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스크랩] 명화 모음/ 성화 모음 4

鶴山 徐 仁 2006. 1. 8. 02:15
만테냐(르네상스) | 명화모음
2005.06.28


갈보리 언덕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목자들의 경배, 1451-3

 


삼손과 데릴라, 1500

 


성 세바스찬, 1480

 


동굴의 성모자

 


유디트와 홀리페르네스

 


죽은 그리스도, 1490

 


마르스와 비너스, 1495- 97

 


천사가있는 성모자

 


석판위에 누워있는 남자

 

만테냐 [Mantegna, Andrea, 1431?~1506.9.13]


이탈리아의 파도바파(派) 화가이다. 파도바 근처의 이조라 디 칼투로 출생이다. 처음에 스콰르초네 밑에서 공부하고, 스승이 수집한 고대미술품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으나, 당시 파도바에서 작품활동을 하던 조각가 도나텔로의 영향을 받아, 견고한 조각적 성격의 작품을 그렸다. 최초의 기념작, 스콰르초네의 제자들과 함께 그린 파도바의 에레미타니성당 오베타리예배당의 벽화(세 화면만 현존)가 그러한 사실을 잘 나타내준다. 그 후 당시 파도바에 화실을 두고 있던 베네치아파의 시조 야코포 벨리니의 사위가 됨으로써 베네치아파와의 관계도 깊어졌다. 그는 베네치아파의 채부법(彩賦法)을 섭취하여 당초의 강한 조각적 성격을 누그러뜨리면서도, 엄격한 북방적 사실주의를 견지하여 북이탈리아 화파(畵派)의 르네상스양식을 수립하였다. 1456년, 만토바의 영주 루도비코 곤자가의 초빙을 받아 그의 궁정화가가 되었으며, 토스카나나 로마 등에 잠깐 여행한 것 이외는 평생을 만토바에서 활약하였다. 만토바에서의 최대업적은 파라초두카레의 카메라 텔리 스포지에서의 곤자가 일가의 생활을 주제로 한 벽화군(壁畵群:1474 완성)이다. 탁월한 공상력과 엄격한 사실(寫實)이 결합된 이 벽화는 단축법에 의한 원근법적 효과와 고전취미가 넘쳐 흐르며, 천장화양식에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였다. 후일 코레조나 베네치아 화가들이 그 영향을 받았다. 그 밖의 대표작으로 밀라노의 《죽은 그리스도》, 런던의 《게세마네의 기도》, 파리의 《승리의 마돈나》 등이 있다. 그 당시 발명된 지 얼마 안 되는 동판화에도 걸작을 남겨, 독일의 뒤러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라파엘로(르네상스) | 명화모음
2005.06.28


자화상

 


바다의 요정 갈라테야, 1511

 


그리스도의 매장, 1507

 


동물의 창조, 1518-9

 


동방박사의 경배

 


삼미신, 1505

 


미가엘과 용

 


카니지아의 성가족, 1507

 


비파의 성모자, 1507

 


성모자와 어린양, 1507

 


성전 결례식

 


솔로몬의 재판, 바티칸, 1518-9

 


십자가의 고난

 


아담과 이브

 


천사, 1500

 


포리뇨의 성모, 1512

 


젊은 여인의 초상, 1519

 


교황 레오10세, 1518

 


불타는 보르고, 1514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


이탈리아 화가, 건축가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작가 의 한 사람으로 조숙한 천재였으며, 우르비노 지방화가에서 바티칸 교황청 궁정화가까지 최고의 사회적 영예와 세속적 성공을 누린 예술가이다. 1483년 우르비노의 화가 지오바니 산지오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페루지아의 화가 페루지노의 문하에서 그림 공부를 했었다. 초기의 작품은 페루지노의 것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으나 <기사의 꿈><삼 미신>에서 <마리아의 결혼>에로의 발전은 서정적인 스승의 예술을 점차 순화하고 형식미로 통일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504년 예술의 중심지인 피렌체로 옮겨 1508년까지 4년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암법을 위시해서 바르톨로메오, 미켈란젤로의 조형법도 단시일에 익혔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그란듀카의 성모=대공의 성모>등 일련의 우아한 성모 그림과 성가족그림, 초상화 <도니부처>, 그리고 미켈란젤 로의 영향을 나타내는 극적인 <그리스도의 매장>등이 있다. 그의 화실에서 미켈란젤로는 화가로서 갖추어야할 일반적인 교양과 기법을 특히 프레스코벽화의 확고한 기초를 쌓았다. 이때부터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기 시작한 미켈란젤로는 그 당시 피렌체풍의 세련된 미술을 거부하고 기념비적이고 강한 표현을 즐겨하게 된다. 1508년 말에 고향 친구인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초청되어 포마로 옮긴 라파엘로 는 1520년 4월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12년간을 바티칸 궁정화가로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 아래에서 일하고 시대의 총아로 그의 작업의 정점에 이르렀다. 바티칸궁 <서명실>의 벽화 중 특히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상징적 회화라고 할 수 있는 <아테네 학당>과 <성체논의> 등의 벽화 제작은 그의 총체적인 재능이 그리이스 정신과 그리스도교 정신의 총합이라는 교회의 세계주의적인 의도와 혼하연 일체가 되어 르네상스 인문주의 예술의 정화로 되어 있다. 특히 <아테네 학당>은 장대한 건축공간과 다수의 인물군상의 완벽한 통일과 조화를 실현하여 고전양식의 규범이 된다. 건축에도 손을 대 1514년 브라만테의 사후 뒤를 이어 레오 10세에 의해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주임에 임명되어 그 조영사업을 지도하였다. 또한 다음해에는 고대 유물 감독관에 임명되고 고대 유품들을 조사하였고, 유적지도의 제작도 시도했으나 미완에 그쳤다. 그의 설계로 알려진 건축작품에는 앞서 말한 키지가의 교회 외에 비드니카파렐리의 저택, 로마 근교의 빌라마다마 등이 있다. 그 작풍은 프란체스코 마우라나와 브라만테를 계승한 우아하고 엄격한 고전주의라 하지만 오늘날 그 작품의 대부분이 대폭적 으로 수정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평가는 어렵다. 라파엘로는 살아 있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르네상스) | 명화모음
2005.06.28


그리스도의 세례, 1473

 


동방박사의 경배, 1481-82

 


모나리자, 1505

 


비례연구, 1487

 


리타의 성모자, 1490-1

 


수태고지, 1474

 


암굴의 성모, 1508

 


최후의 만찬, 1497

 


자화상

 


바커스 신

 


말의 연구, 1483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vinci)


레오나르도다빈치는 르네상스 전성기에 1452년 4월 15일 사생아로 태어났다. 레오나르는 Anchiano의 유명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Vinci에서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레오나르도의 가족은 13세기 이래로 여기서 줄곧 살아왔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났을때,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Vinci, Ser Piero는 공증인이자 지주였다. 같은 해에 그의 아버지가 첫번째 부인을 맞이할때 태어났다. 레오나르도의 어머니는 농부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결혼을 하지않았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레오나르도의 어머니는 Catarina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날 그녀에 관한건 단지 이름만이 알려지고 있을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같은 명화를 그린 단순히 위대한 화가로 불리우진 않는다. 레오나르도 자신 역시 '로도비 코스포르자공'에게 보낸 36가지 안건에서 볼 수 있듯이 판화, 대리석, 금속, 미술 분야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에게 있어서 회화는 과학의 한 분야로 간주될 뿐이었다. 그의 목표는 실험에서 얻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우주로서의 세계를 지각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레오나르도를 르네상스인의 전형으로 보면서도 한편, 그 가 창조한 것들의 방대한 영역과 그 가치를생각한다면 그 어떤 개념으로도 그를 규정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결국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르네상스 시대를 살며 시대의 대표작을 배출해 낸 위대한 르네상스인이었으며,동시에 규정불가의 위대한인물 이었다고 본다. 그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 발명가 등등 어는 명칭에도 해당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힌다. 이와 같이 그는 어떤 한계도 훌쩍 뛰어 넘어서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인체해부 및 빛과 그림자의 연구를 비롯한 과학연구는 새의 비행이나 지질, 지지학, 식물학, 입체 기하학을 거쳐 슈류에 관한 연구나 운하공학, 또는 기계학과 해부학등에 이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많은 업적을 이룩한 것은 그의 뛰어난 창조성에 기인한다. 창조성이란 상당히 복합적인 개념이다.거기에는 유동성, 유연성, 준비성,그리고 독창성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 유동성은 수많은 생각들을 안출해 내는 능력이고, 유연성은 서로 다른 원천들로부터 유래하는 매우 다양한 응답들을 제공하는 능력임에 반해, 독창성은 뻔한 것,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것과 연관되지 않은 생각들을 인출해 내는 능력이고, 준비성이란 생각들을 발전시키고, 확장하고, 개선하는 능력을 뜻한다.


미켈란젤로(르네상스) | 명화모음
2005.06.28


피에타, 바티칸

 


최후의 심판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벽화

 


노아의 만취, 1509

 


노아의 번제, 1512

 


사울의 회심

 


베드로의 책형

 


천지창조, 시스티나 좌측

 


아담의 창조, 1512

 


이브의 창조, 1512

 


이브의 유혹

 


대홍수, 1508-9

 


모세상, 바티칸

 


다비드

 


스가랴 선지자

 


에스겔 선지자

 


예레미야 선지자

 


이사야 선지자

 


요나 선지자

 


성가족과 세례요한, 1504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otti)

 

1475년에 태어나 1566년까지 90세를 살았다. 그의 긴 생애동안 미술의 양식도 여러 번 바뀌었는데 변화의 주인공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15세기 르네상스로부터 시작하여 전성기 르네상스와 매너리즘을 이룩했고 바로크적 경향을 열어놨다. 미켈란젤로는 끊임없는 양식의 창조자였던 것이다. 그의 집안은 귀족의 혈통이라고는 하나 부와 권력을 풍요롭게 누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부친은 미켈란젤로에게 문법공부를 시키려 했으나 아이는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다. 부친은 귀족 출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한다고 자주 꾸지람을 했다. 하지만 타고난 ‘끼’는 어쩔 수 없는 법.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13세 되던 해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잘 나가던 화가 기를란다요의 공방에 아들을 맡겼다. 공식적인 그림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1년만에 그곳을 나왔다.그곳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대가들의 공방에는 제자들의 교육용 혹은 시범용으로 쓰이던 스케치 샘플들이 있었다. 그림을 배우던 미켈란젤로가 하루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스케치 중의 한 점을 빼낸 후 자신이 그린 스케치로 바꿔치기를 했다. 그러나 이를 스승이 알아채지 못하자 그는 이같은 선생 밑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공방을 나왔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당돌함과 ‘끼’가 넘쳤던 것 같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의 눈에 띈 때였을 것이다. 로렌초는 재능있는 소년 미켈란젤로를 알아보고 자신의 집에서 아들처럼 돌보았다. 미켈란젤로는 거기서 메디치가를 드나들던 당대 최고의 철학자들과 한 식탁에서 식사하면서 대화하고 토론하는 생활을 했다.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와 같은 당시에 유행하던 철학을 접하면서 그의 지적 수준을 높일 수 있었다. 이때가 1590년쯤이니 그의 나이 겨우 15세 때의 일이다.  그때부터 미켈란젤로는 작업을 시작해 조각·회화·건축·시·문학 분야에서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죽기 며칠 전까지 ‘피에타’를 대리석에 조각했었다고 하니 평생 쉼없이 작업한 셈이다. 그의 작품 수는 사실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4년동안 누워서 그림을 그리는 바람에 몸이 만신창이가 된 바티칸의 시스티나성당 천장화나 60세가 넘어서 주문을 받고 5년 이상 작업에 매달렸던 전대미문의 규모를 가진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화에서 보듯이 그의 작품은 제작기간이 수년이나 되는 것들이 많았다. 그는 보통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의 일을 철저한 고독속에서 해냈다. 조수의 힘을 빌리는 것이 당연시됐던 시대에도 모든 것을 혼자서 해냈고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는 외부인의 출입도 철저히 금했다. 미켈란젤로의 재능과 명성은 이미 당대인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찬양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인간의 것이 아닌 신의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당시의 교황들을 비롯한 각국의 군주와 귀족들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한 점이라도 소장하기 위해 조바심을 냈다. 미켈란젤로의 이름과 연관을 짓는 것이 바로 자신들의 영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술가라는 직업이 미천한 장인계급에 속했으나 그가 그것을 뒤집어놓은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시스티나성당에 있는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를 거부하자 주문자였던 교황 바오로 3세는 “이것은 나의 30년 된 숙원이다. 교황이 된 오늘도 그것을 충족하지 못하겠느냐”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문필가였던 아레티노라는 사람은 미켈란젤로의 스케치 한 장을 얻기 위해 1년이나 편지를 쓰고 공을 들였지만 이를 얻지 못하자 후에 ‘최후의 심판’을 공격하는 선봉장이 되기도 했다. 이같은 폭발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오로지 작품 제작에만 열중할 뿐 세속적 영화를 추구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에 아름답지 않고 의미가 없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최후의 심판’을 예로 들어보면 이 작품 역시 도상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당시의 개념을 뛰어넘어 새로운 형태와 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 속에는 신성해야 할 성인들이 발가벗은 채 등장하고 천사들은 날개도 없이 못 생긴 얼굴을 하고 있는 등 기존의 개념을 완전히 벗어난 형태로 선보이고 있다. 게다가 가톨릭의 교리는 물론 프로테스탄트 사상까지 내포하고 있으니 한 인간의 폭넓은 사상을 마음껏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은 작품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에도 기인하지만 그가 평생 잃지 않았던 자유분방한 사고와 작품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에도 기인한다. 미켈란젤로는 진정한 권력은 실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작가로서의 고집과 주관을 기라성 같은 후원자들 앞에서도 당당히 주장하는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그의 작품에 토를 달거나 그의 기분을 언짢게 한 자는 상대가 누구였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대상 중 한명이 비아지오 체세나라는 추기경인데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그리는 작업 현장을 방문한 추기경이 벌거벗은 인물들에 대해 한마디하자 그를 지옥의 사신 미노스로 그려놓음으로써 영원히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바쁘다는 이유로 자신을 만나주지 않자 그 즉시로 “교황이 날 찾으면 내가 없다고 하라”고 전하며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내려왔고 교황이 다시 그를 부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는 일화는 권력 앞에서 당당했던 그의 용기와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보여준다. 그는 늘 새로운 경향을 실험하고 기존의 것을 파괴하며 작품세계를 개척해나갔던 것이다. 물질과 권력,그 모든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오로지 작품 제작에만 몰입했던 미켈란젤로, 그는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춘 유일한 인간이었다.


고종희 <한양여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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