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돌아왔던 길을 겨울에 다시 간다
감기에 걸렸고 약기운에 몽롱하지만 마음 크게 먹고 쓴 연차
휴일
모자에 목도리, 마스크로 똥똥 싸매고 일요일 정오경 차를 몬다
오늘은 GPS도 지도도 유턴도 없다
늦가을 도로를
느긋하게 달리다가 박물관이 나오면 박물관에,
식물원이 나오면 식물원에 가겠다. 무슨 절이 나오면 절에 가겠고
아무 것도 안 나오면
아무 데도 안 가겠다. 그렇게 운전을 한다
올림픽대로 미사리 끝길에서 광주로 가는 직진 길이 타졌다
담담한 자동차 전용 고속화
도로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왕복 2차로의 보기좋은 국도가 나타났다
누렇고 허연 가로수들이 이미 단풍을 많이
게워냈다
윤기없이 버석거리는 가지를 달고 나무들은 미동없이 도열해있다
바람이 가느다랗게 불고 있었는데 빼빼한 잔가지들은 바람을
맞을
면적조차 없기 때문에 멈춘 사진처럼 꼼짝않고 섰다
긴 세월 여러 임금을 모시며 풍파를 버텨온 늙은 중신들
같구나
충정의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절개가 드높은 영웅감은 아니다
이제는 연신 잔기침 뱉어내며 구부정한 어깨가 펴지지
않는다
움직일 힘도 없이 열 맞춰 선 모습에 젊은 왕의 마음 되어 가엽다
한편 길 오른쪽 식당가로는 소, 돼지에서 잉어,
붕어까지
각종 산해진미들이 진상되어 객들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다
한결같이 마련돼있다는 대소연회석은 고사하고 주차장이
휑하다
스키장 인파는 아직 좀 멀었고, 가을 여행객은 끝을 본 모양이리라
겨울이구나
잊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겨울이구나 싶다
갑작스런 깨달음이 생경하여 잠시 차를 세우고 몇 자 적는다
보온병에서 담아온 결명자차를 호호 불어 마시는 겨울의
맛..
지형에 따라 라디오가 또렷했다 흐릿했다 하는 길을 따라 또 가자
팔당댐 위로는 앞이 안 보이도록 물안개가
가득차
'잠시 생각 좀 하겠다'하고 닫혀진 아버지 서재같이 근엄하다
(위 사진은 일년 전 이맘 때 춘천갔을 때)
(아래 사진은 일년 후 지난 주 똥똥 싸매고)
이번 강원기행의 최종 종착지는 춘천이다
언제고 휴가를 내어 배낭 메고 가겠다 했는데
컨디션의 난조로
자동차를 데려갔다
글쓰는 우리 선생님 이외수 선생님도 뵙고
대장님같고 선녀님같은 우리 사모님도 뵙고
꿈꾸는 랍쇼,
노래하는 이명도 만나고 오겠다 했다
아닌게 아니라 늦은 시간이었지만 선생님 댁으로 가서
문하생 언니여동생들도 만나 간만에
수다를 좀 떨다
랍쇼, 이명, 진얼이(선생님 차남), 요섭이(조카) 이렇게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놀았다
모든 여행의 제일 가운데에, 제일 맛좋고 제일 실한 데에
사람이 있다
초록색 도로 이정표에서 황토색 박스글로 표현되는 것이 관광지다
무슨 무슨 절, 무슨 무슨 국립박물관 같은 것이
보기 좋게 적혀있다
'천진암'이란 이름이 나오길래 오래된 절쯤으로 생각하고 들어갔다
그런데 불교가 아니라 천주교다.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란다
어째 제법 차들이 앞뒤로 따라 붙는구나 했더니 서울·경기에서 온
신도들이 둘 셋씩 성지 순례를
왔다
을씨년스러울만큼의 고요한 산책은 물 건너 갔고
각종 경축 현수막과 초대형 십자가가 걸린 천주교 암자구경을
해보자
옛 위용을 과시하듯 크나큰 것은 십자가만이 아니다
화장실이 고속도로 휴게소의 그것만큼이나 몹시 넓은
데다
조립식 간이화장실이 스무개도 넘게 운집해있다
이렇게 많은 것이 화장실 주위를 엄호하고 있는 건 처음 본다
산길은 숨이 막힌다
낙엽들이 모든 길을 장악했다
가을색의 그라데이션을 이룬 흙길은 빈틈이 없고
푹신하다
집회 장소였다는 강학회터에 이르자 옆으로는 계곡이 흐르고
산새들이 제가끔의 찬송가를 노래한다
야트막한 나무들이 임시 예배당의 지붕을 이루었다
묵묵히 길을 오르다보니 종교가 없는 나같은 이라도
그
어떤 절대적 지혜자 앞에 납짝 업드려
용서를 구하고 위로를 받고 싶어진다
대성당 건축 공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평원으로
가는 오르막까지만 시멘트길이고
옛 집회 장소나 순교자의 묘역이 있는 곳은 약간의 산길이다
핸드백 들고 구두신은 지긋한 자매님들은 가기
어렵다
노부부 한 쌍이 산악용 지팡이를 들고 먼저 내려갔고
강학회터에서 하루키의 기행에세이 <우천염천>을 깔고
앉아
두리번대며 메모를 할 때 아저씨 셋이 쳐다보며 올라간다
침엽수들이 남아 있어 산은 향기롭고
낙엽이 물에
젖어 눈까지 구수해진다
이쯤해서 나는 이제 내려가야지 할렐루야
단풍들이 낙하하면서 애인 이름이나 어머니를 외치지 않는 건
천만다행이다
다행인 정도가 아니라 잎들은 몹시
소리없이 떨어져내렸고
한 잎 한 잎 바닥에 쌓일 때마다 산은 더욱 극도로 조용해졌다
켜켜이 쌓인 낙엽은 땅을 가리고 소리를
묻고 감정을 가라앉힌다
짧은 언덕길에도 씩씩대는 내 숨소리가 천박하게 여겨저
괜히 민망해서 헛기침을 짧게 하고
만다
내려오는 길은 금방이었다
본시 낯선 길이 더 멀게 여겨지거니와
그만큼 내가 시시하게만 올라갔다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간은 세 시가 넘었다
또 다음 곳으로,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동해보자
다산 정약용 생가에 꾸민 조그만 박물관에서..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다산 정약용이 10살 이전에 지은 시 중 이것 하나가 남았단다
엔지니어(거중기 등 개발),
검찰(암행어사), 시장(목민관),
의사(천연두 치료약 개발), 교수(규장각 교수),
사형 집행 예정자에서 면제자, 수많은 책의
저자..
정약용 박사의 천재성에는 기가 질릴 지경이다
정조의 애정을 담뿍 받았으나 그가 죽자 지위가 위태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정부가 바뀌면 충복은 한 대를 넘기지 못하는구나
청평사
서울하늘 가시거리 이야기로 시작하는 은희경 소설이 있다
여자 주인공이 파혼을 맞고 잠적하는
곳이 청평사였던 듯
배를 타고 가는 사찰이라는 점이 얼마나 몽환적이었는지 모른다
그 매력을 가슴 속에 내도록 연모하던
중에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까지 보게 되었다
속세와의 연이 극도로 완전히 분리된 물 건너의
사찰..
소설 속 일인칭 시점에 푹 동화되어 나는 그녀와 함께 소양댐으로
약혼반지를 내 던졌고, 읍내에서 사온 꽃무늬
몸빼바지를 입었다
일종의 Esc
나를 아는 사람도, 알아야할 사람도, 일도, 생활패턴도 없다
가시거리 같은 것도 중요하지
않다. 너무 아득하여 가시되지 않는다
모든 연은 육로가 끝나는 길에서 끝이 나고 배에서 내리면
과거가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과거를
고요히 가라앉혀
일렁이게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이름모를 보살이 되는 곳
그 고혹적인 유토피아, 즉 현세에는 존재하지 않는 도피처를 찾았다
배를 안 타고 자동차로 가는 길이 있다는
사실도 얼마 전에 알았다
간밤에 묵었던 친구네에서 이정표를 봤는데 '청평사 22km'를
'2.2km'로 잘못 읽었던 게 첫 불찰.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춘천이 여행지라지만 관광명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을리가
부산에서 수영복 입고 돌아다니겠다는 생각과
매한가지다
22km 거리는 전형적인 뱅글뱅글 언덕길이었다
저단기어를 넣고 사과 깎듯 돌돌돌 길을 말아가는
운전이야말로
강원도 드라이빙 같다
물론 특정지역을 비하하기 위함은 절대 아니다
우리나라 우리땅을 사랑하는 어느 객이 느끼는
로망같은 것일 뿐
8km 남았다는 표지판을 분명히 봤는데 6km 조금 넘자 주차장이다
말로 들었듯 앞으로 남은 길은 걸어가야
하는 듯
친절로 중무장한 관리아저씨에게 주차비 2천원과 입장료 천원을 내고
적당히 차를 댄다
간밤의 숙취로 컨디션은
별로라도 온 길이 아까워 마음 먹어본다
다시 똥똥 사매고 책과 노트까지 가방에 잘 넣었다
냉동골 가까이 평상자리가 썰령한
매운탕집 주인 아줌마가
빨간 베레모를 쓰고 지나가는 나를 힐긋 쳐다본다
월요일 오후 세시에 볼 수 있는 흔한 인적은
아닐테지.
본격적 산책로는 시작도 안됐는데 보도블럭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다
우산을 왜 차에 두고 왔을까를 후회하는 거의
동시에,
아니다, 차라리 잘 되었다, 내려가자, 이 상태론 무리다, 한다
아까 관리원 말도 "갔다 금방 오세요. 눈이 올 것
같거든요" 했다
아까 그 돌돌돌 나사길을 벌벌벌 떨며 돌아가기는 싫다
그렇게 목전에 두고 또 청평사를 오르지
못했다
언젠가는 정말 꼭 가고 말리라
커플 한 쌍이 비를 피해 종종 뛰며 선착장으로 뛰어갔다
배를 타고 와도 근사하겠군
하고 생각했던 좀전의 생각을
깔끔하게 고쳐먹게 되는 대목이다
(사진은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한 장면)
이렇게 청평사 목전의 여행까지 모두 마치고 서울로 왔다
초겨울 강원도 내음이 속속들이 배어 아직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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