따라서 12·12 사태 뒤의 대한(對韓)정책도 서로가 약간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위컴 사령관은 5·16때의 매그루더처럼 권위의 손상을 당한 입장에서 강력하게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12·12사태의 당일 밤
위컴은 8군 영외로 차를 타고 나왔다가 한국 계엄군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안테나가 부러지는 등 혼이 난 개인적 체험도 했으니 감정도 나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브루스터씨는 기정사실화 쪽으로 나갔고, 결국은 CIA노선이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한국의 미국통 인사들이 그리릴, 그랙, 클리블랜드씨(주한 미 대사관의 한국과장)등 CIA와 국무성의 한국인맥을 설득, 한미간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암을 앓고 있었던 브루스터씨는 재임 중 한국 중앙정보부장이 네
번이나 바뀌고, 한국 대통령을 세 명이나 겪는 격동의 시절을 보냈다. 재임중 암이 재발, 일시 귀국하여 2차 수술을 받고 돌아와 다시 근무에
임해야 할만큼 격무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그는 병색을 일체 내보이지 않고서 의연하게 임무를 해내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국 고위층과의 인간적
유대도 더욱 돈독해졌다. CIA본부의 뜻도 그러했지만, 본인이나 한국정부도 그의 계속 근무를 희망했었다고
한다. 미국 CIA지부장들 가운데는 자기가 주재하는 나라의 정계 실력자와 특별히 깊은 인간관계를 맺어, 주요한 시기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딘디엠과 막사이사이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지하 공작을 지휘한 에드워드 랜스데일, 낫셀 대통령과 너무 친해져 독이 든 담배에 의한
독살명령을 무시한 카이로지부의 마일즈 코플랜드, 태국의 크라이앙사크 장군과 친한 아놀드 같은 사람이 그런 맨 투 맨의 인맥을 가진
CIA맨이었다. CIA에선 브루스터씨를 그런 지부장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브루스터씨는 그러나 80년 말 암이 악화돼 본국으로 후송됐다. 그
얼마 뒤 그는 사망했다. 지부장의 두 유형―공작형, 분석형
CIA본부의 관점에서 한국지부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중요한 거점이다. 공산국과
대치하고 있는 민감한 군사분쟁 지역인데다가,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지정학적으로도 미국 중공 소련 일본이 각축하는 중요한 자리에 놓여 있으며,
국내 정치정세가 격동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중요성을 반영하여 CIA 한국 지부장으로는 대체로 거물들이 왔다. 12명의 역대 지부장 중 한두
명을 빼고는 전부가 50대의 나이에 부임했다. 2차대전중 OSS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20∼30년의 공작경험을 가진, 원숙한 첩보원들이었다.
한국지부장들의 유형은 행동파적인 공작전문가와 냉철한 분석형으로 나눌 수 있다. 70년대 초까지는 대체로
공작베테랑들이 주류였다. 실버나 리차드슨 같은 CIA 안에서는 신화적인 인물들이 대표적인 행동파 지부장들이었다. 70년대 중반 이후엔 분석형
지부장들로 바뀌었다. 그것은 CIA간부들의 세대교체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해 5월 윌리엄 케이시
CIA부장의 한국방문 때, 그를 수행한 사람은 극동 담당국장 로버트 그리릴씨였다. 76∼78년 사이 한국지부장으로 일하다가 필리핀지부장으로
옮겼던 사람이다. 그는 지난해 11월에도 조용하게, 한국을 찾아왔다. 박정수(朴定洙)씨 등 미국통 인사를 비롯, 각계 각층의 중요 인물들을
만나고 돌아갔다. 2·12총선 이후에 격동하는 한국정세를 현장에서 좀더 가깝게 느껴보려는 출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격동하면 전직
CIA지부장들이 홀연히 서울에 나타나는 일들이 가끔 있다. 이들이 어떤 밀명을 받고 오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관광여행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릴씨의 재임시절은 한미관계가 가장 불편했던 때였다.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청와대도청설이 연일 매스컴을
탔다. 카터 행정부의 등장과 미군철수문제, 한국의 핵개발에 대한 미국의 신경질적 반응 등 악재(惡材)가 겹쳤다.
특히 미국 언론의 청와대도청설 보도는 한국정부의 분노에 찬 성명을 부르는 등 CIA한국지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서울시청은, 미 대사관이 한국일보 맞은편에 있는 직원관사촌에 건물을 신축하려고 하자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한국지부 직원들은
사석에서 『우리가 청와대 도청을 꼭 하고 싶다면 그런 방법(건물신축에 의한 시설)으로 하겠느냐』고 냉소하기도
했다. 포터대사도 청와대도청 시인
문제의 발단은 1970년 가을 청와대에서 있었던 밀담내용을 미국정부기관이 어떻게 알아냈느냐 하는 점이었다.
이 회담은 朴正熙대통령이 주재했고, 고위 청와대 간부들이 참석했다. 밀담의 주제는 대미(對美)로비활동 채널을 朴東宣씨 아래로 일원화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밀담의 내용은 미국 언론의 보도 이후 미국정부에 의해 미 하원 국제관계 소위원회에 제출됐다. 미국정부는 이 정보의 원천을 밝히지
않았다. 미정부의 자료는 청와대 1차 밀담에서 토의된 로비계획이 2차 밀담에선 보류된 과정도 자세히 담고
있었다. 청와대도청설을, 76년10월15일자 워싱턴 포스트지에 특종으로 보도한 것은 사교란 담당의 맹렬 여기자 맥신 체사이어씨였다. 체사이어
기자는 朴東宣씨에 관한 정보를, 미국 정부가 청와대와 주미 한국대사관 내부에 있는 정보원(源)으로부터 빼냈다고 보도했다. 이 정보원(源)은
첩자, 도청장치, 또는 전파감청 등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체사이어 기자는 취재기에서 이 사실을 전직 국무성
관리에게 확인했다고 썼다. 이 관리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으나 한국 담당관이었음은 인정했다. 국무성 한국과장을 지내고 70년대 초에 퇴직한 도널드
레이나드씨가, 체사이어 기자가 말하는 확인자란 추측도 있었다. 1978년 4월3일 미국 CBS방송은 윌리엄
포터 전 주한미국대사와의 인터뷰를 소개했다. 포터씨는 『미국정부가 청와대에 도청장치를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내가
부임하기 전에 그것(필자 주:도청장치를 의미)이 중단됐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새로 가동시키지 말라는 특별지시를 내렸습니다』
포터대사의 이 실토는 그 전해인 1977년8월10일에 터너 CIA부장이 워싱턴 포스트지 기자에게 했다는 말과 상충되고 있다. 터너는 『청와대에는
녹음테이프나 도청장치가 없었다. 나는 CIA, NSA, 그리고 다른 모든 미국 정보기관을 대표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고
했었다. 도청 전문가였던 실버 지부장
포터대사가 한국에 부임한 것은 67년8월9일이었다. 포터 대사와 터너부장의 말을 『67년 이전엔 도청장치가
있었으나 그때(1970년 가을)는 도청장치가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두 사람의 증언은 상충되지 않게 된다. 적어도 포터대사의 증언을 믿지
믿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67년 이전에 CIA한국지부장으로 부임했던 넬슨, 실버, 나오시스, 에드워드, 라자스키 등 다섯 명에게 도청의
혐의가 돌아가게 된다. 이들 가운데 실버씨는 CIA를 물러난 뒤인 1978년에 회고록을 썼다. 「서브 로자(Sub Rosa)」(라틴어로 비밀이란
뜻)란 이 책에서 그는 여러번 자신의 도청공작을 소개하고 있다. 도청전문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공작기술은 다양하다. 그의
체험담을 소개한다. 사례1 : KGB 지부장 집 도청
1955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지부장으로 있을 때였다. 나는 잘츠부르크의 어느 호텔에 모 중립국의 대표단이
투숙할 예정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이 사절단은 고위 회담을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길이었다. 사절단이 호텔에 도착하기 며칠 전 나는 첩보조장
부부를 손님으로 위장시켜 사절단이 묵을 특실에 투숙시켰다. 그 부부는 탁자다리에 송신기를 설치했다. 그들의 대화를 수신하여 우리는 그 중립국이
다가올 회담에서 소련에 대하여 철강기술의 지원 등을 요구할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이 정보를 우리는 워싱턴으로 보고했다. 그 중립국에서의
전략계획수립에 적절하게 활용됐다. 사례2 : 공중전화 도청
빈의 소련 대사관 앞에는 공중전화 박스가 있었다. 우리는 전화박스 천장에다가 도청용 송신기를 몰래
붙여놓았다. 우리는 기다렸다. 낯이 익은 KGB요원이 공중전화박스에서 전화를 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스트리아인 첩자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첩자의 사는 곳을 알아냈다. 우리 요원들이 그를 협박하여 우리의 첩자로 만들었다. 그는 KGB에 박힌, 우리를 위한
2중첩자가 된 것이다. 사례3 : KGB 지부장 집 도청
우리와 협력하는 부동산 중개인이 빈의 KGB책임자가 캐나다 외교관이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갈 계획이란
정보를 갖고 왔다. 캐나다 외교관이 집을 비우고 KGB책임자가 이사를 오기까지의 어느 날 밤 나는 요원들을 그 빈집에 들여보냈다. 서재의 창문
쪽에 붙은 장식판자를 뜯어내고 콩알만한 송신기를 붙였다. KGB책임자는 그 서재에서 가끔 작전회의를 열었고, 우리는 죄다 그 내용을 듣게 됐다.
배터리가 소모되어 가동이 중단될 때까지 여덟 달 동안―. 우방국
원수 도청은 관례 실버씨는 지난 59∼62년 7월까지 한국지부장으로 일했다. 그가
경무대(뒤에 청와대)에 도청장치를 했다는 증거는 없다. 확실한 것은, 그가 만약 그런 장치를 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빈에서 보다는 아주 쉽게 할
수 있었으리란 점보다는 아주 쉽게 할 수 있었으리란 점이다. 행동의 자유, 접근의 용이함, CIA커넥션의 풍부함 등에서 한국은 CIA가
활동하기에 가장 편한 나라일 것이다(더구나 60∼70년대의 놀라운 전자기술 발전을 생각해 보라). 그런 점에서 우리와 비슷했던 월남의 도청사례를
참고해 본다. 사례1 : 티우집무실 도청
사이공함락 직전 CIA사이공 지부에 분석관으로 근무했던 프랭크 스넵씨는 77년에 「Decent Interval」이란 책을 써
CIA공작을 폭로했다. 그에 따르면 티우 대통령의 집무실뿐 아니라 거실도 도청됐고, 그의 정적이던 민 장군의 집도 도청됐다. 75년4월21일
티우 대통령은 수상과 부통령을 불러 사임의사를 밝혔다. 도청장치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CIA지부장 폴가씨는 『월남정전 이후 최대의 특종을
했다!』고 즐거워했다는 것이다. 사례2 :
도청기술 14년간 CIA간부로 일했던 빅터 마체티씨가 쓴 「CIA와 정보숭배」란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오늘날 CIA 및 기타 정보기관은 출입금지 구역에 도청장치를 하거나 전파도청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경호원이나 수위를 찾고 있다. 다른
나라의 전화전신회사도 CIA의 표적이 되어왔다. 외무성 및 국방성 침투 이외에도 CIA 공작원들은 당사국가의 전신조직에 침투하려 한다. 이
작업은 때로 미국 회사 특히 국제전신전화회사(ITT)의 도움을 받는다. 우편업무도 첩보 목적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CIA 공작원의 대부분은
도청에 관한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도청장치를 하는 것은 CIA 본부나 지부에서 온 기재과 전문요원들이 대부분 맡고 있다.
작업이 복잡하면 할수록 CIA 본부의 전문가들이 더욱 많이 동원된다. 어떤 경우에는 CIA 요원 및 책임자급
까지도 이러한 장비설치 기술에 관해 기재과 전문가의 특별훈련을 받아야 한다. 물론 가청(可聽) 주파장치는 복잡하고 어렵다. 고도로 위험이
수반되는 작업은 광범위하고도 상세한 조사가 끝난 후 엄청난 사전 계획을 필요로 한다. 이를테면 건물 및
바닥에 대한 계획은 1차적으로 눈으로 감식한다. 건물 벽의 구조, 방 내부의 색깔 및 이와 유사한 사실도 신중히 결정되어야 한다. 이 장비가
설치될 건물이나 방 혹은 사무실내의 활동이 관찰, 기록되어 그 지역에 언제 접근할 수 있느냐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의
움직임과 순찰 상황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후에라야 어디에 언제 도청장치를
할 것이냐가 최종 결정된다. 보통 문제의 장소는 밤이나 주말에 침투하며 주의 깊게 사전 계획된 시간에 도청장치가 설치된다. 속력 빠르고 소리나지
않는 고속 착공기로 벽을 뚫고 도청장치를 한 뒤 손상된 부분은 빨리 응고하는 도벽제로 막고 처음과 똑같은 페인트칠을 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
장치는 옆방 혹은 아래 윗방으로부터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천장이나 마루바닥이 있는 경우). CIA가 도청에
성공한 나라는 보통 국내 안보체제가 해이해서 이 장치를 하는 데 필요한 CIA 활동의 자유를 용인하는 비공산국가에 한정되어 있다. 일부
동맹국에서 CIA는 당사국 정보기관이 설치한 도청장치로부터 얻은 정보를 같이 쓰고 있다. 당사국 정보기관은 CIA로부터 기술적 원조를 받으며 이
과정에서 CIA가 침투할 수도 있다」 FBI는 케네디 대통령의 백악관 전화까지 도청, 케네디 대통령이 마피아 단원의 정부와 정을 통하고 있는
사실을 알아낸 적도 있다. 에드가 후버 국장이 식사시간에 조용히 이 사실을 대통령께 통보, 관계를 끊도록
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증거로 보아 청와대가 CIA에 의해 도청된 적이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朴대통령도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집무실에서 정원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CIA가 사람에 의한, 또는 외부로부터의 전파발사에 의한, 도청을 했다면 그런 회피 방법은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분쟁지역만 쫓는 8대 지부장
75년 봄에 태국으로부터 부임, 아홉 달만 있다가 다시 태국으로 돌아간 다니엘 C 아놀드 지부장(8대)은
해병대 장교 출신이었다. 행동이 절도가 있고 약간은 딱딱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는 분쟁지역만 찾아다닐 정도의 지하공작전문가였다. 그가 부임했을
땐 한국의 국내정세는 긴급조치 9호의 공포 이후, 비교적 잠잠한 때였다. 그는 『너무 조용하니 아마도 오래 있게 되지 않을 것 같다』고 우스개를
했다. 그의 우스개는 적중했다. 76년에 들어서자 태국의 쿠크리트 수상 내각이 하원에서 불신임을 받았다.
쿠크리트씨는 의회를 해산, 선거전에 들어갔다. CIA는 태국사정에 정통한 아놀드씨를 다시 뱅콕으로 보냈다. 아놀드씨는 그 뒤의 혼란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쿠크리트 수상이 선거에서 참패한 뒤, 좌익계 학생데모가 유혈사태로 치닫자 태국군부는 76년10월6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군부가 추대한 새 수상은 크라이앙사크 차마난드 총사령관이었다. 크라이앙사크의 뒤에는
아놀드씨가 있었다. 두 사람의 깊은 개인적 인연은 태국정치 역학의 중요한 함수로 지적될 정도였다. 아놀드씨와 가깝게 지낸 한국인으로는
백두진(白斗鎭)씨(당시 유정회 의장)가 있다. 白씨는 78년3월에 태국을 방문, 아놀드 지부장과 저녁을 함께했다. 그 자리에서 아놀드씨는
『스나이더 주한 미대사의 후임으로는 글라이스틴씨가 확정적이며 카터 대통령의 철군계획은 결국 좌절되고 말 것이다』고 말했다. 이 두 가지 예언은
1년 뒤에 모두 적중했다. 『金大中씨는 CIA가 살렸다』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金大中씨 납치에 관련했다는) 정보를 얻는 데는 강대국이
관계됩니다. 세계제일의 강대국의 정보가 8일(납치 당일) 저녁 무렵에 들어왔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죠. 미국의 CIA가 한국 중앙정보부에 지령을
한 것이죠. 강대국은 「죽여서는 안 된다」고 지시를 내렸죠. 나는 金씨가 그렇게 해서 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작은 배에서 큰 배로 金씨를
옮기기 전에 배에 직접 지령을 내렸던 것이 아닐까요. 계획을 사전에 알고서 바다 속에 던져버릴 우려가 있으므로 그런 지시를 내렸겠죠.
어쨌든 죽이지 말라고 하니 엄청나게 당황했겠죠. 그래서 큰 배가 출항하여서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동안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우스노미야씨가 사건직후에 나를 찾아 왔을 때 나는 「金大中씨는 절대로 살해되지 않습니다. 제게
믿는바가 있습니다」고 안심시켰죠』(73년8월8일 金大中씨 납치사건 당시 일본 법무장관이었던 다나까 이사마씨가 78년 8월에 마이니찌 신문기자에게
털어놓은 이야기) 「당시 미 국무성 한국과정 레이나드씨에 따르면 사건 직후 서울주재 CIA챔임자였던 도널드
그랙씨가 한국중앙정보부에 문의하여 金大中씨 납치는 한국중앙정보부가 했다는 것과 범행을 실행한 정보부 공작원 몇 명의 이름까지 확인, 그랙씨는
그것을 미국에 보고했다고 한다. 사건이 발생한 8월8일 직후부터 2∼3주간 동안 레이나드 한국과장의 책상 위에는 연일 서울과 도오꾜의 미
대사관과 CIA에서 올라오는 방대한 보고서가 싸였다. 특히 CIA는 한국 중앙정보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을 뿐 아니라, 레이나드씨에 의하면 「한국
정보부 내부에 미국 측에의 통보자가 많아 사건의 내용을 그 계획단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상세하게 전달했다」고 한다.
미 CIA의 극비보고서는 사건 후 2∼3주간만에 범행에 가담한 주요인물, 범행방법, 金씨가 도오꾜에서
오오사까까지 연행된 과정, 오오사까 부근에서 金씨가 『안전가옥』에 잠시 감금된 사실, 그곳에서 배까지 운반된 상황 등을 전해 왔다고
한다」(1977년 11월4일치 아사히신문 조간의 레이나드 인터뷰 기사). 「주한, 주일 CIA의 비밀보고에 의하면 한국에서의 공사계약을 둘러싸고
일본의 회사들이 한국측에 뇌물을 제공했다고 레이나드씨는 밝혔다. 이 보고서에는 일본의 대한(對韓)로비스트로서 기시 전 수상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마이니찌 신문 1977년 1월28일치 인터뷰 기사). 李厚洛씨를 밀어낸 그랙 지부장 이상의 인용문에 나오는
CIA보고의 당사자는 金大中씨 납치사건 때 CIA한국 지부장이었던 도널드 P 그랙씨(Donald P Gregg)다. 그랙씨는 미국의 명문
윌리엄스 칼리지를 나온 엘리트다. 지금은 50대 후반의 나이에 부시 부통령의 국제문제 담당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다. 부시씨가 차기 대통령이 되면
제2의 키신저 역할을 맡게 될 것이란 평을 벌써부터 듣고 있다. 그는 75년에 한국에서 본부로 돌아가 백악관의 국가안보위원회(NSC)에
파견됐다가, CIA부장 출신인 부시 부통령에게 발탁된 것이다. 국무성과 CIA에 있는 한국통 실무 관료들의
총수 격으로 뒷무대에서 조용하게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평이다. 그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조지 타운 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하고 있는
학구파다. 역대 CIA한국지부장 가운데서 그랙씨 만큼 좋은 인상을 심고 간 사람도 드물 것이다. 白斗鎭씨는 『부부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대만의 고아를 양자로 기르고 있었다. 친자식보다 더 귀여워했고, 식탁에선 기도를 열심히 해 밥이 식을 정도였다』고 했다. 장우주(張禹疇)씨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파워보다는 머리를 쓰는 타이프였고,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평했다.
李厚洛씨와 CIA의 관계는 그랙씨의 전임자인 리차드슨씨의 재임 후반기에 와서 급속히 냉각하더니 그랙씨의
시절에 와선 파탄되고 만다. 독실한 천주교인의 윤리관을 가지고 있던 그랙씨는 李厚洛씨의 돈 관계를 소상히 알고 있었고, 그를 싫어하게 됐다고
한다. 李씨는 그랙씨에게 金日成을 만난 인상을 이야기하면서, 『상당한 인물』(Quite a Character)이란 표현을 썼는데, 그랙씨는
정보부장으로선 너무 경솔한 이야기란 표정이었다고 한다. 李씨에 대한 그랙씨의 이런 평가는 金大中씨 사건을 계기로 하여 李씨의 실각 쪽으로
작용하게 된다. 레이나드씨의 증언은 金大中씨 사건에 있어서, CIA의 역할에 대한 가장 정확한 증언이다.
사건당시의 국무성 한국과장이었으므로, 신문사에 비유하면 사회부장이었다는 얘기다. 다만 그의 신빙성이 문제다.
레이나드씨가 77년 1월28일자 마이니찌 신문 인터뷰 기사에서 일본회사의 뇌물제공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일본 정부나 기시 전 수상은 근거 없는
중상이라고 일축했었다. 그러나 1년도 못 돼 일본 의회에서 일본의 상사연합이 서울지하철 공사를 맡으면서 공화당 정권에 뇌물을 주었고, 기시 전
수상이 이 공사를 따내는 데 로비스트로 뛰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레이나드씨의 증언과 CIA 한국지부의 보고가 정확했음이 입증됐었다.
레이나드씨의 증언에는 金大中씨 사건 때 CIA 서울지부가 한국정부안의 정보망을 통해 진상을 알아낸 것처럼
되어 있는데, 이런 방법보다는 통신도청에 의한 정보수집이 더 결정적이었다는 설도 있다. 즉, 미국 정보기관이 서울과 납치선 사이를 오가는 무선을
가로채 납치의 진행과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 법무장관이 벌써 납치 당일 저녁에 『金씨가 무사할 것이다』는 CIA정보를 접수했다면,
CIA의 개입은 즉각적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순발력은 CIA의 정확한 정보입수와 이에 따른 키신저의 강력한 경고에서 나온
것이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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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A의 통신도청, 청와대까지? 미국 측의 통신도청 기술에
참고가 될 기사가 78년 5월26일자 워싱턴 스타지의 1면 머리에 실린 적이 있다. 이 기사는 미국의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가안전국(NSA)이
주미 한국대사관과 한국정부 사이의 암호 전신문을 모니터 했다고 전했다. 암호 해독반은 그 전신문을 풀어서 金東祚대사가 미 의회를 상대로 벌인
로비활동의 진상을 낱낱이 알아냈다는 것이었다. 전파 도청을 전문으로 하는 이 NSA에 대해선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푸에블로호 납치, EC-121 정찰기 피격, KAL007피격 사건 때마다 NSA란 이름이 등장했다. 그리곤, 곧 비밀의 장막 너머로
사라지곤 했었다. NSA의 주임무는 엘린트(Elint=Electroric Intelligenec), 즉 전자기술을 동원한 첩보활동이다. NSA는
너무나 비밀에 쌓여 있어 NSA에 대해 쓴 책이 NASA, 즉 우주항공국에 대한 책으로 잘못 선전될 정도이고, NSC 즉 국가 안보위원회와
혼동되는 일도 있다. NSA는 세계 곳곳에서 약 2천 개소의 통신 모니터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워싱턴에서
가까운 메릴랜드주의 포트 미드에 있는 본부에선 매일 40t씨의 극비 자료를 생산한다고 한다. 암호 해독 이외에도, 대용량 컴퓨터로써 상대국의
통신을 분석하여 그 내용을 알아내고, 「트랙킹 어낼리시스」란 방법을 쓰면 국내배치의 변경상황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때 아르헨티나 군의 암호를 해독, 영국에 정보를 제공한 것도 NSA였다. 카터
대통령이 한국 주둔군의 철수계획을 포기한 것도 NSA의 북괴군 배치상황 정보에 의한 결단이었다고 전한다. 1년 예산이 약 1백억 달러나 돼
CIA를 비롯한 다른 정보기관의 예산을 합친 것보다도 많다. KAL 007 사건 때 소련 요격기와 관제소 사이의 대화를 녹음한 것도 북태평양의
미국령 시미아 섬에 있는 NSA기지였다. 일본의 아오모리와 가나까와 지방에 있는 NSA기지도 007 피격상황을 모니터했다.
물론 한국에도 여러 군데에 NSA기지가 있는 것으로 보도됐다. CIA 한국지부장은 NSA의 업무를 지도하는
자리에 있고, 매일 중요한 보고를 받는다고 한다. 金大中납치 사건 때 NSA의 「전자 귀」가 동원됐다고 판단하는 것은 자연스런 추리겠다. 청와대
도청에 관계한 시설은 미 대사관 안테나가 아니고 NSA란 설도 있다. 朴鐘圭 채널을 통한 李厚洛 거세 이후락(李厚洛)부장에 대한
미CIA의 「비토 선언」은 1973년 8월17일자 미국무성의 내부 회람 메모란덤에 나온다. 5년 뒤 프레이저 위원회에 제출된 이 문서는 미국
내에서 이뤄지고 있는 한국 교민에 대한 한국정부기관의 활동을 지적하여 FBI에 수사를 의뢰했음을 밝힌 다음 이렇게 못박았다.
「…우리(국무성)는 이 문제로 CIA측과 협의했다. 그들은 李厚洛씨와의 관계에 대해 신중한 검토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내의
불안정을 우려하고 있는 CIA는 금명간 李씨를 겨냥한 조치(action directed against him)를 취할 생각이다」
미 하원 보고서에 따르면 주한 미 대사관은 李厚洛씨에 의한 金大中씨 납치, 반정부 대학생들에 대한 강경
진압, 어느 교수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또 위의 국무성 문서에 적힌 대로, 미국 측(CIA)은
朴鐘圭경호실장을 통해 朴대통령에게, 李부장의 행동에 대한 불만과 그것이 한미 관계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란 점을 전달, 그를 제거시켰다고
했다. 이 보고서는 미국 측의 관점에서만 李厚洛씨의 실각을 해석하고 있는 듯하다. CIA의 압력은 李씨
실각의 한 원인이었을 뿐이다. 7·4성명 이후 李씨의 독주가 朴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尹必鏞씨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대통령으로부터
받았으며, 金씨 납치사건으로 나라를 망신시켰다는 점등으로 해서 대통령의 불신임이 깊어 가고 있을 때 CIA의 제거요청이 왔던 것이다. CIA에선
이처럼 李씨의 기반이 약해지는 시점을 택해서 펀치를 날린 것인지도 모른다. CIA가 李씨 제거공작을
朴鐘圭씨를 통해서 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李厚洛씨와 미 CIA의 밀착은 잘 알려져 있지만 朴鐘圭씨도 역대 CIA 지부장들과
친밀했었다. 5·16당시의 지부장 실버씨와 10·26당시의 브루스터씨가 다 같이 朴鐘圭씨를 통해 정변의 진상과 주동세력의 성격을 파악하려 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CIA는 朴대통령 측근 2대 권력자와 직통 채널을 갖고 있었다. 그 한 채널을 가동하여 다른 채널(아마도 쓸모가 없게 된)을
제거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CIA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그랙 지부장 시절에 李厚洛씨뿐아니라 朴鐘圭씨도
8·15저격사건으로 물러나 CIA의 2대 채널이 끊어져버렸다. 이와 함께 한미간의 불편시대가 시작된다. 정보기관이 하는 역할은 무대 위의 마찰을
막후의 교섭으로 해결하는 일인데, CIA의 고급 채널이 끊어짐으로써 해결사의 기능이 약화됐다. 李, 朴씨의 후임이 된 申稙秀, 金載圭, 車智澈은
CIA와의 관계나 정치역량에서 앞의 두 사람에 미치지 못했다. 金載圭는 중정부장 취임 이후, 한국의 핵개발
정책에 반대하는 등 친미적인 경향을 보였으나 朴대통령의 신임쟁탈전에선 車智澈에게 밀렸다. 車는 이 조직을 통해 金載圭가 올리는 정보의 정확성
여부를 검증, 朴대통령에게 金부장의 보고가 엉터리란 쪽으로 몰고 가기도 했다. 이에서 비롯된 車에 대한 金의 증오심이 10·26의 가장 중요한
동기였다. 국가정보의 채널을 지도자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때는 재앙이 생길 수도 있다는 교훈을 준다.
CIA가 아무리 막강해도, 미국 대통령은 CIA의 정보를 정책의 참고자료로 쓸 뿐이다(CIA 이외에도 다섯
개의 주요 정보기관이 더 있다). 정보의 수집, 평가, 판단, 실행을 한 기관이 독점해버리면 「정보의 객관화」가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CIA의 기능을 정책결정이나 실행에서 멀리 떼어놓고 있는 것이다. 정보는 어디까지나 정책의 도구이지, 그 주인은 아니다. 정보가 주인이
되면 권력자는 정보의 노예가 돼 버린다. 가장 막강했던
리차드슨 CIA한국 지부장의 임기는 2년이 원칙이다. 급박한 사태가 발생하면 이 기간이
단축되거나 연장된다. 제6대 지부장 존 리차드슨씨는 69년부터 73년5월까지 4년을 근무했다. 역대 지부장 가운데 최장기 근무자다. 그의 시절에
3선개헌, 대통령선거, 남북회담, 유신선포가 있었다. 격동기에 오래 근무했기 때문인지 얼굴이 가장 널리 알려진 지부장이다. 부임할 때 56세의
대머리 노인이었다. 허리가 꾸부정한 그는 어떤 사람과도 만나는 화통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딸을 데리고 나이트 클럽에 가서 고우고우 춤도 곧잘
추곤 했다. 그는 한국이 마지막 근무처였다. 즉, 한국에서 60세를 맞아 정년은퇴한 것이다. 지금은 멕시코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CIA의 직원들 이름은 거의 활자화되지 않는다. 부장이나, 가끔 국장급 정도가 공개될 뿐이다. 그런데도
리차드슨씨의 이름은 웬만한 CIA관계 서적에는 반드시 나온다. 세계적인 대사건의 현장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상한 영감처럼 말도 나지막하게
하던 리차드슨씨는 2차대전 때 이미 CIA의 전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에 몸 담았다. 윌리엄 콜비,
리차드 헬름즈씨 등 뒤에 CIA부장이 된 사람들과 같은 그룹이었다. 전후에 그는 그리스의 국가정보기관
KYP를 조직하고, 훈련하고, 자금을 대주는 데 깊이 관여했다. 1956년 하바드 대학 교수이던 키신저씨는 그리스를 여행했을 때 CIA지부장이던
존 리차드슨씨의 영접을 받았다. 리차드슨씨는 그리스의 유력 언론인을 키신저씨에게 소개시켜 주는 등 안내를 잘 해주었다고 한다. 이 여행에서
키신저씨는 미 CIA가 그리스 군부를 지원하는 구심점이란 선입견을 갖게 됐다고 한다. 60년대에 그리스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군부 독재체제가
들어섰을 때도 키신저씨는 CIA와 군부의 유착을 계속 뒷받침하게 됐는데, 그리스 여행 때의 인상이 아주 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리차드슨씨와 친했던 한국인들은 역대 지부장 중 가장 막강했던 인물로 그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직급도
역대 지부장 중 가장 높았다. 한국에 왔을 땐 이미 산전수전 다 격은 첩보원으로서, 어떤 공작을 조직하고, 조종하는 데는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더구나 리차드 헬름즈나 윌리엄 콜비 등 그의 친구들이 CIA의 지휘부에 있어 미국 본부에 대한 그의 발언권도 컸었다.
71년 대통령선거 직후, 청와대에서 朴대통령, 李厚洛중앙정보부장, 그리고 또 다른 정보기관장이 비밀회합을
가졌다. 유신에 대한 기본 구상이 토의됐다. 그 며칠 후 리차드슨씨가 모 정보기관장을 찾아가 그 토의내용을 확인하려고 했는데,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스 정보기관의 후견인이었던 리차드슨씨는 월남의 고딘디엠 대통령 시절 사이공 지부장이었다.
여기서도 그는 대통령의 동생 고딘누가 대장으로 있는 비밀경찰을 조직, 훈련하고 자금을 대는 대부(代父)의
역할을 수행했다. 미 CIA는 우방국의 정보기관을 강화하는 정책을 오랫동안 추진해왔다. 그런 지원을 통해 상대국의 정보기관을 친미화 시키고, 그
내부에 CIA의 협력자를 박아 놓는다. 우방국의 정보기관이 막강할수록 그 상대역인 CIA도 일하기가
편해진다. 고딘디엠 제거에 반대. 소환 당해
리차드슨씨는 고딘누와 친하면서도 루치엔 크네인이란 CIA직원을 연락원으로 하여 반정부 장성들과도 직통 채널을
뚫어 놓고 있었다. 1963년 여름에 미국 고위층에선 고딘디엠 대통령에 대한 처리문제로 심각한 이견이 빚어졌다. 해리만, 힐즈맨 등 국무성
팀에선 고딘디엠을 제거해야 공산게릴라를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존 맥콘 CIA부장이나 멕스웰 테일러 대통령 보좌관 등은 고딘디엠을 대체할
인물이 없다고 쿠데타 계획에 반대했다. 리차드슨씨나 당시 극동 담당 국장이던 콜비씨도 쿠데타에 반대했다.
맥콘 부장은 『고딘디엠이 xx일지는 모르나 적어도 그는 우리의 xx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고딘누의
비밀경찰이 63년8월에 반정부 불교사찰을 습격, 국내정세가 불안해지자 국무성의 발언권이 강화됐다. 국무성 팀에선 드디어 케네디 대통령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핸리 캐보트 롯지 대사가 새로 사이공에 부임했다. 쿠데타 계획의 추진지시가 그에게 떨어졌다. 리차드슨씨는 반발했다.
거물정치인인 롯지 대사는 워싱턴에 CIA지부장의 항명을 보고, 그를 소환케 했다. 63년10월28일
롯지대사는 CIA지부의 코네인을 통해 장성들의 쿠데타 일정을 통보받았다. 케네디는 롯지대사를 통해 군장성들에게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통보했다. 11월1일 쿠데타가 성공했다. 고딘디엠과 고딘누는 피살체로 발견됐다. 그 둘을 사살한 혐의를 받은 월남군 장교는 며칠 뒤 목 매단
시체로 발견됐다. 그 장교는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했다고 발표됐다. 고딘디엠의 피살 소식이 백악관에 전달됐을
때 케네디 대통령은 보좌관들과 함께 국무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케네디는 벌떡 일어나더니 방을 나가버렸다고, 그 자리에 있었던 테일러 장군은 뒤에
말했다. 그 다음날 CIA간부회에선 케네디 대통령을 비웃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이 댈라스에서 피살된 것은 그 21일 뒤였다.
이제 와서는 월남전의 패인 제1번은 고딘디엠의 축출로 꼽혀지고 있다. 유신계획 미리 안 CIA 리차드슨 지부장은 4년 동안 3명의
중앙정보부장을 상대했다. 金炯旭, 金桂元, 李厚洛. 李厚洛씨와는 상대한 기간이 약 3년간이나 된다. 두 사람은 호적수였다. 李씨는 권력의
절정기에 있었고, 리차드슨씨는 첩보원으로서 완숙기에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협력해야 할 일도 많았지만, 서로 견제해야 할 일도 많았다.
金炯旭은 그의 회고록에서, 리차드슨 씨가 李厚洛씨의 평양 비밀방문을 사전엔 새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그가 판문점을 넘어갈 때에야 알게 됐다고
썼다. 李씨는 회담내용을 미국 기관에 일체 알리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사실과 다르다. 우선
70년대 남북회담의 시작에는 미국의 강력한 권고가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미국이 한국의 등을 밀고, 미국의 부탁을 받은 중공이 북한의 등을 밀어
회의장에 나서도록 한 일면이 있는 것이다. 남북한 적십자 회담이 열릴 때, 키신저는 중공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돌아갈 때 보좌관을 서울로
보내 대사관의 간부들과 한국적십자 측 핵심인물에게 미국과 중공의 생각을 전해주기도 했다. 미국과의 밀접한 협의 아래서 남북비밀협상이 이뤄졌다고
봐야 옳다. 金炯旭은 李厚洛씨가 74년5월2일 판문점을 넘을 때 미 CIA가 처음 알았다고 했지만, 그
35일 전인 3월28일 정홍진(鄭洪鎭.당시 중정 국장 겸 적십자 회담 3석 대표)가 판문점을 넘어 평양으로 갈 때도 CIA는 알고 있었다.
張禹疇적십자사 사무총장이 직접 판문점에 나가 UN군 측에게 이를 통보했던 것이다. 朴대통령이 張씨를
사무총장으로 발탁한 것도 그가 한국군 장성 가운데서 미 대사관이나 CIA를 포함한 미국 측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란 것을 감안했기 때문이었다.
張씨는 남북회담의 진전에 관해서 한국과 미국 사이의 연락관 역할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李厚洛씨는 나중엔 張씨에게 미국 측과의 접촉을
금하도록 명령했으나, 리차드슨씨 쪽에선 KFMS 루트를 통해서도 남북회담의 경과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즈음 공화당 전국구의원이던 金炯旭은 『리차드슨씨와 한 주일 걸러 교대로 만찬을 열었다』고 회고록에다 썼다.
어느 날 리차드슨씨는 金에게 『白대통령이 결국 총통제를 강행할 것으로 보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며칠 뒤 李厚洛씨는 부하를 金炯旭에게 보내
『왜 총통제 이야기를 발설하고 다니느냐?』고 경고를 했다고 한다. 金은 리차드슨씨가 李부장에게 총통문제로 질문을 할 때 자기에게서 들은 것처럼
말했던 것 같다고 추리했다. 리차드슨씨는 유신의 구상단계에서부터 이를 추적, 유신선포 훨씬 전에 이미 전모를
파악하고 있었다. 유신계획의 한 실무자는 이렇게 말했다. 『궁정동 밀실에선 72년4∼10월 사이 격리 상태 아래서 실무작업이 이뤄졌다. 이
실무반을 제외하고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대통령, 부장, 유혁인(柳赫仁)씨(정치담당 비서관), 金정렴 비서실장 뿐이었다. 선포 직전에 가서
洪性澈 정치담당 수석 비서관과 김성진(金聖鎭) 대변인이 알게 됐다. 李부장은 金鍾必총리에게도 알리자고 했으나 朴대통령은 「말이 샌다」면서 못하게
했다. 金총리에겐 닷새 전에 朴대통령이 골프를 같이 치면서 직접 알렸다. 미국 측엔 金총리에게 보다도 먼저
알렸다』 朴대통령에게 업어치기 당해
리차드슨씨는 李厚洛씨가 7·4성명과 유신에 대해 공식 통보해 줄 때는 이미 상황을 죄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李씨의 때늦은 협조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72년10월17일 아침 청와대에서 朴대통령이 특별보좌관들과 함께 유신선포
배경설명문을 읽고 있을 때 미 대사관에선 李厚洛부장에게 불만을 전달했다. 배경설명엔 「미국과 중공의 접근」 「월남 평화협상」의 예를 들면서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조처라는 대목이 있었다. 미국을 걸고 들어가는 듯한 이 구절을 빼달라는 것이 대사관측의 부탁이었다.
李부장이 朴대통려에게 보고하니, 대통령은 『뭐, 내가 거짓말했나. 미국 놈들이 안 그랬으면
내가 뭐 답답해서…』 라면서 못마땅해했다. 金정렴 비서실장이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라면서
설득하자 朴대통령은 『그래, 빼줘!』라고 했다. 유신 선포 직후 마샬 그린 국무성 차관보는
워싱턴에 주재하던 조세형(趙世衡)한국일보 특파원에게 밤중에 전화를 걸어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 당신은 무엇인가 소식을 들은 게 있는가?』고
물었다고 한다. 사전에 유신의 내용을 소상히 알고 있었던 국무성 간부의 이런 행동은 고단수의 더듬수가 아니었을까. 유신을 몰랐던 것처럼
처신함으로써 묵인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유신 선포는 한미간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출발점이 됐다. 남북회담을
권고해 온 미국으로선 그 남북회담이 朴대통령과 李厚洛씨에 의해 유신 선포의 한 이유로 역이용됐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리차드슨씨와 李씨의 관계도
유신 이후 급속히 냉각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CIA의 눈에서는 李씨가 협력자로 보이지 않게 됐던 모양이다. 78년에 미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가
펴낸 한미관계 보고서에는 李厚洛씨의 권력 남용 및 돈과 관련된 부정에 대한 언급이 유달리 많이 나온다. 이 정보의 상당부분은 리차드슨씨가 지휘한
당시의 CIA 한국지부가 수집한 것으로 추리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CIA의 도구, 디크社의 검은 가방 이 보고서 238쪽엔 이런
대목이 있다. 「李厚洛부장 시절 KCIA는 『검은 가방』(Black Bag)작전에 관계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소위원회는 KCIA가 국제 환전상인
디크사(Deak & Co.)로 하여금 외화를 『검은 가방』에 넣어서 청와대로 운반하게 했음을 밝혀냈다. 1973년 9월에 한 미국회사가
하와이에 있는 디크사의 구좌에 2만 달러를 입금시킨 것에 소위원회는 관심을 가졌다. 이 돈을 그 미국 회사가
한국 측 대리인(한국 엔지니어링 제조 회사)의 지시에 따라 송금한 커미션의 일부였다. 이 대리점은 그 전에 J모씨에게 5천 달러, UN대표부의
李모씨에게 1만 달러를 송금하도록 지시한 바가 있었다. 디크사는 이 거래에 관련된 문서를 찾을 수 없다고 소위원회에 알려 왔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환전상 디크사다. 디크사는 일본의 록히드 사건 수사에서도 드러난 이름이다.
69년6월∼75년1월 사이 디키사는 록히드사의 뇌물성 비밀 자금 8백여만 달러를 27회에 걸쳐 도오꾜의 록히드지사 대표에게 송금했었다. 전 뉴욕
타임즈지의 기자 태드 슐크씨는 76년4월2일자 「누 리파블릭」 잡지에다가 「록히드와 CIA, 디크 커넥션」이란 기사를 기고했다.
이 글에 따르면 디크사는 CIA가 범세계적 규모의 자금조작용 지하 채널로서 오랫동안 이용해온 회사라는
것이다. 예컨대 1954년 이란의 모사데크 정권을 무너뜨리는 공작을 할 때 CIA는 디크사를 이용, 공작자금을 관리했다. 월남전쟁 때도 CIA는
디키사의 홍콩지점을 통하여 CIA자금을 암시장에서 피아스타화(貨)로 바꾸었다. 따라서 CIA가 록히드사에 의한 일본 내 뇌물공작의 전모를,
디크사를 통해, 소상히 알고 있다는 것은 단순한 가능성 이상의 것이라고 슐크 기자는 지적했다. 디크사의
설립자는 니콜라스 디크씨.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항가리, 스위스, 오스트리아,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5개 국어에 능통하다. 1939년
뉴욕에서 환전상을 설립한 뒤, 2차 세계대전 중엔 CIA의 전신인 OSS의 정보장교가 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OSS를 떠났으나 그 뒤에도
CIA의 고위관리들과 친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는 것이다. 이 디크사가 왜 CIA의 심부름을 하게 됐는지 알길이 없다. 디크사가 CIA와
관련된 회사란 사실을 알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디크사가 우리 정부의 검은 돈의 국제간 이동에 관여했다면 CIA가 그 돈의 흐름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추리하는 것도, 단순한 가능성 이상의 일일 것이다. 金炯旭이 대만을 거쳐 미국으로 달아난
것은 73년4월 하순이었다. 그 전에 이미 수천만 달러를 미국으로 빼돌린 뒤였다. 그의 망명과 자금 빼돌리기에 CIA한국지부가 도움을 주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당시의 지부장 리처드슨씨가 金과 자주 만나 정보를 주고받는 사이였다는 단순한 상황증거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고, 재미동포
출신인, CIA한국지부의 당시 모 요원이 관련했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CIA내부에서 나돌고 있다. 천만 달러 단위의 외화를, 권좌에서 물러난 金이
쉽게 빼돌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디크사의 사장 니콜라스 디크는 지난해 11월 뉴욕 사무실에서 그의 비서와 함께 총 맞아 죽었다. 그를 사살한
범인은 44세의 여자였는데 정신병력이 있었다고 한다. CIA도움으로
李穗根 체포 리차드슨씨의 전임자인 제5대 지부장 라자스키씨는 67∼69년 사이 근무했다.
68년의 1·21 사태를 비롯, 푸에블로호 납치, 울진·삼척 공비침투, EC-121기 피격사건 등으로 한반도가 요동칠 때였다. 라자스키씨는
민간인들과 접촉을 별로 하지 않았는지, 그의 면모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수근(李穗根)이 해외로 달아났을 때 라자스키씨가 미 CIA첩보망을
동원, 한국 측에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 것은, CIA와의 밀월시기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라자스키씨의 재임시절, 한국은 월남에 파병, 미국이
한국의 빚을 지고 있을 때였다. 두 나라 관계는 해방 뒤 그 어느 때보다도 순탄했다. 李穗根사건과 CIA의
협력에 대해선 그를 탄손누트 공항에서 직접 체포했던 李大鎔씨(한국화재보험협회 이사장·당시 주월 한국대사관 공사·예비역 준장)의 증언을 직접
들어본다 『李穗根이 서울의 거주지에서 종적을 감춘 것은 69년 1월27일이었다. 나는 그 날밤 李穗根이
李세준이란 가명을 쓴 여권을 가지고 조카 배경옥(裵慶玉)과 함께 사이공으로 떠났다는 통보를 서울로부터 받았다. 그 다음날 조사해보니 월남에 온
李세준은 李穗根이 아니었다. 본부에서 다시 조사해 보니 李穗根은 오제영(吳濟寧)이란 가명으로 여권을 만들어 조카와 함께 28일 오전 7시30분
CPA여객기 115편으로 홍콩으로 출국했음을 밝혀냈다. 29일 오후 홍콩의 한국영사관 직원들이 홍콩 공항을
지키고 있다가 프놈펜행 CPA기를 타려고 나오는 李와 조카를 만나 격투를 벌였다. 李의 가짜 콧수염이 떨어지고 가발이 벗겨졌다. 영사관 직원들과
李 및 그의 조카는 홍콩정청 경찰에 의해 경찰서로 연행됐다. 직원들은 외교관 신분이었기 때문에 즉각 풀려났다. 이때 본부에선 李병두 차장을
홍콩으로 보내 李의 행방을 지켜보도록 했다. 金炯旭은 라자스키씨에게 부탁, CIA의 협조를 요청했다.
1월31일 아침 CIA는 홍콩정청이 李穗根을 사이공 경유, 프놈펜으로 가는 CPA기 편으로 출국시키기로
결정, 일행이 공항으로 출발했다고 金炯旭에게 통보했다. 金炯旭이 홍콩에 파견된 李병두 차장에게 이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李차장은 李穗根이 아직
경찰서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얼마 뒤 CIA가 다시 金炯旭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李의 출발을 알려주었다. 다시 홍콩으로 확인하니 李차장은
李穗根이 아직 경찰서 안에 있다고 했다. 金炯旭은 욕설을 퍼붓고 전화를 끊은 뒤 나에게 긴급 연락을 했다.
그때는 이미 李穗根이 탄 CPA기가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 도착한 2분 뒤인 31일 오전 10시17분이었다. 대사관에서 공항까지 가는 데는
1시간쯤 걸린다. 이 비행기는 30분만 머물렀다가 이륙하게끔 돼 있었다. 나는 보좌관을 티우대통령에게 보내 비행기의 이륙을 지체시켜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미국에서, 티우대통령이 군 장교시절, 함께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내가 63년에 무관으로
부임해 온 이래 절친한 친구가 됐는데, 대통령 관저도 뒷문으로 무상출입할 정도였다. 나는 차를 몰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티우대통령의 지시로
비행기는 아직 이륙하지 않고 있었다. 비행기로 뛰어올라갔다. 부하인 李택근씨만을 데리고 갔다. 단박에 李穗根을 알아봤다.
그는 앞자리의 창 쪽에, 그이 옆엔 조카 裵慶玉이 앉아 있었다. 나는 스튜어디스에게 신분을 밝히고 승객
리스트를 가져오라고 했다. 마침 그 스튜어디스는 미스 장이란 예쁜 한국 아가씨였다. 리스트 맨 끝에 오재영이라고 볼펜으로 써 넣은 이름을
확인했다. 2대2의 상황이었다. 어떻게 끌어낼까 궁리하고 있는데 조카가 다가왔다. 「대사관에서 오셨습니까」
「너 裵慶玉이지!」 裵慶玉은 기가 푹 죽은 표정으로 여권을 내밀었다. 李택근씨에게 裵를 꼭 붙들고 있게 했다. 나는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李穗根에게 다가가 「李선생이시죠」라고 했다. 갑자기 그는 「야, 이놈아! 난 죽을 각오가 돼 있어!」라면서
나의 정갱이를 걷어찼다. 태권도 2단인 나는 위에서 그의 어깨를 갈겼다. 기장이 달려 와 「왜 이러느냐」고 물었다. 나는 신분을 밝히고
티우대통령의 특명이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기장은 물러났다. 그 사이 우리 대사관 직원 대여섯 명이 달려 와 합세, 李穗根을 무사히 끌어낼 수
있었다. 수갑을 채워 대사관으로 데려가는 차 중에서 그는 「야, 우리 부장 좋아하시겠구만」
「야, 李선생은 훈장 타게 됐구먼」이라고 빈정대기도 했다』 이 사건에서 미 CIA는
홍콩주재 영국정보기관의 협조를 받았다. 영국 측은 한국정보부와 직접 접촉하지 않는 대신 긴요한 정보를 CIA에 흘려줌으로써 그것이 자연스럽게
한국 쪽으로 들어가도록 했다고 한다. 영국 측이 李穗根을 출국시키되 사이공을 경유하는 비행기편에 태운 것도 한국 측을 위한 배려였던 것이다. 이
수사에 관계했던 사람들은 영국정보기관의 신중하면서도 세련된 조처에 감탄하면서 『역시 전통있는 정보기관이 다르더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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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121 격추사건과 NSA 1969년4월14일 동해의
공해상에서 미해군 전자첩보기 EC-121이 북괴공군기의 공격을 받고 격추돼 승무원 31명이 몰사했다. 이 비행기는 그 전해에 납치된 푸에블로호와
마찬가지로 공산국가의 통신감청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다. 이 사건이 터지자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은 무력보복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레어드 국방장관과 헬름즈 CIA부장은 외교적 보복을 주장했다. 전 뉴욕 타임즈의 퓰리처상 수상기자인
세이머 허쉬는 「권력의 대가(代價)」란 책에서 당시의 비화를 소개했다. 허쉬 기자에 따르면 국가안보국(NSA)의 통신도청기지는 격추사건을
전후하여 북한의 통신을 감청, 이 사건이 고의적인 도발이 아니고 전투기조종사에 대한 관제실수에 기인한 것임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이런 정보에
입각하여, 결국 CIA의 온건한 보복정책이 채택됐는데, 닉슨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중대한 실수를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격추될 때 EC-121이 공해상에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격추 당시, 우리는 북한의
레이다가 무엇을 보여주고 있었는지, 소련 레이다가 무엇을 보여주고 있었는지도 알고 있다. 세 나라(미국, 소련, 북한)의 레이다는 꼭 같은
위치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것은 NSA의 도청장치가 소련과 북한의 레이다전파를 포착, 분석, 이를 재구성함으로써 상대방 레이다의 추적 상황을
환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NSA에선 닉슨대통령의 이 실토를 듣고 경악했다고 한다.
1960년에 NSA의 암호해독원 2명이 소련으로 달아나 비밀을 털어놓은 다음 기자회견을 갖고 NSA의 활동을
폭로한 적이 있었다. 이 폭로 뒤 월맹은 통신암호를 고도의 복잡한 방식으로 바꿔버렸다. 이 때문에 NSA는 그 뒤 6년간 월맹이 월남의 베트콩
기지로 보내는 암호문을 해독할 수 없게 됐다. NSA에선 소련뿐 아니라 우방국의 통신도 도청하고 있기 때문에 NSA의 능력이 알려질 경우,
우방국의 암호까지도 변경될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실제로 닉슨 대통령의 회견 이후, 소련 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의 통신 암호가
바뀌어졌다. 아시아 재단에 돈 댄 CIA
라자스키 지부장 시절인 1967년 미국에선 CIA의 활동에 대한 중요한 폭로가 한 건 있었다. 이 폭로는
한국에도 파문을 줄 만한 것이었지만 일체 보도되지 않았다. 서울의 비원 근처에 있는 아랍문화회관엔 아시아재단(The Asia
Foundation) 서울 사무실이 들어 있다. 올해로서 설립된 지 32년째인 이 미국 재단은 본부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다. 서울지부는 지난해 약
86만1천 달러를 한국의 연구기관, 대학, 사회단체에 댔다. 지원금을 받은 연구 및 사업계획은 1백 종목이었다. 이밖에도 약 10만 권의 영어
원서를 각 대학도서관에 기증했다. 지난 58∼84년 사이 이 재단에서 한국의 도서관에 기증한 책은
1백22만4천3백여 권이나 된다. 아시아 재단을 모르는 대학생이라도, 원서의 표지 다음장에 찍힌 이 재단의 기증 표시 도장을 대학시절에 한번쯤
본 기억이 날 것이다. 지난해 이 재단은 종속이론에 대한 심포지엄에 보조금을 댔고 나이로비의 여성대회에 참석한 비정부 대표의 여비를
보조해주었으며, 12명의 대학원생들이 국회상임위원회에 배치돼 국회활동을 견학하도록 하는 계획에도 돈을 댔다. 지난해 이 재단의 금전적 지원을
받은 학자들은 수백 명에 이른다. 지난 32년간 이 재단의 덕을 본 수천 명의 학자들 가운데는 오늘 날
한국의 대학과 학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한국에선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이 외국 학술지원재단이 한국에 끼친 영향은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그 지원금의 출처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지난 84년에 아시아 재단은 미국 내에서 약
2천4백만 달러의 자금을 기증 받았다. 그 가운데 1천2백40만 달러는 미 국무성, 1백88만 달러는 국제개발처(AID)로부터 받는 등 미국
정부 예산에서 기증 받은 자금이 약 1천6백22만 달러였다. 주로 미국 정부 돈으로 움직이는 재단일 경우, 재단의 사업에 그 정부의 정책이
반영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총재인 해이든 윌리암스씨는 국가안보위원회에서도 근무한 바 있는 국무성 관료출신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시아 재단의 현재 활동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1967년 이전으로 거슬러
오르면 문제는 달라진다. 전직 CIA정보원이 쓴 「CIA와 정보숭배」란 책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다.
「CIA의 보조를 많이 받고 있는 다른 기관은 아시아재단이다. 이사진을 엄선하여 CIA가 1956년 설립한
아시아재단은 공산권에 관한 학문 및 공동 관심사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공동 관심사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설립했다. CIA는 8백만 달러를
들여 학문 연구자금을 대고 국제회의와 심포지움을 여는 한편, 학자 교환 계획을 실시했다. 아시아재단의 활동은 합법적이었다. 그래서 CIA는
아시아 각국의 반공학자들에게 연구자금을 대주었다. 아시아 재단의 활동 무대는 해외였다. 그러나 아시아 재단은
극동보다는 미국 학계에 더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많은 미국 지식인들이 아시아재단 계획에 참여했다.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CIA의 극동에 대한
생각을 선전했던 것이다. 아시아재단은 단순한 CIA자신의 아시아관(觀)을 미국민의 그것처럼 선전하는 죄를 저질렀다. CIA와 아시아재단과의
관계는 CIA가 전국학생연맹에 보조금을 지급한 사실이 들통난 1967년 이후 명백해졌다. 아시아재단은 CIA가 재정보조를 해서는 안 되는 기관
중의 하나였으며 카첸바크위원회 규정은 CIA의 자금보조를 막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CIA 자금문제에
대해서 아시아재단 서울사무소의 벤 크레메낙 대표는 이렇게 해명했다. 『CIA자금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안 사람은 이사진 중에서도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직접 CIA로부터 돈을 받은 게 아니고 CIA가 만든 대외용 위장회사(Front Company)로부터 받은 것이다』 CIA자금관계가
폭로되자, 아무 것도 모르고 일하고 있었던 직원들 가운데는 그만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아시아 재단에선 직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2m나 되는
긴 해명 전문을 세계 각국의 지부로 보냈다고 한다. CIA냄새는
안 나지만… 67년까지 아시아 재단이 주로 CIA자금에 의해 운영돼 왔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 재단 서울지부가 이 기간에 어떤 사업을 했는지 살펴보자. 1954년에 서울에서 문을 연 이 재단의
초대 대표는 필립 로우씨였다. 그는 주한 미 대사관의 직원이었다. 이 재단은 李태영 여사가 설립한 가정법률상담소에 대해 사무실 임대료를 보조해
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 뒤로도 계속하여 이 상담소를 돕고 있다. 아시아 재단은 고려대학교의 아시아문제연구소에도 초창기부터 꾸준히 지원을
해주었다. 5·16뒤엔 외교안보연구원을 짓는 데 건축자재를 대주었다. 이 연구원의 설립 아이디어는
5·16주체세력과 당시의 아시아 재단 서울대표인 윌리엄 아일러즈씨 사이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아일러즈씨는 6·25때 심리전 요원으로 참전,
육사 8기생들과도 안면이 깊었다. 외교안보연구원이 개설되자 아시아재단은 상담역으로 웰드마 골만씨(전직 대사)를 2년간 파견하여 길잡이 역할을
맡겼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천에 들어가자 통계학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아시아 재단은 통계학자 울프씨를
2년간 경제기획원 통계국에 보내 근무시켰다. 알라바마 대학의 제이 머피 교수를 서울 법과대학원에 보내 우리 나라 사법제도의 발전방안에 대해
조언을 하도록 한 것도 아시아 재단이었다. 머피 교수는 한국의 사법서사 제도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몇 가지 보기를 든 이런 사업 이외에
교수들은 유학, 언론인의 해외여행, 대학생의 해외연수에 많은 돈을 댄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사업에서는
CIA의 냄새가 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직설적이지 않은 이런 방식이 보다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친미 효과를 가져다 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외교관, 법학도, 아시아문제전문가, 교수 등에게 교육과 학문을 통해 보다 자연스럽게, 보다 깊게 친미사상을 주입시키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아시아 재단의 사업은 CIA가 손을 떼기 전에는 주로 정치, 사회, 법에 관련된 것이 많았다.
70년대에 자금원이 AID로 바뀐 다음엔 인구문제, 보건 위생, 농촌개발 부문 등에 치중하게 됐다. 80년대에 들어서서 국무성이 주로 자금을
대면서부터는 다시 정치, 법, 사회 부문 쪽으로 돌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아시아재단의 사업이 아무리 아카데믹한 것이라 해도 돈을 대는 측의
의도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증거인 것 같다. 최근 하바드 대학은 CIA의 보조금을 받고 중동문제 심포지엄을 연 사프란 교수를
중동문제연구소장 직에서 해임했다. CIA자금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런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참석자들에게 사전에 알리지 않은 데 대한
문책이었다. CIA, 6·25때부터 상주
여기서 잠시 CIA 한국지부의 연혁을 더듬어 보아야겠다. CIA는 1947년에 창설됐지만 한국에 상주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 6·26동란이 터진 이후였다. 45∼50년 사이엔 G2로 일컬어지는 미군의 정보기관이 한국에서 정치공작 등 CIA기능까지
맡고 있었다. 한국과 관련하여 CIA의 이름이 처음 공문서에 나타나는 것은, 1949년 2월28일 CIA가 작성한 「1949년 봄, 한국에서
미군철수가 끼칠 영향」이란 보고서일 것이다. 이 문서는 최근 비밀등급이 해제됐다. 백악관 등 12개 관련 부서에 돌려진 이 보고서에서 CIA는
「미군철수는 북한인민군의 남침을 부를 위험이 높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미군철수를 유리하게 이용한다면 남한정부는 붕괴될 것이다」고 예언했다. 이
CIA 보고서는 철군에 반대하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전쟁중 CIA는 독립조직으로서가 아니라 미8군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CIA는 간첩이나 포로의 신문, 적진으로의 침투·정찰, 적의 작전 명령에 관한 정보분석 등의 활동을 했다. 1952년 여름의
부산정치파동 때 CIA는 아마도 미8군 정보기관과 합동으로 李承晩대통령 제거계획에 참여했을 것이다. 최근 비밀등급이 해제된 당시의 국무성
극비문서를 보면 정치 파동의 전개를 미국의 조종이란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미국은 주한 미 대사관과 미군 및 군정보기관을
3대 도구로 이용, 세 가지 방향에서 반李承晩캠페인을 전개했다. 첫째는 장면(張勉)총리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미는 것이었다. 52년 2월15일 무초대사는 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 앞으로 보낸 전문에서 「국회에서 張勉박사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우리의 최선의 희망이다」고 했다. 그는 또 「미국이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국회 안에서 그의 가장 중요한 강점이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둘째는 李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려고 하자, 유엔군에 의한 계엄령 선포로 李박사를 감금 또는 납치,
실각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셋째는 한국 육군본부의 반李承晩 장성들을 이용, 부산에 병력을 투입,
원용덕(元容德) 계엄사령관의 병력을 무력화시킴으로써 李대통령의 실각을 가져오는 계획을 지원했다. 이 계획엔
당시 육본의 작전국장이던 李龍文준장과 작전차장 朴正熙대령 등이, 밴 플리트 8군 사령관의 양해하에 참여하고 있었다. 李장군은 張勉 진영과의
협력도 꾀했다. 미국의 이런 계획은 李대통령을 대체할 지도자가 없고, 야당이 투쟁을 포기하는 바람에 취소되었다. 장택상(張澤相) 총리의
아이디어로 알려진 발췌개헌은, 사실은 미국 측이 경색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 張총리가 총대를 맨 것으로 풀이된다. 張는총리는
『개헌이냐, 미 군정이냐』의 기로에서 개헌을 선택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다. 미8군정보기관은
李대통령의 승리가 확실해진 후, 신변이 위태롭게 된 張勉전총리의 참모 선우종원(鮮于宗源)씨를 밀항선에 태워 일본으로 피신시키기도 했다.
미국정보기관은 그 뒤에도 張勉박사를 계속해서 선호했고 그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원했다. 후진국에서 미국정보기관은 정치가를 민족주의자와
국제주의자로 2분(分)하여 민족주의자를 견제하는 관습을 갖고 있다. 그런 구분의 기준은 영어를 할 줄 아느냐, 못하느냐 일 경우도 많다. 이런
관점은 정보기관 주변에 친미적이고 사대주의적인 인사들을 끌어 모음으로써 정보기관의 촉각까지 마비시키기도 한다. CIA는 5·16에서 바로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CIA, 李대통령 탄 선박에
발포 휴전 뒤에도 CIA는 첩보활동을 계속했다. 2대지부장 실버씨에 따르면 CIA는
서해의 작은 섬에 비밀기지를 두고 공작원들을 비행기나 선편으로 북한에 침투시켰다고 한다. CIA요원들은 한국장교들과 함께 이 섬에 살면서
공작원들을 훈련했다. 어느 날 李承晩박사 일행이 탄 배가 이 섬 앞을 지나가다가 CIA 요원들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CIA는 이 선박의 통과에
대한 사전 통보를 받지 못했었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대통령은 미국대사를 불러 CIA요원들을 72시간 이내에 내보내라고 명령했다. 이 섬의
CIA요원은 남김없이 추방됐다. 그러나 CIA는 위장한 요원들을 한국 내에 계속 상주시켰다. CIA의
해외활동은 「노출」(Overt)과 「비노출」(Covert)로 구분된다. 노출된 공작은 CIA지부를 대사관 안에 설치하고 CIA직원들을 형식상
대사관 소속으로 해두는 방식이다. 이 「노출 공작」에선 CIA지부장은 대사의 감독을 받게 돼 있다. 이런 노출 활동이 한국에서 재개된 것은
1958년부터였다. 대사특별보좌관이란 직명을 가진 넬슨씨가 제1대 지부장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김정렬(金貞烈) 국방장관을 설득, CIA지부와
상대할 중앙정보기관을 만들게 했다. 그것이 국방부장관 직속의 79부대였다. 초대 책임자는
李厚洛준장이었다. 드 실버― 파란만장의 사나이
넬슨씨의 후임으로 59년 9월∼62년7월 사이 제2대 한국지부장으로 근무했던 피어 드 실버씨는 4·19와
5·16을 치렀다. 그는 지난 73년 은퇴한 뒤 「서브 로자」란 회고록을 남겼다. 24장으로 된 이 책의 두 장은 한국체험이다. 이 책은
CIA한국지부의 행동양식을 이해하는 데 기본적인 자료다. 실버씨는 한국에 오기 전에 이미 동서냉전의 뒷무대를
15년간 누비고 다닌 베테랑 첩보원으로서 CIA안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육군의 원자탄 연구개발부서에서
근무하게 됐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를 강타한 원자폭탄은 서태평양 티니안 섬에서 조립됐다. 그는 이 조립 업무를 감독했다. 일본의 항복 뒤에는
과학자들을 이끌고 히로시마와 나가사끼를 찾아 가, 피해조사를 했다. 그 뒤 CIA로 옮겨 핀란드, 모스크바,
서독, 빈의 지부장으로 근무하면서 숱한 모험담을 남겼다. 그는 겁이 없고 KGB요원이라도 서슴없이 만나는 행동파였다. 빈의 외교파티에서
미국대사관 직원이 소련대사관의 KGB책임자를 만나 넌즈시 물었다고 한다. 『소콜니코프씨, 당신은 대사관에서
무슨 일을 맡고 계십니까?』 『예, 나는 당신네의 드 실버씨가 하는 것과 꼭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빈의 KGB팀과 두 켠에선 피나는 투쟁을 벌이면서도 사적(私的)으로는 파티를 함께 열고, 일요일만 되면
부책임자와 송어 낚시를 즐기곤 했다. 낚시를 함께 하면서 KGB간부와의 사이에서 싹트던 우정을 그는 감동적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CIA와
KGB요원들이 한데 어울려 파티를 벌이고 있을 때 라디오를 통해 헝가리의 폭동이 전해지자, 양쪽이 악수를 나누며 헤어져 맡은 임무로 되돌아가는
張勉의 묘사는 깔끔하다. 그는 서울로 부임할 때 CIA본부에서 한국에 대한 정보활동의 방향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다. 李承晩정권의 통치력에 대한 의구심, 대중봉기의 가능성, 그럴 경우의 주한 미군의 안전문제에 CIA본부는 굉장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 내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특수한 위치를 감안, 한국정부가 미국의 정책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이것이 실버씨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실버씨는 월터 매카나기 대사와 함께 경무대에 들어가 李承晩대통령을 만났을
때, 『대통령은 건강은 좋으나 주의력이 없고 국사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도 거의 없다는 것을 첫눈에 알아냈다』고 썼다. 동서냉전의 최전선에서
일해온 실버씨는 한국에서 정치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술회했다. 정작 어려운 것은 풍성한 첩보들 가운데서 루머와 진실을
구별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張勉박사와 절친해진
지부장 실버씨는 곧 張勉부통령에게 접근, 아주 친숙하게 됐다. 「1959년 연말에
한국정부가 반도호텔 대연회장에서 주한 외교관들을 위한 크리스머스 파티를 열었다. 張勉부통령에게 접근, 아주 친숙하게 됐다. 「1959년 연말에
한국정부가 반도호텔 대연회장에서 주한 외교관들을 위한 크리스머스 파티를 열었다. 張勉박사가 참석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한 채 홀로 서 있었다.
…그는 잔잔한 목소리로 미국 정부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일들이 있으니 집으로 찾아올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실버씨에 따르면 張勉박사는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 권력남용 등의 실태를 소상히 이야기해주었다고 한다.
실버씨는 적어도 1주일에 한번씩, 張박사의 집에 가든지, 자기 집에 그를 초대하여 만났다고 한다. 4·19까지의 격변기에 張박사와 지속적인
대화채널을 유지했던 대사관 직원은 실버씨뿐이었다. 실버씨는 미군들 사이에 마이크 김이란 애칭으로 알려진 金貞烈 당시 국방장관과도 특별히 두터운
우정을 맺게 됐다고 썼다. 4·19를 전후하여 그는 분주했다. 데모대를 쫓아다니고, 내무장관을 만나면서 그는
사태의 추이를 관찰했다는 것이다. 60년 4월26일 李承晩대통령이 하야결심을 한 뒤, 이를 통보해주기 위해 매카나기 대사를 불렀을 때 실버씨는
대사, 매그루더 사령관과 함께 경무대로 갔다. 「…회담은 15분 가량 계속됐다. 李대통령은 과도정부로 하여금
새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이 나라를 이끌어가도록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매키나기 대사도 찬동했다. 金貞烈장관은 대통령이 기진해 있으므로
호놀롤루의 미육군 종합병원에서 일정기간 요양할 수 있도록 조처해줄 것을 요청했다」 실버씨는 李承晩박사가
하와이로 출국하는 준비작업에도 관계했다. 張勉박사가 총리가 되자 실버씨는 휴가신청을 냈는데 본부에선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새로운 정부를
영도하는 張勉박사와 당신의 특별한 인간관계에 비추어 휴가를 1년간 늦추라」는 지시가 내렸다는 것이다. 張勉총리의 집권은 미국 정부나 CIA가
바라던 바였다. 그 적극적 후원자의 한 사람인 실버씨가 張勉 박사 곁에 있기를 CIA에선 바랐던 것이다. 이 무렵 張박사에 대한 실버씨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는 것은 중앙정보위원회의 설립에서 잘 드러난다. 실버씨는 李厚洛씨를 실장으로
앉히는 조건으로서 중앙정보위원회의 조직, 훈련, 운영에 자금지원을 하겠다고 長박사에게 제의했다. 측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張박사는 실버씨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우방국에 친미적이고, 강력한 정보기관을 만들어주는 것은 CIA의 확립된 정책이다. 잘만 관리하면 그 정보기관은 그 나라에
박아놓은 CIA의 협력자가 되기 때문이다. 張勉 국무총리는 이때 흥미로운 미국인을 정치담당 고문으로 썼다.
그는 도널드 위터카씨였다. 위터카씨는 해방직후 미군이 한국에 상륙할 때 따라왔다. 정보처(G2)에서 문관으로
북한반장을 했다. 당시 그의 밑에서 일했던 高貞勳씨에 따르면 위터카씨는 중국어, 한국어도 곧잘 했다고 한다. 아마도 2차대전 때 한국문제
전문가로 군에 차출된 사람인 듯했다고 한다. 위터카 씨는 張勉총리의 고문으로서 ①영문으로
된 문서의 작성 ②미국기관과의 연락을 주임무로 했다. 정보처 문관 출신이란 경력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한국내 미국 정보기관과
張勉총리 사이의 연락인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역대 정권 가운데 張勉정부처럼 미 대사관이나 CIA와 친밀했던 정권은 달리 없다. 그때 미 대사관의
매카나기 대사, 그린 부대사, 도날드 레이나드 정치담당 영사, 그레고리 핸더슨 문정관 등은 모두 張勉씨와 개인적으로 가까웠고, 정치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밀월시대는 짧게 끝나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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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B에 노출됐던 실버 지부장 실버씨는 빈이나 한국에서 자기
신분을 드러내 놓고 활동했다. 그는 1955년 이후엔 자신의 신분이 소련 KGB에 알려졌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CIA간부란 사실이 알려졌다고 해서 그의 효용이 끝나는 건 아니다. 어차피 CIA고위직으로 오르면 비밀공작에 몰두할 기회가 적어진다. 그 대신
신분이 은폐된 비밀공작원을 지휘하는 일이 많아진다. 훌륭한 CIA간부는 비밀공작을 하면서도 평범하게 보이도록 해야 한다. 이 책략은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신분이 노출된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실버씨가 자신을 노출된 첩보원으로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다. 킴 필비는 한국전쟁 때 미국에 파견된 영국정보기관 현지 책임자였다. 영국정보기관의 서열3위까지 올랐던 사람인데, 1930년
이후 KGB의 첩자였다. 그는 영국 정보기관 사람들이 사촌이라고 부르는 CIA를 무상출입했다. CIA부장인 알렌 덜레스씨 등 간부들도 자주
만났다. 두 기관의 정보교환에도 관계했다. 더구나 필비와 같이 KGB첩자였던 매클린은 그때 영국정보기관의 본부에서 미국담당과장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필비―매클린 루트를 통해 CIA간부들의 신상명세뿐 아니라 한국전쟁에 대한 주요 전략 정보가
모조리 소련권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중공군이 참전해도 미국은 원자탄을 쓰지 않고, 중공본토로 확전하지 않는다는 계획도 필비를 거쳐 소련을 경유,
중공으로 새나갔다는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이 우리 작전계획을 죄다 미리 알고 있다』고 불평했었다.
5·16쿠데타는 CIA한국지부와 미군, 그리고 미대사관에겐 잊을 수 없는 참패였다. 사전에 알지 못했고,
사후에 진압하지 못했고, 수습에서도 워싱턴 당국에 기선을 빼앗기는 굴욕을 당했다. 실버씨는 회고록에서 5·16주체세력 등장을 눈치채지 못했던
점을 자가비판하고 있다. 「미국?한국장성들을 부패하게 만들었다. 골프, 테니스, 포커, 칵테일 파티 등을 통해 미국은 한국장성들이 한국의 전통과
문화와 소망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한국 군부내에선 미국 고위층이 주최하는 사교모임에 전혀 참석하지 않는, 소외되고 알려지지 않은 일단의
장교들이 있었다」 그 5·16은 실버씨에겐 「가장 긴 날」이었다.
CIA, 5·16쿠데타 정보 입수 그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우리는
朴正熙 직속참모의 일원인 어느 한국군 장교로부터 며칠 전에 군사혁명에 관한 사전제보를 받았었다. 그 장교는 우리 분실의 요원과 친한 사이였다.
나는 매카나기 대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는 이 보고를 확인해 볼 방법이 없으므로 당분간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는
내가 張총리에게 통보해 주는 것을 허락했다. 나는 정보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행동개시 일자만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고 알려 주었다. 張총리은
이 보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몇 달 전부터 군사혁명에 관한 루머들이 있었다. 군사혁명의
가능성이 짙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대사관 사택 제2단지 내에 있는 내 집에 소형 송수신 무전기를 설치하여 대사관 건물 옥상에 있는 전용
통신실과 연락할 수 있도록 했다. 전용 통신실에는 2명의 무전사들이 밤낮없이 24시간 근무하도록 했다. 문제의 그날 새벽 2시30분경, 나의
무전기가 삑삑 울려 잠이 깼다. 대사관 옥상에 있는 나의 무전사는 남산 기슭에서 예광탄이 무지개를 그리고 있으며, 한강다리가 있는 지역으로부터
총성이 들려오고 있다고 긴급히 보고를 했다. 어떤 군부대가 한강다리를 건너 서울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나는 몇 군데 전화를 건 후, 우리 분실 요원들에게는 각자의 집에 설치된 무전기를 통해 비상을 걸었다.
…대사관으로 가자면 중앙청과 덕수궁 사이의 큰길을 지나가야 했다. 우리 대사관은 덕수궁에서 왼쪽으로 약 1백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내가 큰길로
나왔을 때에는 여러 대의 한국군 트럭과 지프들이 평상시에는 늘상 붐비던 교차로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으며 30㎜와 50㎜ 구경의 기관총을 세워놓고
있었다. 나는 내 세단의 차안에 있는 등을 켜고 차의 속도를 줄였다. 신경이 곤두선 보초들에 의해 총격을 받는 이리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가까운 거리를 가는 동안 나는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몇 번이나 저지를 당했다. 그들은 내
차로 다가와서 나의 신분을 확인한 후 가라고 손짓했다. 張勉의 행방과 안전이 걱정되었다. 2명의 무전사 중 한 명이 내 사무실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무전 방수(傍受) 수단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다. 나는 워싱턴에 쿠데타의 발생을
알리는 전문을 쳤다. 그리고 대사관 직원 중 누가 없는가 찾아보았다. 대사관에는 당직직원인 정치과의 말단직원 한 사람 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직원이 직속상관을 통해 대리 대사에게 사태를 보고했을 것이다. 유엔군 사령부 및 미8군 사령부와는 아직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다가 문득 張총리에게 연락을 해보기로 결심하고 그의 비밀 전화번호를 돌렸다. 그는 길 건너 반도호텔에 방을 하나 마련하여
시내에서 늦게까지 일을 할 때에는 거기서 쉬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고 떨리는 목소리가 응답을 해왔다. 내가
영어로 말하자 상대방도 영어로 대답했다. 나는 내 이름을 대고 길 맞은편 미대사관에 있는데 張총리가 그곳에 있는지 물었다. 상대방은 긴장된
목소리로 張총리는 실각했으며, 그곳에 없고, 도주중이며, 혁명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내가 상대방의 이름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朴鐘圭 소령입니다. 혁명군을 대표합니다』 나는 호텔 객실로 가서 그를 만나고 싶다고 말한 후 대답을 듣지 않은 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朴鐘圭 통해 金鍾泌 만난 실버
이때가 새벽 5시경이었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가서 해병 경비
데스크를 지나 반도호텔 쪽으로 길을 건넌 후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한떼의 서양인들이 잠에서 깨어나 잠옷과 실내복을 급히 걸치고 나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로비에는 한국군 공수단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걸어가자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와진 호텔 직원이 나의
이름을 대라고 고집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키가 큰 사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내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는
내게로 다가와서 한국어로 뭐라고 말을 걸었다. 그는 거만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영어로 고맙다고 인사를 했으나 그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서 총리실이 있는 8층의 버튼을
눌렀다. 그 사병이 어떻게 손을 쓰기도 전에 엘리베이터는 스르르 닫혔고 윗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8층으로 올라와 오른쪽 張총리의 방으로 갔다.
문을 두드리자 마른 얼굴에 호리호리한, 잘 생긴 한국군 소령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기진맥진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무장은 철저했다. 무기를 든 채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다른 공수단원들이 몇 명 더 있었는데 모두가 초긴장
상태였다. 내가 朴鐘圭 소령이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는 볼멘 목소리로, 그가 도착했을 때 張勉과 그의 측근
보좌관들은 이미 도주했더라면서 朴장군을 찾아서 보고하려던 중이라고 말했다. 나는 대사관 직원용 명함 한 장을 꺼내어 그 뒤에 나의 사무실
전화번호를 적은 후 그에게 건네주면서 어떤 경우든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대사관으로 찾아오거나 전화를 걸라고 말했다. 나는 길을 건너 내
사무실로 돌아왔다. 나는 朴正熙와 朴鐘圭에 관한 전체자료를 알려 달라고 본부에 요청했다. 이들은 내가 그
시점에서 알고 있던 유일한 이름들이었다. 커피를 더 마시고 담배를 연달아 피워 대면서 앞으로의 사태발전에 신경을 쓰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張총리는 첫 총성을 듣자마자 지프를 타고는 나와 연락을 취하러 우리 대사관 사택으로 왔었다(나는 벌써 대사관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정문이 닫힌 뒤에 도착했으며 아무렇게나 옷을 주워 입은 모습으로 신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다시 서울 동쪽에 있는 카톨릭 수녀학교로 가서 피신했다. 아침 9시쯤 되었을 때 대사관 정문의 해병대 경비병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정문으로 나의 명함을 가지고 온 한국군 소령이 즉시 나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 朴소령은 나를 데리고 4층으로 올라가서 어둠침침한 복도를 지나 큰 회의실로 나를 안내했다. 책상엔 金鍾泌
중령이 앉아 있었다. 그는 중키였고 체격은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동안(童顔)이었으며 조용하고 침착했다. 朴소령이 한국말로 나를 소개하자 나에게
의자를 권했다. 朴소령은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통역을 맡아 주었다. 내가 그 뒤 朴正熙장군 주도하의 정부와 접촉하는 데 있어 金鍾泌중령은
시종일관 주요 대상인물이었다. 朴정권이 집권 2개월 후 한국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게 되면서 우리들의 이 관계는
더욱 그럴싸하게 되었다. 접촉이 시작되면서 金鍾泌은 미국 CIA중견간부라는 나의 지위에 대해 예리하고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는 미국
CIA가 미국 정부조직상 어떤 법적 지위를 갖고 있는가에 대해 정중하나 주의깊게 질문했다. 그의 관심사항은 대부분 내가 자유롭게 충분히 개진할
수 있는 주제들이었다. 나는 이 기회에 「기초 공민학적」 성격에 준하는 강의를 하였다. 대화의 주도권은
분명히 金鍾泌 쪽이 갖고 있었다. 그는 朴소령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朴장군이 왜 군사혁명을 일으켰으며, 왜 그것이 필요했고, 가까운 장래의
개괄적인 계획이 무엇인지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金鍾泌은 그의 생각을 적절하고 깊이있게 표현할 줄 아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잠시 후 그는 말을 그친 다음 그가 말한 내용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그들이 이제 대한민국을
통치할 책임을 떠맡았으므로 그들이 이니셔티브를 갖고 미국 대사관 및 미군 사령부와 우호적인 업무관계를 재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한국동란
동안 함께 많은 피를 흘렸던 한국과 미국이 적대적 관계로 되면 이것은 비극이라고 말했다. … 나는 본부에다
그날 일어났던 사건들, 내가 朴소령 및 金鍾泌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 그리고 내일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사항 등에 관해 긴 전문을 보낸 후에야
대리대사가 몇몇 간부들과 함께 아직도 대사관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들에게 그날 낮에 내가 한 일과 워싱턴에 보낸 보고서 내용에
대해 기본적인 것들을 알려 주었다. 대리대사는 한숨을 쉬고 일어서더니 천천히 왔다갔다 했다. 그는 매그루더
장군이 미8군뿐만 아니라 유엔군사령부를 지휘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더라면서,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한국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내란죄를
범한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더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상황이므로 매그루더 장군은 朴장군을 만나지도 않고 상대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리
대사는 쓴웃음을 짓더니 매그루더의 정보참모가 朴장군의 좌익 경력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고 계속해서 말해
주었다. 朴正熙, CIA지부장과 대면
내 사무실은 그날 하룻 동안 전문의 송수신으로 바빴다. 나는 이미 좌익사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사망한
朴正熙의 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朴正熙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란 확고한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와 같은 사실을 대리대사에게
보고하였으며, 그는 내가 매그루더 장군을 만나 그의 태도를 돌려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는 동안 국방성의 자문을 받아 국무성이 대사관에 내린
지시내용은 별도지침이 있을 때까지 朴正熙를 만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리대사는 이와 같은 미묘한 정치적 배경문제가 어떤 방향으로든 해결이 날
때까지 내가 金중령 朴소령을 계속 접촉해 주도록 부탁했다. 나는 내가 金중령이나 朴소령과 가졌던 모든 회합 내용을 대리대사에게 알렸다.
다음 날 아침 정각 9시, 朴소령이 정문에 와 있다고 해병대 경비병이 전화로 알려왔다. 내가 내려가 보니
朴소령은 지프 옆에 서 있었다. 차 뒤의 보좌관석에는 2명의 사병이 각자 톰프슨형 기관단총을 받쳐들고 앉아 있었다. 그는 나에게 지프의 오른쪽
좌석을 권하면서 용산에 있는 육군본부로 간다고 말했다. …朴소령은 어느 문을 두드린 후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다시 나오더니 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朴소령은 다시 통역을 맡았으며 이것이 朴正熙 장군과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朴장군은
둥근 티 테이블 옆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 주위에도 몇 개의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는 단구에 몸이 단단하게 짜여져 있었으며 피부는 부드럽고 눈은 의욕에 불타는 듯 했다. 朴장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朴소령은 朴장군이 나를 만나 대화할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고 먼저 말해 주었다. 우리가 적당히 인사말을
나누고 자리에 앉자 당번병이 차주전자와 찻잔, 코카콜라와 유리잔이 담긴 쟁반을 즉각 들여왔다. 그가 이
쟁반을 테이블 가운데에 놓자 이번에는 다른 당번병이 떡이 담긴 그릇을 갖고 들어왔다. 朴장군은 영어를 거의 쓰지 않았으며 통역을 통해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답변을 하기 전에 영어로 대답할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는 영어를 상당히 알아들을 수
있었으며 朴소령의 말을 막고 자기 생각을 보다 간결하게 표현한 영어 어휘를 삽입시키기도 했다. 그는 매우 지치고 피로한 표정이었다. 그의
참모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어수선한 가운데서 몇 시간 동안 시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張총리에 대한
군사혁명이 왜 필요했었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열변내용은 전날 金중령이 제기했었던 주요 관점과 일치했다. 그는 조용하고
사려깊게 이런 말들을 개진했다. 얼마 후 朴장군은 내가 강조했던 주제에 대해 언급했다. 즉 외교적이거나 군사적인 면에서의 상호접촉, 우호관계
유지, 건설적인 한미관계의 수립 등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자세를 바꾸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매그루더 장군을 만나려고 시도했었지만 매그루더
장군은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며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朴장군은 朴소령이 이런 말들을 나에게 통역해
주고 있을 때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한국정부를 전복한 쿠데타가 일어난 지금, 미군을 지휘하는 장군이 바쁘다는 이유로 그 나라의 새로운 지도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언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나는 안절부절 못하게 되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朴장군은
언제든 매그루더 장군을 만날 용의가 있으며, 대리 대사도 물론 만나고 싶다고 말하고 그의 생각을 그들에게 전달해 주도록 나에게 부탁했다. 대담은
동양적인 신중함과 꼼꼼함 때문에 대화가 앞뒤로 왔다갔다 했다. 약 2시간 후, 마침내 논리적이고 합당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朴장군은 내가
金중령과 계속 접촉하면 좋겠으며 내가 金에게 주는 메시지는 모두 그가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거듭 말했다. 그리고 만일 긴급한 용무가 있으면
金중령이 자신을 만날 수 있게 주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張勉은
우리의 첩자가 아니었다』 실버씨의 회고록에 따르면 5·16직후 사태가 유동적이던 며칠 간
쿠데타 주체세력과 대화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실버·朴鐘圭·金鍾泌·朴正熙 채널이었던 것 같다. 미8군과 대사관을 통한 공식 채널이 막혀 있었던
때라 CIA가 가진 막후의 통로가 중요한 기능을 했던 것이다. 실버씨의 회고록을 믿는다면 CIA한국지부는 사태를 안정시키고, 군사정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움직였던 것 같다. 5월19일의 매그루더·金鍾泌 회담, 5월23일의 매그루더·朴正熙 회담을 통해 작전권을 둘러싼 갈등이 일단 풀렸다.
실버씨는 자신이 매그루더 사령관에게 朴장군과의 면담을 건의했고, 그때쯤에는 朴장군에 대한 사상적인 의심도 풀렸다고 썼다.
張勉총리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나 가까웠지만, CIA의 조직인으로서 실버씨는 張총리와 연연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반쿠데타 진압작전을 기도했던 매그루더는 6월20일 퇴역 당했고, 그린 대리대사도 홍콩 총영사로 전보됐다. 한국의 새 정권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한 미국 정부의 장애물 제거 작업이자, 문책인사였다. 실버씨는 62년 7월까지 계속 근무했다. 金鍾泌씨가 중앙정보부를 발족시킨
것은 61년 6월19일이었다. 실버씨는 정보부의 조직과 운영에 자문을 많이 했다. 70년대 후반 미국 의회는 CIA가 KCIA의 설립때 자금을
댔다는 소문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었다. 결론은 『아니다』였다. 의회보고서에 따르면 CIA는 金鍾泌씨에게 국내안보와 해외정보수집 기능을
KCIA가 독점해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는 것이다. 즉, CIA와 FBI를 한데 묶는 것과 같은 기능엔
반대했다는 얘기다. 실버씨는 金鍾泌씨가 미국의 CIA와 꼭같은 이름을 사용하려는 것을 말렸다고 썼다. 실버씨는 또 쿠데타군에 체포된 李厚洛씨와
군 장성들을 석방시키는 데 힘을 썼다. 석방된 장성들은 미대사관측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유학 갔다. 실버씨의 회고록에는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두
군데 있다. 「張박사가 전문적인 의미의 미국 첩자(Agent)였던 적은 결코 없었다. 그는 나와의 비밀접촉이 미국과의 정직한 관계라고 믿고
있었다」 張勉박사가 한국 정치인들 가운데 미국측과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가 미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CIA가 말하는 「전문적인 첩자」는 돈을 받고, 조국의 비밀을 파는 부류를 뜻한다. 張박사가
실버씨에게 유용한 정보를 더러 주긴 했지만, 그것은 한국을 위해 유익하다고 판단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총리를 지낸 사람을 보고
『그는 우리의 첩자는 아니었다』고 굳이 해명한, 그 의식이 문제이겠다. CIA, 提報者를 해외로 피신시켜 「…쿠데타가 성공한 뒤, 그
전에 쿠데타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했던 한국장교는 불안해했다. 그는 미국으로 탈출, 망명처를 구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를
오끼나와로 옮겼다가 미국으로 데리고 갔다. 가족도 데려다 주었다. 얼마 뒤 고향이 그리워진 그는 朴대통령으로부터 면책 보장을 받은 뒤 한국으로
돌아가 지금 평화롭게 살고 있다」 실버씨는 이 제보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김재춘(金在春)씨(전 중앙정보부장)에게 물어봤더니 이런 이야기를
했다. 『5·16직후 내가 육군방첩대장으로 부임했는데 부대장인 백운상(白雲祥)대령이 며칠간이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8군 정보부대에 문의했더니 자기들이 오끼나와를 거쳐 미국으로 피신시켰다고 실토하더군요』 이 白씨가 실버씨가 말하는 제보자인지는 알
수가 없다. 白씨는 미국에 정착, 잘 살고 있다니까 실버씨의 제보자 설명과는 다르다. 이 제보자에 대해 취재를 하다가 미국 정보기관이 관련된
흥미있는 사건을 알게 됐다. 5·16이후에 발표된 숱한 반혁명사건 가운데는 2주당(二主黨)사건이란 게
있었다. 안병도(安柄都)씨 등 17명의 장교 출신, 출판인, 학생 등이 朴正熙 최고회의 의장을 암살, 정권을 탈취하려고 모의를 했다는 사건이다.
張勉 박사는 이들에게 거사사금 1백만환을 댔다고 하여 공판진행중 구속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었다. 1심에선 2명이 사형, 11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4년 이내에 모두 석방됐다. 이 사건 기소장을 읽어보면 미스터리 투성이다. 먼저 張勉총리
고문이던 위터카씨가 배후조종자로 등장한다. 그는 이 사건으로 추방당했다. 미8군 309정보부대의 뉴랜드 대위, 다아링 문관이 등장한다.
모의자들이 자주 찾아가 만났고, 반혁명 모의진행의 정보를 상부에 보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직접 가담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安柄都피고인은 朴正熙장군, 金鍾泌 당시 정보부장과는 10여년 전부터 친교가 있는 것으로 돼 있다. 암살 하수인으로 쓰여져 있는 최고회의 본회의실
경비책임자 박준(朴駿)상사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면 이 사건은 조작인가? 아니면 핵심적 사실을 숨기고 기소를 했기 때문에 기소내용이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인가. 기소장에 나타난 이 사건의 핵심 줄거리는 결국 이렇게 요약된다. 5·16때 국방부
조사대 부대대장이었던 이용환(李龍煥)씨(중령)가 최고회의 경호원인 한운규(韓雲奎)헌병상사와 朴駿상사를 포섭, 기관단총으로 朴正熙의장,
李周一부의장, 金鍾泌정보부장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李씨의 행적은 기소장에 나타난 것과는
달랐다. 미국인, 朴正熙 암살 계획의 배후
張勉박사의 측근으로서 미국 정보기관과도 가까웠던 李씨는 5·16 며칠 전 쿠데타 정보를 張총리에게 전달했다.
5·16당일엔 헌병대를 동원한 진압작전에 잠시 참여했다. 5월16일 새벽, 미8군 정보부대의 지프가 그의 집에 나타나 그를 태우고 8군 영내로
들어갔다. 여기서 헬리콥터로 오산, 오산에서 다시 군용기로 오끼나와의 미군기지로 날아갔다. 李씨는 오끼나와에서 며칠간 머물면서 5·16쿠데타의
발전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 그는 며칠 뒤 다시 미국의 모처로 보내졌고, 서울을 떠난 지 열흘쯤만에 미8군으로 돌아왔다.
8군 영내에 머물면서 그는 미8군 정보부대로부터 임무를 부여받게 됐다. 최고회의 수뇌부를 체포, 또는
납치하라는 임무였다. 위터카씨도 이 작전에 끼여들었다. 李씨는 옛날에 자기 부하였던 韓雲奎헌병상사가 최고회의에서 경호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을
알고 그와 몰래 접촉,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韓상사는 다시 朴駿상사를 포섭했다. 그런데 朴상사가 겁이 나서 모의사실을 수사기관에 신고해버렸다.
韓상사는 체포됐다. 朴상사는 불기소됐다. 李씨는 이것을 모르고, 韓상사와 연락하기 위해 8군 영외로 나왔다가 체포됐다. 61년6월의 일이었다.
5·16 주체세력에선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미군 정보기관의 개입사실을 빼고 기소를 했으며, 재판을 연
것도 李씨의 체포 1년 뒤였다는 것이다. 미군에 대한 수사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사실은 완벽하게 진실로 입증됐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위터카와 미8군 정보기관이 암살계획의 배후에 있었다는 큰 줄거리는 사실인 듯하다. 미국의 고위층에서 보면 그 계획이 하나의 안으로 검토된 정도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국내정치에 대한 미국 정보기관의 계획의 대담성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실버씨는
62년7월 한국을 떠났다. 홍콩 지부장으로 잠시 있다가 64년6월 사이공지부장으로 옮겼다. 그의 사이공 지부 전임자는 60년대 말 한국지부장으로
왔던 존 리차드슨씨였다. 당시의 CIA 극동과장은 뒤에 CIA부장이 된 콜비씨. 미국이 월남전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들어가는 과정에서 세
CIA첩보원―리차드슨, 실버, 콜비씨가 한 역할은 월남전의 향방에 큰 영향을 끼칠 만한 것이었다. 실버씨는
사이공지부장으로서 베트콩의 테러에 대한 반(反)테러작전을 계획, 추진했다. 그가 조직한 국민행동대란 월남 특무기관은 베트콩 준동지역으로 잠입,
베트콩 간부들을 암살했다. 65년 5월30일 오전, 베트콩의 폭탄차가 사이공의 미 대사관 앞에서 폭발했다. 이 사고로 실버씨는 한쪽 눈을
실명했다. 그 뒤 그는 본부로 돌아와 해외정보국 참모장, 오스트랄리아 지부장 등 한직을 돌다가 지난 73년에
정년퇴직했다. 黃泰成의 신문권 요구한 CIA
실버씨의 후임으로 62년 7월 제3대 지부장으로 한국에 왔던 이는 그리스계 미국인 나시오스씨였다. 그는
1년도 못돼 다른 곳으로 전임됐고, 4대 지부장에 에드워드씨가 나타났다. 에드워드씨는 거물간첩 황태성(黃泰成)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한다.
북한의 무역성 부상(副相)을 지낸 바 있는 黃은 朴正熙 장군의 형(대구 폭동때)과 친구였었다. 그는 5·16직후 서울에 잠입, 朴장군의 형수
趙여사를 만나려다가 趙여사의 신고로 붙들려 1,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대법원에 상고중이었다. 항간에서는 黃이 남북협상의 카드를 갖고
왔다느니, 金鍾泌 부장을 만났다느니 하는 루머가 돌고 있었다. 5·16때부터 CIA는 朴장군과 金부장의 사상적 배경을 의심하고 있었으므로 黃의
남파목적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질 만했다. 金炯旭에 따르면 에드워드씨는 미국 정보기관이 黃을 신문하도록 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 압력으로써 미공법 480호에 의해 도입 양곡을 싣고 온 수송선을 인천항에 띄워놓고 양곡을 부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는 흉작으로 식량난이 심각할 때였다. 우리 정부는 黃을 미국측에 잠시 넘겨 조사를 받게 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원래 한미간엔
군사정보 교환협정이 체결돼 있지만, 사안에 따라선 잘 지켜지지 않았다. 에드워드씨는 6·3사태 이후 金鍾泌씨가 2차 외유를 갈 때 미 대사관과
함께 그 준비작업에 관계했었다고도 한다. 에드워드씨는 朴鐘奎씨와 무척 가깝게 지냈다. 그는 66년에 본부의 극동담당국장으로
전보됐다. 흔히 미국측과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丁一權, 白斗鎭, 金正烈, 朴定洙, 張禹疇,
李厚洛, 朴鐘圭씨 등이 그런 유력인사다. 이들은 대체로 CIA지부장들과도 친했다. 朴定洙씨(전 국회의원)는 이렇게 말했다.
『CIA지부장들은 거의가 인간적으로 매력이 있는 교양인들이다. 만나서 대화하는 게 우선 즐겁다. 항간에선 나
같은 사람을 오해도 하는 것 같지만, 미국인들에게 나 만큼 비판적으로, 제대로 충고해주는 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자꾸 만나고
싶어하는지 모른다. 내가 겪은 CIA사람들은 대체로 한국인에 대해 진심에서 호의적이었다. 정권에 대해선 비판적이어도, 한국을 좋아한
사람들이었다. 두 나라 사이에서 한미관계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노력한 그들의 고민도 평가해야 할 것이다』
CIA와의 관계에서 지미파(知美波)와 친미파, 그리고 첩자는 구별해야 한다. 미국과 가깝다고 널리 알려진
인사들은 거의가 지미파나 친미파에 속한다. CIA는 이들에게서 정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주로 구한다. 자유당시절의 張勉박사처럼
CIA와의 밀접한 관계가 한국을 위해 보탬이 된다고 믿는 이들은 지금도 있을 것이다. 자유당이나 공화당 정권 치하에서는 미국의 힘을 빌어 독재에
저항한다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CIA의 활동은 그런 정치사회 풍토에선 참으로 수월할
터이다. ◇ 역대 한국 CIA 지부장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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