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그림 그린 죄밖에
없다
천상병 시인은 소풍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
세상이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고 노래했던가? 죽는 날, 이 세상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미술 분야에서 이렇게
맑고 고운 영혼으로 세계를 아름답게 보고 표현하고자 했던 예술가로 장욱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장욱진은 죄가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자신이 지은 죄라고는 그림 그린 것밖에 없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으니, 그의 죄는 도덕적 순결을 향한 끊임없는 성찰과 고해의 다른 표현일
뿐 규범의 위반이나 범죄하고는 하등 상관이 없다. 술을 좋아했고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와 땅 위를 유유자적 배회하는 개를 즐겨 그렸던 동심의
화가 장욱진. 그에게는 죄가 없다. 비록 이 세상이 식민지배와 전쟁, 가난과 독재, 부정과 부패로 점철된 아수라장이었을지언정 그에게 세상은 살
만한 곳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눈과 마음, 방법으로 자신의 세계를 파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현실적 삶이 윤택하거나 다른 근심이나 시름없이 마냥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충남 연기의 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고모 슬하에서 자란 그는 집안 어른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을 공부하였지만,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재 경복고등학교) 재학시절 일본인 교사와 다퉈 퇴학을 당했다. 거기에 병까지 얻어 고모가 자주 다니던 수덕사에서 요양하던
중 마침 일엽스님을 찾아온 나혜석을 만나 그녀와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수덕사에서 육 개월을 보낸 후 운동을 잘해 체육특기생으로
양정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한 그는 졸업하던 해 동경의 제국미술학교로 유학했다. 미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징용에 끌려갔다가 일본의 패전과 해방으로
9개월 만에 귀국한 뒤 장인인 역사학자 이병도의 주선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직원으로 근무하며 최순우, 김원용과 같은 미술사학자와 만나게 되는데, 그
인연으로 이들과 평생 교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욱진이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47년 김환기, 유영국과 함께
‘신사실파’ 동인을 결성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단체의 이름을 ‘신사실파’로 정한 것은 사실에 바탕을 두되 자연세계의 재현에만 머물지
않고 그 속에 주관적 세계를 접목시킨다는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었다. 피난지 부산에서 개최한 동인전을 끝으로 이 단체는 해체되었지만, 해방 이후
현대미술의 도입에 적극적인 단체의 출현이란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은 장욱진에게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기와 고통이었다. 가족을 피난 보내고 혼자 서울에 남아 있다 유영국과 함께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리는 사업에 동원되기도 했고, 1.4후퇴 때
간신히 빠져나와 종군화가단에 합류하기도 했으며, 부산 피난시절 소주 한 되를 옆구리에 차고 용두산 일대를 배회해야 하는 고단한 피난민의 삶을
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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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진진묘 캔퍼스에 유화,
33*24cm 1970 중앙: 캔퍼스에 유화 41*32cm 1989 오른쪽: 자화상(일명 보리밭)종이에 유화,14.8*10.8cm
1951 |
이 시기에 제작한 것이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른바 <보리밭>이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전쟁의 참화와는 상관없이 너무 목가적이라서 작가의 현실도피적 의식의 한 단면을 엿보게 만든다. 그러나 작가의 회고를 보면
현실의 처절한 고통 앞에 느끼는 절대고독이 작가로 하여금 이상적인 고향에의 동경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빛 들판을 가로질러 유유히 걸어오는 서양풍의 복장을 하고 콧수염을 기른 이국풍의 신사는 바로 작가 자신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절과
번민의 시간을 보내던 작가가 고향으로 돌아가 되찾은 오랜만의 안정을 ‘낙원으로의 귀향’이란 방식으로 그려낸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황톳길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은 예술가가 갈망했던 아름다운 세상, 세속의
욕심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기를 꿈꾸었던 작가가 걸어가고자 했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살았다. 전쟁 직후 서울미대 교수가 되었지만
점차 현실과의 타협이나 안주를 거부하고 안정된 직장까지 내팽개친 채 술에 탐닉하는가 하면 작업공간을 찾아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닌 것을 보면,
고대희랍 사상가 디오니게네스나 스스로 하늘에서 쫓겨난 신선謫仙이라 했던 시인 이백을 떠올리게 된다. 다만 세속을 초월한 기행과 비극적 생애가
천재적 예술가에 대한 그릇된 사회적 편견을 조장할 위험이 있음을 주목해볼 때, 장욱진은 가족의 희생적 보살핌 속에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었고,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세계를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가족을 부양하기보다 자신의 예술세계를 위해 가족의 희생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 것이 그의 죄라면 죄일까.
장욱진은 ‘향토성과 서정성이 짙은 화풍을 일구었으며, 동양화적인 수법에 동양적 철학사상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미대 교수를 사직한 후 덕소, 수안보, 신갈의 마북리 등의 작업실을 옮겨다니며 남은 생을 그림과 술로 보내며
전업화가의 길을 걸었던 그의 삶은 그만큼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을지언정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웠다. 그와 얽힌 일화를 보면 손님들이 술을 가지고
출입하는 것을 부인이 엄격하게 감시하자 이층에 두레박을 매달아놓고 손님들의 술을 길어올려 마셨다고도 한다. 천상의 신선이 속세의 인간이 바치는
제물을 받아 음복하는 형국이다. 이 일화는 마치 기인처럼, 세속의 오욕칠정을 초탈한 현자처럼 어린이의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삶을 살다간 그의
인생을 압축해놓은 많은 일화 중 하나에 불과하다. 설명이 생략된 간결하고 천진한 그의 작품은 탈속한 것이고, 무욕으로 일관된 생활에서 우러나온
깊은 맛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그의 작품에서 불교적 세계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불경을 읽고 있는 부인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진진묘>와 같이 불교적 도상임이 확연한 작품도 있지만, 그가 십대 시절 만공스님이 주지로 있던 수덕사에서
요양했던 점과 양산 통도사에 경봉스님을 찾아가 선문답을 나눈 일화, 또 걸레스님으로 잘 알려진 중광과 어울려 파격적인 공동작업을 했던 점들은
그의 세계관이 불교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임을 알려주는 사례임에 분명하다. 특히 단순하면서 막힘없는 선과 다시점의 공간구성은 불교뿐만 아니라
도가적 세계관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그의 매직그림, 먹그림, 도자기그림 등은 말 그대로 ‘한가함 속에서 즐거움이
있고, 여유 속에 예술이 있다(閑中之樂 悠中之藝)’는 그의 예술관이 녹아 있는, 조촐하지만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준다.
범인에 침을, 바보엔 존경을, 천재엔
감사를장욱진이 행복한 은둔자의 삶을 살았다면, 고독하고 불행한 은둔자로서 예술가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로 권진규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자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으로 비극적인 생애를 마감하였기 때문에 실제 작품의 예술성보다 극적인 삶으로 더 유명한 작가이기도 하다. 특히
그가 자살하기 직전 작업실 벽면에 적어놓은 ‘범인凡人엔 침을, 바보엔 존경을, 천재엔 감사를’이란 문구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드라마틱한 측면이 있다.
1922년 함경남도 함흥의 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권진규가 조각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47년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 유학중 병든 형을 간호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바 있던 그는 1947년 다시 일본으로 가서 그 이듬해 8월
무사시노(武藏野) 미술학교(전 제국미술학교로서 장욱진이 1938년 이 학교에 입학했으니, 권진규는 장욱진의 11년 후배가 된다) 조각과에
입학하였다. 권진규는 부르델에게 조각을 배운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시미즈 다카시에게 배우던 중에도 특히 마리노
마리니에게 심취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흔적을 훗날 많이 제작한 말 조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시미즈 다카시가 조각과
교수이지만 특히 그림도 전공했기 때문에 장욱진도 그에게 배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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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희정 테라코타
19*16*26cm, 1968 (가나아트센터) 오른쪽: 춘엽니 건칠 40*23*51cm
1960년대(가나아트센터) |
권진규는 시미즈 다카시 문하에서 로댕과
부르델은 물론 서구 조각의 전통을 습득했다. 그는 같은 학교 서양화과에 재학중이던 가사이 도모(河西智)와 결혼하였는데, 도모의 회고에 따르면
권진규는 재학시절부터 이미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을 만큼 뛰어났고 또 작업에도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특히 일본인 작가들도 졸업한 후 10여 년의
창작 경력을 쌓아야 이과회二科會 회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권진규는 재학시절에 이미 회원이 될 만큼 탄탄한 기초와 자기 세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1968년 동경의 니혼바시(日本橋) 화랑에서 가진 권진규 개인전 도록에 의하면 그는 1952년부터 1955년까지 이과회 공모전에
출품하여 1953년 최고상인 '이과상二科賞'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부부의 결혼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는데,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권진규가 돌연 귀국하면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1959년 귀국 이후 동선동에 작업실을 마련하여 테라코타 작업과 정읍에서 구한 대리석으로
석조에도 전념하였으나 한국여인과의 재혼에 실패했고, 게다가 1965년 서울 신문회관에서 수화랑 기획으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지만 별반 반응이
없자 세상을 향한 그의 분노와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궁핍한 사정 때문에 모델을 구할 수 없어서 신문회관 개인전 이후 친해진 유준상
등의 배려로 연극배우 지망생 등을 모델로 인체조각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는데, 이 당시 작품 중에서 상념에 잠긴 여성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권진규의 작업에는 유달리 익명의 여성을 모델로 제작한 테라코타 두상이 많다. 여류소설가,
어느 여자대학의 메이퀸이라는 여학생, 신문회관 도서실에 근무하는 여직원, 그리고 실명實名으로 제작한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지원의
얼굴>의 주인공 장지원, 그의 작업실에서 음식 수발과 잔심부름을 하던 16~17세 가량의 소녀 영희, 연극배우 지망생 등이 그의 모델이
되었다. 물론 실제 인물을 모델로 작업하였더라도 그의 작품 대부분은 무제일 뿐만 아니라 제작연도도 불분명하기 때문에 거의 익명인 채 남아 있다.
권진규의 작업에서 여성 인체조각과 두상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두상의 경우 거의 양식화, 정형화되어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것은 구체적인 인물의 외모나 개성보다 영원으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인간의 성격을 창출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석고 위에 건칠로 제작한 두상작품의 경우 이 기법이 지닌 복고적
특성 때문에 테라코타와는 다른 정서적 반응을 유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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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의 얼굴
테라코타 32*27*49cm (가나아트센터) |
권진규가 건칠작업을 시작한 것은 귀국 이후부터였으며, 특히 저렴한 재료비와 질박한 형태 및
표면처리의 효과에 적합했기 때문에 이 기법을 즐겨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건칠로 제작한 작품 중에서 도모의 얼굴을 포함하여 말,
비구니 등은 보관과정에서 박락과 훼손이 심해 재료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여성의 얼굴을 소조함에 있어서 권진규는 대립적이고 모순된 감정
속에서 이 감정들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내면세계를 작품 속에 담으려 했다. 나아가 그는 실재하는 인물을 모델로 제작한 두상 외에도 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얼굴도 몇 점 남겼다. 이 중 동그랗게 뜬 눈동자와 무엇에 놀란 사람마냥 크게 벌린 입을 뚫어놓은 <얼굴>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서 귀면와에서 착상을 얻은 부조작품 <소>의 형태를 연상시킨다. 그가 만든 다른 가면이
해학적이면서 무속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는 것에 비해 보다 현실감이 두드러지나 여전히 주술적인 성격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얼굴이 토우나
탈의 형태를 빌어 현대인의 공허하면서도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육체에 대한 가혹한 학대와
영혼의 구원으로 향한 염원이 담긴 그의 걸작으로 <가사를 입은 자소상>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고려대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소장기념 전시에 참가하고 돌아온 그는 바로 그날, 1973년 5월 4일 오후 6시경 동선동 작업실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리얼리즘 조각의 정립을 꿈꾸었던 조각가 권진규, 그의 삶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쪽지
‘공空’처럼 허망했을지언정 그의 작품은 한국 현대조각사에 하나의 이정표로 자리하고 있다. 세상의 몰이해와 지병, 심리적 위축에 따른 절망감과
현실적인 어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겹쳐 자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을지언정 그는 우리나라 조각에 현대적 고졸미archaism의 세계를 제시한
예술가임에 분명하다.
최태만 미술평론가
1962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국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서울산업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한 국조각의 오늘, 미술과혁명, 등 다수가 있다. 현재 국민대 교수를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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