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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정미

鶴山 徐 仁 2005. 10. 30. 02:27
스쳐갔지만 잊혀지지 않는 록커

몇년전부터 가요마니아들은 김정미라는 생소한 가수의 음반을 고가로라도 매입하려는 열기가 후끈함을 감지했다.

낯선 가수의 음반을 1-2만원도 아닌 ‘상태가 좋다면 100만원에라도 구입을 하겠다’는 파격적인 내용에 가수와 음반에 대한 궁금증의 강도는 짙어만 갔다.

회현지하상가, 청계천 등 중고 LP가게들이 몰려있는 지역에서는 '신중현 음반을 싹쓸이하는 일본인들이 부르는대로 가격을 쳐 준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중 ‘김정미 음반은 가장 인기있는 품목’임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믿기 힘든 황당한 소문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희귀 록음반들이 일본등 외국 마니아들에게 무차별 팔려나가고 있다’는 소식은 마니아들 사이에 ‘우리음반을 지켜야한다’는 애국심마저 일어났을 정도.

최근 ‘LP수집붐이 일고있다’는 보도가 심심치않게 오르내리는 것은 그동안 천시했던 우리 가요음반의 음악성을 뒤늦게 인정, 콜렉션 대상으로 여기면서 찾는 이가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김정미 음반들은 가요음반의 전체적인 고가바람에 기름을 부은 악영향도 있지만 이사때면 늘 천덕꾸러기로 버려졌던 우리 가요음반을 소중히 여기게 된 계기가 된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김정미는 어떤 빛깔의 음악을 남긴 가수이기에 30년이 지난 지금 난리들일까?

70년대말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팬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잊혀진 김정미.

김추자를 뛰어넘을 재목감으로 장래가 유망했던 가수였다. 추구했던 음악만큼이나 섹시했던 음색의 콧소리 창법과 현란한 춤은 흔치 않았던 여성 사이키텔릭 록커라는 프리미엄이 더해지며 70년대 초중반 가요계 최대 돌풍의 주역이었다.

사업가 김순성씨의 유복한 가정에서 1남5녀중 둘째로 태어난 김정미는 어릴 때부터 타고난 춤과 노래 재능으로 주변의 소문난 귀염둥이였다. 또한 지지않으려는 욕심과 고집이 대단했지만 붙임성 좋은 활발한 성격의 장난꾸러기였다.

서울 정신여고 재학시절, 김정미는 흑인가수 아레사 프랭클린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좋아했다. 국내가수로는 김추자를 꽤나 좋아했지만 그녀의 넋을 빼놓은 것은 전설적인 록그룹 제퍼슨 에어플래인의 비트 강한 사이키델릭 사운드였다.

또한 한국고전무용과 모던발레를 배우며 율동의 기본을 익혔을 만큼 예능쪽으로 대학진학을 하려했고 유행하던 포크곡들보다는 진보적인 록그룹의 노래를 즐겨불렀던 평범치 않았던 여고생이었다.

또한 시원한 이목구비와 164㎝의 훤칠한 키에 볼륨감 넘치는 몸매는 늘 주변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친구들은 까무잡잡한 야성적 피부에 인기만점인 그녀를 ‘인디언 추장의 딸’로 부르며 주위에 모여들었다.

늘 김정미의 재능이 아까웠던 친구들은 어느날 ‘가수만들기 작전’을 세우고 작곡가 신중현에게 연락, 테스트를 받기로 미리 약속을 받아두었다. 엉겁결에 친구들을 따라나선 김정미는 당대 최고의 히트곡 제조기 신중현의 마음을 한눈에 빼앗아 버렸다.

69년 그룹 <뉴덩키스> 시절부터 신중현은 사이키 델릭사운드에 심취해 있었다. 김추자라는 대형가수를 발굴했지만 늘 스캔들을 몰고다녀 골머리를 썩던 터라 김정미의 등장은 신중현의 음악적 실험욕구에 불을 댕겼다.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음악에 걸맞는 창법과 안무를 개발, 정성을 다해 공을 들였다.

‘김추자에 비해 성량은 다소 떨어졌지만 음폭은 오히려 넓었던 김정미만큼 사이키델릭사운드를 이해하고 소화해낸 가수는 없다’고 신중현은 회고한다.

김정미는 펄씨스터즈와 더불어 신중현이 가장 애지중지했던 여가수였다. 1년6개월동안 노래공부에 전념한 그녀의 가수생활은 엉뚱하게 시작되었다. 첫 데뷔무대는 김추자의 대역출연이었다.

온나라가 떠들석했던 소주병 얼굴난자사건의 당사자로 71년 12월 시민회관에서 예정된 리사이틀을 포기해야만 했던 김추자. 이미 공연홍보에 큰 경비를 투자한 주최측은 붕대를 칭칭감은 끔직한 김추자 모습에 낙담을 했다.

그러나 한사코 무대에 서겠다는 김추자를 대신하여 노래를 부를 대역이 필요했다. 이때 신중현의 추천으로 긴급히 선택된 가수가 김정미였다. 같은 신중현 문하생이자 동국대 연극영화과 후배이기도 했던 김정미의 창법과 춤사위는 김추자를 빼다박아 관객들에게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 때문에 김정미는 ‘제2의 김추자’로 불리워졌다. 김추자대역으로 출연한 성공적인 데뷔무대는 이 글래머 여대생가수에게 큰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켜 단숨에 주목받는 가수로만들었다.

대중들이 보내주는 사랑과 관심은 달콤했지만 ‘제2의 김추자’라는 꼬리표는 불만이었다. 그래서 김정미는 늘 ‘제1의 김정미’를 외치며 의식적으로 김추자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더욱더 새로운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신문 방송의 요란한 인터뷰요청이 이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준비한 데뷔음반은 록그룹 <더 맨>이 연주한 <김정미 최신가요집-유니버샬,KLS44,72년중순>. 수록된 9곡은 모두 신중현의 창작곡이었다.

장현의 저음을 느끼게하는 <기다리는 마음>과 김추자의 다이나믹한 폭발력에 야릇한 분위기를 느끼게하는 콧소리창법으로 노래한 <간다고 하지마오> <잊어야 한다면> 등은 독특했다. 사이키델릭 노래가 풍기는 섹시함이 가득한 김정미의 노래는 70년대 남성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금지곡 족쇄로 스러진 못다 핀 대형가수

71년 봄, 신중현에 픽업된 김정미는 정식데뷔를 앞두고 호텔나이트클럽에서 몇달간 노래실력을 쌓으며 <늑대와 고양이> <대합실의 여인> 등 영화주제가를 취입하기도 했다.

핀치히터로 나선 첫 대중과의 만남은 신인탄생이라는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김정미는 이때의 심정을 ‘너무나 엄청난 시발이어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어떻게 나흘간의 공연이 지나갔는지 꿈만 같아요’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대중과 언론의 호감은 학교의 반대를 격려로 변화시킬 만큼 대단했다. ‘여고를 졸업하면 남의 흉내보다는 제 나름대로의 노래를 열심히 부를거예요’라고 김정미는 당찬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데뷔앨범에 수록된 여러곡들이 히트를 하자 당시 언론들은 ‘김추자를 능가하는 대형가수’라며 김정미를 가요계 최대 기대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데뷔음반에 이어 발표된 2집 <김정미,아니야-유니버샬,KLS68,73년6월>과 윤도현 밴드가 최근 리메이크하여 유명한 <바람>이 수록된 3집 <바람-유니버샬,KLS76,73년11월>은 김정미 노래의 향기를 제대로 맛볼수 있는 명반들.

2, 3집의 연이은 히트로 장안은 온통 사이키델릭사운드로 출렁거렸다. ‘제2의 김추자는 이제 제1의 김정미로 바꿔야 한다’는 평가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김정미는 무교동, 명동의 밤무대에서 월 개런티 80만원에 서로 모셔가려는 특급가수로 급부상하며 현란한 사이키 조명을 받게 되었다. 인기가 높아지면서 김추자 사건을 기억하는 김정미의 집안에선 험한 연예계에 귀한 딸을 내놓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모친이 함께 방송이나 출연무대를 따라다녔고 자택에 걸려오는 전화도 2중3중으로 거른 뒤에야 바꿔줄 만큼 철저한 보안조치를 취했다.

김정미의 음반중 <김정미 NOW-성음,SEL-100 023,73년11월>는 국내 록음반 중에서 <신중현과 엽전들> 초반과 더불어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희귀음반이다.

이때는 ‘신중현의 사이키델릭사운드가 최고조에 달해 물이 오를대로 올랐다’는 평가처럼 김정미독집음반 중 국내외 마니아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반이기도 하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피어있는 자켓사진은 신중현의 사진으로 ‘코스모스는 사이키델릭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앨범에 수록된 <봄> <햇님> <바람> <아름다운 강산> , 그리고 한국전통음악과 록의 접목을 시도한 <나도 몰래>는 신중현 사이키델릭의 걸작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명곡들. 김정미는 수많은 자신 의 히트곡중 7분짜리 대곡인 데뷔곡 <잊어야 한다면>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다.

NOW앨범과 거의 동시에 발매된 3집 <바람>을 발표하면서 김정미는 ‘저만의 노래다운 특징을 찾아내려고 많이 연구했어요. 춤도 환각적이고 전위적인 율동으로 사이키델릭에 맞추어 연습하고 있어요. 이게 저의 참다운 모습입니다’라고 인터뷰를 했을 정도로 만족감을 표시했다.

74년말 MBC-TV의 히트드라마 주제곡 <갈대(신중현곡)>를 부르면서 톱가수의 대열에 올랐다. 밀려드는 방송과 밤무대 요청은 한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는데 75년초 뉴코티나 승용차를 구입해 한없이 높아지는 인기를 과시하기도 했다.

빅히트곡 갈대는 74년 9월 <이건 너무 하잖아요/갈대-지구,JLS120920>음반으로 발표되었다.

이 음반은 금년초 지구레코드에서 CD로 편집, 재발매되어 언론의 재조명을 받았던 <김정미-JCDS-0737>의 자켓으로도 사용됐다. 수록곡중 <담배꽁초>는 마니아들조차 감탄하는 명곡. 여기서 ‘담배꽁초는 대마초를 상징한다’는 풍문이 자자할 정도로 짙은 사이키델릭 향기가 진동한다.

이 음반의 특색은 펄시스터즈,정훈희의 히트곡들과 전설적인 가수 오세은의 데뷔곡 <그날이 오면>과 <친구야>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김정미의 불운은 소위 가요정화운동으로 불리어지는 75년 5월의 ‘대통령 긴급조치9호’로 빚어진 금지곡 사태로 부터 시작되었다. 김정미의 곡들은 대부분 창법저속, 곡 퇴폐라는 명목으로 금지족쇄가 채워졌다.

<바람> <이건 너무 하잖아요> <담배꽁초> <너와 나> <나비 같은 사랑> <가나다라마바> 등의 장례일이었다. 비록 이곡들은 12년후인 87년8월 해금조치가 되었지만 당시 김정미의 충격은 대단했다.

또한 음악스승 신중현의 대마초 구속사건은 헤어날 수 없는 수렁이었다. 막 꽃을 피우려했던 순간에 찾아든 감당키 힘든 음악적 좌절은 은둔아닌 운둔생활을 강요당했다.

2년여동안 침묵을 지키던 김정미는 처음으로 신중현이 아닌 김영광, 김용선의 곡으로 재기를 꿈꾸며 <난 바본가봐-지구,JLS1201239,77년9월> 음반을 발표했다. 트로트로의 변신이었다. 음반 발표 때마다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던 지라 냉담한 대중들의 반응은 낯설고 힘겨웠다.

결국 이 음반을 끝으로 김정미는 소리소문없이 대중들의 곁을 떠났다. 음악적 좌절은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가며 심신을 망가뜨렸다. 70년대말 수도권의 한 암자에서 요양을 하는 모습이 목격된후 현재까지 그녀는 철저하게 대중들로부터 잊혀져 왔다.

미국에서 쓸쓸한 삶을 보내고 있는 김정미는 총 13장의 앨범을 남겼다. 2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녀의 노래가락은 재평가되어 ‘가요LP 수집붐을 주도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상처받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주었으면 좋겠다.

 

 

 

김정미, 한국적 사이키델릭의 정수
 특유의 비음과 섹시한 보컬이 특징
이메일보내기 최지선 _ 대중음악평론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신중현 사단'에 많은 여성 보컬들이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기간, 한국 대중음악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던 신중현이 자신의 밴드를 통해서는 물론, 가수들, 특히 여성 가수들과의 작업을 통해서 자신의 실험을 표출하곤 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펄 시스터즈, 김추자를 비롯해 이정화, 임아영, 민아, 주현, 지현 등 많은 여성 보컬들이 그와 만났다. 이제 그 중 한 명인 김정미와 만날 차례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김정미는 고등학교 시절, 오디션을 거쳐 '신중현 사단'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녀가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1971년 12월 9일 김추자의 리사이틀에서였다. 소주병 난자 사건으로 붕대를 감은 김추자 대신 핀치히터로 등장해 "김추자 최악의 무대에서 김정미 최고의 무대가 탄생한 것이다".

"6개월 전 작곡가 신중현 씨에 의해 발굴되어 그간 p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해 오던 김정미 양(19). 그녀는 지금 J여고 졸업반 재학중이다. (중략) 김양은 이번 쇼에 앞서 이미 [늑대와 고양이], [대합실의 여인] 등 영화주제가도 취입한 바 있다고 하니 사실은 빛을 못 본 기성신인(?)이라는 묘한 타이틀을 받아도 무방할 정도의 베테랑이다" ([김추자 최악의 무대 이러쿵 저러쿵 그 뒷 이야기집: 북새통에 핀치 히터로 등장, 각광받은 신인가수 김정미] 『주간경향』 1971년 12월 22일자 중에서)

김정미가 처음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음반은 1971년 경, 앞면이 김정미의 곡들로, 뒷면이 다른 가수들의 곡으로 채워진 컴필레이션 음반 《신중현 사운드 Vol.2》(프린스, SM-7119)라는 신중현 작품집에서였다. 그 후 몇 장의 독집 앨범을 발표했다. 《김정미 최신가요집: 잊어야 한다면/간다고 하지 마오(신중현 작편곡집)》(킹/유니버어살, KLS-44, 1972)와 《간다고 하지 마오/아니야》(킹/유니버어살, KLS-68, 1973)가 그것이다.

이때의 음반에는 브라스의 사용이 돋보이는데 특히 <간다고 하지 마오> 같은 경우 소울풀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수작은 1973년 《햇님/당신의 꿈(바람)》(유니버어살, KLS-76)과 《바람/어디서 어디까지(NOW)》(성음, SEL 100 023)이다. 당시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던 것처럼, 각기 다른 음반사를 통해 발표된 이 두 앨범은 수록곡들이 다수 겹친다. 

한국 싸이키델릭의 여제(女帝)

김정미가 발표했던 음반들. 위부터
《김정미 최신가요집: 잊어야 한다면
/간다고 하지 마오(신중현 작편곡집)》
(1972),《간다고 하지 마오/아니야》(1973)

김정미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1970년대 초를 대표하는 '한국적 사이키델릭' 여성 보컬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1973년의 두 앨범 《바람》이나 《NOW》는 '한국적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정수'를 보여준 음반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작곡, 연주, 편곡 등을 포괄하는 프로듀서 역할을 담당했던 신중현 자신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극찬해 마지않던, 김정미와 싸이키델릭 음악에 대한 해설들에서도 잘 드러난다(이 음반은 한국의 음반 컬렉터들의 아이템으로 고가로 거래되곤 했는데, 이는 단순히 음반의 희소성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해님', '봄', '바람' 같은 곡들은 대중의 주목을 크게 받지는 못 했으나 사이키델릭 음악의 이상을 수용해 낸 훌륭한 곡이라고 믿고 있다. 사이키델릭 뮤직은 그녀에 의해 국내 처음으로 제대로 소개됐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사이키델릭 뮤직이란 환각 음악이 아니다. 히피 사상의 궁극이 평화를 지향했듯, 그녀의 음악 역시 마음의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 그녀는 내가 키워 낸 가수 중 가장 인기가 없었다고 할 수 있는데..." - <15> 신중현 사단의 여걸들 ([나의 이력서: 록의 대부 신중현], 『한국일보』 2003년 3월 6일)

"2년이 지난 후 그녀와 다시 음반준비를 하게 되었는데 그 음반이 바로 [바람]과 [Now]이다. 나는 새로운 장르인 싸이키델릭 음악을 소화할 수 있는 여가수가 필요했다. 그리고 다시금 김정미라는 여가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싸이키델릭 음악을 국내에 처음 알리기 위한 시도로서 김정미를 택한 것이다. 그녀 역시 연습에 열중했고 그녀가 가진 열성과 자질만으로도 충분할 정도로 성공리에 [바람]과 [Now] 음반 녹음을 마칠 수 있었다." - CD로 복각된 《바람》의 라이너노트에 실린 신중현의 자설 '김정미와의 만남'중에서

김정미의 솔로 독집 앨범들인 《바람》과 《Now》에서 연주를 담당한 밴드는 신중현의 그룹 '더 멘(The Men)'이다. 신중현(기타)과 손학래(오보에/색소폰), 이태현(베이스), 문영배(드럼), 김기표(키보드), 박광수(보컬)로 이루어진 6인조 그룹 더 멘은 여러 가수의 음반에 세션으로 참여했다.

신중현은 이전에도 자신의 밴드 활동을 했지만, 더 멘에서는 클래식 수업을 받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출신 오보에 주자(손학래)나, 어린 나이의 키보드 주자(김기표)를 영입하는 식의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김정미를 통해 '한국적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구현한 더 멘 역시 이 음반을 설명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셈이다. 이 음반은 완숙해진 김정미 스타일을 들려주는데, 보컬은 독자적인 표현보다는 이 밴드와 융합되어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여고 3학년의 나이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김정미를 가수로 키워낸 것은 김추자의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였다. '봄비'의 가수 박인수도 잠적해 버려 김정미가 유일의 대안이었다. 제작자들은 상업성이 없다며 머리를 저었으나 나는 그녀에게 힘을 쏟았다." - [<14> 김추자와 결별 나의 이력서: 록의 대부 신중현], 『한국일보』 2003년 3월 5일자 중에서

김정미는 대타 가수로부터 출발했고 그것이 처음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당시 그녀보다 먼저 신중현 사단의 대표 가수로 활약했던 김추자의 그늘에 가려 '제2의 김추자'로 불렸고, 대중적인 빅히트도 기록하지는 못했다. 물론 김정미의 보컬은 신중현 지휘하에 있던 김추자 등과 비슷한 창법을 구사한다. 하지만 김추자만큼 대중적이거나 파격적이거나 도발적이지 않았지만 '신중현 사운드'를 가장 잘 구현한 보컬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특유의 사이키델릭 여성 보컬이라는 명성에는 손색이 없다. 김정미가 좋아했던 밴드가 제퍼슨 에어플레인이었다는 사실에서도 그녀의 취향은 잘 드러난다. 특유의 비음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리고 섹시하고 관능적이지만 과도한 도발과는 거리가 먼, 김정미만의 보컬은 신중현이나 그의 밴드만으로 그녀의 진가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햇님/당신의 꿈(바람)》, 《바람/어디서 어디까지(NOW)》(1973)


우선 《바람》의 음반 표지를 보자.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팔을 벌리고 서있는 김정미의 모습은 흡사 '한국 싸이키델릭의 여제(女帝)'라고 불리는 그녀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초상화 같다. 역시 김정미의 대표 명작 중 하나인 《NOW》의 커버 사진도 상징적이다. 커버 상단에는 'NOW'라는 노란 글씨가 새겨 있고, 배경 사진에는 푸른 하늘 아래 코스모스 꽃밭 속에 김정미가 서 있다. 당시 사이키델릭에 관심 있었던 신중현 음악을 생각해보면 이 꽃들은 바로 히피즘의 그 '꽃'인 셈이다. 이 사진은 신중현이 직접 찍었다. 음반을 발표할 음반사를 그가 직접 찾아 나서야만 했던 당시 상황 때문에 앨범 커버 제작 역시 개인적인 영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지만 질과는 무관하게 신중현의 컨셉과는 부응한 표지가 아닐까.

하지만 열악한 제작 환경에도 불구하고 《NOW》에는 김정미식 사이키델릭의 화룡점정이라 할 <바람>을 비롯해, 포크와 사이키델릭이 조우하는 <봄>과 <햇님>같은 최고의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 《바람》에서와 유사한 레퍼토리이지만 보컬의 창법이 조금 바뀌었다는 느낌도 감지된다. 말하자면 포크적인 느낌이 한층 강화되었다고나 할까.

또한 <봄>과 <햇님>에는 오보에 같은 관악기와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 사운드가 추가되어 있는데 이런 인스트루멘테이션은 과도하지 않게 사용되었다. 기타의 경우에도 대부분 이펙트 사용 없이 건조하게 사용된다. 이런 연주는 김정미의 독특한 보컬을 강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편으로 신중현의 부단한(그리고 평생의) 관심사였던 한국적 록 음악에 대한 관심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곡은 <나도 몰래>일 것이다. 한국 민요의 5음계 및 장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전통악기인 가야금 소리와 비슷하게 조율된 기타 연주도 이때부터 나타난다. 소재의 측면에서도 '한국적'인데 <가나다라마바>의 타이틀(한글의 음절), <아름다운 강산>의 '아름다운'(이상하게도 역설적인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한국의 자연에 대한 찬가가 그러한 곡이다. 이처럼 사운드와 가사 등에서 나타나는 한국적 정서는 싸이키델릭한 무드와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이것이 토속적이면서도 이국적이고 관능적이며 몽환적인 김정미의 보컬과 함께 구현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김정미와 신중현과의 마지막 작품이 된
《이건 너무하잖아요/ 갈대》(지구, 1974)

그런데 김정미의 진가 역시 신중현과의 협업을 통해서만 더 잘 발휘되었던 것 같다. 이후 김정미는 신중현과 함께 킹에서 지구로 이적한 뒤 《이건 너무하잖아요/ 갈대》(지구레코드, JLS-120920, 1974년)를 발표했다. 1975년 대마초 파동 직후 이 사건과 연루된 신중현과 작업을 할 수 없게 된 그녀는 다른 음반사에서 몇 장의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매력을 발산시켜주는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1977년경에 신중현이 아닌 다른 작곡가의 곡을 부른 음반 한 장을 더 발표했다. 이후에도 김정미 자신의 의도가 개입되었는지 모르지만 몇몇 컴필레이션 음반에 김정미의 곡이 수록되기도 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이후 그녀는 음악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덧붙여: 다행히도 김정미에 대한 뒤늦은 재평가 작업이 있었고 그의 결실로 주요한 음반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몇 년 전 《아니야/간다고 하지마오》, 《바람》, 《NOW》는 CD로 복각, 재발매되었다(신중현MVD에서 발매). 《아니야/간다고 하지마오》는 정확히는 《김정미 최신가요집: 잊어야 한다면/간다고 하지 마오》(킹/유니버어살, KLS-44, 1972)와 《간다고 하지 마오/아니야》(킹/유니버어살, KLS-68, 1973)에서 10곡을 발췌한 합본 음반이다. 《NOW》는 LP 비닐 음반으로도 발매된 바 있다(비트볼레코드에서 발매). 한편, 이보다 먼저 재발매된 음반으로는 《김정미》가 있는데 원래 김정미의 곡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었던 1974년작《이건 너무하잖아요/ 갈대》 및 1977년작 《나는 바본가봐 / 난 정말 몰라요》 가운데 김정미의 곡만 추려서 재발매한 것이다(지구레코드에서 발매).

 


 
출처 : 연어알 |글쓴이 : 북극해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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