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래서 가치판단에 있어서 오류의 가능성은 常存(상존)하기 마련이다. 사실(fact)에 입각해서 純粹理性(순수이성)으로 사고하고 판단하여도 오류는 발생하게 되어있다. 만약 인간이 항상 논리적이고 현명하다면 인류의 역사가 그토록 많은 어리석음과 죄악으로 가득차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현실적 경험이 없이 당위와 명분만으로 판단을 내릴 때는 오류의 가능성은 극대화 될 것이다. 특히 자연과학이 아닌 인문학 그 중에도 역사학에서는 가치판단의 오류가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한 시대의 삶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통찰도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이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는 (동일 조건하에서는) 보다 더 정확하게 할 것이다. 한 시대를 살면서 山戰水戰(산전수전) 모두 겪어 본 사람이 책이나 교육을 통해서 관념적으로만 배운 사람보다는 시대의 평가나 통찰에 있어서 誤謬(오류)가 적을 것이다. 경험을 하고도 어리석은 판단을 예사로 하는 존재가 인간인데 당대에 살아보지도 않고 당대를 관념적으로만 평가할 때는 오류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헤밍웨이의 ≪武器여 잘 있거라≫의 프레데릭 중위는 退却(퇴각) 중에 부대를 이탈한 중령을 헌병들이 체포하여 심문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 심문자(헌병)들은 사격은 하지만 사격은 받지 않는 이탈리아 군인들의 그 모든 능률성과 침착함과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속 여단은?”
그(중령)는 대답하였다.
“연대는?”
그는 대답했다.
“연대에서 왜 이탈했나?”
그는 대답했다.
“장교는 부대와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나?”
그는 안다고 말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헌병장교가 말했다.
“너 같은 놈 때문이다. 야만인들이 조국의 신성한 국토를 짓밟게 만든 것은 바로 너 같은 놈들이다.”
“선처를 바랍니다.”라고 중령이 말하였다.
“우리가 승리의 열매를 놓친 것은 네 놈들의 반역 때문이다.”
“당신들은 전투에서 후퇴해 본 적이 있소?” 중령이 물었다.》
헌병은 총살집행을 위한 총은 쏘지만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지는 않는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총에 맞을 일도 없고 후퇴의 경험도 없다. 그들은 죄의 유혹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도 죄에 굴복한 자를 斷罪(단죄)하는 성직자와 같다.
헌병들이 사용하는 “신성한 국토”와 “승리의 열매”같은 애국적인 語句(어구)는 조개껍질처럼 공허한 것이어서 “후퇴해 본 적이 있는가?”라는 중령의 말에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헌병들의 용감한 말은 실제상황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중령의 질문은 핵심을 찌르기 때문이다. 행동과 경험으로 받침 되지 않는 추상적인 이론이나 명분은 오판의 여지가 많으며 인류사는 너무나 많은 오판의 사례를 보여 준다. 중령은 이러한 오판의 희생자이다.
전투에서 후퇴해보지도 않고 해볼 필요도 없으면서 후퇴하는 군인을 사살하려는 헌병같은 인간들이 한국에는 너무나 많다. 명분과 관념만으로 역사를 裁斷(재단)하는 독선적 지식인 헌병들이 많다. 그런데 이들 헌병의 다수가 소위 2030세대와 40세대에 속하는 젊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박정희시대에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태어났더라도 천지도 모르는 幼兒(유아)들이었으면서도 박정희시대를 “대단히 암울한 독재의 시대”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당대의 삶에 대한 경험이 全無(전무)하면서도 확신에 차서 판단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정작 朴 대통령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절대 다수가 (비밀 보통선거에 의한 유신헌법 지지율이 투표자의 92%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박대통령을 우리 민족을 보릿고개라는 가난의 지옥에서 구출해준 민족의 恩人(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살아 있는 증인들이다. 그런데도 이들의 체험에서 울어나는 생생한 증언을 당대에 살아보지도 않았던 헌병들이 “꼰대들의 妄言(망언)”으로 무시하고 嘲笑(조소)하는 것을 볼 때 마다 인간에 대한 실망이 커져 간다. “이놈들아 그 때에 살아 보기나 했나?”라는 분노의 고함이 터져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