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아름답게 빛나는 시절이 짧다는 것이다.
많은 꽃나무들이 그렇듯 사람도 아름다운 시절은 짧다.
빛나는 시절은 짧고 그 시절을 추억으로 지니며 사는 날들은 길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날들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고 초조해하고 조바심을 낸다.
꽃이 피어 있는 동안은 꽃 주위에 사람이 많고 향기를 좇아 발길이 모여들다가
바람과 꽃숭어리를 툭툭 떨구고 나면 조금씩 찾아오는 발길이 줄어들고,
꽃 진자리에 비슷비슷한 잎들이 돋아날 때쯤이면 찾는 이가 없게 된다.
가까이 다가와서 바라보지 않으면 저 나무가 살구인지 산수유인지 구분이 안 되고
목련인지 함박꽃나무인지 분간이 안간다....
그러나 꽃나무에게 꽃피던 짧은 날들만 소중하고
꽃을 잃고 지내야 하는 그 많은 날들이 의미 없는 것이라면
그건 너무 가혹하다. 나무에게 있어서 꽃피던 날들만이 아니라
잎이 무성하던 날들도 열매를 맺으려 고통스럽던 날들도
그 열매를 지키기 위해 견뎌온 날들도 다 소중한 것이다.
진정으로 나무를 사랑한다면 우선 나무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어야 한다.
꽃이 아니라 설령 잎마저 지고 열매마저 다 잃고 난 뒤에
빈 가지만으로 겨울바람을 맞고 서 있어도,
그리하여 정말 그 나무가 무슨 나무였는지 알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나무는 나무 그 자체로서 소중한 것이다. 그렇게 여길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게 소중하게 보듬을 줄 아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한용운 시인은 '사랑하는 까닭'이란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루어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라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태도는 이와 같아야 한다.
그것이 꽃이든 사람이든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홍안,
즉 붉고 고운 얼굴을 지녔을 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늙고 시들어 머리가 허옇게 되었을 때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그리워(기루어)하는 것은 좋고 기쁘고
웃음이 흘러나오는 때만이 아니라
눈물나고 힘들고 어려울 때도 그리워할 줄 알아야 진짜 사랑이라는 것이다.
건강하고 힘차고 발랄하게 살아있을 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죽게 되었을 때도 죽고 난 뒤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게
그게 진정한 사랑이라서 내가 당신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름답고 웃음 짓고 건강한 모습일 때는 누구나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늙고 병들고 눈물나고 시들고 죽어 갈 때는 누구나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
당신은 내가 그렇게 되었을 때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는 시이다.
사람이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다.
인성人性과 물성 物性은 본질적으로 같은 데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꽃이 지고 난 뒤에도 푸른 하늘을 향해 싱싱한 잎을 자랑스러이 흔들며
꽃을 잃은 다른 나무들 곁으로 팔을 뻗어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을 보라.
우리가 그 그늘에 모여 뜨거운 계절을 피해 가고 있지 않은가.
화려했던 날들에 연연하지 않고 함께 모여 동산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을 보라.
이름에 얽매이지 않고 당당히서서 열매를 키우는 나무들을 보라.
그 나무들이 있어 이 땅이 푸르지 않은가.
- 도종환 산문집 모과 p 14-18 / 샘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