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국가의 자살
영국, 브렉시트로 2류 국가화
미국, 트럼프 뽑아 위기 자초
투표로 '국가 쇠퇴'의 길 선택
한국도 이제 그 뒤를 따르는가
입력 2025.05.01. 00:20 업데이트 2025.05.01. 09:10

브렉시트 5주년인 지난 1월 31일 영국 런던의 영국 의회 밖 물웅덩이에 보행자들과 엘리자베스타워(빅벤)가 비치고 있다./EPA 연합뉴스
해외 출장 가거나 서울에서 영국인을 만날 때마다 하는 질문이 있다. “당신은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는 브렉시트(Brexit)를 찬성했느냐.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영국인 대부분은 이에 대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이도 있었다. 한 고위 관리 반응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노 코멘트.” 하지만 심각해지는 그의 얼굴에서 브렉시트에 불만인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2016년 6월 23일, 영국은 국민투표로 EU 탈퇴를 결정했다. 51.9%가 찬성표를 던진 후 어떤 일이 벌어졌나. 경제 침체, 무역 위축, 금융 중심지 지위 약화…. 온갖 후폭풍이 이어지면서 브렉시트를 후회하는 ‘브레그렛(Bregret)’ 현상이 퍼졌다. 올 초 유고브(YouGov) 여론조사에서는 영국인 55%가 ‘브렉시트는 잘못된 결정’이라고 답했다. ‘올바른 선택’이라는 응답은 30%에 불과했다. 젊은 세대일수록 비판적인 목소리가 커지며 ‘2류 국가로 가는 길’ ‘국가적 자살’에 비유되기도 한다.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5일 트럼프는 압도적 지지로 다시 대통령에 뽑혔는데, 불과 6개월도 안 돼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는 미국인이 늘고 있다. 트럼프 취임 후 100일 지지율은 39~41%로 역대 최저 수준이다. 미국인 4분의 3은 그의 정책이 경기 침체를 불러올 것으로 우려한다. 10명 중에 6명은 그가 대통령 권한을 남용한다고 비판한다. 상호 관세 부과→90일 유예의 ‘트럼표 쇼’가 벌어지면서 미국은 주가·국채·달러화 가치가 모두 하락하는 ‘트리플 약세’를 겪었다. 위기가 닥치면 미국 국채와 달러 가치 상승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작동해 왔는데,이게 고장 난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 한국을 찾은 미국 전문가들도 어깨를 축 늘어뜨린 모습이다. 지난달 아산정책연구원이 서울에서 주최한 국제 회의에 참석한 미국인 전문가는 “트럼프가 미국을 고립시키며 몰락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은 오랫동안 자유민주주의 세계에서 맏형 같은 역할을 해왔다. 많은 나라가 미국을 신뢰하며 ‘캡틴 아메리카’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이제 각국 지도자들은 트럼프를 신뢰할 수 없기에 ‘면종복배(面從腹背)‘를 기본 원칙으로 삼는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얼마 전 “미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지 않고, 중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다”며 트럼프 등장 이후 미국의 쇠락을 우려했다.
국민의 투표를 통해 잘못된 지도자가 등장하고 국가가 몰락하는 역사는 최근 일만은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에 빠진 독일의 국민은 히틀러를 선택했다. 그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은 뒤, 정적을 제거하며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그 후 독일이 어떻게 파멸의 행진을 하며 파열음을 냈는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다.
두려운 것은 포퓰리즘에 기반한 선택이 초래하는 위험을 역사가 거듭해서 경고하고 있음에도 반복된다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은 명백히 예상되는 후폭풍에도 불구하고 브렉시트와 트럼프를 선택했다. 국가의 자살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정치인들의 선동과 감정적 선거 캠페인에 묻혀버렸다.
대한민국은 대통령의 자멸(自滅)적 계엄과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에 이어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 달 바로 새 대통령을 선출한다.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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