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노벨 평화상은 닉슨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와 越盟(월맹)의 정치국원 레둑토에게 돌아갔다. 두 사람은 파리 평화협상 때 양국을 대표해 베트남 전쟁의 처리를 놓고 3년간 협상한 관계였다. 예나 지금이나 노벨평화상은 ‘밥상’ 보다도 못한 상이다. |
베트남은 1973년 ‘파리협정’(베트남 평화협정)을 체결한지 2년 만에 공산화됐다.
북베트남(월맹)과 남베트남(自由베트남) 간의 전쟁이 한창이던 1973년 1월27일, 베트남에서의 전쟁종결과 평화회복에 관한 ‘파리협정’이 미국, 남베트남, 북베트남,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4자간에 체결됐다.
‘파리협정’은 ▲베트남 주둔 미군의 철수 ▲전쟁포로 송환 전쟁포로의 송환 ▲현재 상태로의 정전 ▲남베트남에서의 사이공 정부와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간에 연합정부 조직을 위한 협의 ▲정치범의 석방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이후 북베트남과 이들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는 1975년 4월30일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써 베트남 공산화 통일을 성공시켰다.
‘파리협정’ 체결 이전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전쟁에 월 20억 달러가 넘는 戰費(전비)를 지출했다. 그러나 戰況(전황)이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1968년 3월31일 DMZ를 제외한 지역에 대한 폭격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같은 해 大選 불참을 발표했다.
존슨 대통령은 에버렐 해리먼을 대표로 지명,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노이 당국과 평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도모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1968년 5월13일 ‘평화협정’의 첫 회의가 개최됐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쉽게 평화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들을 제시했다. 핵심은 남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라는 것이었다.
하루빨리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는 反戰여론을 의식한 존슨의 후임 닉슨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 아시아는 아시아의 손에 맡긴다는 정책으로 급선회하여 미군의 철군을 시도했다. 물론 남베트남의 티우 대통령은 미군의 철수를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럼에도 1973년 1월27일 파리협정이 체결됐고, 닉슨은 1954년 프랑스가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시작된 인도차이나 개입의 멍에를 20여 년 만에 벗어던질 수 있었다. 닉슨은 모든 자원을 동원해 남베트남의 티우 정권을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그의 영향력은 사라져갔다.
1974년 군사적 균형은 이미 북베트남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고 있었다. 북베트남은 1975년 본격적인 공세를 감행했고, 불과 55일 만에 사이공 정부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얻어냈다. 사이공 함락 후 남베트남의 지도층 인사, 공무원, 지식인들은 수용소에 보내졌다. 심지어 북베트남을 도와 사이공 정권 반대운동을 벌였던 인사들도 대부분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베트남 전쟁은 동남아의 정치상황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캄보디아는 1975년 4월 프놈펜이 ‘크메르 루주’에게 장악되어 공산화됐다. 북베트남의 주요 전쟁물자 供給路(공급로)였던 라오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자 1975년 5월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베트남은 ‘파리협정’ 체결 후 2년 만에 공산화됐다. 민주당 文在寅 씨는 지난 대선 기간 내내 북한과 남한 내 從北-左派 세력의 주한미군철수 논리인 ‘평화체제’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참고로 사실상의 주한미군철수나 다름없는 韓美연합사는 2015년 해체된다.
정리/조갑제닷컴 김필재 spooner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