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마가렛 대처 수상의 신자유주의
〈 목차 〉
Ⅰ서론
마가렛 대처 수상이 펼쳤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Ⅱ본론
1. 마가렛 대처 수상의 생애
2. 대처리즘의 특징
3. 대처리즘의 긍정적인 면
4. 대처리즘의 부정적인 면
Ⅲ결론
대처리즘의 대한 나의 생각 & 우리나라 여성대통령과 마가렛 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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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서론
영국의 ‘철의 여인’이라 불리던 마가렛 대처 전 수상이 4월 8일 현지시간 아침에 8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대처 수상은 영국의 총리시절 때, 동시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국가정책을 운영해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영국에서 첫 여성 수상으로 당선된 대처 수상은 여성이라는 정치계에서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탱크 같은 추진력으로 펼쳐나가 이를 극복해나갔다.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인 결과 대처리즘이라고도 불리는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영국병이 심해지던 시기에 영국을 살렸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노동자들의 탄압으로 인해 노동자들을 몰락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 여기서는 대처리즘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에 대한 연구를 하도록 하겠다.
Ⅱ본론
1. 마가렛 대처 수상의 생애
마가렛 대처는 1925년에 태어났다. 마가렛 대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랐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식료품점을 운영하며 마가렛이 두 살 때 시의원을 지냈고, 여러 관직을 지나 그랜덤 시장도 역임했다. 이러한 아버지를 보며 정치계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던 대처는 옥스퍼드대학에서 화학과를 졸업했지만 정치가가 되기 위하여 독학으로 변호사 공부를 했고, 변호사가 된 후 정치인으로써는 1958년 런던의 핀츨리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이 후, 1965년 주택장관과 연금장관, 1966년에 재무장관, 1967년 에너지장관, 1968년 교육장관 등 화려한 공직 이력을 쌓았다. 1974년 야당이었던 히스내각이 무너지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나, 히스내각의 책임을 물으며 강하게 도전한 결과 1975년에는 보수당 최초로 여성 당수가 되었다. 그리고 1979년에는 경제난과 노동총파업으로 인해 사회가 혼란스러운 시기에 노동당을 누르며 마침내 영국 최초의 여성 수상이 되었다. 대처는 3번의 수상재임을 받아 총 11년간 영국의 수상직을 맡았고, 1990년 11월에 수상직을 떠났다.
2. 대처리즘의 특징
마가렛 대처는 어려서부터 ‘스스로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아버지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가지고 있었다. 이에 개인의 노력을 중시하였고, 대처리즘 또한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두고 형성되었다. 즉, 구조개혁을 통해 기업을 살림으로써 사회주의정책에 물들어온 영국경제를 자유시장경제로 바꿔 경쟁을 부추겼고, 노력을 통해 사회에 살아남도록 만든 것이다.
당시 영국의 상황은 케인즈주의의 복지 사회로 인해 일하지 않고, 세금은 많고, 일할 곳은 없는 영국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플레이션 지표가 치솟고, 창업하려는 사람들은 정부의 복잡한 규제와 세금으로 인해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노동조합들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계속적인 투쟁을 하던 시기였다. 이에 대처는 감세 정책과 자력경생을 내세우며, 정부는 “세금과 정부지출을 줄여야 한다. 법인세와 준조세를 줄이고 각종 규제를 철폐하여 기업이 활동하기에 최대한 유리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민영화를 확대해야 하고, 노조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노동 유연성을 늘려야 한다.”고 정리하였다.
이를 위해 대처는 외국환 관리 철폐와 국영사업 민영화에 착수하는 한편, 노조 활동을 규제하는 입법에 나섰다. 1981년에는 공정금리를 폐지해 정부주도의 금리통제를 중지하고 시장기능에 맡긴다는 정책을 취했다. 이밖에 정부의 주택구입 보조비를 폐지하며, 고등교육 지원금을 폐지하는 등 교육 투자 예산 대폭 감축 등을 추진했다.
3. 대처리즘의 긍정적인 면
1) 영국의 경제를 부흥시켰다.
대처 수상의 경제정책은 긴축재정과 민영화, 복지정책의 축소를 통해 작은 정부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석유, 항공, 항만, 통신 가스 등 국영기업의 대대적인 매각 작업을 펼치며 인플레이션을 막고 경제를 안정화 시켰다, 또한 공공지출을 최대한 억제하고 긴축정책을 펼쳤다. 큰 정부를 지향하던 시기에 지나친 복지정책은 생산성을 저하시키고, 각종으로 계속되는 파업을 불러일으켜 영국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과감히 복지 축소 정책을 펼침으로 국가재정을 늘려 나갔다.
2) 국방력을 강화하여 ‘강한 영국’을 지향하였다.
국방비를 대폭 감축하면서도 강한 국방력을 갖추도록 하였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1982년 2월에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이다. 당시 아르헨티나 근해의 영국령 포클랜드 섬을 아르헨티나가 무력 점령하자 대처는 해군 기동부대를 파견하여 강한 대처를 했다. 그 결과 두 달 만에 아르헨티나가 항복을 하였고, 대처는 “대영제국의 영광이 되살아났다”며 기뻐했다. 외교적 타협을 권하는 내외의 목소리를 뿌리치고 자신의 강한 신념대로 이끈 결과, 국방비 감소와 국방력 강화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4. 대처리즘의 부정적인 면
1) 빈부 격차를 심화시켰다.
대처 수상은 친기업가 정책을 펼침으로써 서민들과 노동자들에 대한 충분한 보호를 하지 못해 ‘소수만을 위한 경제정책’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대처리즘으로 전체적인 국가경제는 성장했으나 실직자가 늘어났고, 광산업과 몇몇 산업들은 거의 파괴되기도 했다. 이에 경제정책으로 실업자가 된 광부들과 무력 진압에 희생당한 북아일랜드 주민들은 그를 ‘마녀’라 부르기도 했고, 그의 사망 이후에는 영국 곳곳에서 대처리즘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대처 전 총리의 영향으로 영국의 공동체 정신이 소멸했으며 불필요한 분열과 갈등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2) 약자를 외면한 안티페미니스트의 면모를 보였다.
대처는 여성 지도자로써 ‘여성도 강력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며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러나 1987년 ‘위민스 오운’과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을 돌보는 것은 각자의 의무다”라고 말한 그의 발언 속에서 사회의 취약계층을 옹호하는 페미니스트의 주장을 적대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큰 것을 잡기위해 작은 것은 놓친 대처 수상은 여성으로서 역사를 만들었지만 자신의 권력으로 여성을 비롯한 취약 계층을 억압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Ⅲ결론
마가렛 대처는 어려서부터 ‘스스로 노력하는 자는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 왔다. 이에 영국의 수상이 되어서도 “자신을 돌보는 것은 각자의 의무다”라고 말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의 자유로운 경쟁을 도모하고 노력하는 자를 격려해주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경제지표가 일제히 나빠지면서 친기업 위주의 정책과 경쟁격려 정책은 현실적인 한계를 드러냈다. 경제 성장률과 실업률, 물가 상승률 등의 지표에 큰 개선이 없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이론은 이론과 실제가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 중 하나이다. “친기업 정책을 펴면 투자가 늘고, 투자가 늘면 경제가 성장하며 고용이 증가한다”는 신자유주의의 믿음이 실제에서는 대기업의 횡포와 노동자들의 실업으로 나타나 사회의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대처 수상의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본다. 마가렛 대처 수상은 당시 영국의 암울한 사회 모습을 보며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사회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쇠 같은 의지와 이를 실천해 줄 지도자가 필요한 시기였는데 마침 대처와 같은 여성 지도자가 그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대처 수상의 강력한 리더십과 영국을 향한 애국의 마음은 높이 평가 할 점이다.
여성 지도자로서 리더의 자질을 충분히 보여준 대처 수상의 모습처럼, 우리나라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지도자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보여주기 바라는 국민들의 기대가 크다. 대처수상과 같은 보수주의의 지도자로서 우리나라의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한 친기업적인 정책에만 몰두 한다면, 사회적 약자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대처의 비판점을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복지사회의 중요성 또한 강조되고 있는 이 시기에 경제 성장과 복지국가의 양면을 골고루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고 우리나라에 맞는 국정운영을 해나갔으면 한다.
〈참고자료〉
네이버 케스트 http://navercast.naver.com/ 인물세계사-마가렛대처
아시아경제 http://www.asiae.co.kr/news/ 「런던서 대처 전 수상 사망 축하 집회 열려」2013.04.14.
장지글러. 2007.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출처: http://cafe.daum.net/edudoctorkim
마거릿 대처
출처: 울산청소년상담지원센터
1. 일대기
대처는 1925년 10월 13일, 영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아버지 알프레드 로버츠(Alfred Roberts)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본명은 마거릿 로버츠(Margaret Roberts)였습니다. 태어난 곳은 그랜덤이라는 곳으로 영국 중부 지방의 랭커셔 주에 위치해 있습니다.
대처의 아버지는 그랜덤에서 식료품점을 경영하였고, 그의 학력은 짧았으나,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성실히 일하여 사업을 번창시켰으며, 지역사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나중에 그랜덤의 시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대처는 그런 아버지의 성실함과 책임감, 그리고 남다른 정치에 대한 관심은 아버지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처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중에는 프로테스탄트로서의 자립, 자조정신이 있는데 `이것은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바로 일어서는 것으로서,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오늘날 서구 자본주의를 탄생케 한 원동력이라고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습니다.
철저한 자립, 자조 정신에 입각한 그녀는 영국의 최고 명문인 옥스퍼드 대학 화학과에 입학하여 아버지의 영향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져, 대학에서 정계에 진출할 생각을 굳힌다. 대처의 대학생활은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었으며, 남들과 어울리지도 않았으며, 그저 아버지의 엄격한 방침에 묵묵히 순종하는 타입이었으나, 꿈은 늘 의원으로서의 정치참여였습니다.
옥스퍼드대학의 서머빌 칼리지를 졸업하고, 1951년 D.대처와 결혼하여 쌍둥이 남매를 두었다. 1953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 1959년 보수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1∼1964년 연금·국민보험부 정무차관, 1970∼1974년 교육·과학 장관을 지냈습니다. 1975년 E.히스를 물리치고 영국 최초의 여성 당수(보수당)로 선출되었다. 1979년 노동당의 L.J.캘러헌 내각이 의회에서 불신임결의를 당하고 해산된 직후의 총선거에서 대처가 영도하는 보수당이 승리함으로써 영국 최초의 여 총리에 취임하였습니다.
2. 정책
* 공기업의 민영화
마거릿 대처에게는 포클랜드 전쟁 이후에 수행해야 할 정책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첫째로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국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마거릿 대처는 1979년 5월 수상에 취임하자 국유(국영)기업의 민영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영국의 기업이 전후에 활력을 잃은 것은 결국 주요산업들을 국유화시킨 것과 국영 기업의 경영자들에게서 ‘기업가정신’을 박탈하였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그에 대한 시정을 단행한 것이다. 영국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국제 경쟁이라는 찬바람을 직접 쏘이도록 해서 그러는 중에 강하게 살아남는 전술을 배우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은 ‘곤란할 때에는 정부에 호소하면 된다.’는 국영 기업 경영자의 근성을 바로 잡는 것이 선결 문제였다.
살아남느냐 살아남지 못하느냐는 정부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분명히 자기 스스로의 책임인 것이다. 마거릿 대처는 이러한 구상 밑에서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2차 대전 후의 영국은 1945년에서부터 1951년까지 정권을 담당했던 노동당의 애틀리 정부에 의해 철강, 석탄, 전기, 가스, 철도, 통신, 방송, 국영은행 등이 잇달아 국유화되었다. 그리하여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들을 제외하면 영국은 세계에서 국영기업이 가장 많은 나라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업 국유화의 배경은 ‘기업 성악설’에 있다. 여태까지 소련 한 나라만이 사회주의 국가였던 것이 2차 대전 후에는 국제정치체제에 변화가 생겼다.
이제 중국이나 동유럽에도 출현하여 소련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국가군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들 신흥 사회주의 국가들은 소련처럼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계획경제를 채택하였다. 거기에는 ‘기업을 자유로운 경쟁 상태로 두면 반드시 독점이 생겨나서 인민을 착취하게 되므로 자유경쟁에서 생기는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기업을 국가가 직접 관리할 필요가 있다’ 는 것이다.
이러한 기업 성악설에 따른 사회주의의 논지는 여러 곳에서 관철되고 있었다.
그 당시는 ‘동풍이 서풍을 압도하는 시대’였다. 사회주의의 새로운 시도는 사회주의 국가로의 길을 거부한 나라들에서도 신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소련의 소포즈나 콜호즈 또한 중국의 인민 공사 등에서 나타난 사회주의의 국유화 실험은 서방측의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전후의 영국의 정책에도 이러한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이 반영되었다.
“국유화를 전제로 한 기업의 합병이나 통합은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생산수단의 근대화를 가능케 한다. 각종 요금의 인하를 촉진하며 경쟁에 따르는 낭비를 배제한다. 독점에 대신하는 국유화만이 산업의 효율을 높이는 길이다”
1945년 노동당 정부는 주요기업들의 국유화에 즈음하여 그 방향을 위와 같이 설명하였다.
그 후 1951년에서 1964년까지 1970년에서 1975년까지 두 차례 보수당이 정권을 잡았으나 국영기업을 다시 민영화로 돌리는 정책전환은 실시되지 않았고 노동당의 국유화 정책을 추인하는 형식에 머물렀다. 1974년 세 번째로 정권을 잡은 노동당 정부는 국유화정책을 더욱 확장시켜 갔다.
가령 브리티시 레이랜드, 영국석유 영국 조선 등을 차례로 정부소유로 이전시켜 국영 기업화 해놓았다.
마거릿 대처가 수상에 취임할 당시 영국의 국영 기업체는 약 50개 사에 이르렀고 영란은행과 BBC방송 등의 공공기업체도 정부가 주식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었으니 총 80개의 국영기업과 공공 기업체가 정부의 관리에 있던 셈이었다.
1979년 당시 국영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수는 약2백만 명이고 그 생산량은 GDP의 10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후 대처에 의한 자유경제 체제였던 1988년 현재 노동자는 약 백만 명으로 생산액의 GDP비율은 6퍼센트까지 감소하였다.
한편 그동안 노동당 정부가 국유화 선언에서 제창했던 국유화의 이상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생산수단의 근대화는 고용 최우선 정책이 채택됨으로써 뒤로 밀리고 말았다.
즉 생산수단에 대한 투자보다는 고용현황을 개선시키는 것에 많은 재원을 사용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반대로 생산수단의 노후화가 심화되어 국제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수송, 에너지, 통신, 철강, 조선 등 영국 산업의 중핵을 이루는 국영 산업의 생산성이 현저히 떨어져서 영국 경제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이것이 사회주의적 생산체제가 갖는 커다란 딜레마인 것이다. 적극적인 경쟁의지는 사라지고 안이함에 젖어 현상 유지나 하려는 속성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역시 정부에서 임명된 국영 기업의 경영자는 정부의 간부나 노조의 얼굴만 쳐다보는 사람들이므로 경영을 합리화하고 회사의 이익을 올리려는 발상은 전혀 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국영기업의 태반은 적자운영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전화의 신설이나 고장 등에 대한 기본적인 서비스의 질도 매우 떨어져서 이용자들의 불만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자유주의자로서 근면과 노력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마거릿 대처는 ‘국유화야말로 악의 근본’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79년 보수당 정권이 탄생하자마자 국영기업의 민간 이양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항공기 제조회사를 비롯하여 전신전화, 의료기구 제조회사 고급 자동차 제조회사 영국 가스사 항공회사 등 20개사가 민간 경영으로 넘어갔다.
국영 기업이 민간 기업으로 넘어갈 때에는 주로 정부가 보유하고 있던 국영 기업의 주식을 민간에 방출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리고 정부 보유주의 방출방식은 두 가지 형식을 취하였다. 즉 부분적인 방출과 100퍼센트의 방출이 있었다.
더구나 정부는 100퍼센트 민영화에 대해서는 하나의 조건을 붙였다. 그것은 골든 웨어를 정해 두는 것이었다. 그것은 민간에 이양하게 된 기업이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나 외국자본에 의해 부당한 점령이 예상될 때에는 정부가 직접 개입하여 필요에 따라 거부권을 발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특별주권의 경우를 말한다.
국영 기업의 민영화는 영국 기업에 DIY의 정신이 배게 함으로써 국제 경쟁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기업 체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다.
그리고 민영화 조치는 곧 마거릿 대처 정권이 동시에 추진하고 있던 재정 재건이라는 이중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영국의 경우에는 국영 기업의 설비투자 자금의 대부분이 정부지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석탄, 가스등의 국영 기업은 재무부의 허가를 얻어 매년 설비투자 계획을 책정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부 의존도가 전체의 30퍼센트를 넘는 경우가 많았다.
국영기업의 민영화는 실제로 정부 주식을 민간에 방출하는 형식으로 추진되었으므로 그 판매전액은 정부의 수입이 되었다. 마거릿 대처가 정권을 잡은 1979년도에 정부 보유의 영국 석유 주식 약 2억8천만 파운드를 시장에 매각하였다.
국영 기업의 매각에 의한 정부 수입액은 1981년에서 1985년까지 매각액은 80억 파운드에 달하였고 1986년에서 1988년까지의 매각액은 최고 140억 파운드를 기록하였다. 그 결과 마거릿 대처 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 이제까지 국영 기업의 주식을 매각한 총액은 235억 파운드에 이르러 결국 정부의 적자재정 해소에 크게 공헌하였다.
*긴축정책, 감세정책
대처는 노동당 시절 복지국가 지향적인 적극적 정부를 지양하고, 또한 국가의 예산이 불필요하게 들어가는 공공부문에 관해서는 정부지출을 억제하여 예산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였다. 국민의 혈세를 함부로, 아무런 대책과 책임 없이 낭비되는 것은 국민의 세금을 도둑질과 같은 것이라는 게 대처의 주장이었다. 또한 복지지향이라는 명목 하에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많이 거둬들임으로써 투자의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대처는 세금을 감면해주어 기업가들로 하여금 투자할 수 있는 의욕을 살리고자 하였다.
또한 그녀는 평소부터 ‘중소기업 집단만이 경제 활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여 왔다. 40년 동안 영국의 중소기업 수는 반감되고 있었으며 이것이 영국경제 문제에 있어 유력한 부정적 요인으로 분석되었다고 말했다.
소기업에 대한 대담한 법인세율의 인하가 실시된 이면에는 변차 사업이나 새로운 사업의 육성에 전념해 있던 마거릿 대처의 강한 의욕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한편 그녀의 신보수주의적 개혁정책들은 사회의 일반계층이 누릴 수 있는 자유로부터 제외된 영국 빈곤층을 형성시키는 위험에 대해 비판되곤 하였다. 그런 입장에 대해서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 한 바 있다.
“목적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단지 돈을 아낀다든지 세금을 깎는다든지 하는데 우리의 목표가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지전으로 곤궁한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도움을 제공하고 발생하는 사회문제들을 척결해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자유 시장 경제를 추구하는 목표중의 하나는 그 속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갖는 일입니다. 개인의 재능이 발휘되는 사회는 또한 인내하고 자신감 있고 통합된 형태의 사회를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회를 함께 묶어 주는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 즉 사회를 단순히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응집력 있게 만들려는 정책에 대한 관심의 증대를 의미합니다.”
*교육제도 개혁
영국 경제 상황이 나빠진 배후에는 바로 교육이나 훈련제도의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마거릿 대처가 이점에 대한 개혁을 착수한 것은 사실상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1976년까지는 본격적인 개선책이 마련되지 않았다.
기능과 직업훈련에 있어서 대처정부는 1984년 4월1일 교육 사업에 대한 대폭적인 개혁 내용을 확정하였다. 이러한 사업 중에는 ‘청년훈련계획’이 들어 있으며 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기능 및 직업교육 사업’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성인훈련’이라는 명칭으로 현재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 실업자, 개인 사업자, 개인 기업주, 고용주 등에 대해 전문적 기능을 높이기 위한 교육 사업 등 성인을 위한 사회교육이 전국 및 지역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보완되었다. 이러한 사업을 도입한 것은 증가하는 실업자를 일시적이나마 흡수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확실히 사업내용 전체를 거시적으로 살펴보면 서둘러 개혁을 시도했다는 문제점을 내포하고는 있다 해도 마거릿 대처정부가 더 늦기 전에 이러한 현실적인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1보를 내디딘 것은 잘한 일이라고 평가되었다. 1987년의 예산에서 충분치는 못하지만 기업의 기술훈련을 위한 지출을 약속하였다는 것은 일보 전진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거릿 대처의 노선은 민간기업 활동의 중시라는 정책을 강화시켜 나가는 것이지만 복지 제도적 의미와 성격을 갖고 있는 국민적 훈련제도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교육과 훈련의 영역을 각 세대에 확대함으로써 ‘국민 모두의 비즈니스 교육’을 실현 하려는 것에서 마거릿 대처가 품은 의욕과 야심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 할 수 있다.
* 거대한 공룡으로 변해버린 노동조합의 분쇄
당시 영국 산업 근로현장에 종사하는 노동조합은 정권을 바뀌게 할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지니고 있어 경제정책 대수술을 하기에는 많은 난관과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대처는 이런 국가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집단의 눈치를 보지 아니하고 자신의 신념을 믿고 과감하게 추진하였다.
마가릿 대처는 아무리 노조의 힘이 강하더라도 함부로 승복하지는 않았다. 조합의 힘을 약시키는것에 전념하여 1980년과 1982년의 고용 법, 그리고 1984년의 노동조합법 등 3회에 걸쳐 노동조합을 규제하는 법률을 개정하였다.
이 고용법의 개정을 마거릿 대처는 노조활동의 민주화라고 설명하였다. 그 개정은 다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클로즈드 숍 제도의 완화.
2. 동정 파업, 지원 파업의 금지.
3. 파업권의 확립, 조합 간부 선출 등의 주요 안건을 비밀 투표제로 할 것.
노조의 파업해산은 예외적으로 보수당의 정치적인 싸움에서 진 결과였으며, 또한 노조도 보수당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을 시인하였다.
*영국을 비즈니스의 나라로....
대처는 외국자본을 국내로 유치하여 일자리 창출은 물론 외국기업이 자국에서 기업을 경영할 수 있게끔 그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한 정책은 대처이후 존 메이저 총리가 취임 때 까지도 유지되어 영국이 유럽에서 사업하기로 좋은 나라로 인식을 굳히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노동당으로 정권이 다시 넘어온 후인 토니 블레어가 총리가 재직할 때는 영국의 경제가 호전하게끔 경제적 기초를 단단히 한 점에 있어서 대처의 업적을 칭찬하다 할 수 있다.
마거릿 대처의 정권이 발족할 당시의 노조원 수는 1200만 명을 넘었으나 현재에는 880만 명으로 줄었다. 탄광노조의 패배는 노사대결주의를 슬로건으로 해왔던 영국 노조에 거대한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 포클랜드 전쟁
아르헨티나의 영국령 포클랜드 섬 무력점령으로 당시 영국사회는 국론이 전쟁을 하자는 쪽과 하지말자는 쪽으로 분열되어있었다. 대처는 아르헨티나의 무력침공은 영국의 주권을 침해했기 때문에 영국의 명예와 주권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쟁의 승패여부에 관해 비관적인 목소리들이 있었지만 대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으며, 대처의 뛰어난 지도력에 의해 포클랜드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 소련과의 외교
대처가 `철의 여인`으로 불리게 된 계기는 그녀가 당시 동서냉전의 화해무드인 데탕트 속에서 군비증강을 한 것에 대한 그녀의 거침없는 소련의 반소 연설이었다. 소련은 이 계기로 서방세계의 경고장을 통해 겁을 먹었고, 이와는 반대로 대처의 신임도가 올라가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국제사회의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대처는 소련에 대해서 강경하고, 우려를 표시 하였지만,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의 사망이후, `페레스트로이카`를 내세운 고르바초프라는 젊은 지도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보다 적극적인 외교적 노력으로 소련을 방문하였다. 그녀는 그를 서방세계로 이끌어 내어 적극적으로 새로운 국제사회의 평화를 모색하고자 하였다.
위와 같이 대처를 국내외의 그녀가 행한 행보를 중심으로 큰 골자로 하여 업적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대처의 여러 가지의 업적과 일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녀가 행한 제일의 치적을 본다면 그것은 영국경제의 회복할 수 있게끔 그 기본을 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기본적인 토대위에 대처가 물러난 후 경제회복정책의 효과는 20년 뒤로 나타나게 되어 오늘날 영국의 경제회복이 될 수 있었던 하나의 지렛대역할로서 이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완벽히 보이는 대처의 업적가운데서도 그녀 자신도 인간인지라, 실패한 정책 사안이 없지 아니하다. 그녀의 악덕 중에 그러한 원인이 어디서부터인지 살펴보게 되면 그녀의 정치적 신념과 무관하지 않다.
3. 대처 수상의 영향
*대처리즘 -영국 경제의 재생을 꾀한 대처수상의 사회, 경제 정책의 총칭 -
그녀가 실시한 일련의 정책들-공기업 사유화, 노조에 대한 강경책, 금리 인상을 통한 인플레 억제 등등 - 은 영국 경제를 확실히 부흥시켰으며, 나아가 이처럼 "시장 자유화"를 바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성공적 모델은 사회주의 국가들에 본을 보여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냉전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처가 행한 경제, 정치적 정책은 현재 영국의 수상인 토니 블레의 총리의 성공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 아울러, 대외적으로도, 그녀는 북아일랜드의 테러리스트들과의 협상에서나 포클랜드 영유권을 둘러싼 아르헨티나와의 분쟁에서도 강경책을 관철시킴으로써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자존심을 되찾았다.
*대처의 원칙주의
이러한 성공을 이끌어낸 그녀의 경제 원칙은 명쾌했다. "일한 만큼 얻는다." 그리고 "누리는 만큼 지불한다."는 철저한 자본주의적 논리는 큰 번영을 가져와 환영 받았었다.
이런 그녀를 가리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그녀를 『칼리굴라(로마의 폭군)의 눈과 마릴린 먼로의 입을 가진 정치인』이라고 표현했다. 대처 수상은 여성의 우아한 매력도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남성도 따르지 못할 강한 신념과 의지를 지닌 정치인이었다.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손에는 예리한 메스를 들고 중병을 앓고 있는 나라를 수술하기 시작했다. 고통이 따랐지만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영국병을 거론하는 사람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대처는 후일 이렇게 자부했다. “우리가 정권을 맡았을 때 영국은 쇠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런 영국을 건져내기 위해 기업가 정신을 본보기로 삼았으며 흐트러졌던 법과 질서를 바로잡았습니다. 전적으로 부당하게 운영되던 노동조합 문제도 해결했습니다. 노동당 정부下에서 나라가 쇠퇴로 치닫고 있었는데 그 상황을 중단시켰습니다.”
*이상과 실천
<타임>지는 20세기의 인물 100인 중 한 사람으로 그녀를 이렇게 평가했다.
"20세기를 이상주의자들에게 너무나도 큰 실망으로 만들었던 모든 힘들 - 전체주의, 거대 국가, 개인적 선택 및 창의성의 말살 - 은 공공연히 패배 당했다. 반면 대처가 때로는 강한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견지했던 가치들 - 자유 경제, 자유정신 - 은 갈수록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21세기,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세계가 좀 더 현명해진 데에는 구멍 가겟집 딸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그녀는 몇 가지 간결하고 실천적인 아이디어들과 결부된 의지력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음을 증명해보였다."
그녀의 의지력, 그녀를 "철의 여인"으로 만든 원동력은
그녀의 경제 원칙 못지않게 단순 명쾌한 것이었다.
진취성: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네 마음에 충실하고 네 꿈을 실현하라.
성실성: 어떤 날이 만족스러운가 생각해보라. 아무것도 안하고 빈둥거린 날과 할 일을 다 해치운 날을
노 력: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한 번에 한 단씩 올라가야 한다.
끈 기: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두 번 이상 싸워야 할 때도 있다.
4. 대처의 부정적인 면
* 정치적 타협을 할 줄 모르는 외골수
당시의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대처의 논리적인 면과 완벽성과는 달리 화자의 요점을 듣고 자신의 의도를 피력하여 상대방이 나에게 끔 동조하게 만드는 인간적인 폭이 넓다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2차 대전 당시 연합국의 승리를 안겨다 준 처칠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대처는 그 어떠한 정치적인 입안문제에 대해서 자신과 반대될 경우 상대방의 존중과 타협이 아닌 자신의 논리로 관철될 때까지 끝까지 주장한다. 그것은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단점이 되어 그러한 모습 때문에 영국국내에서 정치적으로 늘 주변에 적이 많았다.
* 독불장군
대처를 독불장군이라 평가하는 것이 우스운지 몰라도 사실 그녀를 평가하자면 정책을 집행하는데 있어서 상대방의 의견을 잘 듣지 않고 일을 독단적으로 결정, 처리하는 스타일이다. 이것은 수상자격으로서는 경계를 해야 할 사항이지만, 독재자일 정도로 아무런 구속과 제한 없이 권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스타일이 모든 업무집행에 있어서 다는 아니겠지만 그녀의 내각에서 일 해봤던 상당수 관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러한 모습이 비쳐졌다는 견해들이다.
* 피지배자 층의 역사적 고통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
국제 테러리스트들의 암살 대상자 명단에 상위에 거론되고 있는 인물 중의 하나가 대처이다. 그녀는 특히 IRA(아일랜드 공화국 해방군)의 암살 제1호로 올라와 있다. 대처는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무자비한테러에 대해서 매우 강경하게 대처했다. 외교적 유연성이 약간은 필요한 민감한 문제에 관해서 너무나 강하게 밀고 간 나머지 아일랜드 사태를 더욱더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영국 내에서 소수민족의 인권과 인종차별에 대해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이것은 후에 그녀가 총리직에서 물러나는 요인으로도 작용하였다.
대처의 과감한 경제정책에 대한 가장 크고 완강한 저항은 1985년의 탄광노조 파업이었다. 1년여를 끈 이 파업에서 극단 노조 지도자들의 의도가 관철되지 못하고 대처의 원칙과 주장이 승리하게 된 것은 영국의 노동운동 나아가 노조와 정부와의 관계에서 획기적인 분수령을 긋는 사건이었다.
영국의 탄광노조는 단순히 대규모 산업노조에 머물지 않고 사실상 노동운동을 리드하여 왔으며 나아가 노동당과 정부의 고삐를 쥐고 흔드는 데까지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영국의 석탄산업은 산업혁명 이래 영국의 산업경제를 이끌어 온 견인차적 역할을 하여왔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영향력이 대단히 컸다. 따라서 석탄보다는 석유, 나아가 원자력으로 동력원이 바뀌어 가는데 따라 석탄산업이 사양산업이 되어 갔음에도 단순히 채산성만을 고려하여 경영관리를 해나가기가 어려운 특수한 문제가 있었다. 채탄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노후탄광을 폐쇄하고자 하도 여기에 딸린 노동자를 해고할 수 없어서 적자를 내면서도 이들 노후탄광을 계속 유지해야 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영국의 석탄산업은 국유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석탄산업의 수지를 맞추기 위해서는 불가불 정부의 각종 지원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사회정책 차원에서는 모르나 경제적으로는 이를 지속하기 어려워 영국 정부의 큰 고충중의 하나였다.
1983년 대처 정부가 대승하자 이제 선거로는 당분간 정권을 잡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노동당 좌파(the militants) 들은 노동조합을 동원하여 사회, 경제 질서의 혼란을 일으켜 대처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고자 하였다. 이들 중 선봉에 선 자가 탄광노조위원장인 Arthur Scargill 인데 그는 스스로가 Marxist 임을 공언하였다. 대처도 스카길이 노동운동가가 아니라, 영국의 체제 전복을 기도하는 파괴적 선동가, 공산주의자라고 규정하였다.
1983년 10월 석탄공사가 채산성이 맞지 않는 일부 탄좌의 폐쇄를 결정하자 1984년 3월 스카길은 이를 구실로 전국적인 탄광파업을 주도하고 나섰다. 대처는 1981년 탄광노조의 총파업 위협때 석탄이 긴급히 소요되는 산업시설- 특히 발전소-에 석탄보유 예비량이 충분히 비축되지 않아서 부득이 노조측에 양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 유념하여 그동안 기간산업체의 석탄보유 예비량을 꾸준히 증가시켜 왔다. 그리고 이들 잉여석탄이 탄광에 쌓여 있는데 만족하지 않고 실제로 필요로 하는 현장에 갖다 놓도록 하는 세심한 준비까지 하였다. 이러한 준비를 해놓고 대처는 스카길이 총파업을 위협하여도 파업을 버틸 수 있다는 계산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만반의 대비를 바탕으로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극단적 노조 지도자들의 음모를 분쇄하겠다는 의지로 총파업에 정면 대응하게 된다.
스카길은 정상적인 절차로서는 총파업에 필요한 표를 얻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지역별 파업은 중앙집행위원회의 승인하에 할 수 있다는 조항을 이용하여 각 지역별 파업을 동시다발적으로 일으켜 총파업의 효과를 달성하려는 편법을 동원하였다. 스카길의 이러한 전략은 일단 성공하였으나 파업에 반대하는 노동자 또는 지역들이 있어 일사불란한 투쟁체제는 갖추지 못하였다. 대처는 이 분열에 착안하여 조업을 계속하고자 하는 노동자는 조업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방해하는 자에 대해서는 형사조치를 취하겠다는 강경조치를 취하였다.
대처의 전술가운데 탁월한 점은, 탄광노조의 파업을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대결’로 몰아가려는 노조측의 움직임을 차단하고 이를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파업을 강행하려는 소수의 극단적 노조 지도자와 조업을 계속하려는 다수의 선량한 노조원들’간의 대결로 규정하고 정부는 다수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정당한 경찰권과 조정권을 행사한다는 초월적 입장에 선 것이다. 즉 총파업을 대처와 스카길의 대결로 보이도록 하려는 음모에 말려들지 않고 스카길은 사회를 좀먹는 음모가에 불과하다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스카길 등 노조 집행부는 늘어나는 조업 복귀자들을 각종 수단으로 협박하였는데 이에 따라 탄광에서는 많은 폭력사태가 발생하였다. 대처는 소란이 무서워 타협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일부 정치인과 언론인들이 경찰과 노조를 1:1로 다루는데 분개하여 법을 집행하는 경찰과 극단분자들의 폭력행위를 같은 선상에서 다루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하고 경찰의 사기를 올리고 장비를 개선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파업은 1년여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 동안 조업에 복귀하는 노동자가 늘어가고 또 파업에 참가하지 않는 지역도 많아 석탄 공급에 큰 차질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밖에 석유, 원자력발전소의 전력공급을 증가시켜 석탄에 대체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결국 파업이 소기의 상과를 거두지 못하자 노조 집행부는 초조해졌으며 스카길을 비난하는 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일부 극단적 지도자들은 파업 계속을 위한 자금을 얻기 위해 리비아의 카다피에까지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서 이들의 도덕성은 치명적 손상을 받았다.
치욕적인 패배를 당할 것을 두려워한 노동조합연맹(TUC)은 대처에 협상을 제의하였는데 총파업을 중단하는 대신 정부와 석탄공사, 탄광노조 간에 새로운 석탄정책을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처의 응답은 냉정하였다. 첫째, 모든 협상은 노동자들이 먼저 직장에 완전 복귀한 후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둘째, 파업에 동조하지 않았거나 중도에 복귀한 노동자들이 불이익을 받는 일은 일체 있을 수 없다. 셋째, 채산성이 악화된 탄광 폐쇄 중지를 먼저 보장하라는 노조 요구는 등의 탄광노조 요구는 일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
그 동안 직장에 복귀하는 노동자들은 계속 증가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1985년 3월 탄광노조 집행부는 이제 총파업을 중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대처는 이번 사태의 승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승자가 있다면 그것은 직장을 지켜준 노동자들이다”고 대답하였다. 1984-5년의 탄광노조 파업과 그 결말은 영국 정치상황에 큰 분수령이 되었다. 이제 소수의 극단분자들이 노조를 앞세우고 국민을 볼모로 삼아 정부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탄광노조 파업을 성공적으로 수습하게 됨에 따라 대처는 과연 Iron Lady임을 입증하였으며, 국내는 물론 유럽의 사회당 정권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처의 승리는 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치밀한 준비, 적을 최소화하고 상대방을 명분면에서 무장해제 시키는 명석한 논리, 원칙에 충실하고 큰 승리를 위해 작은 희생과 고난을 감내하는 의지, 그리고 이를 국민들에게 설득하고 끌어 나갈 수 있는 정치력 등에 힘입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철의 여인은 쉽게 얻어진 명성이 아니다.
- 명분과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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