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평양에서 출생한 이중섭은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미술 지도를 받으면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1937년
도일하여 분카학원 미술과 학생 시절부터 신인상을 받으며 각광 받기 시작했다.
이무렵 일본인 여성 야마모토(山本方子)와 1945년 원산에서 결혼하여 그 사이에 2남을
두었다.
1946년 일시 원산사범학교에 미술교사로 봉직하기도 하였으나 북한 땅이 공산치하가 되어 자유로운 창작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게 되었다.
그 후 1951년 6.25 동란을 피해 제주도 서귀포로
넘어 와 겨우 한평 남짓한 방한칸에서 일 년여 기간 동안 아내와 함께 피난 생활을 했다.
그는 여기에서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 '바닷가와 아이들' 등의 작품을 그렸고 그 해
12월 부산으로 옮겨간다.
그러나 이무렵 부인과 두 아들은 생활고로 인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며, 이중섭은
홀로이
남아 부산·통영 등지로 전전하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1953년 밀항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부인 이덕남은 한 나라의 위대한 화가가 그런 치욕적인
밀항을 하여서야 되겠느냐며 돌아가길 종용해 다시 귀국하였지만, 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수많은 편지로
전했다.
부산 생활부터 서울에서 최초로 개인전을 치를 때까지 삼 년여 세월 동안 이중섭은 정신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쇠약해진다.
1955년 사촌들이 서울로 이중섭을 데리고 왔는데 자신의 머리를 박박 깎거나 엄지
손가락을 피가 나도록 문지르는 일을 되풀이 하는 격한 행동을 보였다.
주위 사람들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 없고 사람들이 이유를
물으면, 아내가 미워 죽이려 한다고 했다 한다. 지인들이 문병을 오면 화가와 시인들을 욕하며 죽인다고 증오심을 드러내기도 하고 음식도 거부하며
거의 먹지도 않아 몸은 야위고 뼈만 남는 지경에 이른다.
정신 병원에서 감금과 전기 쇼크 요법까지 받은 이중섭이 안타까웠다고
주위 사람들은 증언한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가족들과의 오손 도손한 삶은 결국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현대 미술 작가전과 개인전
등을 개최할 만큼 왕성한 작품 활동에 몰두하다가 55년에 정신 착란 증세로 병원에 입원한 후 1956년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서 정신 이상과
영양실조로 홀로이 40세의 짧고 서글픈 생을 마감한다...
그가 추구하였던 작품의 소재는 소·닭·어린이〔童子〕·가족 등이 가장 많으며, 불상·풍경 등도 몇 점
전하고 있다. 소재상의 특징은 향토성을 강하게 띠는 요소와 동화적이며 자전적인 가족에 대한 정감의 요소이다.
〈싸우는 소〉·〈흰소〉(이상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움직이는 흰소〉·〈소와 어린이〉·〈황소〉(이상 개인 소장)·〈투계〉(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등은 전자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닭과 가족〉·〈사내와 아이들〉·〈집떠나는 가족〉(이상 개인 소장)과 그밖에 수많은 은지화(담배갑 속의 은지에다 송곳으로 눌러 그린
일종의 선각화들은 이중섭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생시의 많은 인간적인 에피소드와 강한 개성적 작품으로 1970년대에 이르러 갖가지 회고전과 재평가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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