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政治.社會 關係

못된 SBS를 보고 朴正熙가 장준하를 암살하였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권하는 글

鶴山 徐 仁 2012. 9. 6. 20:02
못된 SBS를 보고 朴正熙가 장준하를 암살하였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권하는 글

 

그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선거철이 다가오니 또 다시 정치선동꾼들과 SBS와 같은 反저널리즘적 언론이 합세, 수십 년 묵은 張俊河 타살설을 제기하면서 張씨의 추락사를 목격한 교육자(고등학교 교감 정년 퇴직자) 金龍煥 씨를 사실상 살인범으로 모는 마녀사냥을 재개하였다. 張씨가 타살되었다면 朴正熙 대통령이 지시하였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터무니 없는 음모설을 믿는 이들은 인간 朴正熙를 잘 모른다. 그는 18년 집권기간에 政敵 암살을 지시한 적이 한번도 없다. 좌파정권 시절의 과거사 조사로 김대중 납치나 김형욱 실종은 그의 지시 없이 부하의 독단에 의하여 이뤄진 것임이 거의 확인되었다.

    李長春 대사(퇴임)는 이런 박정희를 평하여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둔 혁명가'라고 했다. 나는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단정하는 걸 반대하지만 어떤 시기에 그가 '독재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독재'엔 여러 종류가 있다. 700만의 人命을 희생시키고도 경제건설에 실패한 김일성-김성일 식 독재가 있고, 수천 만 명을 죽인 스탈린이나 모택동 식 독재, 경제활동이 가장 자유로운 싱가포르를 만든 李光耀 식 독재도 있다.

    세계사를 보면, 혁명적 변화엔 수많은 人命 희생이 따르는 게 보통인데 박정희 시절은 극히 예외였다. 朴正熙가 韓民族 2000년 역사상 최단기간 내에 最大의 변화를 몰고온 근대화 혁명을 주도하였음에도 자유와 人權을 최소한도로 제약하는 데 그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간됨과도 관련이 있다.

    朴正熙 傳記(全13권) 작업을 일단 끝낸 뒤 아들 志晩씨를 만났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신 분이셨어요. 나무 꽃 강아지를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아버지를 쓴 글이 없더군요.'
    내가 제대로 보지 못한 면을 지적한 것이다. 志晩씨의 충고가 이 분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朴正熙가 山林녹화에 성공한 것은 의무감에서라기보다는 숲과 나무를 사랑한 결과일 것이다. 그가 富國强兵에 성공한 것은 못 살고 힘없는 사람들을 사랑한 결과일 것이다.
    그의 日記엔 낙엽, 꽃, 나무, 구름 등에 대한 감상적 표현들이 아주 많다. 작은 것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관심이 느껴진다. 그의 일기는 권력자의 日記가 아니라 소학생의 日記처럼 순수하다. 너무 꾸밈이 없어 '대통령이란 분의 日記에 깊은 맛이 없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나이가 들다가 보니 절대적 권력을 잡고도 초등학생과 같은 순수한 정신을 유지하였다는 것이 대단하게 보인다. 순진함은 物情을 모를 때의 마음상태이고 순수한 것은 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다 겪고 나서도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 淸濁(청탁)을 다 들여 마시되 맑은 魂을 유지하는 자세이다.

    朴대통령이 1973년 7월3일 경주 불국사 復原 준공식에 참석하여 내린 지시문엔 이런 대목이 있다.
    <불국사 주차장의 1~2호 변소 뒤편에 벚꽃나무를 植栽(식재)하여 미화할 것. ‘화랑의 집’ 뒤편 남산에 自生하고 있는 꼬불꼬불하고 클 수 없는 잡목은 제거하고 적합한 樹種(수종)으로 대체할 것.>

    사람들은 “대통령이 화장실 주변에 나무 심는 것까지 간섭해야 하는가”라고 의아해 할 수 있다. 朴 대통령은 자동차로 지방을 다니면서 창밖을 살펴보다가 가끔 수행원에게 “저기 좋은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누가 베었어?”라고 묻기도 하였다. 한국의 山野를 자신의 캔버스라고 생각하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1975년 8월27일, 대통령은 이발을 하고 나서 기자실에 들렀는데, 한 기자가 “산림녹화의 비방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무도 사람과 같이 생각해서 대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산에 가보면 알겠지만, 나무도 사람이 만지는 것을 싫어해요. 등산로 근처의 나무들은 시들거나 축 늘어져 있는 데 반해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있는 나무들은 싱싱하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어요. 삼성의 李秉喆 씨가 龍仁공원을 만들기 전에 산림에 관계되는 대학 교수들을 만나 산림녹화 방법을 물어봤는데, 그때 어떤 교수가 아무런 수식사도 없이 ‘入山금지를 시키면 됩니다’라고 간단히 대답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병철씨는 ‘이 사람이 누굴 놀리나’ 하고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답니다. 뒤에 이병철씨가 일본에 가서 총독부 시절 산림에 관한 일을 한 관리를 만나보았는데, 그 사람도 같은 얘기를 했답니다.”

    1936년에 발간된 <대구사범 교우회지>제4호에 실린 5학년생 朴正熙(당시 19세)의 ‘大自然’이란 제목의 詩.

    <1. 정원에 피어난
    아름다운 장미꽃보다도
    황야의 한 구석에 수줍게 피어 있는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꽃이
    보다 기품 있고 아름답다.

    2. 아름답게 장식한 귀부인보다도
    명예의 노예가 된 영웅보다도
    태양을 등에 지고 大地를 일구는 농부가
    보다 고귀하고 아름답다.

    3. 하루를 지내더라도 저 태양처럼
    하룻밤을 살더라도 저 파도처럼
    느긋하게, 한가하게
    가는 날을 보내고 오는 날을 맞고 싶다. 이상>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하였다는 朴正熙가 가장 사랑한 것은 한국사람, 특히 가난하고 어렵고 약한 사람들이었다. 흔히 그를 평하여 ‘자신의 恨을 민족의 恨으로 여기고 한풀이를 하는 과정에서 나라를 발전시킨 사람이다’고 하는데, 민족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였다는 이야기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1951년 朴正熙가 9사단 참모장으로 근무할 때 북한군의 포격과 기습으로 하루 평균 서른 명꼴로 戰死者가 발생했다. 어느 날 두 명밖에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사단장에게 올린 작전참모가 “오늘은 좋은 날이니 회식을 시켜주십시오”라고 했다. 金鍾甲 사단장은 박정희를 불러 준비를 시켰더니 그는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한 명도 안 죽었다면 모르지만 두 명밖에 안 죽었다고 축하하자는 데는 반대합니다. 그 두 사람의 부모는 아마 대통령이 죽은 것보다도 더 슬플 겁니다.”
    1963년 그가 ‘국가와 혁명과 나’를 朴相吉씨에게 구술, 代筆시킬 때의 일이다. 어느 날 朴 의장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더니 “이것을 좀 넣어줄 수 없습니까”라고 어색하게 말하더라고 한다.
    <땀을 흘려라/돌아가는 기계소리를 노래로 듣고.../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고운 손으로는 살 수가 없다/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

    박노해 시인을 연상시키는 내용이다. 그는 이런 ‘서민적 반골정신’을 권력자가 되고나서도 죽을 때까지 유지한 사람이었다. 朴대통령은 1972년 연두 순시 때 노동청을 방문, 이런 말을 했다.

    “작년에 구로동 어느 수출 공단에 갔을 때입니다. 아주 정밀한 기계를 취급하는 職工(직공)인데, 그 작은 것을 들여다보고 작업하기 때문에 視力이 대단히 피로하기 쉽고 또 어두우면 아주 작업에 지장이 많고, 가보니 저쪽 구석에서 컴컴한 거기서 일하는데 불은 여기서 거꾸로 뒤로 비치는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데, 현장에 가서 지적을 했지만, 책임자가 다니다가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한테는 電氣를 하나 따로 더 달아 준다든지 조명을 더 밝게 해준다든지 이런 것은 간단한 착안입니다.”

    朴正熙는 울릉도를 방문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이던 1962년 10월 해군배로 울릉도를 찾았다. 그는 위험한 고비를 두 번 넘겼다. 도동 항구에서 작은 경비정을 타고 먼 바다에 떠 있는 本船으로 떠나려고 할 때 풍랑이 일었다. 경비정은 흔들리다가 전복될 뻔했다. 위기를 감지한 해군 참모총장이 “바다로 뛰어내리자”고 했다. 그때 풍랑은 더욱 거세어져 배를 해안에서 멀리 밀어내고 있었다. 전송 나왔던 島民(도민)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밧줄을 던져 겨우 경비정을 해안으로 끌어당길 수 있었다. 해안 가까이 갔을 때 朴 의장을 비롯한 乘船者(승선자)들이 한 사람씩 바다로 첨벙 첨벙 뛰어내렸다. 다행히 水深은 사람의 키를 넘지 않았다. 바닷물에 흠뻑 젖은 朴 의장 일행은 산을 넘어 건너편 학동 항구로 갔다. 그쪽 바다가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학동 항구에서 경비정을 타고 본선에 다다랐을 때 또다시 풍랑이 거세게 일었다. 朴 의장은 밧줄로 묶어 만든 줄사다리를 타고 本船에 오르는데 파도가 덮쳤다. 朴 의장은 비틀거렸고 하마터면 미친 듯이 출렁이는 바다 속으로 떨어질 뻔했다. 동행하였던 동아일보 李萬燮 기자(국회의장 역임)는 “만약 그 자리에서 박 의장의 신변에 어떤 일이 발생했더라면 이 나라의 운명도 그날의 파도만큼이나 심하게 바뀌었을 것”이라고 회고하였다. 朴 의장은 “이래서 국가 원수가 한 번도 울릉도를 방문한 적이 없는 모양이야”라고 했다.

    “가난은 나의 스승이고 은인이다.”

    작고 낮은 곳에 대한 그의 관심은 겸손하고 소박한 인간성의 반영이었다. 아들 志晩씨에게서 들은 이야기.
    '아버지는 가끔 술을 많이 드시고 내 침대로 쳐들어와서 주무시기도 했습니다. 過飮(과음)을 하셔서 내 침대에 토해놓으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다음날 아침에 나를 불러 '지만아, 어제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하시는 거에요.'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로 일하였던 분의 증언도 비슷하다. 朴대통령은 출입기자들과 자주 회식을 했다고 한다. 한번은 야당 총재에 대하여 좀 과격한 말을 했는데 그 다음 번에 회식을 할 때 대통령이 갑자기 기자들을 향하여 고개를 숙여 절을 하면서 '내가 그때는 과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한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號(호)가 없었다. 고령 朴씨 문중에서 호를 지어 올린 적이 있는데, 이 보고를 받은 그는 '박정희란 이름 석 자로 충분하다'고 거절하였다. 한 보좌관이 모 외국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주기로 했다는 보고를 하니 朴 대통령은 '박사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거절하였다. 朴 대통령은 18년간 재임했으나, 그 흔한 명예박사 학위가 하나도 없다.

    朴 대통령은 私信을 쓸 때는 절대로 '大統領 朴正熙'라고 하지 않았다. '朴正熙 拜'라고만 했다. 朴 대통령은 자신의 생일에 대해서도 무심했다. 그의 생일은 호적에 잘못 적혔다. 그날을 생일이라고 생각한 장관들이 축하 인사를 해도 그냥 받아주었다.

    호, 명예박사, 생일, 직함 등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던 朴 대통령은 권위적인 것들을 생래적으로 싫어했다. 그렇지만 그가 지도한 체제는 권위주의 체제로 불린다. 그는 특히 권력을 빙자한 횡포를 미워하였다. 그는 虛禮虛飾(허례허식)도 싫어하였다. 항상 淸貧한 마음자세를 죽을 때까지 유지한 분이었다. 그가 죽을 때 '허름한 시계를 차고,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 핀을 꽂고, 헤어진 혁대를 두르고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屍身을 검안한 군의관이 '꿈에도 각하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恩人이다>면서 <본인의 24시간은, 이 스승, 이 恩人과 관련 있는 일에서 떠날 수가 없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라고 썼다. 자신이 특권계층, 파벌적 계보, 君臨(군림)사회를 증오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김재규로부터 가슴에 최초의 한 발을 맞았을 때 대통령의 왼편에 앉아 있던 가수 심수봉은 자신 쪽으로 쓰러진 그를 부축하여 앉히면서 비명을 질렀다. 오른 편에 있던 신재순 여인이 일어나 심수봉 쪽으로 가서 대통령의 등에 손을 댔다. 뜨거운 게 물컹 잡혔다. 피였다. 한 차례 총성이 멎자 실내 화장실로 피했던 경호실장 車智澈이 문을 빼꼼히 열고 머리만 내밀고는 “각하, 괜찮습니까?”라고 물었다. 신재순이 보니 총 맞은 차지철의 오른 손목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난 괜찮아.”
    대통령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심수봉이 앉았던 방석이 대통령의 流血(유혈)로 적셔졌다. 申양은 손수건 같은 것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피가 솟고 있는 대통령의 등에 손을 꼭 댔다. 신재순의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박정희의 숨소리는 “크르렁, 크르렁” 하고 있었다.
    “각하, 정말 괜찮습니까?”
    申양이 물었다.
    “응, 나는 괜찮아`…….”
    申씨는, “나는 괜찮아”라는 生前 마지막 말의 뉘앙스가 ‘난 괜찮으니 너희들은 여기를 빨리 피하라’는 뜻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1950년 戰時 부산에서 맞선을 보던 날 陸英修는 朴正熙 소령의 뒷모습을 먼저 보았다고 한다.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해 보였어요. 사람은 얼굴로는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으로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에요.”
    궁정동 安家에서 朴正熙가 보여 준 최후의 모습이 바로 그의 뒷모습일 것이다. 가난과 亡國과 戰亂(전란)의 시대를 살면서 마음속 깊이 뭉쳐 두었던 恨의 덩어리를 뇌관으로 삼아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폭발시켰던 사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하여서는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면서 일체의 변명을 생략한 채, 총탄에 가슴을 뚫리고도 ‘체념한 듯 담담하게(신재순 증언)’ 최후를 맞은 이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 혁명가 朴正熙였다.


     

    [ 2012-09-05, 17:05 ]

     

     

     

     

    張俊河 추락사 담당 검사 徐燉洋(서돈양)씨, "외압도 의문도 없었다"

     

    "타살 가능성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의문을 갖고 그를 추궁했습니다. 하지만 타살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정치 선동꾼들과 선동적 언론이 합세, 1975년의 張俊河 추락사를 타살로 몰아, 박근혜 후보를 해치려는 캠페인이 또 다시 벌어지고 있으나 성공 가능성은 제로이다.
    그들이 새로 들고 나온 장준하 유골 사진은 그가 추락사하였다는 당시의 검사 판단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선동꾼들은 두개골의 함몰골절과 골반 골절이 이번에 처음 발견된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사건 당시 이미 확인된 것이다.

    선동꾼들 앞엔 넘을 수 없는 진실의 장벽이 두 겹 있다. 장준하와 함께 하산하다가 그가 추락하는 장면을 본 金龍煥 씨(교감 퇴직자), 현장 조사와 屍身 검안을 통하여 '추락사'라고 결론 내린 담당 검사가 있다.

    국가기관은 과거 세 차례 재조사를 하였지만 두 사람의 주장을 뒤엎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이번 선동꾼들은 5審(최초 조사 포함)을 해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셈이다. 1993년 5월호 月刊朝鮮에 실린 담당 검사 徐燉洋(서돈양) 변호사의 인터뷰 내용을 읽어보자.

    <여기까지 취재가 되자 당시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에서 이 사건을 담당한 徐燉洋 변호사의 증언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그러나 徐변호사는 계속 취재팀과 만나기를 거부했다. 완강한 그의 모습에서 '혹시 이 사람이 뭔가 비밀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서울방송이 "당시 실족사라고 주장했던 검찰과 경찰 및 목격자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몇 차례의 접촉 끝에 4월12일 오전 안계신다며 출입을 막는 사무원을 밀치고 어렵게 徐변호사를 만날 수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 앉아 기자를 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기자를 피하면 의혹만 증폭되는 것 아닙니까. 徐변호사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인상만 줄 뿐인데요.
    "증거도 없이 타살이라고 우기는 시대상황이라면 더 이상 말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지난번 서울방송에서 張俊河씨 일에 대해 묻길래 추락사로 기억한다고 말해줬지요. 그런데 전혀 내 말을 믿지 않더군요. 처음부터 타살이라고 전제하고 묻는데야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사고 당일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지요.
    "그날 내가 당직 검사였습니다. 저녁 때 잠시 서울 녹번동 집에 와 있는데 연락이 왔더군요. 경찰보고가 '張俊河씨가 등반 도중 사고를 당했고 추락사인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변사사건은 흔한 것이기 때문에 가지 않고 경찰 조사를 토대로 처리하면 그만이지만 숨진 사람이 張俊河씨라는 얘기를 듣고 현장에 갔습니다"
    -현장에 도착해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내가 아마 새벽 1시쯤 도착했을 겁니다. 포천 지역 의사회장이던 심구복씨(사망)와 함께 산에 갔지요. 이미 시신은 옆으로 치워져 있었고 피가 꽤 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심구복씨가 시신을 살펴보는 동안 플래시로 떨어졌다는 지점을 비췄더니 절벽에 비스듬히 나 있는 소나무가 아래쪽으로 휘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높이가 12m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 옆에는 기자들도 많이 와 있었는데 저마다 그 소나무를 가리키면서 '저 소나무를 잡으려다가 떨어졌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분명히 소나무가 휘어져 있었습니까.
    "적어도 내 느낌으로는 그랬습니다. 가족들도 그분이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몸이 쇠약해졌는데 아마 현기증이 일어서 추락한 모양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시신도 그렇게 깨끗하지 않았었다고 기억됩니다. 18년 전의 일이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시신을 살폈던 심구복씨가 후두부와 다리에 골절이 있다고 말한 기억도 나고요. 별로 의심할 만한 점이 없었습니다"
    -유일한 목격자인 金龍煥씨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때 金龍煥씨가 저에게 호되게 닦달을 당했습니다. 저는 타살 가능성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의문을 갖고 그를 추궁했습니다. 하지만 타살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사진도 수십 장 찍었는데 그것도 없어졌고 기록도 없으니 저도 답답합니다"
    -기록이 없는 이유가 뭡니까.
    "모든 기록은 보관 기관이 있는 겁니다. 아주 중요한 기록이야 정부기록보존소로 가지만 단순 변사 사건기록이 정부기록보존소로 갈 리도 없고…. 내가 검사 생활하는 동안 변사사건만 1천여 건을 넘게 했어요. 그 사건도 그중의 하나일 뿐입니다ꡓ
    -왜 날이 밝은 뒤에 현장검증을 하지 않았습니까.
    "뭔가 의혹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의문날 만한 것이 없었어요. 저는 최선을 다했다고 지금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혹시 외압은 없었습니까.
    "외압이 있을 일이 뭐가 있습니까. 텔레비전을 보니까 단 사흘만에 허겁지겁 종결했다고 말하던데 아무런 물증도 없이 뭔가 흑막이 있는 듯한 암시적인 표현으로 마치 검찰이 숱한 궁금증을 억지로 덮은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사건은 경찰의 1차 조사 서류에다가 제가 金龍煥씨를 조사한 기록 등을 첨부해서 그걸로 끝난 겁니다"
    -당시 張俊河씨 변사 사건에 대한 의문 제기로 동아일보 기자가 구속되고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사흘만에 단순 변사라고 굳이 발표까지 한 것은 오히려 의혹을 더 깊게 해 주는데요.
    "그건 검찰의 사고조사와 다른 내용을 보도했기 때문이고 또 그것이 마치 의문사인 것처럼 재야에서 증폭시킬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겠지요"
    -그럼 정말 의혹은 없는 겁니까. 당시 법무관이라는 사람의 증언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사람 뭐하는 사람입니까. 지금도 법무관입니까. 저는 당시 최선을 다해 조사했다고 생각합니다. 검사들은 단순 변사체의 경우 대부분 현장에 잘 가지 않고 경찰조사만으로 처리하는데 저는 목격자를 마치 피의자 다루듯 꼬치꼬치 조사했습니다. 열심히 조사를 한 것도 의문이라고 한다면, 아마 일반적인 변사사건처럼 경찰조서만으로 처리했을 때는 또 그렇게 했다고 의문을 제기할 겁니다">

    서돈양 변호사의 증언을 요약하면 이렇다.

    *조사에 외압이 없었다.
    *통상적 변사사건보다 더 자세하게 조사하였다. 특히 목격자를 필요 이상으로 세게 조사하였다.
    *가족들도 수사결과를 받아들였다. 부검 요구도 없었다.
    *현장 조사와 시신 검안을 통해서도 추락사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후두부 함몰골절과 다리 골절이 있었다.

    徐 변호사는 당시 18년 전의 사건을 기억에만 의존하여 이야기하였는데 이번에 공개된 유골 사진상의 골절 부위와 일치하였다. 선동꾼들은 얌전한 목격자 김용환 씨만 추궁하는데, '추락사'라고 결론을 내린 건 국가기관으로서의 서돈양 검사이다.

    [ 2012-09-15, 2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