歲寒圖
歲寒圖는 그림이기 이전에 "秋史 김정희"의
암울하고 쓸쓸한 유배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심경사진<心境寫眞>이다.
자신의 말할 수 없이 처절한 심정은 볼품없는 조그마한 집
한채로서 표현하였고
제자의 고마운 행동은 지조의 상징인 우뚝한 소나무로
표현하였으며
"너와 나"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무관심은
소나무와 집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겨울배경으로
표현하였다.
紙本 墨書 23.3 * 108.3센티,국보
제180호>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추사라는 호 말고도
완당이라는 호로도 유명하다.
그밖에 수십개에 달하는 호를 쓰기도 했지만
추사와 완당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호다.
완당 김정희는 판서를 지낸 유당노경의 맏아들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연경을 왕래하며
최고의 중국통으로써 청조경학이난 학계문단에 밝아
청조 명류와도 친교가 많았던 당대 엘리트 지식인 이었다.
24세에 소과에 합격하기 시작하여
24세에 소과에 합격하기 시작하여
종2품 병조판서(오늘의 차관급)에까지 오르게되고
동지부사로도 선발되게 된다.
조정에서도 그의 학문의 실력을
인정하고,
청조의 새풍조를 따르는 항상 앞서 가는 신지식인이었기때문에
주위의 시샘이 따랐다
그러다,윤상도의 옥(죄로 처형을 받게되는사건)에
관계되었다고하여
제주도로 귀양가게 된다.
이때 완당의 나이 55세로 인생의 황혼길에 접어들어
제주도 귀양살이는 9년이나 되는 고통의 긴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당시의 제주도 유배생활은 아무도 없는
섬에서
모든것을 도와 주는 이 없이 살아야 하는 큰고통의 세월이었는데
그속에서 선비로써 낙이라면
오로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 뿐이었다.
완당의 처지가 벼슬이 떨어지고 9년에 이르는 유배생활을 하게 되자
완당의 처지가 벼슬이 떨어지고 9년에 이르는 유배생활을 하게 되자
모든 주위의 인심은 바뀌었다.
사람들의 인심도 예전같지 않은 속에서도
완당의 제자중 이상적이라는 제자는 스승을 잊지않고
중국에 역관(지금의 통역관)으로 드나들며
스승을 생각해서 귀한 책을 구해 계속 유배지로 보냈다.
당시도 범죄자를 도와 주면 도와준 사람도 크게 벌을 받게
되므로
사람들은 감히 엄두내기가 어려웠다 .
완당은 그런 위험을 무릎쓰고 계속해서 책을 보내 주는 제자가
완당은 그런 위험을 무릎쓰고 계속해서 책을 보내 주는 제자가
너무 고마워 세한도를 그렸다.
그림의 크기는 세로 23.7센티에 가로109센티미터로
그림만은 별로 크지않은 크기지만
여러사람의 발문(그림을 보고 느낀감상이라든가 등 느낌을
쓴글)이
붙어있어 세한도를 펼치면 10미터에
이른다
(두루마리식)그림의 구도를 설명하면,
왼쪽엔 잣나무 두 그루와 그 옆으로 초라한 초막집과
꼿꼿이 서있는 소나무 두그루를 그리고
오른쪽에 김정희 필치의 화제와 낙관이 찍혀있는것이 전부이다.
단순하기도 한데다가 먹물이 묻은 붓을 꼭 짜서
단순하기도 한데다가 먹물이 묻은 붓을 꼭 짜서
마른 붓질로 까실 까실한 느낌이드는 갈필을 많이 써서
황량한 느낌과 함께 메마르고 차가운 먹색이 어우러져 외롭고
초라한 유배생활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고고한 문기를 강렬하게 발산하여
김정희 문인화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구도도 삼각구도를 잡아 단순한 작품속에서도 안정성을 이루고
필력있는 필치로 글씨하나,
낙관한점 찍는것에 소홀함이 없는 작품이었다.
그림에 김정희 자신이쓴 시제에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라고 쓰여있다.
그림에 김정희 자신이쓴 시제에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라고 쓰여있다.
이뜻은 "아주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잣나무와 소나무의 푸르름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처지가 뒤바뀌어 주위의 인심이 변함을 말하기도 하고
자신의 힘든 유배생활을 세한(추운겨울의 심한추위)에 비유하여
그런 속에서도 송백과 같은 변함없는 의지로
선비의 기상을 잃지않겠다는 자신의 굳은 의지를
표현하고,
또한 곁들여 완당의 발문에 사람이 한번 잘 살다 못살아 보면
주위에 인심을 알수 있는데
예전의 제자 이상적의 처세는 칭찬할게
없으나
(스승에게 제자가 잘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뜻)
"지금의 이상적의 처신은 어느성인이라도 칭찬할
것이다"
라고 제자 이상적의 스승에대한 변치않는 의리에
고마움을 표현하였다.
완당은 아마도 당시의 어려움을 세한속의 꼿꼿한 송백을 표현하면서
완당은 아마도 당시의 어려움을 세한속의 꼿꼿한 송백을 표현하면서
자신의 슬픔을 굳은 의지로 이겨나간 것 같다.
이 그림을 받는 이상적은 이듬해에 중국 북경에 가게되어
스승의 옛 친구인 오찬의 잔치에 초대 받아 간 자리에서
스승의 세한도를 내보였다.
이때 함께 자리했던 청나라 문사 16인은
이 그림을 감상하고는 그 어려운 유배생활 속에서 세한도에
표현한
김정희의 마음을 십분 헤아리고
세한도의 높은 품격과 사제간의 깊은정에 감격하여
저마다 이를 기리는 시문을 남겼다.
그후, 이상적은 자신의 제자 매은 김병선에게 그림을 주게되고
그후, 이상적은 자신의 제자 매은 김병선에게 그림을 주게되고
그의 아들 소매 준학군이 쓰고 읆으며 보관했으나,
그림이 그려진지 70여년뒤 일제 강점기를 맞아
귀중한 보물과 서적을 온갖 수단을 다하여 탈취하니
이때 이 그림도 마침내 경성대학 교수였던 후지쯔까를 따라
동경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후,세계에서 전운이 가장 높은 1844년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 선생이
어려움과 위험을 무릎쓰고 현해탄을 건너가
후지쯔까를 여러번 방문 사정하여
사재를 털어 세한도를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세한도가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니
세한도가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니
이를 보고 위대한 한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오세창이
세한도가 이역으로 전전한 내역과 그동안에 기록된 찬문의 내역을
자세히 적고 세한도를 찾게 된 기쁨을 시한수로 덧붙였다.
이어서 초대 정부 부통령 이시영과 정인보의 평가와
감회의 글과 서예가 손재형의 필치로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가 남겨져있다.
세한도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대상이 된 것은
작가의 농축된 예술적 기질과 고결한 선비의 정신에서 발로 되는
담박함과 지조와 기상,
그리고 사제지교의 아름다움이
이 시대의 교훈이 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청나라 유학자 16인의 발문이 있어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어 세한도의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지금은 개인 소장되어 있으며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1844년작 작품크기:23.7*109.0cm
소장자:손창근
1844년작 작품크기:23.7*109.0cm
소장자:손창근
[출처;행복의 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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