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산업화'가 요즘 떠오르는 주장들 중의 하나다. 대통령과 교육부총리가 분위기를 조성하는 듯하더니, 이제는 기업이 떳떳하게 대학에서 맞춤형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 한편에서 기초과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 연구 자율성의 위기가 얘기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물론 이런 문제는 단지 우리나라만의 것은 아니다. 동일한 논쟁이 미국은 물론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대학의 산업화에 대한 요구는 바로 이런 세계적인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기업이 주도하는 과학기술 혁신 체제 구축을 전제로 한, 대학의 산업화가 최선의 대안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대답은 부정적이다. 우리는 상황과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거론하기 전에 그것과 연관된 좀더 근본적인 틀, 즉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전략적 중심인 '국가 혁신 체제(NIS)'론부터 살펴보자. 사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학의 산업화'를 주창한 것은 바로 이 정부 들어서 추진되고 있는 국가 혁신 체제론의 문제의식이 대학교육 정책으로 구체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역 클러스터, 국가혁신체제?
어디일까? 분권형 국가 혁신 체제론이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된 것은 관련 정부 산하 정책 연구기관에서 제출한 일련의 정책 보고서들이다.
풍부한 이론적 기반 위에서 체계적인 전략을 내놓기 위한 고민이 엿보이는 이들 보고서들은 공통적으로 중소기업에 대한 지식․금융․비즈니스 지원, 성과 중심 평가 시스템에 근거한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개방 유연화, 연구 중심 대학 육성 및 기업 간 연계 강화, 수요자 중심의 국가 연구 개발, 산․학․연 촉진을 위한 인적 연결망 강화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제안들은 이런 고려 가능한 모든 요소들이 시장과 기업을 중심으로 평면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이에 대한 전반적 논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여기서는 특히 기초과학 연구와 관련된 부분만을 거론해보자.
현재 추진 중인 분권형 국가 혁신 체제의 구축은 '연구개발의 산업화, 기업이 주도하는 혁신 체제'로 요약할 수 있다. 거칠게 살펴보면 지역 특성화된 대학과 지역의 개방형 정부 출연 연구 기관 또 지역별로 구축될 산업 클러스터가 상호 간 긴밀하게 연계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런 연계가 특히 강조되는 현실적 근거로는, 대학과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의 연구개발이 기업으로 이전돼 상업화되는 비율이 매우 낮거나, 전체 특허 출원이 지속적으로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그 상용화되는 비율은 미미하다는 점, 혁신 체제에서 강조하는 구성원들 간의 연계망이 취약하다는 점 등이 거론되고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런 여러 가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시장에 대한 접근성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현실 근거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논외로 하더라도, 정말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국가 혁신 체제론의 어디에도 새로운 과학기술 패러다임을 창출할 중심 전략, 이행 방안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점 또 그 과정에서 감당해야 할 국가의 역할이 배후에서 자금을 지원하는 '돈줄'로서 역할을 빼고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산업 기술 정책의 핵, "전략 거점을 형성하고 길목을 터라"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뒷받침하는 과학 이론상의 발전이 있어야 하며, 기술 패러다임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그에 걸 맞는 산업구조의 변화가 설계, 유도 되어야 한다. 특히 전략 거점을 형성하고 길목을 트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문제 해결과 가치의 실현은 기업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정보통신(IT), 나노기술(NT), 생명공학(BT)을 차세대 핵심 기술 패러다임이라고 한다면, 우선 (융합은 차치하고라도) 이들 각각의 패러다임을 구축하기 위해 가능한 과학 이론상의 기반이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내용은 그대로인데 이름만 바꾸는 식이다. 대안 기술 패러다임을 구성할 학문적 집결지, 그 길목에 해당하는 학제 간 협동 과정을 개설하는 10여년 단위의 '목적형 기초과학 육성 프로그램'이 시급히 요구되는데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나노기술과 관련해 미국이 범용 나노 지식 기반이 형성되는 데 10~15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고 준비에 적극적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둘째는 현재의 산업구조를 이들 3대 패러다임이 출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구조 전환, 조정해야만 한다. 가령 나노 소재 기술육성과 화학 및 섬유를 연결할 경우, 현 단계에서 이를 감당할 기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산업 구조 전환을 위한 거점도 없고, 전환에 필요한 기술 경제적 연관조건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본 기술은 시스템적 성격, 시장 불확실성, 연관된 기초과학의 광범위함으로 인해 정부가 초기 시장을 보장하고 대학과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연구 역량이 집중되는 방식이 아니고는 성공하기 힘들다. 정부가 개입해야 할 영역은 바로 이처럼 시장 논리에 의해서 해결이 불가능한 대안 패러다임 거점을 육성하고 창조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자극하는 길목을 트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정부 출연 연구기관과 국책 프로젝트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현재의 국가 혁신 체제 논의에서는 반대로 정부 출연 연구기관 역시 개방형 기업 근접 지원형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현재 추진되는 대부분의 초대형 국책 프로젝트들은 각각 어떤 전략적 패러다임을 지향하고 있는지, 프로젝트 선정에 있어서 과학기술 지식 기반의 전략적 설계 기능을 고려했는지, 프로젝트 추진 연구 거점 연결망 구축이 충분히 고려되었는지 등이 불분명하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제시된 아시아 기술 경제권 형성을 염두에 둔다면 더욱더 기술 지식 기반, 전략 거점, 길목 트기 전반을 관통하는 전략을 설계하는 정부의 역할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것이 필요한데도 현실은 정반대다. 혁신 체제 논의에서는 아시아는 고사하고 국내 전략 설계 기능조차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IT, NT, BT의 융합은 구호 수준에서 또 연구 자금을 조정하고 배분하는 수준에서만 거론되고 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국가의 산업 기술 정책 부재를 기업 주도 개방 혁신이라는 이름 밑에서 대학과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산업화로 대신하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대학의 기초과학 연구는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시장의 논리에 맡겨서도 안 되는 영역이다.
정부의 역할과 기업의 역할은 다르다
과학 지식의 발전과정은 자기 완결적이며, 외부환경의 변화와는 무관하다. 과학 지식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는 상이한 이론 에도 불구하고, 이론 내적 완결성, 연구의 연속성, 일관성, 자율성이 지식 발전의 필수 조건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이는 곧 시장 근접형 대학 산업화, 맞춤형 인재 양성론을 주장하는 입장은 연구 중심 대학 구축을 통한 기초과학 육성과는 양립 불가능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정부가 특정과제 중심의 기초과학을 선별 육성하겠다고 나선다면, 이는 과학과 기술이 갖는 지식 시스템의 근본적 차이를 무시하겠다는 폭력적인 선언에 다름 아니다.
기술 혁신은 아주 강한 시스템적인 성격을 갖는다. 통합, 연결, 누적성이 그 본질적인 동태적 특성이다. 따라서 정작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과학기술 지식에 대한 전략적 설계 및, 설계의 장기 구조적 안정성을 보장함으로써 이러한 동태적 특성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지 대학의 시장 근접성을 높이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전략적 기획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개입할 수 있는 대학교육의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기초과학이 아니라 학제 간 연구를 통한 지식기반 창출, 공학을 통한 범용 확산이며, 이것조차 개별 기술의 발전에 관련된 부분이 아니라 기반 지식 시스템을 구축하는 차원이어야 한다.
특히 산학 간 지식이전이 안 되는 문제는 기업의 책임이지 대학의 책임이 아니다. 1980년대 초 미국에서 산학 간 지식 이전을 촉진시킬 목적으로 대학이 기술 특허를 획득해 인센티브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도입된 '베이돌 법(Bayh-Dole Act)'의 효과를 연구했던 많은 논문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교훈 중 하나는 산학 간 기술 지식 이전에 최대 장벽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해당 기술을 둘러싼 산학 간 경영 전략의 맥락 공유, 비즈니스 모델의 개발이 활발하지 못하다는 점 그리고 지식이전의 연속성 유지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 또한 대학의 역할과 위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정부나 기업들이 나서서 기술과 경영간의 맥락 공유를 촉진할 수 있는 기술 경영 지원 기관을 설립하는 것이 산학 기술 이전에 보다 효과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건, 아주 단순한 다음과 같은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 혁신의 주체는 정부나 대학이 아니라 기업이다. 현명한 기업들이라면 기술 혁신은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재정, 교육 지원을 비롯한 각종 유인책이 주어진다 해도 경영 전략상 기술 혁신이 수단으로서 유효성을 갖지 않는다면 지식 이전-기술 혁신은 불가능하다.
결국 정부가 진짜 감당해야 할 역할은 기업들이 스스로 기술혁신에 나설 수 있는 구조적 환경, 시장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지, 기업을 앞장서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기업의 역할을 대신 혹은 직접 지원 한다면 기업의 세계적 경쟁력은, 장기적으로 없다.
미국의 경험, 우리나라와 결정적 차이
대학의 산업화, 이 구호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의 경우는 1980년 베이돌 법을 입안하는 것으로 대학의 산업화, 산학 간 지식 이전에 기술 시장의 논리를 적용했다. 미국의 대학들이 첨단 과학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기술 혁신 및 시장 경쟁에서는 일본 기업들이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미국정부의 대학 기초 연구에 대한 지원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한편 산․학․연 공동 연구 프로그램, 첨단기술 이전 프로그램에 대한 정부 지원은 대폭 확충되었다.
그러나 베이돌 법이이 시행된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과연 그 결과는 어떨까? 일단 대학의 특허 출원율 증가 및 산학 기술 이전에 관련된 통계적 수치는 놀라울 만큼 개선되었다. 그러나 전미 대학별 기술이전 부서 연합(AUTM)의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대학에 의해 이루어진 기술개발의 실제 경제적 효과는, 중소기업 및 신생 혁신 기업 육성에 미친 긍정적 영향을 제외한다면 법안 통과 이전과 이후 간에 유의미한 질적 변화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이로 인한 기초연구 부문의 상대적 저하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자들이 점차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실정이다.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미국의 경우 1940~1980년까지 국립과학재단(NSF)을 중심으로 기초과학 중심의 연구지원이 지속적으로 강조되었고, 주요 대학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초과학 연구역량을 보유했으며, 국방부, 국립보건원, NASA 등을 비롯한 정부기관들에 의해 연방 연구기관들이 수행하는 첨단 근본기술 개발 프로그램이 근본 기술혁신을 주도해 왔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물론이고 민간 차원에서 다양하고도 중층적인 목적형, 비목적형 연구지원 프로그램이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 대학들의 기초과학 연구역량은 기술 혁신 역량에 비해 심각할 만큼 낮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 역시 기술이전 및 확산의 거점이었을 뿐 근본기술을 창조한 경험은 거의 없다. 기업 연구소 역시 마찬가지다. 아주 최근에 들어서야 독자적인 근본 기술 혁신에 투자를 시작했을 뿐이다. 이에 반해 미국의 기업 연구소들은 대학에서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와 기업에서 배출한 수상자들의 수가 거의 동일하다. 최근의 첨단 나노 관련 과학이론 및 기술개발 양상을 보면 기업 연구소들이 오히려 대학을 앞서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미국과 우리나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대학의 기초과학 역량, 학문적 경쟁력은 어떻게 높여야 할까? 이것이 다음 글의 주제이다.
물론 이런 문제는 단지 우리나라만의 것은 아니다. 동일한 논쟁이 미국은 물론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대학의 산업화에 대한 요구는 바로 이런 세계적인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기업이 주도하는 과학기술 혁신 체제 구축을 전제로 한, 대학의 산업화가 최선의 대안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대답은 부정적이다. 우리는 상황과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거론하기 전에 그것과 연관된 좀더 근본적인 틀, 즉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전략적 중심인 '국가 혁신 체제(NIS)'론부터 살펴보자. 사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학의 산업화'를 주창한 것은 바로 이 정부 들어서 추진되고 있는 국가 혁신 체제론의 문제의식이 대학교육 정책으로 구체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역 클러스터, 국가혁신체제?
▲ 현재 클러스터 시범단지로 설정된 전국 7개 클러스터 ⓒ | ||
풍부한 이론적 기반 위에서 체계적인 전략을 내놓기 위한 고민이 엿보이는 이들 보고서들은 공통적으로 중소기업에 대한 지식․금융․비즈니스 지원, 성과 중심 평가 시스템에 근거한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개방 유연화, 연구 중심 대학 육성 및 기업 간 연계 강화, 수요자 중심의 국가 연구 개발, 산․학․연 촉진을 위한 인적 연결망 강화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제안들은 이런 고려 가능한 모든 요소들이 시장과 기업을 중심으로 평면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이에 대한 전반적 논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여기서는 특히 기초과학 연구와 관련된 부분만을 거론해보자.
현재 추진 중인 분권형 국가 혁신 체제의 구축은 '연구개발의 산업화, 기업이 주도하는 혁신 체제'로 요약할 수 있다. 거칠게 살펴보면 지역 특성화된 대학과 지역의 개방형 정부 출연 연구 기관 또 지역별로 구축될 산업 클러스터가 상호 간 긴밀하게 연계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런 연계가 특히 강조되는 현실적 근거로는, 대학과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의 연구개발이 기업으로 이전돼 상업화되는 비율이 매우 낮거나, 전체 특허 출원이 지속적으로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그 상용화되는 비율은 미미하다는 점, 혁신 체제에서 강조하는 구성원들 간의 연계망이 취약하다는 점 등이 거론되고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런 여러 가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시장에 대한 접근성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현실 근거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논외로 하더라도, 정말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국가 혁신 체제론의 어디에도 새로운 과학기술 패러다임을 창출할 중심 전략, 이행 방안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점 또 그 과정에서 감당해야 할 국가의 역할이 배후에서 자금을 지원하는 '돈줄'로서 역할을 빼고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산업 기술 정책의 핵, "전략 거점을 형성하고 길목을 터라"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뒷받침하는 과학 이론상의 발전이 있어야 하며, 기술 패러다임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그에 걸 맞는 산업구조의 변화가 설계, 유도 되어야 한다. 특히 전략 거점을 형성하고 길목을 트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문제 해결과 가치의 실현은 기업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정보통신(IT), 나노기술(NT), 생명공학(BT)을 차세대 핵심 기술 패러다임이라고 한다면, 우선 (융합은 차치하고라도) 이들 각각의 패러다임을 구축하기 위해 가능한 과학 이론상의 기반이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내용은 그대로인데 이름만 바꾸는 식이다. 대안 기술 패러다임을 구성할 학문적 집결지, 그 길목에 해당하는 학제 간 협동 과정을 개설하는 10여년 단위의 '목적형 기초과학 육성 프로그램'이 시급히 요구되는데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나노기술과 관련해 미국이 범용 나노 지식 기반이 형성되는 데 10~15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고 준비에 적극적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둘째는 현재의 산업구조를 이들 3대 패러다임이 출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구조 전환, 조정해야만 한다. 가령 나노 소재 기술육성과 화학 및 섬유를 연결할 경우, 현 단계에서 이를 감당할 기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산업 구조 전환을 위한 거점도 없고, 전환에 필요한 기술 경제적 연관조건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본 기술은 시스템적 성격, 시장 불확실성, 연관된 기초과학의 광범위함으로 인해 정부가 초기 시장을 보장하고 대학과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연구 역량이 집중되는 방식이 아니고는 성공하기 힘들다. 정부가 개입해야 할 영역은 바로 이처럼 시장 논리에 의해서 해결이 불가능한 대안 패러다임 거점을 육성하고 창조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자극하는 길목을 트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정부 출연 연구기관과 국책 프로젝트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현재의 국가 혁신 체제 논의에서는 반대로 정부 출연 연구기관 역시 개방형 기업 근접 지원형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현재 추진되는 대부분의 초대형 국책 프로젝트들은 각각 어떤 전략적 패러다임을 지향하고 있는지, 프로젝트 선정에 있어서 과학기술 지식 기반의 전략적 설계 기능을 고려했는지, 프로젝트 추진 연구 거점 연결망 구축이 충분히 고려되었는지 등이 불분명하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제시된 아시아 기술 경제권 형성을 염두에 둔다면 더욱더 기술 지식 기반, 전략 거점, 길목 트기 전반을 관통하는 전략을 설계하는 정부의 역할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것이 필요한데도 현실은 정반대다. 혁신 체제 논의에서는 아시아는 고사하고 국내 전략 설계 기능조차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IT, NT, BT의 융합은 구호 수준에서 또 연구 자금을 조정하고 배분하는 수준에서만 거론되고 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국가의 산업 기술 정책 부재를 기업 주도 개방 혁신이라는 이름 밑에서 대학과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산업화로 대신하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대학의 기초과학 연구는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시장의 논리에 맡겨서도 안 되는 영역이다.
정부의 역할과 기업의 역할은 다르다
과학 지식의 발전과정은 자기 완결적이며, 외부환경의 변화와는 무관하다. 과학 지식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는 상이한 이론 에도 불구하고, 이론 내적 완결성, 연구의 연속성, 일관성, 자율성이 지식 발전의 필수 조건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이는 곧 시장 근접형 대학 산업화, 맞춤형 인재 양성론을 주장하는 입장은 연구 중심 대학 구축을 통한 기초과학 육성과는 양립 불가능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정부가 특정과제 중심의 기초과학을 선별 육성하겠다고 나선다면, 이는 과학과 기술이 갖는 지식 시스템의 근본적 차이를 무시하겠다는 폭력적인 선언에 다름 아니다.
기술 혁신은 아주 강한 시스템적인 성격을 갖는다. 통합, 연결, 누적성이 그 본질적인 동태적 특성이다. 따라서 정작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과학기술 지식에 대한 전략적 설계 및, 설계의 장기 구조적 안정성을 보장함으로써 이러한 동태적 특성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지 대학의 시장 근접성을 높이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전략적 기획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개입할 수 있는 대학교육의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기초과학이 아니라 학제 간 연구를 통한 지식기반 창출, 공학을 통한 범용 확산이며, 이것조차 개별 기술의 발전에 관련된 부분이 아니라 기반 지식 시스템을 구축하는 차원이어야 한다.
특히 산학 간 지식이전이 안 되는 문제는 기업의 책임이지 대학의 책임이 아니다. 1980년대 초 미국에서 산학 간 지식 이전을 촉진시킬 목적으로 대학이 기술 특허를 획득해 인센티브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도입된 '베이돌 법(Bayh-Dole Act)'의 효과를 연구했던 많은 논문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교훈 중 하나는 산학 간 기술 지식 이전에 최대 장벽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해당 기술을 둘러싼 산학 간 경영 전략의 맥락 공유, 비즈니스 모델의 개발이 활발하지 못하다는 점 그리고 지식이전의 연속성 유지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 또한 대학의 역할과 위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정부나 기업들이 나서서 기술과 경영간의 맥락 공유를 촉진할 수 있는 기술 경영 지원 기관을 설립하는 것이 산학 기술 이전에 보다 효과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건, 아주 단순한 다음과 같은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 혁신의 주체는 정부나 대학이 아니라 기업이다. 현명한 기업들이라면 기술 혁신은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재정, 교육 지원을 비롯한 각종 유인책이 주어진다 해도 경영 전략상 기술 혁신이 수단으로서 유효성을 갖지 않는다면 지식 이전-기술 혁신은 불가능하다.
결국 정부가 진짜 감당해야 할 역할은 기업들이 스스로 기술혁신에 나설 수 있는 구조적 환경, 시장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지, 기업을 앞장서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기업의 역할을 대신 혹은 직접 지원 한다면 기업의 세계적 경쟁력은, 장기적으로 없다.
미국의 경험, 우리나라와 결정적 차이
대학의 산업화, 이 구호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의 경우는 1980년 베이돌 법을 입안하는 것으로 대학의 산업화, 산학 간 지식 이전에 기술 시장의 논리를 적용했다. 미국의 대학들이 첨단 과학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기술 혁신 및 시장 경쟁에서는 일본 기업들이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미국정부의 대학 기초 연구에 대한 지원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한편 산․학․연 공동 연구 프로그램, 첨단기술 이전 프로그램에 대한 정부 지원은 대폭 확충되었다.
그러나 베이돌 법이이 시행된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과연 그 결과는 어떨까? 일단 대학의 특허 출원율 증가 및 산학 기술 이전에 관련된 통계적 수치는 놀라울 만큼 개선되었다. 그러나 전미 대학별 기술이전 부서 연합(AUTM)의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대학에 의해 이루어진 기술개발의 실제 경제적 효과는, 중소기업 및 신생 혁신 기업 육성에 미친 긍정적 영향을 제외한다면 법안 통과 이전과 이후 간에 유의미한 질적 변화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이로 인한 기초연구 부문의 상대적 저하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자들이 점차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실정이다.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미국의 경우 1940~1980년까지 국립과학재단(NSF)을 중심으로 기초과학 중심의 연구지원이 지속적으로 강조되었고, 주요 대학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초과학 연구역량을 보유했으며, 국방부, 국립보건원, NASA 등을 비롯한 정부기관들에 의해 연방 연구기관들이 수행하는 첨단 근본기술 개발 프로그램이 근본 기술혁신을 주도해 왔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물론이고 민간 차원에서 다양하고도 중층적인 목적형, 비목적형 연구지원 프로그램이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 대학들의 기초과학 연구역량은 기술 혁신 역량에 비해 심각할 만큼 낮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 역시 기술이전 및 확산의 거점이었을 뿐 근본기술을 창조한 경험은 거의 없다. 기업 연구소 역시 마찬가지다. 아주 최근에 들어서야 독자적인 근본 기술 혁신에 투자를 시작했을 뿐이다. 이에 반해 미국의 기업 연구소들은 대학에서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와 기업에서 배출한 수상자들의 수가 거의 동일하다. 최근의 첨단 나노 관련 과학이론 및 기술개발 양상을 보면 기업 연구소들이 오히려 대학을 앞서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미국과 우리나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대학의 기초과학 역량, 학문적 경쟁력은 어떻게 높여야 할까? 이것이 다음 글의 주제이다.
출처 : 블로그 > 나노식품/나노푸드 (Nanofood) | 글쓴이 : Truescience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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