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인천상륙작전

鶴山 徐 仁 2005. 9. 15. 15:13

 

인천 자유공원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본다는 것은 이 나라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인천의 자유공원에서 맥아더 장군의 동상에 경례를 올리는 한 노신사를 목격하였습니다.

해병용사이며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했다는 이 분은 속초에 사시는데 인천에 사는 딸의 집을 잠시 찾아왔으며, 인천에 오면 반드시 이 공원에 올라 장군의 동상에 경례를 올린다고 하더군요.

 

코주부 : 상륙작전때에는 어느 대대에 소속되었습니까?

역전의 용사 : 글쎄 그건 잘 기억이 나지 않소이다...그게 중요하오?..여하튼 엄청 죽었소.

코주부 : 당시에 3 대대는 저어기 대한 제분앞으로 상륙을 했고...1대대는 인천항 남쪽으로 상륙을 했지요...혹시 상륙하신 곳이 어디인지 기억이 나시는지요?

역전의 용사 : 그것도 잘 모르겠소...여하튼...압록강까지 올라간 내 전우 30명 중에서 나만이 살아남았다오.

 

북정동 골목길을 내려가시는 그 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내가 그 '살아남은 용사"에게 실례를 저질렀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 분에게 역사의 기억을 강요했는데 이제 그 분에게 남은 기억은 전쟁의 가장 아픈 기억...그리고 가장 마지막 까지 남을 기억....."전우의 죽음"뿐이었던 것입니다.

 

<잊혀진 역사의 포성>

여기에서 나는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기억의 한자락을 붙들어 되살려 보고자 합니다.

 

1950년 9월 15일 밤 2시

칠흑같은 어두움을 뚫고 19척의 선발함대가 종대로 줄을지어 팔미도의 등불을 신호삼아 인천 앞바다로 진입해 들어왔습니다. 드디어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의 서막이 올려지는 순간이지요.

 

1950년 새벽 5시 정각.

공격개시명령을 받은함포의 포문이 열리고 코르세어 함재기들이 월미도를 향하여 날아가 격렬한 포격을 개시합니다.

그리고 해병대 병사들은 상륙용 주정으로 옮겨타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벽 6시 27분,

미 해병 제 1사단 5연대 3대대 병력이 17척의 상륙용주정에 분승하고 9대의 탱크를 실은 3대의 대형 상륙주정도 함께 월미도 해안(그린 비치)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아래의 "코주부"장군이 작성한 작전도를 보아 주십시요.

"월미도"는 인천항을 외곽에서 둘러싸고 호위하는 형상을 하고있는 섬으로서 육지와는 방파제로 연결되어있고, "소월미도"와도 작은 방파제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인천상륙의 제 1파는 바로 월미도...지금의 문화의 거리가 형성되어있는 해변에 상륙하였는데 이 위치의 작전명은 "그린비치" 였습니다.

 

 

북한군이 쏘아대는 기관총 사격을 받으며 해안에 상륙한 미 해병대는 1개 소대를 기관총이 날아오는 "소월미도"로 진격케하고 일부는 산 정상을 향하여 공격해 올라가며, 다른 일부가 섬을 좌로 돌아서 인천시내와 연결된 방파제 입구까지 전진하여 인천 방향에서 몰려올지 모르는 북한군에 대한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이 방파제가 바로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도로이며 멀리 건너편에 보이는 곳이 지금의 '대한제분'이 있는 위치로서 작전명"래드비치"...금일 저녁의 상륙목표인 것입니다.

 

 3대대의 주력은 바로 월미산 정상을 향하여 공격해 올라가서 섬에서 동굴을 파고 저ㅓ항하던 북한군 병력을 섬멸합니다.

이 섬에는 약 400명의 북한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108명은 사살되고, 136명이 포로, 나머지 병력중 100여명은 동굴에서 저항하다가 매몰되어 사라졌습니다.

 미 해병이 월미도에 대한 소탕을 완료한 시간이 대략 오전 8시,

이제 그 유명한 인전의 간조로 인하여 저녁 때까지 바다로부터의 지원은 없으므로 인천으로부터 북한군이 몰려오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진지를 구축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월미도에서 사살당한 인문군 시체들

 

오후 4시 45분 만조가 시작됨.

만조가 시작되자 미 해병대의 제 2파가 상륙을 개시하여

미 해병 제 5연대는 17시 33분에 북쪽해안(래드비치)..지금의 대한제분공장자리...에 상륙을 개시하고,

미 해병 제 1연대는 17시 32분에 인천항 남쪽 송도해안(불루비치)에 상륙을 감행합니다.

 

다시 "코주부" 장군의 작전도를 참고하여 주십시요.

 

 

작전도와 같이 미 해병 5연대의 1,2 대대와 자랑스러운 우리 해병 제 1해병연대 제 3대대의 병력은 북쪽의 "래드비치"로 상륙했으며, 미 해병 1연대는 인천의 남측 송도 방향의 "불루비치"로 상륙을 감행하였던 것입니다.

이 상황을 한 눈으로 보여주는 항공 사진으로 보시지요.

 

 

9월 15일 저녁 5시 30분에 "래드비치"와 "불루비치"로 달려가는 상륙용 주정의 모습이 한눈에 보입니다.

월미도의 상황은 이미 끝나서 "래드비치"로 이어지는 방파제를 따라서 탱크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보이며 '자유공원"을 폭격하는 미 해군의 코르세어 공격기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인천의 외항과 내항의 모습이 한 눈에 보이는데 인천항은 교두보가 확보되면 대량으로 물량이 하역될 "옐로우 비치" 였습니다.

 

 

"래드 비치"로 달려가는 미 해병대...."래드 비치"는 방파제로 둘러쌓여 있으므로 이 사다리는 방파제의 높이에 맞추어 제주도에서 준비해 온 것입니다.

과연! 사다리를 이용하여 방파제를 올라가고 있는 미 해병과 한국 해병대 병사들의 모습입니다. 이 때 인천 역 방향에서 기관총 사격이 날아오며 저항이 있었으나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서울 방향에서 달려오던 북한군 병력은 미군기의 워낙 거센 폭격에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다음 날 아침 .."래드 비치"로 상륙한 한국 해병대 3대대 와 "블루 비치" 방향으로 상륙한 해병대 1대대의 병사들은 미 해병대의 병사들과 인천 시가지 소탕작전에 나서게 됩니다.

 

9월 16일, 인천이 완전히 아군의 수중에 들어오자 인천항(옐로우 비치)을 통하여 미 육군 제 7사단의 병력과 한국군 제 17연대의 병력이 상륙하여 서울로 공격할 준비를 갖춤으로서 역사에 남는 인천상륙작전은 막을 내리는 것입니다.

 


상륙 당시에 북쪽 해안(래드비치)으로 상륙한 우리 해병 "3대대"와 남측 해안(불루 비치)로 상륙한 "1대대"는 인천 시내 소탕을 마친 후 제 3대대는 수원 방면으로 내려가고 제 1대대는 서울 방면으로 미군과 함께 진격합니다.

그러므로 서울에 입성하여 중앙청 지붕에 태극기를 날린 해병용사는 제 1대대 또는 제 2대대의 용사일 겁니다.

제 "2대대"의 상륙위치및 전진방향에 대하여는 제가 상세히 알지 못하나 차후 자료를 접하면 여기에 보완글로 올리겠습니다. 

 

이 부족하기 그지없는 글을 "살아남은 노병" 에게 바칩니다. 

 

 

 

 

********작성을 마치고 떠드는 몇몇 이야기 들**************

 

1. 인천상륙 작전에 대한 글과 그림은 많으나 너무 산만하게 흩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후대들에게 이 역사적 사건을 제대로 알려주려면 우선 글과 그림을 사건의 시간대별로 정리한 바른 텍스트가 준비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며 제 나름의 작은 시도를 해 본 것입니다.

 

2. "자유공원"에는 지금도 "인천 문화원"이라는 작은 건물이 있는데 19세기 말 외세가 이곳을 점유하고 있을 때 "외국인 전용 클럽" 이던 건물로서 100년이 넘었죠. 

이 건물이 어떻게 인천상륙당시의 엄청난 폭격에 살아남았는지 참으로 신기하고 한 편으로 감사한 심정입니다.

 

 

               자유공원에 있는 인천 문화원

 

 3. 북정동에 중국인 거리가 만들어지고 있죠? 자유공원아래는 전쟁 전부터 중국인들이 촌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아래에 있는 집은 제가 삼십 년전에 울면 한 그릇을 사 먹고 삽십년 후에 다시 볶음밥을 사 먹으며 찍은 모습입니다.   아주 오랜 전통을 가진 중국집이지요.

 

 

 4. 작전도와 그림에 붙어있는 설명은 제가 만든 것입니다.

    그림에 포함된 설명문도 제가 만들었는데 너무 커서 문장의 글과 조화가 잘 안되는군요 ...

    알면서도 고치기가 힘들어 그냥 올렸습니다.

 

5. 언제가 월미도의 '문화의 거리" 에 가시거든 '그린 비치" 기념비를 찾아보아 주십시요.

  

이 한 장의 사진이 제게는 아주 소중합니다.

이 방파제가 인천시내와 월미도를 이어주는 방파제인데 그림에서 오른 쪽은 인천항이며, 왼쪽은 바다입니다.

제 나이 다섯 살 때 아빠의 손을 잡고 이 방파제를 걸어 월미도를 구경했는데....바로 이 군인들이 앉아있는 자리에 소풍객들에게 식혜를 파는 조그마한 정자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날이 내 인생 최초의 구경 나들이 였는데... 그 화창했던 초여름의 어느 날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군요.

(당시에는 월미도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안 쪽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백년 전 사진을 보면 월미도의 왼쪽에 소월미도가 보입니다.

 

이 소월미도는 작은 방파제로 대월미도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항구를 대폭 늘리면서 연결이 끊어져 소월미도는 사라졌습니다.

혹시 자유공원에 오르시거든 소월미도가 있던 곳을 짐작으로 바라보세요. 거기에 건물들 사이에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작은 언덕이 있습니다. 소월미도의 흔적이지요.

이 소월미도를 바라보노라면 웬지 무언가를 상실한 느낌으로 가슴이 아련해 집니다.

 


 

나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그 자리를 지켜주기를 바랍니다.

 

노병이 장군에게 올리는 경례는 맥아더 장군에 대한 존경이라기 보다는 살아남은 자신에 대한 경의일 수 있습니다.

동상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동상을 자신의 삶의 기억을 여는 키(key)로 간직하는 세대에게 실례되는 일이지요.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져온 곳: [코주부 하우스]  글쓴이: 코주부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