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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文道 칼럼] 오늘 박정희 國葬 33주-超人의 죽음

鶴山 徐 仁 2012. 11. 4. 00:15

 

[許文道 칼럼] 오늘 박정희 國葬 33주-超人의 죽음

 

 

박정희가 목숨을 건 진실은 무엇이었던가? 박정희의 「진실」이란 무엇이었던가. 「이땅의 서민들이 제 땀 흘려 제 밥 먹을 수 있고, 제 힘으로 제 나라 지킬 수 있는 세상」이었다.

 

허문도    

 

  

역사의 자살 박정희! '초인은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죽음의 의미

초인이냐 속죄양이냐

허문도 /전 통일부 장관



필자/허문도 전 통일부 장관ⓒ
▲필자/허문도 전 통일부 장관

박정희 대통령을 국장(國葬 79.11.3.)으로 보낸지 서른 세해가 흘러 한 세대가 확실히 지나갔다. 그의 죽음의 의미를 역사 속에서 새겨 볼 때가 된 것 같다.

박정희는 돌연한 총격으로 갔지만, 그 총격의 주체는 모든 사람에게 너무도 상상 밖이었다.

총격의 주체는 그의 정적들이 아니었다. 달리고 있는 나라 위에 중압과 갈등을 몰고 와 그의 실존을 고뇌의 심연으로 밀어넣던 반대자들이 아니었다.

총격의 주체는, 인권을 고집하여 주둔군 철수까지도 위협 재료로 쓰는데 서슴치 않았던 미국의 사주를 받은 자도 아니었고, 박정희가 ‘사대주의에 골수가 절은 자들’이라고 경멸해 마지 않았던 데모크라트(민주쟁이)들도 아니었고, 유신만 아니면 대권이 제것이라고 생각해 마지 않았던 YS나 DJ의 뜻을 받은 자도 아니었고, 몇 번씩이나 박정희의 목숨을 노리고, 국가 전복의 틈을 엿보던 북의 공산집단이나 그 연장에 있던 자도 아니었다.


총격의 주체는 유신체제 제1의 수호책으로 자타가 알고 있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였다. 유신체제 제1의 수호자가 유신체제의 제 1인자를 부정한 것이다. 김재규와 체제의 제2인자 역을 두고 갈등하던 경호실장 차지철도 김재규의 총격에 갔다. 한시 한자리에서 유신체제의 정상부가 갑자기 함몰해 버린 것이다.

유신체제 밖에서 보면 유신체제가 스스로를 부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0여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그가 돌연한 총격 앞에서 취한 자세를 찬찬히 뜯어 보다가, 일순 아! 이건 순교자의 자세다, 라고 감전되듯 느꼈다.

그날 김재규가 차지철을 쏜 제 1탄과 박정희를 쏜 제 2탄 사이에는 몇 초간의 간극이 있었다. 김재규가 이유를 알 수 없이 머뭇거린 4, 5초 사이에 박정희가 취했던 동작에 대해서는 옆자리의 여인으로부터 확실한 증언이 있다.

“탕”소리와 함께 피가 치솟는 팔목을 붙들고 차지철이 화장실로 뛰는데, 박정희는 ‘뭣들 하는거야’라고 벽력같이 한마디를 지른 후 ‘눈을 감고 정좌를 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 1격을 받고 대통령은 ‘고개를 떨구고 기울어졌는데 이마가 식탁위에 닿았다’. 이후 머리에 제 2격을 받고 절명하기 까지 약 1분간에도 박정희는 치명상이 아닌 총격을 받은 인간이 보이는 조건반사적 단말마적 동작을 일체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것은 물론 범인이 흉내낼 수 있는 동작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김재규의 제 1격과 제 2격 사이의 4초간이다. 이 4초간에 박대통령이 취한 동작 속에 유신에서 포스트 유신으로 시대를 전철(轉轍) 하는 역사극의 성격을 드러내는 키포인트가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4초간에 박정희가 보인 명목(暝目)과 정좌(靜坐)에서 드러난 있기 어려운 태연자약과 의연함을 들어 사람들은 그의 초인성을 보기도 한다.

거기서 그칠 수 없다.

총격상황에서 「마탄의 사수」를 앞에 한 박정희의 명목과 정좌는 죽음의 소극적 수용이 아니라, ‘여기를 쏘라’ 는 적극적 채근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박정희의 안광에 쫄아들 수도 있는 상대이기에 더욱 그렇다.

4초간의 박정희의 자세는 총구를 유도하는 자세이고, 죽음을 맞이해 들이는 자세이고, 죽음 앞으로 삶을 던지는 자세이고, 나아가서는 혈제의 제단에 스스로를 올려 놓으려는 의지로 읽혀 질 수 밖에 없는 자세이다.

민족중흥을 종교로 했던 박정희는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번제(燔祭)를 진작부터 마음에 두었던 것일까.

박정희 리더십의 본질은 추종자들로부터의 믿음 속에 있었다. 그 믿음은 박정희가 5.16 의 한강 도강 이래, 늘 그가 조국근대화의 대의(大義) 앞에 모든 권력수단은 물론 그의 일신까지도 바치려 든다는 믿음이었다.

죽고 나서 공개된 그의 일기 중에 들어있다. 1976년 6.25남침 26주년에 김일성 집단의 동족 살육의 죄를 다스릴 국력을 길러낼 것을 다짐하면서, 「나의 모든 생명을 바쳐서 이 민족적 사명을 기필코 완수하리라. 천지신명이시여, 나에게 이 대업을 완성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라고 아무도 보지 않는 일기 속에 적고 있다.

「조국 근대화」를 걸고 박정희는 초월적 존재앞에 일신을 던져 가부를 묻는 자세를 언제나 갖고 살았던 것 같다.

그많은 문민의 측근들 중에서도 김성진 장관은 박정희정신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던 사람으로 꼽힌다.

대통령 「유고」를 발표하던 새벽4시, 기자들이 도착하기 전의 텅빈 방에서 김성진 장관은 그가 청와대 대변인 시절, 대통령 연설의 치사로 초 잡았다가 지운 한 구절이 떠올랐다 한다.

「나는 이미 이 나라 민주 제단에 나의 몸과 마음을 바친지 오래다」



마지막 무렵의 박정희에게 종말론적 상념이 있었을까.

일신교(一神敎)세계에 있는 종말론의 「종말」이란 「그 날이 온다」, 「새 날이 온다」, 「하늘의 뜻이 이 세상에 직접 개입하는 날이 가까웠다」를 말한다. 추상적인 「천국의 도래」가 아니다. 유대교의 경우, 「국제사회의 정치역학이 변화하여, 유대민족의 지위가 뻗어나, 예루살렘 중심으로 유대국가가 다시 패권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날은 돌연히 온다.」가 종말론의 사고방식이다.

박정희에게 종말론적 상념이 있었는지 여부를 짐작해 보기 위해서는 유신체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먼저 직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신체제는 한 마디로 박정희가 발명한 「근대화 머신」이었다.

이는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이 ‘반제 민족해방전쟁’의 머신(machine)이었고, 레닌의 볼세비키가 공산혁명의 머신이었고, 등소평의 공산당이 사회주의 중국의 근대화 자본주의 머신이듯이, 유신체제는 박정희의 「근대화 머신」이었다.

머신은 근대화의 가도를 효율좋게 질주했으나 발열과 소음의 결함이 있었다. 머신의 발열과 소음은 한국의 역사조건으로 인해, 처음부터 알았고, 각오한 것이었다.

소음을 두려워 한다면 F1 경주를 그만 두듯이, 근대화를 그만 둬야 하는 것이 한국의 역사조건이었다. 이 점을 박정희는 누구보다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었던게 아닐까.

머신이 이룩한 근대화의 도달점을 대견해 하는 일방에서, 머신의 소음과 발열이 커져가는 것에 박정희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동맹 미국이 주둔군 철수를 인권 문제의 위협재료로 하였고, ‘사대주의 근성의 데모크라트(민주쟁이)’ 들이 강대국의 등에 올라타 제나라로 외압을 불러들이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대도 그는 질주의 액셀을 더욱 밟을 뿐이었다.

그러나 부마(부마)사태, 자갈치 아줌마와 국제시장 아저씨들이 데모꾼에 물 떠줬다는 소리를 듣고는 흔들렸을 것이다. 보리고개를 넘어온 머신의 질주에 대해 누구보다 박수를 보내리라 믿었던 한국의 서민들이 보인 의외성은 박정희 에게 배신감에 가까웠다.

드디어 소음의 파괴력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파괴력은 박정희 신도들의 마음까지 잠식했던 것이다.

그의 마지막 영적 결단을 부른 것은 그가 혼을 쏟았던 새마을 운동쪽이었다. 끝장이 왔던 하루 전날인 10월 25일, 청와대 뜰에서 몇 수석들과의 점심에는 박진환 새마을 특보도 불려왔다.

대통령: 박 박사 고향이 마산인데, 이번 사태를 어떻게 생각해?
박진환: 민심이 떠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국민들이 새마을 운동에도 옛날처럼 열을 내지 않
는 것 같습니다...
정부와 국민이 뭔가 헛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부마사태를 두고 책임 소재를 정부쪽으로 코멘트를 하기도 하였는데, 말을 끝맺고 벌떡 일어서는 것이, 어떤 ‘결연한 의지’의 결심으로 박특보 눈에 비쳤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스스로가 만든 「근대화 머신」의 한계를 보았다.

강대국측과 사대주의 근성들의 요구는 긴급조치철폐, YS 제명철회 등이었지만 박정희의 초월적 사고는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그같은 체제 완화의 양보는 1회에 끝날 수 없는 것이고, 끝내는 체제폭파로 이어지고, 근대화의 성취마저 허공중에 흩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역사와 씨름하는 박정희는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찔끔찔끔 양보하기 보다는 박정희는 모든 것을 쓸고 ‘새날’을 예비하는 종말론적 사고로 응대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다음은 나폴레옹의 말대로 「역사는 운명이다」였다. 유신의 수호책인 김재규의 총성의 순간에 박정희에게는 운명적-계시적 기전(機轉)이 있지 않았을까. 박정희는 눈을 감고 일신을 번제의 제물로 바쳤다. 근대화의 머신 유신 체제는 일거에 철거되었다.

역사는 박정희가 스스로를 민족의 제단에 속죄양으로 올린 번제에 답하고 있는 것일까.

속죄양 박정희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의 추종자들, 뒤에서 보게 될 「박정희의 아이들」의 죄의식은 확실히 안고 갔을 것이다. 예수는 온 인류를 위해 그 죄를 대속하여 죽었다 하는데, 박정희는 「박정희의 아이들」의 민주 콤프렉스는 씻어냈을 것이다.

박대통령 시해를 두고서 친류라고 할 수 있는 군부 장성들 간에도, 주군(主君) 향한 복수의식의 강도에 차이가 있었던게 아닌가 한다. 내밀한 복수의식으로 대통령의 돌연한 죽음에 얽힌 정의를 구현해 냄으로써 윤리의 고지에 올라서게 된 전두환에게는 집권의 길이 열렸고, 복수의식이 모호한 채 소극적 가담으로 비친 참모총장 정승화의 세력은 제거되었다.

포스트 박정희의 질서의 축은 박정희의 죽음이 결정했다 해도 될 것이다.



나폴레옹의 말대로 「역사는 운명이다」를 다시 한번 느낀다. (이는 일본의 전국시대에 패자(覇者)인 주군 오다(織田信長)를 배반, 공격하여 죽게한 아케치(明智光秀)를 반드시 강한 세력이 아니면서 빠른 정보와 기동으로 먼저 복수전을 벌였던 도요토미가 무장들의 권력서열 네 번째에서 일거에 오다 사후의 패권을 차지했던 사례와 닮은 데가 있다.)

여기서 벌써 30년 전인 5공초를 회상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연 40%나 뛰던 물가를 잡고자 누구라도 껄끄럽게 여기는 긴축정책이 있었다.
‘물가오름세’ 심리를 잡는데 언론의 무드 주도가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한편에서 「국풍」판이 벌어져 오래 수문에 막혀있던 민족의 기(氣)와 끼와 흥(興)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고, 이 기세가 일본을 제치고 올림픽을 불러왔다. 여기에 낮은 달러값, 오일값 등의 3저현상이 축복처럼 닥쳤다. 유신으로 기틀이 놓여졌던 한국 경제는 세계 제일의 경제성장률로 치솟아 덩치를 키웠다. 이와 함께 새마을의 서민들이 중산층으로 자라났다. 우리 역사상 민주화 정면의 수요자들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

지금도 신문을 보면 5공의 하늘을 유신(維新) 연장에서 어둡게 칠하는데 더러 부딪힌다. 광주사태나 아웅산폭파를 헤쳐내고 도달한 흥륭하는 사회의 밝음에 눈을 주는데 인색하다.

그러나 그 시절을 열심히 뛰었던 누구를 만나도 ‘그때는 사는 것이 신이 났고, 손에 잡힐 목표가 있었고, 희망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1년정도의 혼란기를 사이에 두고 유신사회에 접속되어 잇는 5共사회의 밝음과 활기와 에너지와 끼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나는 5共의 밝음과 활력이 박정희의 죽음의 의식과 관계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여기까지 써 왔다.

이럴 때는 정신분석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체성(아이덴티티)의 정신분석가 에릭 에릭슨은 인간의 본성을 파고들어 프로이드의 제자이면서 프로이드를 넘어섰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에릭슨은 서양사상 최대의 개혁가란 소리를 듣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청년시절을 『청년루터』에서 심리적인 역사분석을 해보인다.

이 『청년루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인간은 수치심을 대가로 치러 <자율적인 존재>가 되었고, 죄의식을 대가로 <독자적 창의력> (independent initiative-독립적 자발심)을 얻게 되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독립적 자발심>이다. 인간성장의 한 단계에서 인간은 <독립적 자발심>을 갖게 되는데, 의식의 심층에 생겨난 죄의식에 의해 촉발된다는 것을 에릭슨은 관찰해 내었다.
(에릭슨은, 청년 마틴루터가 고집세고 완강한 부친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여 강렬한 개혁주체의식을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이 대목을 쓰고 있다)


에릭슨의 관찰로 박정희의 죽음 주변을 들여다 본다.

앞에서 본 김성진 장관이 그날 새벽 아무도 없는 국무회의실에서 「그의 죽음」을 두고 느낀 소회의 일단을 뒷날 적었다. 그 속에 「아비의 속마음을 모르는 자식들에게 배은망덕한 꼴을 당하고 말았구나」가 있다.

박정희의 죽음이 앞에서도 보았듯이 유신체제 내의 죽음이므로 인해, 「유신의 아이들」 즉 「박정희의 아이들」에게 살부(殺父)의 죄의식이 의식의 심층에 자리잡게 되었음을 김장관의 소회는 엿보게 한다.



「박정희의 아이들」이 누구인가.

그가 손때 묻혀 길러낸 정규 육사 출신의 장교단, 무서웠지만 짐지는 맛이 나던 유신관료들, 그 혼을 직접 입김으로 불어 넣은 새마을 지도자들, 그의 독찰에 밤잠을 잊었던 중화학 공업의 개척자들, 아라비아의 열사에서 한국인만이 가능했던 규율노동을 체현했던 근로자들, 그와 함께 모심기를 하여 주곡 자급의 녹색혁명을 이룩한 농업전사들, 그리고 새마을의 종소리에 새벽잠을 깨어본 모든 국민들, 이 모든 「박정희의 아이들」에게 살부(殺父)의 죄의식은 분유되었다 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5共의 마당에 청년 루터처럼, 살부의 죄의식의 미안한 반동은 터져 나와, 「독자적 창의력」으로 「독립적 자발심」으로 5共의 일상을 채웠던 것이 아닐까. 이것이 개혁과 창조의 동력이고 밝음과 활력의 발원체 바로 그것일 것이다. 「박정희의 아이들」은 박정희 생전에는 그의 카리스마에 가려 그 목소리는 작았고, 그림자는 희미했다. 그러나 속죄양 박정희의 번제(燔祭)와 동시에 ‘아이들’은 달라졌다.

‘박정희의 아이들’ 살부의 죄의식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은 다시 한 번 영적 강점의 지주가 되었다. 박정희의 아이들의 새로운 시작은 약했지만, 그러나 그 연약함이란 곧바로 산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을 약속했다.

6.29의 민주화 선언은 난중의 폭발하는 데모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속죄양으로 바친 박정희가 눈길주어 기른 ‘박정희의 아이’ 전두환의 결단에 의한 것임을 역사는 특기할 것이다.



박정희 초인론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에서 국립교향악단은 리히할트 슈트라우스 작곡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란 교향시를 연주했다. 이때 이후, 작곡자가 악상을 얻기도 했던 꼭 같은 題名의 니체의 철학적 문학작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주제어 중에 초인(超人)이 있어서인지, 박정희의 죽음에는 「초인(超人)」이 따라 다닌다.

앞에서 나왔지만 한 전기 필자는 그날밤 김재규의 총격 앞에서 취한 박정희자세의 ‘태연자약하고 의연함’을 특히 높이 보아 박정희의 초인성을 말하기도 했다.

우리도 박정희가 초인임에 동의하지만 그 이유는 따로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명역 『짜라두자는 이렇게 말했지.』 (박성현 역, 필명 백석현, 야그 출판)가 있다.

이 번역판의 「초인」해설을 쓰겠다.

초인의 超는 「넘어선」이고, 초인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이다. 본문 속에는 니체 「초인」의 해설같은 구절이 있다.

『초인은 「진실에 대한 의지」하나에 자신의 존재 전체를 바친 인간이다.』


박정희의 「진실」이란 무엇이었던가.

「이땅의 서민들이 제 땀 흘려 제 밥 먹을 수 있고, 제 힘으로 제 나라 지킬 수 있는 세상」


이것이 박정희의 진실이었다. 박정희가 아니라도 이 보다 더한 진실이 세상에 있을 것인가.

해설은 「진실」의 파지(把持)과정에서 부닥치는 기존의 모든 도덕과 가치관을 다 버리겠다는 생각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바친 인간이 초인이다」고 하고 있다.

서민의 「진실」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부닥친 선진강대의 모든 가치관 앞에서 박정희는 물러서지 않았다.
않을 수 없었을 때는 자기를 바쳤다. 마지막에는 스스로의 생명까지 혈제의 제단에 올려 「진실」영속의 길을 열었다.

이만하면 박정희를 초인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박정희가 초인이었기에 스스로를 사과할 것까지도 모두 안고가는 속죄양으로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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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1-03, 21: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