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외국작가 畵壇

[스크랩] 샤갈을 생각하며 - 단 하나의 색은 사랑의 색깔이다

鶴山 徐 仁 2005. 8. 6. 14:04

"(난) 그 어떤 구속도 없이 새처럼 노래 하리라"

 

"우리 인생에서 삶과 예술의 의미를 주는

 단 하나의 색은 사랑의 색깔이다"

 

"나의 태양이 밤에도 빛날수 있다면

 나는 색채에 물들어 잠을 자겠네

 

    - 마르크 샤갈 -

 

 

 

제가 다니던 학교 앞에는 카페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 중 샤갈의 눈내리는 마을이란 곳이 기억에 남아 있어요. 음, 강남역에도 같은 이름의 큰 카페가 있죠. 이렇듯 낭만적 분위기의 명칭을 만든 것은 샤갈이 아니랍니다. 샤갈의 그림 중에 <눈내리는 마을> 이란 작품은 없어요. 다만 김춘수의 시 중에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란 작품이 있죠. 참, 샤갈의 시 또한 상당했기에 그는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화가가 될 꿈을 꾸기 시작한 샤갈은 러시아의 가난한 유대인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유대인 마을에서의 종교적 정서는 그의 일생에 결정적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그는 소박하고 청렴한 양심의 소유자이자 자유로운 영혼을 갈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종교적 성실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또한 그의 운명과도 같은 고독 또한 인정했습니다. 모든 구속과 속박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은 울타리를 포기하기에 고독할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혹자는 “ 샤갈보다 더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한 화가는 생각하기 힘들다 ” 라고 말했습니다.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했던 샤갈은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던 모딜리아니, 들로네 등과 같은 파리파 화가들이나 입체파, 야수파 화가들과 교류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느 화파에도 속하길 원치 않았으며, 다른 이들도 신비로운 그의 그림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생활에 대해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나는 오만한 입체파 화가들 옆에서 조용히 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이나 세계 대전으로 인해 사회적, 정서적으로 혼란한 유럽 안에서 샤갈은 자신의 고향에 미술학교를 설립하기도 하고, 모스크바 극장에서 무대 디자인을 하기도 하며 독특한 동판화 작업을 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였습니다. 특별히 뉴욕의 발레 극장이나 런던의 코벤트 가든 등 극장에서의 무대 장치 제작 등에 있어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는 데요. 당시 무대 디자인을 할 때의 샤갈은 거의 배우처럼 연극을 익히고, 음악을 들으면서, 극본을 읽고 또 읽는 작업을 통해 깊은 감동을 받은 후에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일에 대해 놀라운 열정을 소유한 사람 같아요.

샤갈은 도공들 마을인 프랑스의 방스에서 도자기를 제작하기도 하고, 성서 메시지를 담은 석판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마술피리>를 위한 커튼을 만들기도 하였구요, 파리 오페라 극장의 천정화, 유대교회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등 실용적인 미술 작품등을 많이 제작하였습니다. 독특하면서도 왕성한 그의 예술적 욕구가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의 신비로운 그림들은 전통과 파격의 혼재라 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 기독교 사상에 기반을 둔 그의 예술은 초현실주의자들이나 야수파들이 손댈 수 없는 영역에 까지 닿아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공간 배치나 채색법은 그를 어떤 화파 라 결정하기에는 어렵게 하죠. 그래서 어느 정도는 혼란스럽고, 어느 정도는 환상적인 그의 그림에 대해 많은 이들이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요.

샤갈은 1982년 95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개인전시회를 하는 등 꾸준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습니다. 현대 예술의 주류라 할 수는 없지만 분명 샤갈은 현대 미술에서 빠질 수 없는 작가이며 새로운 개척자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듯 합니다.

 

 

 

[ 나와 마을 (1911) ]
샤갈의 아주 유명한 작품입니다. 파리에서 공부를 시작하던 샤갈은 고갱과 고호의 원시적이며 열정적인 생명력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자신의 고향 비테부스크를 인상파 화가들보다 더 과감하게 그렸네요. 소와 마주한 초록색 얼굴이나 뒤집혀 있는 듯한 사람 등을 보며 많은 이들은 충격을 받기도 했답니다.

 

 바이올린 켜는 여인 (1912) ]
결코 여인같지 않은 여인의 지붕 등이 그려진 마을의 하늘쯤 되는 곳에서 춤을 추며 바이올린을 켜는 듯 합니다. 모든 어2000린이들의 꿈속에서 한번쯤 그려졌을 그림인데요, 여기서도 나타나는 초록색 얼굴이 심상치 않네요. 그림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이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 서커스들은 그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으로, 그를 그의 고향으로 인도하는 매체였습니다.

 

 

 첼로 연주가 (1939) ]
첼로화 된 인간은 샤갈 자신을 뜻하는 것이고, 옆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송아지 얼굴의 사람은 그의 부인 벨라랍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그려진 황량하게 눈덮힌 마을은 샤갈의 고향이구요. 그림의 분위기나 형상등이 다소 기괴하면서 환상적이죠. 이 점이 샤갈 그림의 매력인 거 같아요. 거리감이 느껴지면서 그 거리감이 무시되는 듯한 느낌…

 

 

 피안 없는 시간 (1939) ]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유태인이었던 샤갈이 느낄 수 밖에 없었던 비극과 고난의 시간 속에서 완성된 그의 대표작입니다. 피를 흘리는 새는 바이올린으로 슬픈 운명을 연주하는 듯 하네요. 또한 어둡고 우울한 세상 속에서 그 새는 쉴 곳이 없어 보입니다.

 

 

 썰매와 마돈나 (1947) ]
굉장히 투명하고 깊이있는 푸른 빛이 감도는 작품입니다. 벨라가 죽고 난 후에 그려진 것인데요, 샤갈의 깊은 슬픔이 묻어나 있습니다. 썰매를 타고 가던 마돈나(마리아)가 상승하는 썰매에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녀의 품안에 예수는 안전해 보이네요.

 

 

 레지스탕스 (1948) ]
유대인 박해를 목격한 샤갈이 독일과 이태리 그리고 러시아의 스탈린을 대항하는 의도로 10년 동안 제작한 작품입니다. 수난당하는 구원자의 주변에 맴돌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강렬한 색채로 그렸습니다. 맨 아래 비테부스크 광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화가 자신을 뜻한다고 하네요.

 

 

[ 생젠의 태양 (1949) ]
남프랑스 생젠의 매력에 빠진 샤갈은 힘들었던 시간을 뒤로 한 채 밝고 생명력있는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초록의 풍경> 이란 별명이 있는 이 작품은 샤갈 특유의 붉은 색과 초록색의 조화가 아름답습니다. 남자의 얼굴 오른쪽에서 평화롭게 그를 안고 있는 여인은 그 남자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여신 같네요.

 

 

[ 푸른 서커스 (1950) ]
샤갈은 어린 시절의 추억 중 하나인 서커스를 많은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서커스가 샤갈에게 자유로운 공간배치를 허용하게 한 거 같아요. 슬픈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소와 여인의 모습은 몽상적이면서도 안타까운 하나의 로맨스를 연상시키네요.

 

 

바바를 위하여 (1955) ]
1952년 65세의 샤갈은 자신보다 25세나 어린 러시아 여성 바바와 결혼합니다.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한 샤갈의 마음이 느껴지는 작품인데요. 깨끗한 이미지의 여인 곁에 있는 노란 말은 샤갈 자신을 뜻합니다. 두 인물의 크고 맑은 눈이 인상적입니다.

 

 

 푸른 얼굴 (1967) ]
샤갈이 많이 제작했던 스테인드 글라스 풍의 작품입니다. 화폭을 좌우로 양분하여 인생의 그늘과 양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혁명으로 인해 상처받고 힘들었던 시간들과 자연과 사랑으로 인해 행복했던 기억들을 인생의 말년에 열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늘진 얼굴의 사람이 오른쪽 끝의 여인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있습니다.

 

*이하는 샤갈에 관한 작품과 사진이며 "불교정진회"란 카페에서 인용.


 
가져온 곳: [북경이야기(北京故事)]  글쓴이: 지우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