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김진홍 목사의 아침묵상

鶴山 徐 仁 2006. 2. 20. 23:24
 
   
   
  서정후님께 드립니다.
     
 
 
새로운 출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신약성경 고린도후서 5장 17절)
 
“탈피(脫皮)하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는 말이 있다. 뱀은 주기적으로 자신의 껍질을 스스로 벗는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든지 껍질을 벗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약 먹은 쥐를 먹는다든지, 날카로운 쇠붙이에 피부가 상한다든지 하여 껍질을 벗지 못하는 경우가 뱀에게 생긴다. 그럴 경우 뱀은 자신의 껍질에 갇혀 죽게 된다.

사람의 경우도 뱀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사람의 경우는 뱀과는 다르다. 사람의 경우는 뱀처럼 신체적으로 껍질을 벗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껍질을 벗는 것이다.
낡은 생각, 낡은 습관, 낡은 관행, 고정관념 등이 벗어야 할 것들에 속한다. 개인에게도 공동체에도 이런 낡은 것들을 벗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물론 옛 것을 벗고 새로운 것으로 새출발함에는 고통이 따르고 희생이 따른다. 그러나 그런 고통과 희생은 축복으로 가는 길잡이가 된다. 마치 새 아기가 태어나려면 출산의 고통이 뒤따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진리가 위대한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결단, 새로운 출발을 이끌어 준다는 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지는 거듭남(born again)이다.

지나간 세월의 허물과 아픔, 실수와 과오를 십자가 밑에 다 묻어 버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출발하는 것이다. 개인도 공동체도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서정후님께 드립니다.
     
 
 
장준하의 삶과 사상 (26)

 
  알고 보니 족청의 이범석은 경교장의 김구 주석 편이 아니라 이승만의 편이었다. 이승만의 명을 받아 반공운동을 표방하면서도 좌익세력들과도 거리낌 없이 타협하곤 하는 것이었다. 민족과 민주를 위한 순수한 정신운동을 목표로 족청에 몸담았던 장준하는 이미 다른 정당 단체들과 다를 바 없어 더 머무를 수 없었다. 이에 그는 단복을 벗어 단정하게 개어 단모와 함께 책상 위에 놓고는 말없이 나오고 말았다. 후에 이범석은 이승만의 사람이 되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설칠 때에 혹시 만나게 되면 그냥 목례만으로 지나치는 사이가 되었다.

1948년 장준하는 일본신학교에서 못다 한 것을 계속하기 위하여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하여 반년만에 졸업하였다. 47년, 족청에서 나온 이후로 장준하는 문화운동에 주력하면서 정치계에는 멀리하였다. 48년 정부수립과정에서도 그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던 ‘49년  그가 정성을 다하여 보좌하였던 김구 선생이 암살당한 후로는 임정 세력은 완전히 국내 정치에서 몰락하였다. 김구 선생께서 심혈을 기울였던 남북협상도 종말을 고하고 임정 세력은 뿔뿔이 자기 살길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김구 선생이 서거하게 된지 꼭 일년만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일어났으나 국군은 일본군 출신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에 광복군 출신들은 참여하지를 못하였다. 그는 속절없이 피난민들 속에 떠밀리다시피 하여 부산까지 가게 되어 그곳에서 그 유명한 『사상계』를 창간케 되었다.
 
지금까지 27회에 이르도록 장준하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내가 장준하 선생에 대하여 다소 장황하게 쓴 것은 그의  삶과 사상이 뉴라이트 운동에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뉴라이트 운동의 사상적 배경으로 3가지 흐름이 있다.
바로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주의, 공동체주의이다. 그리고 뉴라이트운동이 지향하는 민족주의의 흐름에는 다섯 분을  본보기로 삼고 있다.
 
1) 다산 정약용 선생  2) 도산 안창호 선생  3) 백범 김구 선생  4) 유일한 회장  5) 장준하 선생
 
모름지기 이 땅의 젊은이들은 이런 소중한 선배들의 삶과 사상에서 배우고 익혀 자신의 인격과 실력을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서정후님께 드립니다.
     
 
 
장준하의 삶과 사상 (25)

 
  아내의 뒤를 이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까지 38선을 넘어 월남하여 와서 온 가족이 서울에 모이게 된 것은 좋았으나  많은 가족이 서울 바닥에서 살아 갈 생계가 막연하였다. 1946년 말까지 장준하는 김구 선생의 비서로 있었으나 이미 임시정부는 빛이 바래지게 되고 김구 선생은 임정의 주석직에서 한독당이란 한 당파의 대표에 머물게 되고 말았다.

정국은 테러와 암살이 연이어 일어나 45년 12월에 송진우가 암살되고, 47년 7월에는 여운형이, 47년 12월에는 장덕수가 암살  되었다. 그리하여 정치계는 갈수록 혼미하여져 가게 되고 백성들의 정치인들에 대한 기대는 날로 무너지게 되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장준하의 고민은 날로 깊어만 갔다. 이때에 1946년 6월까지 중국에 남아있었던 이범석이 이승만 박사의 부름을 받아 귀국하게 되었다. 그는 귀국 후 국내의 얽히고 섥힌 혼란상을 일신해 보겠다는 이상을 품고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였다.
족청으로 잘 알려진 이 조직은 칡넝쿨처럼 얽히고 설킨 당시의 정치 현실을 일신하겠노라는 포부를 안고 시작되었다. 이범석은 장준하의 손을 잡고 간곡히 부탁하며 다음 같은 대화가 둘 사이에 오갔다.
 
“장 동지 서안(서안)에서의 일을 생각하고 나를 도와주시오”
“하지만 저는 경교장에서 김구주석을 돕는 일에 매인 몸입니다.”
“그런 일이라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지 않소. 그러나 이 일은 장 동지같은 일꾼이 없이는 안되는 일이요. 김구 선생께 내가 말씀 드리겠소. 선생님께서도 쾌히 허락하실 거요.”
  
철기 이범석 장군의 부탁을 들은 뒤로 장준하는 자신의 거취 문제로 고민하다가 김구 선생께 의논드렸다. 선생께서는 기꺼이 다음같이 말해주었다.
 
“철기가 장 목사를 탐내는 거야 당연하지. 본디 중경에서도 장군은 정치판이 싫다고 서안으로 철기를 따라가지 않았나. 가서 열심히 도와주시오.”
 
이에 경교장을 나온 장준하는 그가 30세 되던 해인 1947년에 민족청년단의 교무처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이 자리 또한 오래가지 못하였다. 족청에 발을 들여 놓고 보니 이범석은 옛날의 이범석이 아니었다. 그의 언행에서 계략과 술수가 비쳐지는 것이었다. 민족 재건을 위한 순수정예를 추구하는 장준하와 세력 확대에 열중하는 이범석 사이에 의견 대립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장준하의 굽히지 않는 고집에 이범석이 성가셔 하게 되었다.
 
     
 
   
   
  서정후님께 드립니다.
     
 
 
장준하의 삶과 사상 (24)

 
  김구선생의 사회로 시작된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김구 선생의 국내 정세에 대한 간단한 언급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국내 사정이 유동적입니다. 미군의 대 임정 태도가 썩 좋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런 요지의 발언이 있고 난 후 선전부장 엄항섭이 임정 제1진이 귀국한 이후로 겪게 된 여러 가지 사정을 설명하는 중에 난립을 이루고 있는 각 정당의 동태, 미군정의 견제를 받고 있는 임시정부의 고충 등을 보고하였다. 이어서 이승만 박사가 발언을 하면서 좌파와 공산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상세히 설명하고는 그들에 대한 엄격한 경고의 발언을 하였다. 좌중에는 공산주의자들도 있었던 때였기에 그들이 몹시 언짢아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이어서 동석한 각 계파들 간에 서로에 대한 비난과 규탄이 뒤를 잇게 되어 국무회의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로 마치게 되고 말았다.
이런 분위기에 너무나 실망하였던 장준하는 『돌베개』에서 그 때의 심정을 다음 같이 쓰고 있다.
 
“환국한 임정 각료들 안에서까지 일치구국의 염이 저렇듯 허사가 된다면 이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이 난국에 온 백성들의 기대가 임정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단 한마디가 없는 국무회의가 된 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마당에 임시정부의 여러 요인들은 제 각기 자기 파벌의 세 확장과 입지를 닦는 일에만 열중하였기에 그런 사실이 해방 이후 한반도 역사의 굴절과 아픔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1945년은 넘어가게 되고 해가 바뀌게 되면서 장준하는 북한에서 월남한 가족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17세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결혼 하자마자 남편을 학병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의 아내 김희숙은 이제 19세가 되어 남편과 재회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