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내 그림이 있었던 게 아니다. 처음엔 미산 그림 같았고 후에는 소치 그림,
중국의 대치 그림과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내 그림은 미산 것도 소치 것도 대치 것도 아니다. 개성은 어디까지나 전통 위에서 꽃피워야
하며, 처음부터 자기 독단의 개성은 생명이 길지 못하다. 전통을 철저하게 갈고 닦으면 자연 자기 것이 생기게
된다.
<의재 허백련(毅齋許百鍊) 선생>
전편에서 뜬구름 잡듯이 안 그래도 사람 이름만으로도 생소한 전통회화 이야기를 나열한
것 같아 독자 여러분들께 죄송스런 마음이다. 그런데 이번 글에도 의재 선생님의 그림과 관련된 이야기에 낯선 이름들과 조금 지루한 옛이야기가
이어질 것 같으니 ‘날씨도 더운데 다 마음 수행이려니….’하고 널리 헤아려 주시면 필자는 힘을 얻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대신 의재 선생님의
일대기를 나열하기보다는 평소 선생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을 만한 소박한 그림 몇 점으로 선생의 이야기를 대신해 보겠다.
중국의 강남지방과 우리의 강남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의재 선생님 앞에 수식어로 꼭 따라다니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남종 문인화의 대가!
여기서 ‘문인화’라는 단어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도 같다. 그런데 ‘남종화’라는
말은 대체 그 뜻이 선 듯 와 닿지 않을 것이다.
‘남종화’에서 남은 ‘남녘 남(南)’이다. 다시 말해 중국의
‘강남’(양쯔강의 남쪽 강소성,안휘성,절강성,호남성)일대를 가리킨다. 아마도 무협 소설이나 영화에서 낯익은 지명일 것이다. 갑자기 왜
중국이야기냐고 할 테지만 워낙에 전통회화에 대해 말하자면 중국이란 나라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잘 되질 않는다.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깊은 연관이
있어 회화에서도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일 것이다.
원래 중국의 왕조는 대대로 수도가 북쪽에 있어서 강남은 시골처럼 생각되었다고
한다.
왕은 북쪽에 사니 강남에는 자연 정치니 권력이니 하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강남이라 기후도 따뜻하고 농사도 잘 되니 굶거나 얼어 죽을 걱정 없었고, 나무도 잘 자라고 산도 푸르니 풍류를 즐기기에는 안성맞춤
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배경이 있었음을 알고 나면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산수화’라는 것이
바로 강남 지방의 풍광을 그린 것이라는 게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남종화 북종화 이야기
한마디 덧붙이자면 중국 강남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한 ‘ 남종화’는 문인 사대부들의
그림으로 수묵화가 주를 이룬다. 주제 면에서도 개인적인 인격 도양을 중시해서인지 사의적이고 관념적인 그림이 많다. 여기서 우리가 소위 동양화라고
부르는 그림들을 감상할 때 부딪히게 되는 참을 수 없는 지루함과 모호함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반대로 ‘북종화’는 왕실에 소속된 화원(직업화가)들의 그림으로 사실을 존중하고 채색을
위주로 한 화려하고 장식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남화가 자신의 느낌에 따라 자유롭게 사유하듯 그렸다면 북화는 따라 그리거나
실물을 보고 사실대로 그렸다고나 할까…
북종화가 화북 지방의 험한 기후 풍토를 배경으로 발전한 반면 남종화는 온화한 풍토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북종화는 산세가 날카롭고 험준하며 남종화는 부드럽고 유연한 형상을 띄는 게 특징이다.
그림인생의 뿌리 진도‘운림산방’
차문화관<문향정>
남종이니 북종이니 한참 학문적인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의재 선생의
그림뿐만 아니라 평소 전람회장에서 그저 그런 뻔한 한국화라고 치부해버리며 그냥 훑고 지나쳐버렸던 그림들에 대해 조금은 이해를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 의재 선생 그림인생의 뿌리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진도 ‘운림산방’ 이야기를 간단히 해보자.
의재 선생님의 증조할아버지뻘 되는 소치 허련 선생이 계셨다.
소치 허련은 조선시대 말기 최고의 남종화가중 한 분이다. 추사 김정희의 애 제자였던
소치는 추사가 죽자 귀향하여 운림산방을 꾸렸는데 여기서 미산 허형을 낳았고 손자뻘 되는 친척 아이에게 글과 그림을 가르쳤는데 그 아이가 바로
의재 선생이었다.
소치 허련, 아들인 미산 허형, 의재 허백련까지 19세기와 20세기를 걸쳐 우리나라
남종 문인화를 이끌어온 가문의 산실이 바로 운림산방인 것이다.
이들은 어렵고 딱딱한 중국식 산수화를 우리의 정서로 풀어 부드럽고 따뜻한 남도의
정서가 배어나는 아름다운 산수로 발전시킨 장본인들이다.
나는 반벙어리(半亞子) 올시다
남종화 이야기와 의재 선생의 뿌리인 소치 허련과 운림산방 까지 돌아왔다. 그러나 이쯤
되면 전통회화에 대한 막막함보다는 마음속에 우리그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조금은 자리잡지 않았을까? 필자의 말에 공감하는 독자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차근차근 여기까지 글을 읽어주신 고마운 분들이다.
이제는 의재 선생님 그림 이야기를 편하게 풀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선생의 그림이야기가 결코 거창한 것은 아니다.
전편에서 선생의 우리 차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짐작하고도 남을 만한 글과 그림
<다로경권(茶爐經卷)>을 소개해 드린 바 있는데 선생의 그림이 왜 그토록 소박하면서도 멋스러운지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차 끓이는 화로와 몇 권의 책’이라는 의미. 처음엔 머리로 그 뜻을
받아들였으되 가슴속엔 그 몇 배의 여운을 남겨주는 그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점의 맑은 그림이 필자의 마음을 붙들어 놓는다.
<월하단심(月下丹心)>이라는 그림인데 참 간단한 스케치 같은 작품이다.
아무 말이 필요 없고 머리가 맑아질 것 같다. 그림의 오른쪽에 찍힌 낙관과 ‘반아자(半亞子)’라는 글씨에 반해버렸다. 글씨의 뜻을 풀이해 보니
‘반벙어리’라는 뜻이다. 의재 선생님 스스로 붙인 호인데 별로 심각하지 않은 그림에 종종 썼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선생이 개인적으로 각별한
애정을 보인 것이라고 상상하고 싶다.
<월하단심(月下丹心)> 종이에 수묵 1940년대
반아자(半亞子)라…… 말 못해서 고민하는 이들이여 잠시 그런들 어떠하리.
요즘같이 자기 목소리 내세우고 말 잘하는 소위 똑소리 나는 사람만이 인정받는 세상에서
그 숨은 뜻을 한번 새겨봐도 좋을 만한 단어인 것 같다. 한번쯤 고개 숙이게 되고 겸손해지게 만드는 말이다. 워낙 나서서 또박또박 말하지 못하는
필자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웬지‘반아자’란 말이 자꾸만 가슴속에 촉촉히 맺힌다.
선생의 그림을 한 점 한 점 발견하고 알아갈수록 이런 선생님을 닮고
싶다.
푸근한 남도의 품에 안기고 싶다
중국의 강남지방과 우리나라의 강남과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아시겠지만 여기서 강남이란 서울의 강남이 아니라 남도지방을
가리킨다.
중국의 강남과는 다르겠지만 우리 남도 땅은 그에 못지않은 넉넉함과 풍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풍류라고밖에 표현하지 못했지만 남도지방을 여행할 때마다 느끼는 아우라는 정말 특별하다. 남도로 발걸음을 옮겨본 이들은 알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곳이라는 것을.
의재 선생은 1938년에 광주에 정착하게 되는데 광주에 정착한 까닭을 “그림을 아는
이들이 많아서”라고 하셨단다. 광주는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마음의 여유만큼은 남달랐던 곳이라고 생각하셨나 보다.
필자의 사담을 좀 털어놓자면 서울에서 자란 필자는 남도지방에 특별한 추억이 없던
터였다. 그런데 필자가 결혼과 동시 남도지방에 또 다른 적(籍)을 두게 되면서 남도의 진 매력을 발견해가고 있다고 하면 적당한 표현일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만한 추억을 남겨놓고 있다는 점에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것이 좋은 것이었든 나쁜 것이었든 추억을 많이 간직한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 하지 않았던가) 아직 탐구하고 싶은 것들과 몸과 마음이 흡수할
수 있는 매력들은 무궁무진하리라 생각한다.
물론 어느 곳인들 안 그렇겠는가.
걷고 걷고 또 걷고……
인생은 끊임없는 여행길인걸.
* 윗 글은 심세중 님의 <삶과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를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