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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社會 關係

韓明淑 리비아 방문당시 게양된 '엉터리 태극기'

鶴山 徐 仁 2012. 12. 1. 14:22

 

韓明淑 리비아 방문당시 게양된 '엉터리 태극기'

 

 

歷史는 記錄으로 남고 記錄이 모여 증거(證據)가 된다

 

金泌材  

  

 

 

위 사진은 민주당 한명숙(韓明淑) 의원이 2006년 9월19일 리비아를 방문했을 당시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미티가 국제공항에 게양됐던 태극기의 모습이다.
 
자세히 보면 태극기 괘(掛)의 선이 손으로 그린 것처럼 삐뚤삐뚤하며, 태극의 크기가 지나치게 크게 그려져 있다. 당시 韓明淑은 엉터리 태극기 아래서 의장대 사열을 받았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리비아 주재 한국 대사관은 규격에 맞는 태극기를 제공했으나, 리비아측이 自國의 국기보다 커서 게양할 수 없다며 태극기를 직접 제작했다는 것.
 
그러나 국내에서도 다양한 규격의 태극기가 제작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대사관의 대응은 이번 韓明淑 태극기 모독 사건과 함께 고의(故意)성이 엿보인다.
 
韓明淑은 과거 공안사건에 연루된 전력이 많다. 1968년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 사건과 관련, 남편 박성준(朴聖焌, 성공회대 교수)과 함께 실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朴聖焌은 1심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대법원에서 형(刑)이 확정됐다. 韓明淑은 징역 1년, 집행유예1년, 자격정지1년 형을 받았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통혁당이 합법·비(非)합법, 폭력·비(非)폭력의 배합투쟁을 통해 1970년까지 소위 ‘결정적 시기’를 조성, 민중봉기를 통해 공산정권 수립을 획책했다고 발표했다.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관련기사] 문재인, 통혁당 사건 연루자 신영복 '글씨체' 사용
통혁당 지도이념은 주체사상... 申 씨, 한명숙 민통당 前 대표 남편 박성준 포섭했던 인물

 

통혁당 사건 연루자 신영복(사진)의 글씨체를 사용한 문재인 민통당 대선 후보의 슬로건

  

 

■ 민통당 대선 후보인 문재인 씨가 최근 공개한 대선 슬로건 ‘사람이 먼저다’의 글씨체가 통혁당(통일혁명당) 사건 연루자인 신영복(申榮福)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것으로 확인됐다.

文 씨의 이번 슬로건은 광고회사 ‘더일레븐스’의 최창희 대표가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崔 대표는 2002년 韓日월드컵 당시 'Be the Reds'(미국의 Answer.com에서는 ‘Reds’를 ‘공산주의자들’로 해석한다) 등을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인터넷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崔 대표는 ‘사람이 먼저다’라는 대선 슬로건에 대해 “이념보다, 성공보다, 권력보다, 개발보다, 성장보다, 집안보다, 학력보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만들겠다는 철학과 의지를 담았다”고 한다. 그러나 문재인 캠프의 이 같은 주장과 달리 문제의 슬로건에 사용된 글씨체를 만든 신영복 씨는 누구보다도 이념적인 인물이다.

申 씨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삼았던 통혁당 사건 연루자로 무기징역을 선고(1988년 석방)받았던 인물이다. 통혁당 사건(1968년 8월24일 검거)은 해방 이후 북한의 전형적인 對南 공작사업에 의해 결성된 남한 내 지하당이다. 사건 주범 김종태(金鍾泰)는 북한의 對南사업총국장 허봉학으로부터 직접 지령과 공작금을 받고 남파된 거물간첩이었다.

통혁당은 김종태(북한 노동당 입당)를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하여 김질락(1967년 4월 월북, 북한 노동당 입당)·신영복 주도의 ‘민족해방전선’과 이문규(1967년 5월4일~5월28일 월북, 북한 노동당 입당)·이재학 주도의 ‘조국해방전선’ 아래 다양한 서클·조직·학사주점 등을 조직, 공산혁명을 획책했었다. 신영복 교수의 경우 당시 육군 중위로 박성준(한명숙 민통당 前 대표 남편, 現 성공회대 교수)씨를 포섭했던 ‘민족해방전선 조직비서’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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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세계’가 발행한《공안사건기록》에 나타난 ‘통혁당 사건 인적사항 및 피의내용’

 

 


■ 통혁당 사건 판결문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 소위 '진보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박성준-신영복 등의 행적이 아래와 같이 담겨 있다. (<월간조선> 2006년 5월호 보도인용)

《1968년 검거 당시 박성준은 서울대 경제학과 4학년이었다. 그는 1968년 1심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대법원에서 형(刑)이 확정됐다. 박성준은 대학 선배였던 신영복으로부터 포섭돼 사상교육과 학습을 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박성준은 신영복으로, 신영복은 김질락으로, 김질락은 핵심 주범인 김종태로 이어지는 인맥 조직도를 그리고 있다.

<1966년 11월 김질락은 자신의 집에서 북괴의 이익이 되는 점을 알면서 신영복과 만나 북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할 목적으로 신영복으로부터 철학 노트 1권을 받고, 육사생도 9명에 대한 교양상황과 ‘박성준을 포섭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1967년 오후 3시 김질락은 잔디다방에서 신영복으로부터 ‘경제복지회 내에 있는 성원인 박성준을 조정하여 시내 각 대학생 100여 명을 규합, 7월2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명동에 집결시켜 6·8 부정선거 규탄구호를 외치면서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앞 노상까지 데모 행진을 감행했다’는 보고를 받고 신영복을 격려했다.>

통혁당 사건 당시 신영복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육사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이 사건의 주범들과 직접적으로 연루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간 복역했다. 신영복은 김질락 등 사건의 핵심 인물들과 자주 만나 지시를 받고, 사업 진행상황을 보고했다.

서울大 출신으로 북한과 직접적으로 연결됐던 김질락은 신영복 등 젊은 청년을 포섭하는 일을 했다. 다음은 판결문의 일부이다.

<1966년 중순경 김질락은 서울 중구 무교동 소재의 한 다방에서 북괴의 이익이 되는 점을 알면서 김종태를 만나 그에게 ‘신영복을 포섭하였다’고 보고했고, 김종태로부터 ‘신영복에게 교양을 주어 하부조직을 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아 反국가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했다. 1966년 8월 서울 서대문구 갈현동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신영복에게 ‘육사교관과 생도를 포섭할 것’, ‘월 2~3회씩 집에서 회합할 것’, ‘각자의 활동상황을 정기 회합 時 보고할 것’ 등을 지시하고,《청춘의 노래》라는 불온서적을 제공하여 反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

검찰은 박성준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음모, 반공법 위반죄를 적용했다.

당시의 검찰 공소장에는 <박성준이 사회주의·공산주의·유물론 등 사회과학 서적은 물론 北이 발행한 불온서적도 열심히 학습했다>고 적시되어 있다.

박성준은 이 같은 책을 열심히 읽은 후 주변 인물에게 사상을 전파한 걸로 돼 있다. 그가 공부했던 책은 다음과 같다.<「마르크스 자본론」, 「사회사상전집」, 「불란서 유물론」, 「레닌의 성과적 유물론」, 「레닌주의란 무엇인가」,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 「청년의 노래」(북괴 발행),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 「공상에서 과학으로」,「 새벽길」(북괴 발행)>

<우리가 現 사회주의를 이상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없고 후배들도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선 合法을 가장해서 동지규합단체를 확대, 現 정부에 대항하고 외세에 항거, 現 사회제도를 타파하고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방향으로 「민족적, 사회민주적, 사회대중적 사회」라는 구호 밑에 외견상 합법적으로 보일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하고 동지를 규합하자.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이러한 조직은 민족해방전선(엔,이,엘)이라고 호칭하자. 現 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외세의 지배下에 있고, 경제적으로 불평등하여 대단히 모순이 많은 사회다. 자본주의 체제의 악순환을 제거하기 위하여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개혁하여야 한다.>

통혁당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종태는 재판 과정에서 검찰의 공소사실을 대부분 시인했다. 그러나 김종태 등과 직·간접적으로 연루됐던 ‘청맥’의 주요 인물들은 자신들이 행위가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1심 판결에 불복한 박성준은 항소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민족해방전선’을 구성한 바 없으며, 4·19 묘지에서 북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 사실도 없고, 그 밖에 이 사건 책자를 구입하거나 빌려 보거나, 빌려 주고, 필기시키고 한 모든 행위가 북괴를 이롭게 한 것이 아니며, 신영복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경솔한 소행을 하기에 이른 것이니 기독교인으로서 깊이 반성한다.>

그러나 대법원은 “박성준이 ‘現 사회는 사회주의 제도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反국가 단체의 활동에 동조했다”고 판단, 원심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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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혁당 조직도


■ 신영복 교수는 2002년 1월17일 연세대에서 민노당(現 통진당 前身) 당원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자본축적은 근본적 모순체제”, “자본주의 체제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었다. 

“자본주의 체제, 종속적 자본주의, 천민적 자본주의가 우리나라에 언제까지 갈 것인가? 나도 몰라. 그러나 논리적 이론적 사고를 한다면 ‘非인간적 근본적 모순구조’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중략) 자본 축척은 근본적 모순체제다. 화(和)의 철학을 기초해서 만들어 가야한다. 억압적 구조에서 취약역량을 가지고 희망을 만들어 가야하는 것이다. 힘들어도 샛길은 없다. 사회를 바꾸어 내자. 정말 황폐화된 인간관계 삶의 일부로서 실천해야한다. 운동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 행할 때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할 것이다.”

申 교수는 2003년 10월 송두율이 입국하자, ‘송두율 교수 석방을 요구하는 시민사회 1000인 성명(2003. 10. 23)’, ‘송두율 교수의 무죄 석방을 촉구하는 사회 원로·인사 성명(2004. 3. 11)’ 및 ‘송두율석방대책위’ 고문 등으로 참여하며 宋 씨 석방투쟁의 전면에 나섰다.

申 교수는 2006년 6월2일 정년퇴임 시 교단을 떠나는 소회를 묻자 “진보적 학풍의 성공회대였기 때문에 左派색깔이 확실한 나 같은 사람이 안정적으로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다”면서 “학생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던 것들이 가장 큰 추억이며 퇴임 후에도 변함없이 젊은 사람들과 소통에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申 교수는 또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전국교수 1000인 성명(2004. 10.27)’, ‘6.15공동선언, 10.4선언 이행 및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각계 인사 공동선언(2008. 6. 14)’ 등에 참여해 국보법 폐지와 6.15 및 10.4선언 이행 촉구에도 앞장서왔다. 

정리/김필재 spooner1@hanmail.net

[ 2012-12-01, 13: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