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가 되도록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기분이다.
이 길이 바로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나는 남들과는 아주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게 된다.
이렇게 살아서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영 자신이 없는 것같다.
해가 바뀌고 5개월이 지나고, 반 바퀴 회전을 위해서도 겨우 한 달이 남았을 뿐이다. 한 달 후에는 한해를 기준으로 해서 이제는 출발선을 향해 되돌아옴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해가 바뀌고 줄기차게 역사서에 매달려 독서와 여행을 이어가다가 대략이나마 마무리를 하고 집필로 들어가려는 순간 다시금 한국전쟁사에 매달리게 되었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하여 두 권의 장편소설을 썼으나, 웬지 미진한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군 체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 전쟁을 어떤 학자보다 더 깊이 있게 연구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나는 6.25에 대해 상상력을 동원하여 졸작 <두 아내>(상하)와 <바람의 여인>을 출간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나는 우연히도 한 20년 전에 출간된 바 있는 <한국전쟁사>(전7권, 행림출판사 간)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 방대한 책을 정독하기 시작하였다.
이 책의 저자들은 그냥 역사학자나 언론인이 아니고, 주로 육사에 근무하는 군사전문가들이었다. 그래서 사실 나같은 전쟁 아마츄어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적지 않았다.
이 책은 너무 전문서라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주야로 독파하여 이제 겨우 3권까지 나갔다.
나의 관심사는 이 거대하고 처참한 살인의 현장을 어떻게 소설적으로 재구성하는 가에 몰려 있음은 물론이다.
이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은 놀라움의 현장이었다. 나는 6.25에 대해 두 편의 장편소설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6살 때 전쟁이 터졌으니 나는 6.25를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라고 생각한다.
6.25는 김일성과 맥아더의 싸움이었다. 맥아더는 이 전쟁의 영웅이지만 그는 결정적인 실수도 한 사람이다.
미 10군단(미 제 1기병사단, 미 7 보병사단, 한국군 독립 17연대)을 별도로 편성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희대의 전쟁영웅이 맥아더지만, 그 십군단을 빼내서
원산상륙작전을 명령한 사람이 맥아더였다.
그러나 근 8만명의 10군단을 좁아터지고 조수의 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항으로 빼내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작전이었고, 10군단 중 미 제7사단은 인천항의 혼란을 피해 부산으로 빼내어 수송선으로 원산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거의 완전히 파괴된 서울 부산간 도로에서 북진하는 8군과 한국군과 부딪쳐 오도가도 못하는 혼란을 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산상륙작전 준비 우선 명령에 따라, 인천항은 오직 미10군단 병사들과 수많은 중장비를 빼내기와 승선, 그리고 운반에만 전력하였다.
그래서 벌써 38선 이북으로 전진한 한국군과 미군들을 위한 병참선이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인천항에 도무지 짐을 부려놓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워커 8군 사령관은 비행기로 병참을 공수하도록 했다. 이 병참선의 혼란은 서부전선이 동부전선보다 남으로 훨씬 내려간 원인의 장본인이다.
천신만고 끝에 원산항에 도착해보니 항구 앞 바다에 깔려 있는 기뢰 때문에 열흘을 바다에 뜬 채로 허송해야만 했고, 그나마 한국군 일군단(수도사단과 3사단)에 의해 벌써 열흘 전에 탈환된 후였다.
그는 한국군을 너무나 깔보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미군만이 강군이고, 배후 항만 상륙작전만이 진정한 전략이 아니다.
게다가 맥아더는, 북진 유엔군을 양분하여, 서부전선의 8군과 동부전선의 10군단의 명령체계를 완전히 이분하였다. 그 이유는 한 반도의 지형상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으로 이어진 남북종단 고산준령으로 인해 8군 사령관인 워커 장군이 동부전선을 자신의 휘하 부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사학자들은, 맥아더가 자신의 신임이 두터운 미10군단 사령관 아몬드 소장에게 독립 지휘권을 주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맥아더의 판단은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악전에 능숙한 중공군에게 낭림 태백산맥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실로 이 두 전선의 접속선으로서 필연적으로 공백이 생기기 마련인 낭림산맥 중 장진호루트로로 대규모 침략공간이 중공군에게 탐지되었던 것이다.
이루트가 격파되었을 때, 8군도 10군단도 어쩌며 자신의 작전지역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오늘 현충일을 맞아 공주집으로 내려온 차에 대전 현충원을 방문하였다. 6.25의 아군 지휘관들이 대부분 동작동 현충원에 묻혀 있지만, 당시 고급 지휘관들 중에는 아직 생존한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대전 현충원에 묻힌 사람도 많은 것같다.
예를 들어서 김용배 장군은 중장으로 대전 현충원에 묻혀 있었는데, 그는 전쟁시 혁혁한 대대장(중령)이었다. 그는 그러니까 대령도 되지 못했기에 연대장도 아닌 계급이었다. 그의 묘비석을 발견하고 방금 읽은 6.25 전사가 생각나 나는 잠시 묵념을 올렸다.
6.25의 또다른 영웅인 이형근 대장의 묘비를 발견하고나는 묵념을 올렸다. 대한민국 육군 군번 일번으로, 전쟁 중 하반기에 참모총장을 맡아 서울 수복의 공을 세운 분이다. 나의 졸작 <아테내 가는 배>를 영역한 이보경 교수가 이분의 따님이다.
이 소설이 출간된 것은 1985년이었다. 이 작품으로 무슨 상을 수상하여 나는 조금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 소설이 영문으로 번역된 것은 한 5년 전이었는데, 원고지 380 매의 소설이라 차일피일 하다가 완독을 하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영문판을 완독한 바가 있다.
묘역을 둘러보고,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영구화 하는데 나는 이들처럼 국가에 결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그 방법과 길을 찾은 사람들이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일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것의 방법에는 오직 예술작품을 남기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속좁은 한 사내의 옹졸한 생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런 연고자도 없었으나 나는 택시를 대절하여 공주에서 달려와 여기 대전 현충원 언덕에 누워 까맣게 내려다보이는 수많은 묘비들을 보면서 오만가지 생각에 잠겼다.
여기 묘들은 장군묘역과 국가 유공자 묘역의 묘들 이외에는, 전부 순직 전사한 사람들이다. 주종을 이루는 장교묘역과 사병묘역은 전부 전사자들이다.
이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이들은 여기 묘역에 묻혀 자신의 역사 속에서의 존재가치를 증언하는 특권을 누릴 것이다.
국립묘지인 현충원은 국가를 위해 의롭게 죽어간 사람들이 묘역이다. 그러니 자연 군인이 주종을 이룰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현충원은 다른 말로 말해 군인들의 공동묘지인 셈이다.
그러니 나같은 개인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깊은 생각에 뻐져드는 하루였다.
나는 개인과 국가, 그리고 죽음과 영원한 삶의 가치를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 마침 귀국한 아들놈을 동반하였다. 녀석은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 중인데, 삶의 가치를 제대로 깨닫고 있는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원대한 포부와 깨달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 길고 어려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로 돌아와 식구들이 모여, 생맥주를 한잔씩 나누었다. 갈증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알 수 없이 깊은 생각의 심연을 강요하는 내 시골집의 하루였다.
이 길이 바로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나는 남들과는 아주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게 된다.
이렇게 살아서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영 자신이 없는 것같다.
해가 바뀌고 5개월이 지나고, 반 바퀴 회전을 위해서도 겨우 한 달이 남았을 뿐이다. 한 달 후에는 한해를 기준으로 해서 이제는 출발선을 향해 되돌아옴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해가 바뀌고 줄기차게 역사서에 매달려 독서와 여행을 이어가다가 대략이나마 마무리를 하고 집필로 들어가려는 순간 다시금 한국전쟁사에 매달리게 되었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하여 두 권의 장편소설을 썼으나, 웬지 미진한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군 체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 전쟁을 어떤 학자보다 더 깊이 있게 연구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나는 6.25에 대해 상상력을 동원하여 졸작 <두 아내>(상하)와 <바람의 여인>을 출간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나는 우연히도 한 20년 전에 출간된 바 있는 <한국전쟁사>(전7권, 행림출판사 간)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 방대한 책을 정독하기 시작하였다.
이 책의 저자들은 그냥 역사학자나 언론인이 아니고, 주로 육사에 근무하는 군사전문가들이었다. 그래서 사실 나같은 전쟁 아마츄어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적지 않았다.
이 책은 너무 전문서라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주야로 독파하여 이제 겨우 3권까지 나갔다.
나의 관심사는 이 거대하고 처참한 살인의 현장을 어떻게 소설적으로 재구성하는 가에 몰려 있음은 물론이다.
이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은 놀라움의 현장이었다. 나는 6.25에 대해 두 편의 장편소설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6살 때 전쟁이 터졌으니 나는 6.25를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라고 생각한다.
6.25는 김일성과 맥아더의 싸움이었다. 맥아더는 이 전쟁의 영웅이지만 그는 결정적인 실수도 한 사람이다.
미 10군단(미 제 1기병사단, 미 7 보병사단, 한국군 독립 17연대)을 별도로 편성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희대의 전쟁영웅이 맥아더지만, 그 십군단을 빼내서
원산상륙작전을 명령한 사람이 맥아더였다.
그러나 근 8만명의 10군단을 좁아터지고 조수의 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항으로 빼내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작전이었고, 10군단 중 미 제7사단은 인천항의 혼란을 피해 부산으로 빼내어 수송선으로 원산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거의 완전히 파괴된 서울 부산간 도로에서 북진하는 8군과 한국군과 부딪쳐 오도가도 못하는 혼란을 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산상륙작전 준비 우선 명령에 따라, 인천항은 오직 미10군단 병사들과 수많은 중장비를 빼내기와 승선, 그리고 운반에만 전력하였다.
그래서 벌써 38선 이북으로 전진한 한국군과 미군들을 위한 병참선이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인천항에 도무지 짐을 부려놓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워커 8군 사령관은 비행기로 병참을 공수하도록 했다. 이 병참선의 혼란은 서부전선이 동부전선보다 남으로 훨씬 내려간 원인의 장본인이다.
천신만고 끝에 원산항에 도착해보니 항구 앞 바다에 깔려 있는 기뢰 때문에 열흘을 바다에 뜬 채로 허송해야만 했고, 그나마 한국군 일군단(수도사단과 3사단)에 의해 벌써 열흘 전에 탈환된 후였다.
그는 한국군을 너무나 깔보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미군만이 강군이고, 배후 항만 상륙작전만이 진정한 전략이 아니다.
게다가 맥아더는, 북진 유엔군을 양분하여, 서부전선의 8군과 동부전선의 10군단의 명령체계를 완전히 이분하였다. 그 이유는 한 반도의 지형상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으로 이어진 남북종단 고산준령으로 인해 8군 사령관인 워커 장군이 동부전선을 자신의 휘하 부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사학자들은, 맥아더가 자신의 신임이 두터운 미10군단 사령관 아몬드 소장에게 독립 지휘권을 주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맥아더의 판단은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악전에 능숙한 중공군에게 낭림 태백산맥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실로 이 두 전선의 접속선으로서 필연적으로 공백이 생기기 마련인 낭림산맥 중 장진호루트로로 대규모 침략공간이 중공군에게 탐지되었던 것이다.
이루트가 격파되었을 때, 8군도 10군단도 어쩌며 자신의 작전지역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오늘 현충일을 맞아 공주집으로 내려온 차에 대전 현충원을 방문하였다. 6.25의 아군 지휘관들이 대부분 동작동 현충원에 묻혀 있지만, 당시 고급 지휘관들 중에는 아직 생존한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대전 현충원에 묻힌 사람도 많은 것같다.
예를 들어서 김용배 장군은 중장으로 대전 현충원에 묻혀 있었는데, 그는 전쟁시 혁혁한 대대장(중령)이었다. 그는 그러니까 대령도 되지 못했기에 연대장도 아닌 계급이었다. 그의 묘비석을 발견하고 방금 읽은 6.25 전사가 생각나 나는 잠시 묵념을 올렸다.
6.25의 또다른 영웅인 이형근 대장의 묘비를 발견하고나는 묵념을 올렸다. 대한민국 육군 군번 일번으로, 전쟁 중 하반기에 참모총장을 맡아 서울 수복의 공을 세운 분이다. 나의 졸작 <아테내 가는 배>를 영역한 이보경 교수가 이분의 따님이다.
이 소설이 출간된 것은 1985년이었다. 이 작품으로 무슨 상을 수상하여 나는 조금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 소설이 영문으로 번역된 것은 한 5년 전이었는데, 원고지 380 매의 소설이라 차일피일 하다가 완독을 하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영문판을 완독한 바가 있다.
묘역을 둘러보고,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영구화 하는데 나는 이들처럼 국가에 결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그 방법과 길을 찾은 사람들이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일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것의 방법에는 오직 예술작품을 남기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속좁은 한 사내의 옹졸한 생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런 연고자도 없었으나 나는 택시를 대절하여 공주에서 달려와 여기 대전 현충원 언덕에 누워 까맣게 내려다보이는 수많은 묘비들을 보면서 오만가지 생각에 잠겼다.
여기 묘들은 장군묘역과 국가 유공자 묘역의 묘들 이외에는, 전부 순직 전사한 사람들이다. 주종을 이루는 장교묘역과 사병묘역은 전부 전사자들이다.
이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이들은 여기 묘역에 묻혀 자신의 역사 속에서의 존재가치를 증언하는 특권을 누릴 것이다.
국립묘지인 현충원은 국가를 위해 의롭게 죽어간 사람들이 묘역이다. 그러니 자연 군인이 주종을 이룰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현충원은 다른 말로 말해 군인들의 공동묘지인 셈이다.
그러니 나같은 개인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깊은 생각에 뻐져드는 하루였다.
나는 개인과 국가, 그리고 죽음과 영원한 삶의 가치를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 마침 귀국한 아들놈을 동반하였다. 녀석은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 중인데, 삶의 가치를 제대로 깨닫고 있는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원대한 포부와 깨달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 길고 어려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로 돌아와 식구들이 모여, 생맥주를 한잔씩 나누었다. 갈증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알 수 없이 깊은 생각의 심연을 강요하는 내 시골집의 하루였다.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재경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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